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가집성(農家集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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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조 때의 문신 신속(申洬)이 엮은 농서(農書).

개설

『농가집성(農家集成)』은 조선인조 때의 문신 이지당(二知堂)신속((申洬, 1600~1661)이 엮은 농업서적으로 1655년(효종 6) 간행되었다. 세종 대의 『농사직설(農事直說)』을 비롯하여, 주자(朱子)의 『권농문(勸農文)』, 세조 때 강희맹(姜希孟)이 지은 『금양잡록(衿陽雜錄)』과 『사시찬요(四時纂要)』를 하나로 집성한 책이다. 그 내용은 『농사직설(農事直說)』에서는 소홀히 다루고 있던 수전농법과 이앙법을 대폭 증보하였고, 화누법(火耨法: 잡초의 제거와 도열병 처리기술)과 목화재배법 등을 보충하였다.

편찬/발간 경위

『농가집성』은 1655년(효종 6)에 초간을 보고, 이어서 이듬해에 십행본(十行本), 1686년(숙종 12)에 숭정본(崇禎本) 등 중간을 보았다. 이 사이에 약간의 보수와 개수가 가해졌다.

서지 사항

1책(76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현종실록자본(顯宗實錄字本)이다. 크기는 세로 33.1cm, 가로 20.2cm이며,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농사직설』의 내용은 조도앙기(早稻秧基; 올벼의 못자리)의 관리법, 잡초제거와 도열병 처리로서의 화누법, 그리고 목화재배법 등이 보충되어 있다. 『금양잡록』에서는 곡식 작물의 품종 이름이 80여 가지나 나오고, 품종별로 파종기ㆍ성숙기ㆍ적지(摘地) 등이 기술되어 있으며, 기후와 지세의 논급도 있다. 『사시찬요초』는 사시순(四時順), 월별, 그리고 24절별로 각종 전곡(田穀)과 벼의 경종법 원포작물인 채소류와 목화ㆍ삼[麻]ㆍ잇[紅花]ㆍ쪽[藍], 약용 식물의 재배법이 기재되어 있으나 곡류의 항은 매우 간략화 되어 있다. 『구황촬요』는 1554년(명종 9) 구황에 긴요한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 진휼청에서 간행한 것이다. 그 내용은 솔잎을 비롯한 각종 초목의 잎과 줄기, 뿌리 등을 가루로 내어 이용하거나, 다른 곡식과 섞어 대용식을 만드는 법을 소개한 것이다. 이 책은 『농사직설』ㆍ『금양잡록(衿陽雜錄)』ㆍ『사시찬요초(四時纂要抄)』의 세 농서와 부록으로 『구황촬요(救荒撮要)』가 덧붙어 있는 합편이다. 그러나 각 부분의 내용은 시대에 따른 개수와 보충이 있어 당시로서는 내용과 체재를 갖춘 종합 농서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당본(唐本) 『사시찬요』와 『농가집성』에 들어간 『사시찬요초』를 비교해 보면, 후자가 상당히 한국화 된 내용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피도 적으며, 인용도 우리나라의 풍토에 맞추어 적절히 교정되었고, 우리나라 고유의 기술도 많이 언급되어 있다. 이로써 조선 중기의 농민과 권농관을 위한 전형적인 농업지침서가 이루어진 셈이다.

이 책은 4종의 원본을 그대로 합책한 것이 아니라, 『농사직설』의 내용에도 증보와 개수가 더해져 있다. 예를 들면, 조도앙기(早稻秧: 올벼의 못자리)의 관리법, 잡초 제거와 도열병 처리로서의 화누법(火耨:도열병에 걸린 벼에 불을 질러 태운 뒤에 물을 대어 밑포기에서 다시 새순이 나오기를 기다림), 그리고 목화재배법 등이 보충되어 있다. 『금양잡록』에서는 곡식 작물의 품종 이름이 80여 가지나 나오고, 품종별로 파종기ㆍ성숙기ㆍ적지(適地) 등이 기술되어 있으며, 기후와 지세에 대한 논급도 있다. 『사시찬요초』는 사시순(四時順), 월별, 그리고 24절 별로 각종 전곡(田穀)과 벼의 경종법은 물론 원포작물인 채소류와 농산물, 그리고 많은 약용식물의 재배법이 기재되어 있으나, 곡류 항은 아주 간략화 되어 있다.

