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건상(馬建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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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말~중화민국 시기 천주교 예수회 신부이자 관리를 역임한 교육자.

개설

마건상은 1851년에 프랑스 예수회가 상해에서 운영하는 서회공학(徐匯公学, Collège Saint Ignace)에 입학하였다. 1862년 5월 29일 예수회에 입회하여 신학, 철학·문학·천문학 등을 배웠으며, 1869년에 사제서품과 동시에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마건상은 안휘성(安徽省)성의 선성(宣城) 등에서 표교를 하였다. 그 뒤 1872년에 서회공학의 교장에 부임하였지만, 학생들에게 중국의 국학을 강조하면서 예수회 내부의 반발을 샀다. 1876년에는 난징으로 거처를 옮겨서 예수회에서 외국인 저작의 번역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수리대전(數理大全)』의 출판 과정에서 예수회 측과 마찰을 빚게 되면서, 그해 8월 15일자로 예수회에서 퇴출되었으며, 결국 일반인으로 환속하게 되었다.

마건상은 그의 형 마건훈(馬建勛)의 권유로 이홍장의 막료가 되어서 양무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주로 산동 지역의 광업 조사를 실시하였다. 1881년에는 주일 청국공사관의 참찬관(參贊官)을 거쳐서, 1882년에 이홍장의 추천으로 조선으로 와서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의 참의(參議)와 참찬(參贊)에 올랐다. 1885년에 대만순무(台灣巡撫) 유명전(劉銘傳)의 막료가 되었으며, 1892년에 일본장기(長崎)와 횡빈(橫濱) 등에서 영사 업무 및 주일 청국대사관의 참찬관을 역임하였다. 한편 1897년에는 예수회로부터 사면을 받았다.

1903년 상해에 진단학원(震旦學院: 현 진단대학)을 설립하였으며, 1905년에는 복단공학(復旦公學: 현 복단대학)을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1908년에는 강소자의국(江蘇諮議局)의 의원이 되었으며, 1912년 중화민국이 설립된 이후에는 원세개(袁世凱) 대총통부 고문, 북경대학(北京大學) 교장, 정치회의(政治會議) 의원, 참정원(參政院) 참정(參政), 약법회의(約法會議) 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1917년에 공직에서 은퇴하고 상해로 거처를 옮긴 마건상은 천주교 서적을 번역하는 데 집중하였다. 하지만 1931년에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내전 중지를 호소하였으며, 1935년에는 심균유(沈鈞儒)·추도분(鄒韜奮) 등 상해 내 문학가들과 함께 「상해문화계구국운동선언(上海文化界救國運動宣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36년에는 송경령(宋庆龄)·하향응(何香凝)과 함께 전국각계구국연합회(全國各界救國聯合會)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7년 3월에는 남경 국민정부의 위원이 되었다.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마건상은 이종인(李宗仁)의 요청으로 거처를 계림(桂林)으로 옮겼다가, 다시 우우임(于右任)의 권유로 곤명(昆明)으로 이동하는 중에 베트남에서 병을 얻어서 1939년 11월 4일에 사망하였다.

가계

마건상 집안은 강소성(江蘇省) 진강부(鎮江府) 단양현(丹陽縣)의 천주교 부락의 마씨촌 출신으로 대대로 천주교를 믿었다. 마건상의 아버지 마송암(馬松岩)은 고향에서 의료 및 상인으로 활동하였다. 동생 마건충은 양무파 관료로서 1882년에 조선이 미국·영국·독일과 차례로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때 조선에 파견되어서 청의 중재 실무를 전담하였으며,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흥선대원군을 톈진으로 납치하는 일을 맡았다. 한편 『매천야록』에는 윤치호가 청국에서 결혼한 둘째 부인 마애방(馬愛芳)이 마건상의 딸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마애방이 태어난 해가 마건상이 신부로 있었던 1871년이기 때문에 『매천야록』의 기록은 추가적인 검토가 요구된다.

활동 사항

1882년 임오군란이 진압된 이후 조선 정부는 조영하를 청국에 보내서 해관 업무 및 근대적 개혁을 추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인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에 이홍장은 뮐렌도르프([穆麟德], Möllendorf, Paul George von), 당정추(唐廷樞), 진수당(陳樹棠)과 더불어 마건상을 조선으로 파견하였다(『고종실록』 19년 11월 5일). 고종은 마건상을 접견하고, 그를 정2품 관직인 의정부 찬의(贊議) 및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회판(會辦)을 겸직하게 하였다(『고종실록』 19년 12월 25일). 그러자 이홍장은 청의 관리가 조선의 관직을 맡는 것이 내정 간섭의 혐의를 받는다고 하여서 의정부 찬의 직책을 감하해 달라는 자문을 보냈으며(『고종실록』 20년 4월 1일), 이에 조선 정부도 의정부 찬의 직책을 감하하였다(『고종실록』 20년 4월 4일). 마건상은 조선 정부의 정책 결정 과정에 공식적으로 개입하기보다는 주로 배후에서 조선의 외교를 통제하고 친청파가 조선 조정을 장악하는 데 힘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기에 그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1883년에 고종은 마건상이 올린 의견을 묘당에서 적극적으로 시행하도록 지시를 내렸는데, 실록을 비롯한 관찬사료에는 그가 올린 건의 내용이 적혀 있지 않았다. 다만 『나암수록』에는 당시 마건상이 고종에게 건의한 내용으로 추정되는 「마건상14조」가 있었다. 그 내용은 조혼하지 말 것, 범죄자의 사후 조치 및 범죄자 자손에 관한 것, 여성의 재가를 허용하는 건, 과부와 홀아비의 혼배를 허락하는 건, 노비의 부역 부과에 관한 건, 토지정책에 관한 건 등이 있다.

1888년 8월 초에 종사관성기운(成岐運)은 이홍장에게 임기가 만료되는 원세개(袁世凱)의 후임으로 마건상을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고종 역시 원세개를 교체해 줄 것을 청국에 요청하였다. 하지만 이홍장은 원세개를 대체할 인물이 없다는 이유로 원세개를 유임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마건상의 조선 부임은 성사되지 않았다.

저술 및 작품

馬相伯 著 ,徐景賢編錄 筆記, 『馬相伯國難言錄集』, 文化美術圖書公司, 1933.

馬相伯著, 方豪編, 『馬相伯先生文集』, 上智 編譯館, 1948.

묘소

1952년에 상해 시장 진의(陳毅)가 베트남에 묻혔던 마건상의 유해를 천주교 식언공동묘지[天主敎息焉公墓]로 이장하였다. 1966년 문화혁명기에 홍위병에 의해서 식언공동묘지가 훼손되었으며, 1984년에 마건상의 유해는 상해의 송경령능원(宋慶齡陵園)으로 이장되었다.

참고문헌

  • 『나암수록(羅巖隨錄)』
  • 『매천야록(梅泉野錄)』
  • Ruth Hayhoe, Yongling Lu, Ma Xiangbo and the Mind of Modern China 1840-1939, M.E. Sharpe,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