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헌(金尙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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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0년(선조 3)∼1652년(효종 3) =83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효종(孝宗) 때의 문신. 좌의정 등을 지냈다. 자는 숙도(叔度)이고, 호는 청음(淸陰), 또는 석실산인(石室山人), 서간노인(西磵老人)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거주지는 서울의 장동(壯洞) 청풍계(淸風溪)와 경기도 양주(楊州) 덕소리(德沼里) 석실(石室)이다. 양아버지는 현감(縣監)김대효(金大孝)이고, 친아버지는 돈녕부(敦寧府) 도정(都正)김극효(克孝)이다. 양어머니는 광주 이씨(廣州李氏)는 이영현(李英賢)의 딸이고, 친어머니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좌의정정유길(鄭惟吉)의 딸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평양부서윤(平壤府庶尹)김번(金璠)이며, 할아버지는 신천군수(信川郡守)김생해(金生海)이다. 우의정김상용(金尙容)의 동생이자 영의정김수흥(金壽興)·김수항(金壽恒) 형제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고, 신흠(申欽)·이정구(李廷龜)·유근(柳根)·홍서봉(洪瑞鳳)·이안눌(李安訥)·조희일(趙希逸)·장유(張維) 등과 교유하였다.

선조 시대 활동

1590년(선조 23) 가을,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1세였다. 성균관에 들어가서 공부하다가, 1592년(선조 25) 23세 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홀로 된 양어머니를 모시고 강원도로 피난하였다가, 그해 겨울에 강화도를 거쳐 충청도 서산(瑞山)으로 옮겨 갔다. 이때 세 살 된 외아들 김종경(金宗慶)이 병으로 요절하였다. 1596년(선조 29) 겨울,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7세였다. 처음에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다가, 1598년(선조 31) 홍문관(弘文館) 저작(著作)이 되었다. 1600년(선조 33) 성균관 박사(博士)가 되었다가 통례원(通禮院) 인의(引儀)를 거쳐 그해 2월에는 예조 좌랑(左郞), 12월에는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이 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고,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 33년 2월 20일 4번째기록],[『선조실록』 33년 12월 14일 5번째기록],(『선조실록』 33년 12월 29일) 1601년(선조 34) 1월 이조 좌랑이 되었고, 그해 5월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가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었으며, 8월에는 제주도에서 작은 소요(騷擾) 사건이 일어나자 안무어사(按撫御史)가 되어 제주도 백성들을 위무(慰撫)하였다.[『선조실록』 34년 5월 3일 2번째기록],[『선조실록』 34년 8월 1일 3번째기록] 1602년(선조 35) 1월 예조 정랑이 되었다가 그해 윤2월 함경도의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이 되었는데, 찰방으로서 향시(鄕試)의 고시관이 되어 함경도 홍원(洪原)·북청(北靑) 등지에서 향시를 시행하였다.[『선조실록』 35년 윤2월 13일 2번째기록]