즉 이들은 『농사직설』과 『금양잡록』에 주로 실려 있어, 『사시찬요초』에서는 주로 원예작물과 특용작물을 다루고, 양잠ㆍ재수(栽樹) 등에도 상당히 자세한 설명을 첨가하였다. 이로써 『농가집성』의 구성은 균형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는 『구황촬요』는 1554년(명종 9)에 진휼청(賑恤廳)의 인포(印布)로 시작되어 중간을 거듭해 오던 중 『농가집성』에도 『구황보유방』과 아울러 수록되었다. 그 내용은 솔잎을 비롯한 각종 초목의 엽부(葉部)ㆍ피부(皮部)ㆍ근부(根部)ㆍ종자ㆍ종피 등을 가루로 하여, 곡식가루에 섞어, 여러모로 조리해서, 대용식을 만드는 법을 요약하여, 소개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은 우리나라 1653-1655년의 기후가 아주 좋지 않았고, 인구의 증가와 토지활용의 측면에서 외견상 경제가 활성화된 듯 보였지만, 열악한 자연 환경 요인으로 인한 농업생산의 저락으로 관민이 모두 곤궁한 입장에 처해 있었다, 누적된 기근상황은 필연적으로 이 시기 사람들의 건강상태를 지속적으로 악화시켰으며, 결국 22회나 발생한 전염병은 자연재해에 멍든 농업생산의 누적된 부진의 또 다른 표현이었던 셈이다.

그러므로 『농가집성(農家集成)』은 이 시기에 서적이 무척이나 귀하고, 구하기가 어려웠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통설과는 달리 단순히 전기의 농서를 집대성한 농서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시대 상황에 맞추어 신속은 『농가집성』을 편찬하여 조정에 바치었고, 조정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 재인쇄 되어 지방에 반포하였다. 15세기 조선인의 경험이 반영된 농업서적이 17세기에 다시 활용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영조대와 정조대에도 『농가집성』은 조정의 후원 이래 간행되었고, 19세기 초에도 전라도 태인의 방각본(坊刻本) 출판업자인 전이채(田以采)와 박치유(朴致維)에 의해 상업적 이윤을 목적으로 간행되었다. 방각본 『농가집성』이 출현하였다는 것은 이 책에 대한 수요가 그만큼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 한다.

즉 『농가집성』에 수록된 내용을 참고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것을 상업적으로 이용하여 이윤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앞서 전주와 무장에서 『농사직설』 책판을 직접 만들어서, 『농사직설』을 직접 유통시켰던 것처럼 전라도의 출판업자가 『농가집성』의 책판을 제작하여 책을 인쇄하고 판매하였던 것이다.

현재 다른 지역에서는 『방각본 농서(坊刻本農書)』가 발견되지 않았던 점과 비교해 본다면, 이러한 현상은 전라도만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전라도 지역에서 농업서적의 직접적인 간행이 이루어졌던 것은, 이 지역이 곡물의 중요한 생산지이었기 때문에 농업서적에 대한 지속적인 수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농가집성』이 한문으로 쓰인 책이라는 점에서 ‘한문가독층(漢文可讀層)’이라고 할 수 있는 지식인의 농업에 대한 관심이 지속적으로 증대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19세기에 한문으로 된 방각본(坊刻本) 『농가집성』이 출판되었다는 점에서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실학의 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책은 시대를 달리하면서, 중간본들이 제작되었고, 보수와 개수도 가해졌다. 원저와 중간본들 사이에 농업기술의 차이도 나타나는 등 기술변천도 살필 수 있어, 우리나라 농업사 연구에 귀중한 문헌이다. 그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작물의 품종명에서 이두와 한글의 표기가 많이 나와 국어사 연구에도 자료적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

  • 김영진, 『농림수산고문헌비요』,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2.
  • 박근필, 「기후와 농업의 미시분석(1653-1655)을 통해 본 『농가집성』 편찬의 배경」, 『농업사연구』 제4권 제2호, 한국농업사학회, 2005.
  • 이선아ㆍ소순열, 「조선시대 농서의 지역적 간행의 의의 : 『농사직설』과 『농가집성』을 중심으로」, 『농업사연구』 제5권 제1호, 한국농업사학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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