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령청(奴令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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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지방 관아의 관노비들을 관리하던 관서.

개설

노령청은 조선시대 관아에 소속된 관노비들을 관리하던 관서이다. 중앙의 육조(六曹)에 대비되는 지방의 육방(六房)에 소속되었던 아문인 노령청은 노방(奴房), 관노청(官奴廳)으로도 불렸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 초기부터 지방 관아의 조직이 정비되면서 관아에 관노비가 배속되었다. 일반적으로 노비를 공노비와 사노비로 구분할 때, 공노비가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조직 및 역할

관노비는 관아에 배속되어 각종 잡역에 충원되었다. ‘백성들이 겪는 고통으로 족징(族徵)·동징(洞徵)이 있으며, 향청(鄕廳)·작청(作廳)·장청(將廳)·노령청·면임(面任)·이임(里任)의 수렴(收斂)이 서로 다투어 빼앗고, 혹 무단(武斷)과 토호(土豪)들이 따라서 벗겨 먹는다.’ 하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순조실록』 25년 11월 19일), 지방의 육방 관속들의 아문은 그 기능에 따라 장청·작청·향청·노령청 등으로 구분되었으며, 노령청은 관노들을 사역시키던 관서였음을 알 수 있다.

변천

조선후기 지방 읍지(邑誌)류에서 노방(奴房) 또는 관노방(官奴房)으로 파악되며, 건축물의 규모와 인원수가 병기되는 사례가 있다. 강릉 지방의 경우 그 규모는 8칸으로 파악되며, 이 규모는 다른 아문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일 작은 규모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소속된 인원수는 많은 경우에 20여 명 내외로 파악되며, 적은 경우는 10명 내외로 파악된다. 그리고 인원수에 있어서 노(奴)와 비(婢)를 구분하여 파악되거나 통합적으로 파악되기도 하며, 구분하여 파악되는 사례에서는 노의 수가 비의 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았음을 보여 준다.

이렇게 보면 노방의 규모와 소속된 인원의 수효는 지방사회의 읍세에 따라 다양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읍세가 큰 지방에서는 많은 인원수를 수용하기 위해 그 규모도 상대적으로 큰 규모를 가졌던 것으로 이해된다.

참고문헌

  • 이규대, 『조선시기 향촌 사회 연구』, 신구문화사,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