1602년(선조 35) 선조가 젊은 인목왕후(仁穆王后)를 계비(繼妃)로 맞아들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자, 선조는 서자 광해군 대신 적자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으려고 하였다. 이를 계기로 북인(北人)이 소북(小北)과 대북(大北)으로 나누어졌는데, 선조 말기에 선조의 뜻을 받들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던 소북의 유영경(柳永慶)이 정권을 잡으면서 세자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의 정인홍(鄭仁弘) 등은 조정에서 쫓겨났다. 이때 영의정유영경은 광해군의 처가와 인척 관계에 있던 김상용·김상헌 형제도 탄압하면서 김상현은 1603년(선조 36) 고산도찰방에서 파직되어 장동(壯洞)의 집으로 돌아왔다. 1605년(선조 38) 8월 함경도의 경성판관(鏡城判官)이 되었으나, 이듬해 소북에 의하여 다시 파직되었다.[『선조실록』 38년 8월 7일 4번째기록] 1607년(선조 40) 윤6월 개성부경력(開城府經歷)이 되었으며,[『선조실록』 40년 윤6월 1일 4번째기록] 아직 아들이 없었으므로 둘째형 김상관(金尙寬)의 둘째아들 김광찬(金光燦)을 양자로 삼았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08년(광해군 즉위년) 2월 광해군이 즉위하자, 성균관 직강(直講)에 임명되었다. 그해 겨울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사도시(司導寺) 정(正)이 되었고, 그해 11월 이이첨(李爾瞻)·홍서봉(洪瑞鳳)·목대흠(睦大欽)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에 뽑혀 책을 읽었다.[『광해군일기』 즉위년 11월 6일 3번째기록] 1609년(광해군 1) 1월 의정부 검상(檢詳)이 되었는데, 명(明)나라 황제가 칙사(勅使) 웅화(熊化)를 보내 세상을 떠난 선조에게 사제(賜祭)할 때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이 되어 의주(義州)까지 가서 칙사를 마중하고 안내하였다.[『광해군일기』 1년 1월 22일 2번째기록] 그해 7월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가, 8월 사간원 사간(司諫)을 거쳐 홍문관 부응교(副應敎)가 되었다.[『광해군일기』 1년 7월 3일 2번째기록],[『광해군일기』 1년 8월 30일 2번째기록] 사간원 사간이 되었을 당시 광해군의 처남 유희량(柳希亮)이 사간원 정언으로 있었는데, 두 사람은 이종 4촌간으로 상피(相避) 관계에 있다고 하여 곧 홍문관 부응교로 옮겼다. 그러나 이조에서 결론을 내리기를, ‘김상헌이 양자로 갔기 때문에 두 사람은 상피 관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광해군일기』 2년 11월 2일 3번째기록]

1610년(광해군 2) 7월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었다. 그 뒤에 종부시(宗簿寺) 정이 되었다가 홍문관 전한(典翰)을 거쳐,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하였다. 1611년(광해군 3) 3월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다. 그때 정권을 잡은 대북의 정인홍이 회재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을 무고하며 헐뜯자, 김상헌이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오윤겸(吳允謙)과 함께 상소하여 정인홍을 공격하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서 파면되었다. 정인홍은 이언적과 이황을 헐뜯고 깎아내려서, 그의 스승 조식(曹植)을 문묘(文廟)에 모시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해 5월 김상헌은 승문원 부제조(副提調)가 되었다가, 6월에 광주목사(廣州牧使)로 나갔다.(『광해군일기』 3년 6월 23일) 그러나 1612년(광해군 4) 봄 대북의 정인홍·이이첨의 탄압을 받고 광주목사에서 파직되어 집으로 돌아왔다.[『광해군일기』 4년 3월 12일 2번째기록] 이어 그해 여름 호군(護軍)이 되었다가, 겨울에는 황해도연안부사(延安府使)로 좌천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여름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서 영창대군(永昌大君)과 그 외할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죽었는데, 양아들 김광찬(金光燦)이 김제남의 손녀와 혼인을 하였으므로 김상헌·김광찬 부자도 옥사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광해군일기』 5년 6월 21일 15번째기록] 이때 문외(門外) 출송(黜送)을 당하면서 김상헌은 가족을 이끌고 경상도 안동(安東)의 풍산(豊山)으로 내려가 한동안 우거(寓居)하였다.[『광해군일기』 5년 8월 13일 4번째기록] 1615년(광해군 7)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의 추천으로 호군이 되었고, 그해 8월 광해군의 명을 받아 명나라 황태자에게 사은(謝恩)하는 전문(箋文)을 지었다. 당시 광해군의 생모 김공빈(金恭嬪)에 대한 추숭을 명나라에서 허락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북의 정인홍 등은 전문의 내용이 시의(時議)에 어긋나고 또 기휘(忌諱)하는 글자를 사용하였다고 공격하여, 마침내 김상헌의 관직을 삭탈하였다. 이때부터 김상헌은 조정에서 쫓겨나 낭인(浪人) 생활을 하였다.

