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응형(閔應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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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8년(선조11)∼1662년(현종3) = 85세]. 조선 중기 광해군∼현종 때의 문신. 자는 가백(嘉伯)이다.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분 승지(分承旨)민호(閔頀)이고, 어머니 남양홍씨(南陽洪氏)는 예조 좌랑홍익세(洪翼世)의 딸이다. 부사민응경(閔應慶)의 형이고, 좌의정민암(閔黯)의 7촌이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12년(광해군4)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5세였다. 승문원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는데, 이듬해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그는 이에 반대하여 벼슬을 버리고 경기도 양근(楊根)의 선산 아래로 돌아가서 6, 7년 동안 은거하였다.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었으므로 김포현령(金浦縣令)과 개성부 경력(經歷)으로 나가서 부모를 봉양하였는데, 치적(治績)이 뛰어나서 두 번이나 표리(表裡)를 하사받았다. 1621년(광해군13) 분 병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형조 낭관(郎官)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이조 낭관을 거쳐 사헌부 감찰(監察)에 의망(擬望)되었고, 1625년(인조3)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어서, 춘추관(春秋館)기주관(記注官)을 겸임하였다. 1626년(인조4)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가, 사헌부 장령(掌令)과 성균관 사예(司藝)를 거쳐, 개성부 경력(經歷)으로 나갔다. 1627년(인조5) 홍문관에 들어가서 부수찬(副修撰) · 수찬(修撰)으로 승진하였다. 1630년(인조8)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가 강릉부사(江陵府使)로 나갔는데, 그때 성 안에 난 불이 집경전(集慶殿)까지 옮겨 붙어 태조(太祖)의 영정(影幀)이 타버렸으므로, 참봉(參奉)과 함께 파직되었다. 1632년(인조10)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다가, 이듬해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이 되었고 이어 홍문관 부응교(副應敎)가 되었다. 1635년(인조13) 사간원 사간(司諫)에 임명되었다가, 동부승지로 발탁되었다. 이듬해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승진하였다가 강원도관찰사로 옮겼다. 그 해 겨울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을 때 그의 부모가 충청도 예산(禮山) 내포(內浦)에 있었으므로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달려가지 못하였다. 나중에 조정에서 임금이 피란할 때 호종(扈從)하지 않은 자의 죄를 논하였는데, 인조는 “민응형은 반드시 임금을 뒤로 하지 않는 사람인 것을 내가 안다.” 하고 본래의 관직을 회복시켰다. 1637년(인조15) 좌부승지가 되었다가, 1642년(인조20) 예조 참의를 거쳐, 이듬해 대사간(大司諫)으로 승진하였고, 병조 참의로 옮겼다. 병조 참의로 있을 때 최명길(崔鳴吉) · 김류(金瑬) · 심기원(沈器遠) 등 대신들을 탄핵하였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었다. 1644년(인조22) 이조 참의가 되었는데, 상신들을 공격하였다가 순천부사(順天府使)로 좌천되었다. 이후에도 그는 항상 직언(直言)을 하다가 임금의 뜻을 거슬러서 수년 동안 산직(散職)에 있었는데, 1649(인조27) 안변부사(安邊府使)에 보임되었다.

효종~현종 시대 활동

1649년(효종즉위)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가 부호군(副護軍)이 되었다. 1651년(효종2) 병조 참판이 되었다가 경연 동지사(同知事)를 거쳐 예조 참판이 되었고,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1652년(효종3) 대사헌이 되었는데, 그때 자전(慈殿: 자의대비)이 목욕하는 것을 중지하도록 청하였다가 하옥(下獄)되었다. 이때 잠곡(潛谷)김육(金堉)이 입대(入對)하여 그를 용서해 주기를 청하는 덕분에, 그가 삭출(削黜)되는 선에서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1653년(효종4) 이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한직 서반(西班)으로 옮겼다. 1657년(효종8) 종2품상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품(陞品)되고 쌀과 고기를 하사 받았는데, 나이가 80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1659년(현종즉위)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고, 1661년(현종2) 중추부 지사를 거쳐,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에 임명되었다. 당시 남인 윤선도(尹善道)가 자의대비(慈懿大妃: 장렬왕후)의 복상문제로 송시열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다가 함경도 삼수(三水)로 귀양갔다. 그는 윤선도의 무고함을 주장하다가 노론 일파의 미움을 사기도 하였으나, 결코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1662년(현종3) 7월 20일 노병으로 죽으니, 향년이 85세였다.

성품과 일화

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평소에 의롭지 못한 것을 보면 의분을 참지 못하여 비분강개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마음에 생각한 것이 있으면 바로 조정으로 들어가 임금에게 고했는데, 때로는 울면서 임금의 잘못과 시정(時政)의 득실을 극구 말해 숨기는 것이 없었으므로, 인조는 감동하여 그가 충성스럽고 소박하며 바른말 잘하고 정직한 인물이라고 칭찬하였다.

1635년(인조13) 사간원 사간에 임명되었을 때 재이(災異)가 여러 번 나타나고 변방의 근심이 더해지자, 그는 임금에게 시정(時政)의 폐단을 지적하였다. 함께 아뢰었던 집의(執義)심지원(沈之源)은 물러 나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민공의 충언(忠言)아 임금을 감동시켰으므로, 나는 아무 말도 못하였다.” 하였다.

1646년(인조24) 순천부사로 있다가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어 순천에서 서울로 오다가, 동작진(銅雀津)에 이르러 <강빈(姜嬪) 옥사(獄事)>의 소식을 들었다. 바로 대궐로 달려가서 강빈을 구원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인조의 노여움을 크게 샀다. 이에 그는 강빈의 죽음을 막지 못한 것을 한탄하여 스스로 파직되기를 자청하고 벼슬을 떠나서 몇 년 동안 벼슬하지 않았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통진(通津)에 있는데, 용주(龍洲)조경(趙絅)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용주유고(龍洲遺稿)』 권12) 첫째 부인 원주이씨(原州李氏)는 호군(護軍)이정식(李挺植)의 딸이고, 둘째 부인 강릉최씨(江陵崔氏)는 첨지(僉知)최기석(崔基錫)의 딸이다. 아들이 없었으므로 동생 민응경(閔應慶)의 아들 민후(閔煦)를 양자로 삼았는데, 민후는 선공감 첨정(僉正)을 지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용주유고(龍洲遺稿)』
  • 『동계집(桐溪集)』
  • 『백호전서(白湖全書)』
  • 『속잡록(續雜錄)』
  • 『송자대전(宋子大全)』
  • 『약천집(藥泉集)』
  • 『응천일록(凝川日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잠곡유고(潛谷遺稿)』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하곡집(霞谷集)』
  • 『한수재집(寒水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