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수흠(睦守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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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48(명종3)~1593(선조26) = 46세]. 조선 중기 명종~선조 때의 유일(遺逸). 자는 요경(堯卿), 호는 하담(荷潭)이다. 본관은 사천(泗川)이고, 서울 출신이다. 아버지는 이조 참판목첨(睦詹)이고, 생모 전의이씨(全義李氏)는 이보(李寶)의 딸이고, 계모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정건(鄭謇)의 딸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현헌(玄軒) 목세칭(睦世秤)의 손자이고, 이조 판서이문형(李文馨)의 조카이다.

선조 시대 음직 활동

생모 이씨는 학문에 통달하고 식견이 뛰어나서 오라버니 이문형(李文馨)은 어려운 일이 있으면 반드시 누이동생과 상의할 정도였다. 이처럼 훌륭한 어머니가 그의 나이 13세였던 1560년(명종15)에 병으로 돌아가자 그는 무척 방황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면서, 유학을 공부하였다. 아버지 목첨은 선조 때 도승지를 세 번이나 역임할 만큼 선조의 신임을 받아 죽을 때까지 나랏일에 분주하였다. 아버지가 계모를 맞아들여 3남 4녀를 낳았는데, 그는 타고난 성품이 진실되고 순박하여, 모든 것을 너그럽게 포용하였다. 말은 함부로 하지 않았고 처신은 망령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집안에서는 노여워하지 않아도 위엄스러워서 좌우의 사람들이 감히 그를 우러러보지도 못하였다. 계모를 생모처럼 섬기면서 봉양하고 공경하기를 다하고, 여러 배다른 아우들과 우애를 더욱 돈독히 하면서 온 집안에 화기가 넘치도록 하였으므로, 여러 아우들도 그의 성의에 감동하여 모두 마음을 다하여 맏형을 공경하였다.

성리학을 공부하면서도 과거의 합격에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이복동생 3명은 모두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그는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였다. 아버지의 권유로 음보(蔭補)로 벼슬길에 나가서, 선공감(繕工監)가감역(假監役) ·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 · 장원서(掌苑署)별좌(別坐) 등을 역임하였다. 그가 의금부 도사로 부임할 적에 동료들은 그가 부귀(富貴)한 집안의 출신이므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라고 업신여겼는데, 그가 처음 출사(出仕)하던 날 옥사(獄事)를 청리(聽理)한 제사(題辭)를 거침없이 기록하는 것을 보고 감탄하였다. 1588년(선조21) 의금부 도사로서 죄인들을 압송하여 한밤중에 평양을 지나다가 초적(草賊)을 만나서 의롱(衣籠)을 빼앗겼으나, 죄인들은 무사히 의금부로 압송하였다. 또 장원서에 있을 때는 물건을 출납(出納)하기를 매우 공정하게 하여 뇌물을 주고받는 풍토가 사라졌다. 어떤 아전이 그가 없는 틈을 타서 생선 한 꾸러미를 그의 집으로 가지고 와서 바치고 인사도 없이 가버리자 그 부인이 그것을 문설주 위에다 매달아 놓아서 저절로 썩게 만들었다. 이는 그의 청렴결백한 기풍을 보고 온 집안 식구들이 남의 뇌물을 조심하였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효도와 죽음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다가, 스스로 정신을 가다듬고, 아버지의 가르침을 정성껏 받들어, 스스로 분발하여 자신을 위하는 학문에 힘을 기울였다.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여 여러 아우들의 모범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천목씨(泗川睦氏) 집안에서 적장자(嫡長子)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선조가 의주로 몽진(蒙塵)하였는데, 아버지 목첨은 나이가 많아서 임금을 호종(扈從)할 수가 없었다. 이듬해 아버지를 모시고 강화도(江華島)로 피난갔는데, 아버지는 79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강화도에서 경기도의 여러 의병을 규합하여 그 대장이 되고, 의병의 명칭을 ‘일의군(一義軍)’이라 하였다. 충청도의 의병대장 조헌(趙憲)과 손을 잡고 왜적을 토벌하려던 참에, 조정의 명령으로 거느렸던 군사를 추의장(秋義將)우성전(禹性傳)에게 넘겨주고, 세자(世子)가 있던 행조(行朝)로 가던 길에 연안부(延安府)에 이르렀다. 전쟁 중에 선릉(宣陵) · 정릉(靖陵) 두 왕릉이 파헤쳐졌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목첨에게 두 왕릉으로 가서 왕릉을 봉심(奉審)하라고 명하였다. 그는 아버지 목첨을 모시고 왕릉으로 출발하려고 하였으나, 목첨은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서 연안의 여관에서 운명하였다. 목수흠은 며칠 동안 밤을 새우면서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고 현지에서 초상을 치렀다. 서울의 금촌리(金村里)의 선영에 묘자리를 만들고 여막(廬幕)으로 돌아왔는데, 초상 중에 생긴 병이 갑자기 심해져 1593년(선조26) 9월 6일에 죽으니, 향년이 46세였다. 아버지가 돌아간 지 석달 보름만에 아들도 아버지를 따라간 것이다. 유교의 장례(葬禮) 문화가 빚어낸 조선시대 유교 가문의 비극이었다.

성품과 일화

목수흠의 성품과 자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순박하고 겸손하여 가난하게 살면서도 청빈함을 지켜 녹봉을 받는 벼슬살이를 피하려고 하였다. 세상의 물건과 인정에는 일체 욕심이 없고 깨끗하게 살면서 음식과 의복은 번거롭게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첫째 부인의 아버지 첨정(僉正)한총(韓叢)이 재력이 있어서 옥으로 만든 술잔을 그에게 주었는데, 진기하기가 세상에서 견줄 수가 없을 만큼 값졌지만, 그는 간곡히 사양하고 끝내 받지 아니하였다. 둘째 부인 연안이씨(延安李氏)의 남동생 이기설(李基卨)에게 “말세의 진로가 여러 갈래인데, 사람의 마음이 속세에 빠져들면, 머리가 나왔다가 들어갔다가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몸마저 망치는 경우가 많다.” 하고, 속세에서 초연하게 지조를 지키고 살면 그 화를 모면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친구들과 교제하는 방도가 매우 곧으면서 성실과 신의를 다하였다. 술을 좋아하여 친구들과 어울려서 술을 많이 마셔도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하지 않았고, 술이 거나하면 번번이 두보(杜甫)의 시를 소리 높이 한껏 읊었는데, 음률과 운치가 맞아 떨어졌다고 한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동쪽 금촌리(金村里)의 선영에 있는데, 그의 처남 연봉(蓮峯)이기설이 지은 행장(行狀)이 남아 있다. 첫째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는 첨정한총의 딸이고, 둘째 부인 연안이씨는 소격서(昭格署) 참봉(參奉)이지남(李至男)의 딸인데, 자녀는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 목취선(睦取善)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修撰)을 지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미수기언(眉叟記言)』
  • 『백사집(白沙集)』
  • 『사암집(思菴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