박령(朴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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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미상~1434년(세종 16)]. 태조~세종 때 활동한 무신. 행직(行職)은 좌군 도총제(左軍都摠制)이다. 자는 호부(浩夫)이고, 본관은 의창(義昌)이다. 아들은 박홍간(朴弘幹), 박홍신(朴弘信), 박홍지(朴弘智)이다.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고려 말, 조선 세종 시대 활동

조선 개국 초 여러 번 판사재(判司宰)·호조 전서(典書)·판통례(判通禮)·병조 참의(參議) 등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1398년(태조 7) 강주진 첨절제사(江州鎭僉節制使)로 강화부사(江華府使)를 겸했다. 1404년(태종 4) 상호군(上護軍)으로 있다가, 왕의 명에 따라 동북면 선위사(東北面宣慰使)가 되어 여진족을 안무(按撫)하였다. 1405년(태종 5)에는 경원등처병마사(慶源等處兵馬使)에 임명되었다. 1406년(태종 6) 2월에 만주 목단강(牧丹江)의 고주(古州:具州) 지역에 살던 혐진(嫌眞) 우디캐[兀狄哈]의 추장 키무나[金文乃] 등이 경원(慶源)의 소다로(蘇多老)를 침략하였는데, 박령이 그들을 격퇴하였다.

1408년(태종 8)에는 길주도 찰리사(吉州道察理使) 겸 길주판목사(吉州判牧事)가 되었다. 1419년(세종 1) 황해도도절제사(黃海道都節制使)로 해주판목사(判海州牧使)를 겸하였다. 그 때 상왕 태종과 함께 세종이 해주(海州) 등 여러 곳을 순행하자 관찰사이숙무(李叔畝)와 같이 맞이하였는데, 세종은 비록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의 차서(次序)가 있으나 그가 구신(舊臣)임을 들어 감사보다 상좌에 앉히고 어의(御衣)를 하사하는 한편 환궁한 뒤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시켰다. 1421년(세종 3) 좌군 도총제(左軍都摠制)에 오르고, 그 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가 1434년(세종 16) 12월 24일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하루 동안 정조시(停朝市)하고 조부(弔賻)하였으며, 중궁(中宮)도 또한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였다.

성품

박령은 성품이 너그럽고,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무예(武藝)가 있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 『태조실록(太祖實錄)』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