1617년(광해군 9) 이항복(李恒福)이 인목대비의 폐출을 반대하다가 유배당하여 먼 길을 떠날 때 만나 서로 나눈 정담을 기록한 『양산야인담록(楊山野人談錄)』을 지었다. 1618년(광해군 10) 2월 친아버지 김극효의 상을 당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49세였다. 상중에 있으면서 『독례수초(讀禮隨鈔)』를 지었는데, 『예기(禮記)』를 읽고 문제가 되는 점을 글로 적은 것이다. 이후 양어머니를 모시고 다시 경상도 안동 풍산으로 내려가서 우거하였다. 1620년(광해군 12) 친구 권태일(權泰一)에게 보낸 편지에서 안동의 ‘3태사묘(三太師廟)’에 안동 김씨·안동 권씨(安東權氏)·안동 장씨(安東張氏)의 시조 3형제를 함께 제사 드리는 의식을 논의하였다. 1621년(광해군 13) 봄 양주로 돌아왔는데, 그해 5월 둘째형 김상관이 세상을 떠나고, 11월에는 친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그리고 1622년(광해군 14) 2월에는 양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53세였다. 광해군 말기에 생가(生家)의 부모 형제와 양가의 모친 상(喪)을 연달아 당하였던 것이다.

인조 전반기 활동

1623년(인조 1)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났다. 그해 겨울 상중에 있던 김상헌은 반정을 주도한 대장 김류(金瑬)에게 편지를 보내어 시사(時事)를 논하였다. 당시 정권을 잡은 서인은 반정(反正)에 참여한 김류·최명길(崔鳴吉) 등의 공서(功西)와 반정에 참여하지 않는 김상용·김상헌 등의 청서(淸西)로 나누어졌는데, 김상헌이 청서파의 시국에 대한 견해를 공서파에 전달한 것이다.

1624년(인조 2) 2월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는 공주(公州)로 피난하였다. 반란이 곧 평정되고 이괄이 옹립하려던 흥안군(興安君)은 처형되었으나, 반란에 동조한 혐의를 받던 인성군(仁城君)의 처형 문제를 둘러싸고 서인은 과격파와 온건파로 나누어졌다. 그해 4월 김상헌은 이조 참의(參議)에 임명되었고, 5월 승문원 부제조(副提調)를 거쳐 6월에 다시 이조 참의가 되었다. 그해 8월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으로 승진하여 인조에게 나라의 ‘8가지 조짐[八漸]’을 조심하라고 건의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간절했다.[『인조실록』 2년 8월 28일 2번째기록] ‘8가지 조짐’ 가운데 하나를 보면, “모든 장리(贓吏 : 뇌물 받는 관리)의 옥사를 가볍게 처리하지 말고, 당사자를 법대로 엄하게 다스리며, 그 자손의 벼슬길을 막으면, 탐관오리가 나타나는 조짐이 없어질 것입니다” 하였다.[『인조실록』 2년 9월 13일 5번째기록] 그해 11월 예조 참의·이조 참의를 거쳐 12월에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다가 형조 참의가 되었다.[『인조실록』 2년 11월 12일 2번째기록],[『인조실록』 2년 11월 20일 2번째기록].[『인조실록』 2년 12월 22일 6번째기록]

1625년(인조 3) 1월 다시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으며, 그해 2월 이조 참의가 되었는데, 인조에게 상소하여 시폐(時弊)를 논하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면직되었다.[『인조실록』 3년 1월 13일 4번째기록],[『인조실록』 3년 2월 4일 1번째기록],[『인조실록』 3년 2월 9일 1번째기록] 그해 4월 다시 형조 참의가 되었다가 승정원 우부승지를 거쳐 승정원 도승지(都承旨)로 영전되었다. 명나라 조사(詔使)가 나오자, 벽제(碧蹄)까지 나가서 마중하였다. 이어 그해 7월 병조 참판(參判)이 되었다가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이괄의 난 때 반군의 공초(供招)에 많이 나왔던 인성군의 죄를 탄핵하였으나, 인조가 인성군을 보호하였다.[『인조실록』 3년 7월 29일 2번째기록] 그해 10월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으로 옮겼는데, 목성선(睦性善)·유석(柳碩) 등이 인성군의 처형을 주장하면서 전임 사헌부 대사헌김상헌이 인성군의 탄핵에 소극적이었다고 비난하자, 김상헌에 차자(箚子)를 올려 관직을 사임하고 석실로 돌아가서 은거하였다.(『인조실록』 3년 10월 24일)

