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차왜(大差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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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일본이 연례송사와 별도로 일본국왕사의 업무를 대신하여 조선에 파견된 임시 사절.

개설

1609년(광해군 1) 기유약조가 체결됨에 따라 조선전기와 달리 일본의 대조선 사행이 조약에 따라 규정되었고, 일본의 대조선 외교업무는 기유약조에 규정된 사행을 통해서 처리해야 했다. 외교실무는 주로 세견송사(특송사)가 담당하였는데, 기유약조가 체결된 이후에도 규정된 연례송사와 별도로 도항한 배[부선(副船)·수목선(水木船)·재도선(再渡船)]들이 있었고, 규정 외의 임시 사절인 차왜가 도항하였다. 이후 차왜는 별차왜(別差倭) 등으로 불렸는데, 부선·수목선·재도선이 사무역(私貿易)의 증대를 꾀한 것과는 달리 차왜는 외교업무를 수행하고 일본의 대조선 임시 사절로 정착하게 되었다. 차왜의 역할이 정착되고 접대 기준이 정례화된 것은 1680년(숙종 6) 이후부터였다. 차왜 가운데 특히 조선 정부로부터 외교사행으로 인정받은 차왜를 ‘별차왜’라고 하였다. 차왜는 그 사명에 따라 대차왜와 소차왜 및 기타 차왜로 구분할 수 있는데, 대차왜는 막부나 통신사에 관한 사항을 취급하였다.

기원과 성립

차왜는 기유약조 체결 이후 일본이 규정 외에 별도로 보낸 사신 가운데 조선 정부가 인정한 외교사행이기 때문에 그 기원은 연례송사를 제외한 일본의 임시 사절이었다.

차왜 가운데 대차왜는 1645년(인조 24) 처음 등장하였는데, 이는 조선전기 국왕사의 계승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관귤성반(橘成般)을 비롯하여 총 126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처음으로 예조(禮曹) 참판(參判)에게 보내는 서계를 지참하였다. 예조 참판에게 보내는 서계를 지참하였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참판사(參判使)’라고도 불렀다. 이는 예조 참판과 대마도주를 잇는 새로운 외교 루트의 성립을 의미하며, 결국 대차왜와 소차왜의 분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편성 체계

조선으로부터 외교사행으로 접대를 받은 별차왜는 1680년(숙종 6)에서 1720년(숙종 46) 사이에 그 편성 체계와 접대 규정이 정착하게 되었다. 대차왜는 주로 막부나 통신사에 관한 사항을 취급하였으며, 소차왜는 대마도주(對馬島主)나 기타 외교업무에 관한 사항으로 취급하였는데, 그 파견 목적이나 내용의 중요도 특히 지참 서계에 따라 편성 체계와 조선의 접대 규정이 달랐다. 대차왜의 편성은 정관(正官)·도선주(都船主)·봉진압물(封進押物) 각 1명, 시봉(侍奉) 2명, 반종(伴從) 16명, 격왜(格倭) 70명 등이며, 예조 참판·참의, 동래부사, 부산첨사에게 보내는 3통의 서계(書契)와 4통의 별폭을 지참하였다. 대차왜들이 가져온 진상품은 그 품목이 70종에 달하였다.

접대 규정과 규모

조선 정부는 대차왜를 비롯한 차왜에 대하여 연례송사와 같은 접대, 즉 다례, 각종 영향, 지공 등의 접대례와 회답서계 및 별폭 등을 모두 지급하고, 조선 왕에 대한 숙배례(肅拜禮)를 행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왜관에서 60일간 체류할 수 있으며 숙공일(熟供日)은 5일이었다. 이외에 다례(茶禮)·연향(宴享)·지공(支供)은 제1특송선과 같았다. 그러나 회사별폭이나 연향증급예단과 같은 증여무역의 성격을 가진 회례(回禮) 물품은 연례송사보다 많이 지급하였다. 대차왜의 접대는 경접위관(京接慰官)이 주관하여 접위차비역관 당상·당하 각 1명과 출사역관(出使譯官) 1명을 대동하고 각종 다례와 연향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동래부사도 참여하였다. 그리고 별도의 견선(遣船)·각선(脚船)·수목선이 각 1척씩 있고, 매 선(船)마다 각기 20명의 격왜를 대동하였지만 이들은 접대하지 않았다. 대차왜는 모두 4척의 선단(船團)을 이루어 총 151~153명이 도항하였다.

종류

대차왜는 대마도주의 이름으로 파견되었지만 관백의 뜻을 알리는 사절이었고, 내부적으로 막부의 관할 하에 운영되었다. 1636년(인조 14) 이정암윤번제(以酊庵輪番制) 실시로 대마도주는 자의적으로 외교문서를 작성할 수 없었으며, 막부에서 파견한 외교승에 의하여 외교문서의 작성과 회답서계의 검열을 받았고, 조선과의 모든 왕복서계는 막부에 보고해야만 했다.

조선 정부로부터 임시 사절로 접대를 허가받은 총 27종의 별차왜 중 대차왜는 18종이었다. 대차왜은 관백의 뜻을 알리는 차왜로 불렸던 만큼 관백가(關白家)의 경조사나 통신사행과 관련한 외교의례가 주를 이루었다. 그것들을 나열해 보면 관백고부차왜(關白告訃差倭), 관백생손고경차왜(關白生孫告慶差倭), 관백생자고경차왜(關白生子告慶差倭), 관백승습고경차왜(關白承襲告慶差倭), 관백립저고경차왜(關白立儲告慶差倭), 관백퇴휴고지차왜(關白退休告知差倭), 도서청개차왜(圖書請改差倭), 도주승습고경차왜(島主承襲告慶差倭), 도주퇴휴고지차왜(島主退休告知差倭), 도주섭정대차왜(島主攝政大差倭), 내세당송신사차왜(來歲當送信使差倭), 진하차왜(陳賀差倭), 통신사강정차왜(通信使講定差倭), 통신사청래차왜(通信使請來差倭), 통신사호행차왜(通信使護行差倭), 통신사호환차왜(通信使護還差倭), 퇴휴관백고부차왜(退休關白告訃差倭)이었다.

관백가와 관련된 사항이 많은 이유는 임시 사절을 파견해서라도 무역량을 늘리고자 하는 대마번의 기본적인 의도와 맞물렸다. 조선 정부의 허가를 얻은 차왜는 각종 연향접대, 일공의 지급, 회사 및 개시무역에의 참가 등을 통하여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그 접대 여부는 전적으로 조선 정부에 달려 있기 때문에 대마번은 가능한 한 많은 차왜를 파견하여 조선 정부로부터 외교사행으로 인정받으려 노력하였다. 이때 조선 정부로부터 외교사행을 접대받기에 가장 좋은 명분은 관백이나 대마도주의 경조사였고, 통신사행과 문위행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변례집요(邊例集要)』
  • 『통문관지(通文館志)』
  •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 손승철, 『조선시대 한일관계사 연구』, 지성의 샘,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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