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덕회(同德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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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자신의 즉위를 도운 신료들의 공덕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모임.

개설

정조는 서명선(徐命善)이 세손 대리청정을 반대한 홍인한(洪麟漢) 탄핵 상소를 올렸던 12월 3일을 기념하여 동덕회(同德會)를 만들었다. 그리고 매년 이 날이 되면 구성원들을 특별히 불러서 당시 상황을 되새기며 이들의 공덕(功德)을 기념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정조가 매년 동덕회를 열었던 12월 3일은 1775년(영조 51)에 서명선이 영조에게 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는 홍인한 세력을 탄핵하라고 요구하는 상소를 올린 날이다. 당시 궁료(宮僚)인 홍국영이 홍인한을 탄핵할 사람을 찾았지만 홍인한 세력이 드세어 호응하는 사람이 없다가, 결국 서명선이 나서서 탄핵 상소를 올렸다. 이를 계기로 영조가 서명선을 불러서 크게 칭찬한 뒤 홍인한을 축출하여 의리가 비로소 확정되었다. 훗날 정조는 서명선을 『명의록(明義錄)』 의리의 주인(主人)으로 인정하였다.

조직 및 역할

정조는 1777년(정조 1) 12월 3일에 탄핵 상소를 올린 서명선과 궁료인 홍국영·정민시(鄭民始)·이진형(李鎭衡) 등을 소견(召見)하여 각별한 정을 표하며 음식을 내렸는데, 이것이 동덕회의 시작이다(『정조실록』 1년 12월 3일). 훗날 동덕회에는 김종수(金鍾秀)도 포함되었다. 동덕회의 형식은 일정하지 않았지만 대개는 매년 이 모임을 열었으며, 특별한 사정으로 모임이 무산되어도 정조는 이 날을 기념하는 글을 지어 각별한 정을 보였다(『정조실록』 15년 12월 3일). 이들은 각각 정조의 편에서 노론과 소론의 핵심을 연계시키는 역할을 하면서 탕평 정국의 운영에 큰 역할을 하였다.

변천

정조는 즉위와 관련하여 공신 책봉을 하지 않는 대신에 공신에 준하는 사람들을 선정하여 동덕회의 모임을 가졌다(『정조실록』 15년 9월 13일). 물론 이후에 동덕회의 구성원들 사이에 노선 갈등도 있었고 홍국영은 죄인까지 되었지만, 그 외에는 정조와 각별했던 인연 때문에 특별한 예우와 보호를 받았다. 홍국영이 신하들의 집요한 주장에도 끝내 역적 처분을 받지 않았던 것도 그의 공로를 감안한 정조의 배려 때문이었다. 영조와 달리 정조의 탕평은 척신에 의존하지 않고 청론 사대부를 등용한다는 우현좌척(右賢左戚)의 노선에 입각하였으므로, 동덕회 인사들은 정조대 노론과 소론 정파의 구심이 되어서 중추 역할을 다하였다고 하겠다.

동덕회의 구성원에는 약간의 변동이 있었다. 특히 홍국영은 1780년(정조 4)에 축출된 이후 곧 사망하였고, 서명선은 1791년(정조 15)에 사망하는 등 핵심 인물 두 명이 사라졌다. 그러나 남은 구성원을 중심으로 동덕회는 끝까지 지속되었다. 간혹 모임을 갖지 못할 경우에도, 이 날을 기념하여 정조는 살아 있는 자에게는 시를 지어 보내고 고인이 된 자에게는 제문을 지어 보내는 등 특별한 대우를 다하였다.

참고문헌

  • 김성윤, 『조선 후기 탕평 정치 연구』, 지식산업사, 1997.
  • 박광용, 「조선 후기 「탕평」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 최성환, 「정조대 탕평 정국의 군신 의리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