1626년(인조 4) 5월 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에 임명된 후 성절사(聖節使)로서 사은사(謝恩使)를 겸임하며 서울을 출발하여 해로(海路)를 거쳐 그해 10월 명나라 북경(北京)의 옥하관(玉河館)에 도착하였다.[『인조실록』 4년 5월 28일 6번째기록],[『인조실록』 4년 윤6월 18일 1번째기록] 이어 명나라 예부와 병부에 정문(呈文)하여 제독(提督)모문룡(毛文龍)이 평안도 가도(椵島)를 점거하고 조선에 막대한 군량미를 요구하고 있으며, 조선이 후금(後金)과 내통한다고 명나라에 무고(誣告)한 것은 허위 날조한 것이라고 해명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명나라에 대한 우호 관계는 변함이 없다고 역설하자, 명나라 희종(熹宗)이 “배신(陪臣) 김상헌 등의 충성이 지극히 가상하다”고 칭찬하였다.(『인조실록』 5년 5월 6일)

1627년(인조 5) 3월 명나라 북경에 있을 때 조선에서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명나라 병부에 정문하여 원군(援軍)을 보내주도록 간청하였다.[『인조실록』 5년 5월 6일 1번째기록] 그리고 그해 5월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며, 서울로 돌아와서는 차자를 올려 후금의 사신을 빨리 돌려보내고 명나라와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청하였다.[『인조실록』 5년 5월 16일 4번째기록] 그해 7월 다시 승정원 도승지가 되었다가 9월에 다시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고, 그해 11월 다시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인조실록』 5년 7월 5일 7번째기록] 1628년(인조 6) 1월 <유효립(柳孝立) 모반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유효립은 인성군을 옹립하려고 하였으므로, 목성선·유석의 소서(少西) 일당은 다시 인성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에 김상헌은 인성군을 보호하려고 목성선 일당을 비판하였는데, 인조가 노서(老西)와 소서가 당파싸움을 벌리는 것이라고 의심하였으므로 김상헌은 관직을 사임하였다. 그해 5월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다시 승정원 도승지로 영전되었다가 7월에 형조 판서(判書)에 임명되었고, 그해 11월에는 다시 사헌부 대사헌을 거쳐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으로 승진하였으며, 다시 승정원 도승지가 되었다.[『인조실록』 6년 5월 2일 3번째기록],[『인조실록』 6년 7월 26일 1번째기록],[『인조실록』 6년 11월 16일 2번째기록]

1629년(인조 7) 2월 승정원 도승지로서 홍문관 제학(提學)을 겸임하였는데, 그해 3월 격무로 인하여 병이 나자 승정원 도승지에서 물러났다. 그해 윤4월 부호군(副護軍)이 되어 차자를 올려서 시폐(時弊)를 상소하고, 군사를 양성할 것을 주장하였다.(『인조실록』 7년 윤4월 20일) 이어 5월에 다시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가 그해 8월 의정부 우참찬이 되어 홍문관 제학을 겸임하였다. 그해 10월 사헌부 대사헌이 되어 목성선 일당의 죄를 다시 비판하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서 인피(引避)하였다.[『인조실록』 7년 10월 21일 2번째기록],[『인조실록』 7년 11월 21일 1번째기록] 1630년(인조 8) 6월 중추부 지사(知事)가 되었다가 7월 홍문관 제학이 되었으며, 그해 12월 예조 판서가 되어 홍문관 제학을 겸임하였다.(『인조실록』 8년 12월 4일)

1631년(인조 9) 3월 함경도 영흥부(永興府)에 가서 태조(太祖)의 선원전(濬源殿)을 봉심(奉審)하고 돌아왔고, 그해 11월 다시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인조실록』 9년 3월 7일 1번째기록],[『인조실록』 9년 11월 17일 1번째기록] 1632년(인조 10) 2월 서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조가 그의 생부 정원군(定遠君)을 추숭하고 부묘(祔廟)하는 예를 행하자, 사헌부 대사헌김상헌이 인조에게 차자를 올려 임금이 자기 사친(私親)을 높이는 것은 예가 아니라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인조는 선조의 서출 제 5왕자 정원군의 아들인데, 아버지를 원종(元宗)으로 높이고 그 신위(神位)를 종묘에 모시려고 하였다. 그해 5월 김상헌은 다시 사헌부 대사헌이 되어 정원군 추숭에 적극 찬성한 이조 판서이귀(李貴)를 논핵하였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서 면직되어 석실로 돌아왔다.[『인조실록』 10년 5월 8일 3번째기록],[『인조실록』 10년 5월 21일 1번째기록] 이때부터 3년 동안 김상헌은 모든 벼슬을 사양하고 석실에 은거하였다. 이런 가운데 인열왕후(仁烈王后)가 세상을 떠나자 어명을 받고 애책문(哀冊文)을 지었는데, 이때 김상헌은 “인열왕후를 염습(殮襲)할 때 쓰는 물품을 상의원(尙衣院)에서 가져다가 쓰고, 일체 장사치들의 물건을 쓰지 못하도록 하소서” 하니, 인조가 그대로 따랐다.

