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응방(內鷹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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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궁중 안에서 매의 사육을 담당하던 관서.

개설

내응방은 왕에게 직속되어 궁궐 내에서 매의 사육을 담당하던 관서였다. 관상용 이외에도 종묘(宗廟)나 중국의 요구에 응해 진상하기 위한 매의 사육도 담당하였다. 조선전기에 설치와 폐지를 반복하였으며, 연산군 때에 최고의 전성기를 맞기도 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응방(鷹坊) 의 설치는 이미 고려 후기 원나라와의 외교 관계 속에서 설치되었다. 그러다가 일시적으로 폐지되고 고려 말에 다시 설치되었다. 이로 인해 매의 사육이 성행하면서 조선에서도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응방을 설치하였는데, 내응방은 특별히 왕 직속으로 설치된 것이다. 내응방은 매의 사육을 주로 담당했는데, 그 용도는 관상용인 경우와 함께 중국 조정의 요구(『문종실록』 1년 11월 4일)나 종묘 등에 진상하기 위한 경우 등이 있었다.

조직 및 역할

내응방은 내시와 별감, 그리고 응인(鷹人)인 시파치(時波赤)로 구성되었다. 내시부 소속의 내시나 액정서 소속의 별감이 차출되어 내응방을 관리·감독하였다. 실제적인 매의 사육이나 조련 등은 시파치 등이 담당하였다. 시파치는 매사냥을 보려고 왕이 거둥할 때 언제나 왕의 수레를 따랐기에 상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부역도 면제되었다(『세종실록』 2년 10월 29일). 내응방의 경비는 위전(位田)을 절급받아 충당하였고, 사역을 위해 노비가 배속되었다.

변천

내응방은 중국에서 매의 진상 요구가 없어지면서 혁파 논의가 제기되다가(『문종실록』 1년 11월 4일) 1460년(세조 6) 10월에 혁파되었다(『세조실록』 6년 10월 28일). 이후 1467년에 다시 내응방에 대한 기사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그 사이에 다시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세조실록』 13년 12월 19일).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응방이 좌·우로 나뉘기도 하였으나 1467년 4월에 좌·우로 나뉜 제도를 폐지하고 내응방으로 다시 통합하였다(『세조실록』 13년 4월 1일). 이후 성종 연간에 일시적 혁파되기도 하였으나 곧 다시 설치되어 다시 좌·우로 나뉘었으며 이전 시기에 비해서 인원이 축소되었다.

연산군 때에 이르러 응방이 확장되면서 좌·우응방을 개수(改修)하고 군사 100여 명을 분속시켰으며 광흥창(廣興倉)에서 양미(粮米)를 지급하도록 하고 창덕궁에도 새롭게 응방을 만들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 5년 2월 21일). 내응방은 중종반정 이후에도 폐지되지 않고 존속하였다.

참고문헌

  • 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 東洋文庫, 19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