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언해(孟子諺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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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宣祖) 대에 『맹자(孟子)』에 토(吐)를 달고 우리말로 언해한 책.

개설

『맹자언해(孟子諺解)』는 선조의 명에 따라 중국의 사서(四書) 가운데 하나인 『맹자』의 원문에 한글 토를 붙이고, 한글로 풀이 한 책이다. 14권 7책으로 되어 있으며, 간행은 1590년(선조 23) 교정청(校正廳)에서 담당하였다.

이 책은 원문과 언해문의 한자에는 현실(現實) 한자음을 표기하였으며, 방점도 달려 있다. 중세국어를 알 수 있는 귀중한 국어사 자료로서, 순수국어를 많이 사용하고, 자음동화현상을 반영한 점이 특징이다. 그 내용은 1책에 「양혜왕편(梁惠王篇)」, 2책에 「공손축편(公孫丑篇)」, 3책에 「공문편(文公篇)」, 4책에 「이루편(離婁篇)」, 5책에 「만장편(萬章篇)」, 6책에 「고자편(告子篇)」, 7책에 「진심편(盡心篇)」의 순서로 되어 있으며, 각 책은 상·하 2권씩이다.

편찬/발간 경위

언해 사업이 본격화한 것은 선조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선조 대에 유숭조(柳崇祖)·이황(李滉)·이이(李珥) 등은 경전(經典)에 토를 붙이는 작업을 하였다. 이런 가운데 유희춘(柳希春)은 1574년(선조 7)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언해하라는 선조의 명령을 받고 먼저 『대학(大學)』, 『논어(論語)』의 주석서를 만들어 바쳤다.(『선조실록』 7년 10월 19일)

이러한 학문적 성과들을 바탕으로 선조는 1585년(선조 18)에 교정청을 설치하고, 경서에 구결을 달아 언해를 하도록 명하였다.(『선조수정실록』 18년 1월 1일) 그리고 이렇게 간행한 교정청본을 관본(官本)이라고 하여 개인본과 구별하였다. 이 사업에는 정구(鄭逑)·최영경(崔永慶)·한백겸(韓百謙)·정개청(鄭介淸)·정철(鄭澈) 등 당대의 학자들이 대거 참여하였으며, 이듬해인 1586년(선조 19) 『소학(小學)』을 시작으로 1587년(선조 20)에는 사서삼경의 언해가 모두 끝이 났다.(『선조실록』 20년 12월 25일) 그리고 도산서원(陶山書院)에 소장 중인 원간본에 ‘만력십팔년칠월일(萬曆十八年七月日)’ 내사기(內賜記)가 있는 것으로 보아, 1590년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서지 사항

14권 7책으로 되어 있으며, 목판본이다. 지질은 한지이며, 원간본은 도산서원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은 조선시대에 여러 번 간행되어 이본이 많다. ‘만력사십년십이월일(萬曆四十年十二月日)’, ‘숭정사년윤십일월일(崇禎四年閏十一月日)’, ‘강희삼십이년구월십사일(康熙三十二年九月十四日)’의 내사기가 있는 책이 있는데, 이들은 각각 1612년(광해군 4)·1631년(인조 9)·1693년(숙종 19)에 간행된 것들이다. 그리고 ‘경진신간내각장판(庚辰新刊內閣藏板)’, ‘갑신신간영영장판(甲申新刊嶺營藏板)’, ‘임술계춘영영중간(壬戌季春嶺營重刊)’의 간기를 가진 책들은 각각 1820년(순조 20)·1824년(순조 24)·1862년(철종 13)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구성/내용

『맹자언해』는 한문을 앞에 싣고 이어 언해문을 다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방점(傍點)이 찍혀 있고 ‘ㅿ’과 ‘ㆁ’도 쓰이고 있으며, 원문과 언해문의 한자에는 현실한자음(現實漢字音)에 따라 표기된 한자음도 달려 있다.

표기상으로 볼 때 원간본이 방점표기 및 ‘ㅿ, ㆁ’을 사용하고 있는 데 비해, 광해조본·인조조본·숙종조본은 방점이 표기되지 않고 ‘ㅿ’과 ‘ㆁ’이 혼용되고 있으며, 그 이후의 간본들은 ‘ㅿ’과 ‘ㆁ’까지도 전면적으로 폐기하고 있다. 그러나 문법상의 차이를 보이는 표기나 문체상의 차이는 전혀 보이지 않으므로, 이본의 비교를 통한 문법사(文法史)의 연구에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문체상의 차이를 보이는 전혀 다른 언해는 『맹자율곡언해(孟子栗谷諺解)』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 책은 원문의 한자를 언해문에 그대로 써서 어휘상의 차이도 보인다. 그러나 원문에 달린 토는 다른 『맹자언해』와 동일하다.

원간본인 도산서원본은 다른 원간본 사서 언해와 함께 방점을 표기한 마지막 문헌이며, 중세국어와 근대국어의 분기점에서 일어나는 여러 언어 변화가 반영된 문헌이라는 점에서 국어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예컨대 ‘ㅿ’가 점차 ‘ㅇ’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나타나며, 공동격 조사 ‘과’가 ‘괘ㆍ과ㆍ과ㆍ과애’ 등으로 중복해서 사용하는 예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ㄹ’ 뒤에서 나는 된소리의 표기는 ‘定다ᄒᆞᆯ꼬ᄒᆞ야ᄂᆞᆯ’, ‘反홀빠아니로소이다’, ‘ᄒᆞᆯ빼아니니’, ‘出ᄒᆞᆯ’, ‘일쯕’, ‘되어실쩨’에서처럼 다양하게 쓰인다.

다른 사서언해와 같이 규장각 소장본 『맹자언해(孟子諺解)』의 책들은 ‘△’과 ‘ㆁ’ 표기법의 변천을 보여줄 수 있는 것들로 국어사 연구의 자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17세기초 이후의 문법이나 어휘의 변천과정을 찾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규장각 소장본 사서언해는 초간본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16세기말에서 17세기초의 언어 변화가 언해라는 제약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그 때의 공시적 연구를 위해서는 귀중한 자료가 될 수 있다. 특히 이 시기는 세종 대에 불경 언해가 이루어진 이후 경서 언해가 처음으로 이루어진 시기라는 점에서 국어사적으로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의 원간본인 도산서원본은 중세 국어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국어사 연구의 훌륭한 자료가 되며, 기타의 이본들 역시 국어사 중 음운 변화를 고찰하는 데 좋은 자료로 활용된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박종국, 『한국어발달사』, 세종학연구원, 1996.
  • 안병희, 「중세어의 한글자료에 대한 종합적 연구」, 『규장각』 3, 서울대학교, 1979.
  • 이숭녕, 「대학언해의 율곡본과 관본과의 비교연구」, 『동교 민태식 박사 고희 기념 유교학 논총』, 1972.
  • 최현배, 『한글갈』, 정음사, 1942.
  • 한영균, 「맹자언해 이본고」, 『울산어문논집』 3, 울산대학교,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