1633년(인조 11) 5월부터 1634년(인조 13)까지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 사헌부 대사헌과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등에 거듭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인조실록』 11년 5월 22일 1번째기록],[『인조실록』 11년 11월 13일 2번째기록],[『인조실록』 13년 6월 7일 1번째기록] 김상헌은 정원군의 추숭을 반대하였으나, 인조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원종으로 추숭하였기 때문이었다.

인조 후반기 활동

1636년(인조 14) 1월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고, 그해 2월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되어 다시 예조 판서가 되었다.[『인조실록』 14년 1월 12일 1번째기록],[『인조실록』 14년 2월 21일 2번째기록] 당시 국호를 ‘후금’에서 ‘대청(大淸)’으로 바꾼 청나라 태종(太宗)홍타지는 스스로 ‘황제(皇帝)’라고 일컫고 용골대(龍骨大)·마부태(馬夫太)를 조선에 사신으로 보내 인조에게 칭신(稱臣)할 것과 명나라 연호 대신 청나라 연호를 쓰도록 강요하였다. 이때 오랑캐를 방어할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였음에도 조정의 상하 관리들 및 백성들이 모두 격분하여 청나라 사신의 목을 베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예조 판서김상헌은 자기를 책망하는 글을 지어 올리고, 평안도 지방에 진(鎭)·보(堡)를 보강 설치하며 군사를 증강 배치하도록 건의하였다. 이것을 보고 인조는 김상헌에게 임금이 자기를 책망하는 「죄기교서(罪己敎書)」를 짓게 하여 이를 반포하고, 전국 8도에 오랑캐와 싸움을 선포하는 「선전유문(宣戰諭文)」을 내리며 청나라와 싸울 준비를 하였다.

그해 5월 김상헌이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며 염정(廉正)하고 근면하다고 하여 특별히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품되었다. 그러나 그해 8월 정원군의 추숭에 적극 찬성한 이조 참판유백증(兪伯曾)의 죄를 논하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서 면직되어 석실로 돌아온 후 자신의 시문 초고를 정리하여, 『청음초고(淸陰草稿)』를 편찬하고 스스로 서문[自敍]을 지었다.[『인조실록』 14년 8월 4일 3번째기록] 그해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다. 강화도로 파난 가려던 인조는 길이 막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고, 이에 김상헌도 인조의 어가(御駕)를 쫓아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남한산성이 오랑캐 군사에게 포위되면서 45일 동안 공방전이 벌어졌는데, 싸움이 길어지자 청나라 태종홍타지의 강화 조건을 받아들여 화해하자는 주화파(主和派)와 이를 반대하고 끝까지 오랑캐와 싸우자는 척화파(斥和派)가 격렬하게 논쟁을 벌였다.[『인조실록』 15년 1월 2일 1번째기록]

