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재(佟養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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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말의 여진인으로 누르하치의 휘하에서 활동하며 조선과의 교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

개설

동양재는 현전하는 자료가 적어 구체적인 사항을 알기 어려우나, 만주퉁기야씨(佟佳氏)인 것으로 추정된다. 퉁기야씨는 건주여진의 흥기에 많은 기여를 하였던 성씨였다. 동양재는 중국어에 능통하여 마삼비(馬三非)·마신(馬臣) 부자와 함께 명의 호시(互市)에 수차례 진공(進貢)하였던 인물이다(『선조실록』 28년 12월 5일). 1595년 8월 이후 전개된 조선과 건주여진의 교섭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활동 사항

1595년 8월 평안도 강변에서 조선의 군민이 여진인들과 충돌하여 수십 인의(명의) 여진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누르하치([奴兒哈赤], nurhaci)는 이에 대한 보복을 다짐하였고, 양측의 관계는 언제든 무력 충돌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조선에서는 이를 요동의 명 아문에 보고하는 한편으로 조선에 들어와 있던 명군 유격(遊擊)호대수(胡大受)에게 중재를 의뢰하였다. 호대수는 자신의 막하에 있던 여희원(余希元)을 건주여진으로 파견하여 선유(宣諭)하였고, 조선에서도 만포첨사(滿浦僉使) 명의로 신충일(申忠一)을 들여보내게 되었다.

먼저 여희원 일행은 1595년 8월 만포에 도착하여 자신의 부하인 양대조(楊大朝)를 파견하여 한 차례 조선과 상호 화해하라는 뜻을 전하였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누르하치는 자신의 부하인 마신과 동양재를 만포로 파견하였다. 만포진에서는 여희원이 먼저 잔치를 베풀었고 이어서 만포첨사가 회원관(懷遠館)에서 잔치하였는데, 이때 동양재 일행은 예전에 건주여진에서 조선인 피로인들을 송환한 점, 여진인들이 살해된 경위, 누르하치의 침공 의사와 명의 중재를 듣고 이를 철회한 사실 등을 논하였다. 동양재 등은 향후의 교섭에서 문서를 사용하자고 건의하였으나 조선은 명의 금법(禁法)을 이유로 거절하였다(『선조실록』 28년 11월 20일).

동양재는 이후에도 조선과 건주여진의 교섭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하였다. 1595년 12월 28일에 조선의 신충일이 만포첨사의 군관이라는 직함으로 건주여진을 방문하였는데, 이때 마신 등과 함께 누르하치와 슈르가치 형제의 의사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신충일은 건주여진에서 7일가량을 머물렀는데, 동양재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그를 찾아와 문안하고 술과 고기, 말먹이까지 제공하는 역할을 하였다. 신충일이 조선으로 귀환한 뒤에 올린 서계(書啓)에 따르면, 동양재의 본명은 ‘소시(蘇屎)’였는데 1595년에 여희원이 방문하였을 때 이름을 고쳤다고 하였다. 신충일의 서계에는 마신이 주로 누르하치의 지시를 받았던 반면, 동양재는 슈르가치의 지시를 받고 있었음도 확인되었다. 동양재는 신충일과 슈르가치나 그의 사촌형인 다지(多之)와의 대화를 서로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군사적인 문제와 조선인의 의복에 대한 언급들이 확인되었다. 신충일은 누르하치와 슈르가치가 내린 선물을 거절하였는데 이때도 동양재를 통하여 의사를 전달하였다(『선조실록』 29년 1월 30일).

이후 동양재에 대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지만, 이후 조선과 건주여진의 교섭이 지속되었던 만큼 중재의 역할을 계속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
  • 장정수, 「16세기 말~17세기 초 조선과 건주여진의 배후 교섭과 신충일의 역할」, 『한국인물사연구』 25,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