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준(金濟俊)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796년(정조 20)~1839년(헌종 5) = 44세]. 조선 후기 순조(純祖)~정조(正祖) 때의 천주교도로, <기해박해(己亥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이냐시오.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거주지는 충청남도 면천과 경기도 용인이다. 아버지는 김택현(金澤鉉)이며, 할아버지는 면천군수(沔川郡守)를 지낸 김진후(金震厚)이다. 한국인 최초의 신부 김대건(金大建)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순조~헌종 시대 활동

충청남도 면천에서 태어난 김제준(金濟俊)은 할아버지 김진후와 큰아버지 김종한(金宗漢)의 권면으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할아버지 김진후가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10여 년 간 감옥살이 끝에 1814년(순조 14) 사망하고 큰아버지 김종한 또한 1815년(순조 15) 경상도와 강원도의 천주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을해박해(乙亥迫害)> 당시 사망하면서, 더 이상 박해를 피할 길이 없게 되었다. 이에 1827년(순조 27) 아버지 김택현과 함께 서울 청파를 거쳐 경기도 용인으로 이주하여 살며 신앙생활을 이어 나갔다.[『기해일기(己亥日記)』] 용인 골배마실에 정착한 김제준은 조선 선교를 위해 입국한 프랑스인 모방(Maubant)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837년(헌종 3)에는 아들 김대건을 마카오신학교로 보내 신부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게 하였다.

1839년(헌종 5) 7월 사위 곽씨(郭氏)를 앞세운 김순성(金順性)의 밀고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김제준은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아 잠시 배교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배교를 취소하고 끝까지 천주교 신앙을 지켰다. 그런 가운데 그는 사술에 미혹되어 아들을 외국으로 무단출국 시켰다는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그해 8월 19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사망하였다.(『헌종실록』 5년 8월 19일),[『승정원일기』헌종 5년 8월 19일],[『승정원일기』헌종 5년 8월 19일]

1925년 7월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복(諡福)되어 복자가 되었으며,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어 성인 반열에 올랐다.

참고문헌

  • 『헌종실록(憲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 『일성록(日省錄)』
  • 『기해일기(己亥日記)』
  •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2,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