당시 주화파의 우두머리는 예조 판서최명길이었고, 척화파의 우두머리는 이조 판서김상헌이었다. 점차 오랑캐와 싸움이 길어지고 희생자가 늘어나면서 영의정김류 등 많은 대신과 관료들은 주화파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이조 참판정온(鄭蘊)과 사간원 대사간윤황(尹煌) 등은 김상헌을 지지하며 주화론을 반대하였다. 그런 가운데 영의정김류가 청나라 태종을 만나 강화 회담을 열었는데, 청 태종은 왕세자를 청나라에 질자(質子)로 보내라고 요구하였다. 이조 판서김상헌은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절대로 청나라에 보낼 수 없다고 반대하였으나, 인조는 주화파의 최명길을 이조 판서에 임명하며 주화파에 힘을 실어주었다. 1637년(인조 15) 1월 주화파의 이조 판서최명길과 영의정김류가 청나라 태종과 강화 회담을 열고 돌아온 후 의정부에서 강화 문제를 논의할 때 당시 예조 판서였던 김상헌은 최명길이 지은 항복 국서(國書)를 찢어버리고, 인조에게 입대(入對)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끝까지 남한산성을 고수하고 오랑캐와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해 1월 22일 강화도가 오랑캐 군사에게 함락되어, 왕자와 비빈(妃嬪)이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인조는 마침내 항복할 결심을 하였다. 그리고 1월 30일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내려온 후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하고, 곧바로 서울의 궁궐로 돌아왔다. 남한산성의 포위가 풀렸을 때 김상헌은 인조를 따라 궁궐로 가지 않고 바로 석실로 돌아왔다. 그때 맏형 김상용이 강화도 함락 당시 화약 상자를 폭발시키고 스스로 뛰어들어 순절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인조실록』 15년 1월 22일 9번째기록] 이후 김상헌은 경상도 안동 풍산으로 내려가서 학가산(鶴駕山) 서미동(西美洞)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4월 남한산성에 호종(扈從)한 공로를 포상하여 그를 종1품상 숭록대부(崇祿大夫)로 가자하였으나, 김상헌은 관작(官爵)을 일체 사양하며 사은하지 않았다.[『인조실록』 15년 5월 28일 2번째기록]

1638년(인조 16) 안동에서 『풍악문답(豐岳問答)』을 지었다. 그해 가을 유석 등이 그가 대궐에 나와 임금에게 문안하지 않는 죄를 들어 극변(極邊)에 유배하도록 청하였고, 김상헌은 고향에서 대명(待命)하다가 관직 파면과 관작 삭탈을 당하였다. 1639년(인조 17) 70세가 되어 치사(致仕)할 때가 되자, 그해 10월 인조는 직첩(職牒)을 돌려주고 김상헌을 서용(敍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인조실록』 17년 12월 26일 1번째기록] 1640년(인조 18) 11월 청나라에서 명나라를 정벌하는 데에 필요한 군사를 조선에 요구하자 김상헌은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격분한 청나라 태종홍타지는 차사(差使)를 의주까지 보내 김상헌을 잡아서 청나라로 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김상헌은 조정의 명령을 받고 청나라 심양(瀋陽)으로 압송되었는데, 그때 나이가 71세였다.

1641년(인조 19) 청나라 심양의 북관(北館)에 구류되었는데, 청나라 태종의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지조를 지켰다. 그해 11월 부인 이씨(李氏)가 안동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12월에 부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김상헌의 병은 더욱 악화되었다. 청나라에서 위독한 김상헌을 조선의 의주로 급히 보내 치료하게 하면서, 1642년(인조 20) 1월 김상헌은 의주에 도착한 후 감옥에 구류된 채 병을 치료하였다.[『인조실록』 20년 1월 6일 1번째기록] 이때 김상헌은 병든 몸을 이끌고 인조에게 상소하여 자기의 심경을 토로하였으며, 또 심양의 질자관(質子館)에 잡혀 있는 소현세자에게 상서(上書)하여 용기를 잃지 않도록 격려하였다. 1643년(인조 21) 1월 몸이 조금 회복되자 승정원 도승지신득연(申得淵)의 무함과 선천부사(宣川府使)이계(李烓)의 밀고를 받고 청나라에서 김상헌을 다시 심양으로 잡아갔다.[『인조실록』 21년 1월 23일 2번째기록] 처음에는 심양의 동관(東館)에 가두었다가 다시 북관(北館)을 거쳐 그해 4월 남관(南館)으로 옮겼는데, 소현세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머물던 질자관과 가까웠으므로 질자관에서 음식을 마련하여 남관의 김상헌에게 제공하였다.[『인조실록』 21년 2월 11일 1번째기록]

