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기(閔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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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04년(연산군10)∼1568년(선조1) = 65세]. 조선 중기 중종∼선조 때의 문신. 자는 경열(景說), 호는 관물재(觀物齋) · 호학재(好學齋)이다.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현령민세류(閔世瑠)이고, 어머니 전의이씨(全義李氏)는 사헌부 장령(掌令)이인석(李仁錫)의 딸이다. 참의(參議)민효손(閔孝孫)의 손자이고, 사헌부 지평(持平)민호(閔箎)의 형이다. 모재(慕齋)김안국(金安國)의 문인이다.

중종∼인종 시대 활동

1531년(중종26)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39년(중종34)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6세였다. 승문원 정자(正字)를 거쳐 홍문관에 들어가서 곧바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예문관 검열(檢閱)을 거쳐, 승정원 주서(注書)에 임명되었다. 1540년(중종35) 홍문관 정자와 저작(著作)을 거쳐, 이듬해 수찬(修撰)으로 승진하였고,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1542년(중종37) 세자시강원 사서(司書)를 겸임하여 세자 때 인종을 가르쳤고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모친상과 부친상을 연달아 당하여 벼슬을 사임하고 몇 년 동안 상례를 치렀다. 1544년에 즉위한 인종은 그가 복제(服制)를 끝마치기를 기다렸는데, 인종이 동궁(東宮)으로 있을 적에 세자 시강원에서 글을 배우면서 그의 학문(學問)이 고명(高明)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부친상을 마친 것은 명종 즉위 후였다.

명종∼선조 시대 활동

1545년(명종즉위) 부친상을 마치고 홍문관 부교리(副校理)에 임명되었는데, 오래도록 상복을 입고 외부와 관계를 끊고 지냈으므로, <을사사화(乙巳士禍)>의 화를 면할 수가 있었다. 의정부 검상(檢詳)과 사인(舍人)을 역임하고, 이듬해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에 들어가서 교리(校理) · 응교(應敎)로 승진하였다. 1547년(명종2) 병으로 관직을 사임하였다가, 사도시(司䆃寺)첨정(僉正)봉상시(奉常寺)부정(副正)을 거쳐, 군기시(軍器寺)정(正)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경상도 수령들의 불법을 염찰(廉察)하였고, 홍문관 전한(典翰)에 임명되었다가 1549년(명종4)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되었다.

그 해 충주(忠州)에서 <이홍윤(李洪胤)의 옥사>가 일어나자, 문사관(問事官)에 임명되어 옥사를 다스렸다. 돌아와서,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하여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으로 승진하였고,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1550년(명종5) 우부승지 · 좌부승지로 승진하였고, 공조 참의를 거쳐 병조 참지가 되었다가, 이듬해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1552년(명종7) 동지사(冬至使)에 임명되어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가서 동지(冬至)를 하례하였다. 그때 악관(樂官) 1명과 악사(樂師) 3명을 데리고 가서 명나라 정통 음률(音律)을 배우고, 율관(律管) 1부(部)를 얻어 가지고 돌아왔다.

1553년(명종8) 이조 참의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이문정시에서 장원을 하였다. 1555년(명종10) 청홍도관찰사(淸洪道觀察使: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공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1557년(명종12)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고, 용양위 대호군(大護軍)을 거쳐, 이듬해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으로 옮겼다. 1560년(명종15) 공조 참판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다시 청홍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대사성이 되었다. 또 대사헌에 임명되어 몇몇 재상들과 함께, 윤원형(尹元衡)의 전횡(專橫)을 막으려고 노력하였다. 1563년(명종18) 예조 참판에 임명되었고, 1565년(명종20) 이조 참판으로 옮겼다가,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1566년(명종21) 이조 판서에 임명되어, 홍문관 제학(提學)을 겸임하였고, 이듬해 중추부 지사가 되었다. 1567년(명종22) 형조 판서로 옮겼다가,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으로 승진하였다.

1565년(명종20) 명종이 위독하였을 때, 영상이준경(李浚慶)은 이조 참판민기의 권유를 받아 명종에게 후사를 정할 것을 청하였고, 이에 명종이 중종의 손자 하성군(河城君)이균(李鈞)을 세자로 삼았다는 일화가 『부계기문(涪溪記聞)』에 있다. 1667년 명종이 승하하고 하성군이균이 선조로 즉위하였는데, 그는 예조 판서로 옮겨 국상 중의 예절과 제사 의식을 주선하였다. 이어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었는데, 1568년(선조1) 정월 18일 관청에서 관대를 갖추고 손님을 접견하다가 갑자기 구토하면서 인사불성이 되었다. 평소 담(痰)을 앓아 몸이 마비되는 병세가 있다가 이때 쓰러져 깨어나지 못하고 죽었는데, 향년이 65세였다.

저서로는 『석담야사(石潭野史)』와 『대학도(大學圖)』가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민기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타고난 자질이 평온하고 밝으며, 침착하게 안정되어 조용하였으므로, 아무리 창졸간(倉卒間)이라도 말을 빨리 하거나 허둥대는 기색이 없었고, 다른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할 때에는 진실하여 남을 속이지 않았다. 집안에 있을 때나 관아에 있을 때에 어느 누구도 그가 기뻐하거나 성내는 것을 보지 못하였는데, 착한 것을 보아도 지나치게 칭찬하지 않았으며, 악한 것을 보아도 용인해 주었다. 간혹 남의 단점을 공격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언제나 “완전한 사람을 어떻게 쉽게 얻을 수 있겠는가? 사람에게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민기가 이조 판서로 있을 때 이이(李珥)가 이조 좌랑이었는데, 이이가 전선(銓選)을 공평하게 하여 청탁하는 길을 막으려고 하면 민기는 너무 지나치게 하다가 불평이 일어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계하였다. 이를 두고 이이는 민기가 소인을 두려워하나 군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였고,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성품이 각박한 소인에게는 죄를 얻으면 멸족될 수도 있는데, 그가 이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한편, 실록에서는 “민기는 사려가 깊고 지략과 계책이 원대하여 큰 일을 잘 처리하였다.”라고 평하였다.

묘소와 비문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묘소는 경기도 금천(衿川: 시흥) 백암리(白巖里)의 선영에 있고, 현손 민균(閔昀)의 부탁으로 잠곡(潛谷)김육(金堉)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찰방(察訪)김택(金澤)의 딸인데, 자식이 없다. 종제(從弟) 민순(閔筍)의 아들 민수도(閔守道)를 후사로 삼았는데, 그는 상서원(尙瑞院)부직장(副直長)을 지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잠곡유고(潛谷遺稿)』
  • 『견한잡록(遣閑雜錄)』
  • 『고봉집(高峯集)』
  •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 『동각잡기(東閣雜記)』
  • 『부계기문(涪溪記聞)』
  • 『석담일기(石潭日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퇴계집(退溪集)』
  • 『해동야언(海東野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