1644년(인조 22) 청나라는 중국 본토를 완전히 정복하고 서울을 심양에서 북경으로 옮기며 연경(燕京)이라고 불렀다. 소현세자 내외와 봉림대군 내외는 물론 질자관의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관원들도 모두 북경으로 옮겨갔으나, 75세의 김상헌은 세자 일행을 따라 새 수도 연경으로 가지 못하고 남관에 그대로 구류되었다.[『인조실록』 22년 9월 6일 2번째기록] 이후 중국 천하를 완전히 통일하였으므로, 조선의 세자와 김상헌 등을 청나라에 포로로 잡아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섭정왕(攝政王) 돌곤은 1645년(인조 23) 2월 소현세자를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이때 김상헌 등도 6년 동안의 청나라 감옥 생활을 마치고 석방되어 세자 일행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인조실록』 22년 12월 4일 2번째기록],[『인조실록』 23년 2월 23일 2번째기록] 그리고 1646년(인조 24) 3월 인조는 김상헌을 좌의정(左議政)에 임명하였으나, 김상헌은 77세가 되는 바람에 늙어서 정사를 볼 수 없다고 핑계를 대고 32차례나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다.[『인조실록』 24년 3월 27일 1번째기록],[『인조실록』 24년 4월 2일 5번째기록] 이에 인조는 마지못하여 좌의정을 면직하고, 한직인 돈녕부 영사(領事)에 임명하였다.

효종 시대 활동

1649년(효종 즉위년) 5월 인조가 세상을 떠나고, 효종이 즉위하였다. 얼마 후 효종은 승정원 승지를 석실로 보내 김상헌을 돈독하게 유시(諭示)하니, 80세의 김상헌이 입궐하여 사은(謝恩)하였고, 이때 젊은 효종은 늙은 김상헌에게 정사를 도와달라고 간청하였다.[『효종실록』 즉위년 5월 14일 3번째기록] 그리고 그해 8월 효종은 김상헌을 좌의정에 임명하였다.[『효종실록』 즉위년 8월 4일 1번째기록] 그러나 김상헌이 11차례나 상소하여 이를 사양하자, 효종은 마지못하여 좌의정에서 면직하여 돈녕부 영사에 임명하였다. 그해 11월 김상헌은 차자를 올려 훌륭한 인재를 등용할 것을 진언(進言)하고, 사헌부 대사헌김집(金集)을 조정에 머물게 하여 장차 크게 쓰도록 청탁하였다. 김집은 김장생(金長生)의 아들로서, 고향인 충청도 연산(連山)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후진을 양성하겠다고 거듭 벼슬을 사임하였기 때문이다. 효종은 김상헌의 특별 청탁을 받아들여 김집을 이조 판서에 임명하였다.(『효종실록』 즉위년 11월 10일)

1650년(효종 1) 1월 김상헌은 효종에게 오랑캐의 세상을 물리치고 중화(中華)의 문화를 다시 회복하도록 상소하였다.[『효종실록』 1년 1월 4일 2번째기록] 효종은 봉림대군 시절 김상헌과 함께 청나라에게 사로잡혀 온갖 수모를 겪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반드시 청나라를 쳐야 한다는 공감을 하였던 것이다. 그 뒤에도 김상헌은 여러 차례 상소하여 북벌(北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피력하였다. 그리고 1651년(효종 2) 5월 인조의 대상(大祥)에 나아가서 문상(問喪)하고, 효종에게 상소하여 벼슬을 사직하고 석실로 돌아왔다. 1652년(효종 3) 6월 25일 노병으로 양주의 석실 별장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83세였다. 그는 효종에게 유소(遺疏)를 통해 나라를 잘 다스려서 오랑캐를 물리치고 새로운 세상을 열도록 부탁하였다.(『효종실록』 3년 6월 25일) 이에 효종은 이조 판서 김집과 함께 북벌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후 김집은 나이가 많다며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가면서 자신의 제자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추천하였다. 이에 송시열과 송준길 등이 실제로 북벌 계획을 추진하였는데, 당시 이들은 김상헌을 그들의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김상헌의 문장은 간엄(簡嚴)하고 시는 전아(典雅)하였다. 그의 문집으로는 『청음집(淸陰集)』 40권 16책이 있다.(『효종실록』 3년 6월 25일)

척화파와 주화파의 싸움

1632년(인조 10) 후금의 칸[임금] 홍타지는 만주 전역을 점령하고 요동(遼東)에서 명나라를 공격하면서, 먼저 조선을 쳐서 그 배후 세력을 없애려고 계획하였다 이에 후금은 조선과의 관계를 ‘형제의 나라’에서 ‘군신의 나라’로 바꾸고, 막대한 세폐와 정병 3만 명을 요구하였는데, 이것은 조선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1636년(인조 14) 2월 국호를 ‘후금’에서 ‘대청’으로 바꾼 홍타지는 스스로 ‘황제’라고 일컫고, 용골대·마부태 등을 조선에 사신으로 보내 인조에게 칭신을 강요하였다. 이에 인조는 청나라 사신의 접견마저 거절하고, 8도에 선전 유문을 내리며 청나라와 싸울 결심을 하였다. 이때 집권한 서인은 명분론(名分論)을 중시하며 척화론을 주장하였고, 일반 사림(士林)의 여론도 청나라 사신의 목을 베라고 요구할 정도로 들끓었다.

1637년(인조 14) 겨울 청나라 태종홍타지는 8기병(八旗兵) 12만 명을 직접 거느리고 조선을 대대적으로 침입하였다. 오랑캐 군사는 압록강을 건넌 지 5일 만에 곧장 서울 근교로 육박해 왔다. 중국 본토를 정복하려는 야망에 불타던 청나라 태종홍타지는 조선을 점령하는 것보다 조선의 항복을 받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조선 군사와의 싸움을 피하며 곧바로 서울로 직행하였다. 이것이 바로 병자호란이다.

인조는 정묘호란 때처럼 강화도로 피난을 가기로 결정하고, 급히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김경징(金慶徵)을 강화도검찰사(江華島檢察使)로, 이조 참판이민구(李敏求)를 부검찰사로, 심기원(沈器遠)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각각 임명하여, 강화도와 서울을 수비하게 하였다. 또 인조는 정묘호란 때처럼 소현세자에게 분조(分朝)를 거느리고 전주(全州)로 내려가게 하였고, 봉림대군은 비빈과 왕자 및 종실들을 인솔하여 먼저 강화도로 피난하게 하였다. 그때 인조는 원임대신 김상용과 윤방(尹昉)에게 종묘사직의 신주(神主) 40여 기를 받들고 강화도로 가서, 비변사(備邊司)의 분사(分司)를 강화도에 설치하고, 원임대신들이 검찰사를 지휘하게 하였다.12월 14일 오후 인조가 강화도로 향하려는데, 척후병이 달려와서 “적이 강화도로 가는 길을 끊었습니다”라고 하였으므로, 인조 일행은 어쩔 수 없이 적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때 석실의 별장에 은거하고 있던 김상헌은 황급히 여장을 꾸려서 인조의 어가를 뒤쫓아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훈련대장신경진(申景禛)은 남한산성에 들어온 1만 3천여 명의 군사를 나누어 성벽을 지키게 하고, 45일 동안 청나라 오랑캐 군사와 공방전을 벌였다. 그런 가운데 청나라 마부태가 이끄는 선봉 부대가 남한산성을 완전히 포위하였고, 1637년(인조 15) 1월 1일 청나라 태종이 남한산성 아래 탄천(炭川)에 군영을 차린 후 12만 명의 오랑캐 군사를 총동원하여 남한산성을 밤낮으로 공격하였다. 또한 용골대로 하여금 통역관 정명수(鄭命壽)·김돌이(金突伊) 등을 데리고 남한산성 안으로 들어가서 조선에게 강화 조건을 제시하고 빨리 항복하도록 종용하였다. 이때 이조 판서에 임명된 김상헌은 오랑캐와의 강화를 적극 반대하고 상하가 한 마음으로 뭉쳐서 끝까지 남한산성을 지키면 반드시 각도의 근왕병(勤王兵)이 구원하러 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예조 판서최명길은 싸움의 희생자를 줄이고 종묘사직을 구하는 길은 청나라와 화해하는 것 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주화파의 우두머리는 예조 판서최명길이었고, 척화파의 우두머리는 이조 판서김상헌이었다. 처음에는 다수가 척화파를 지지하였으나, 싸움이 오래 가고 희생자가 늘어나면서 영의정김류 등의 대신들과 신경진 등의 무장들이 주화파를 지지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조 참판정온과 대사간윤황(尹煌) 등은 김상헌을 굳건히 지지하고 주화론을 반대하였다.

1월 16일 의정부에서 대신들이 모여서 청나라와 강화하는 국서의 글을 심의하였는데, 김상헌은 그 글을 읽다가 격분하여, “여러분은 차마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하고, 그 글을 찢어 버렸다. 곧바로 장전(帳殿)으로 달려가서 인조에게 청대(請對)한 김상헌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오늘의 의론은 양립할 수 없으니, 청컨대 소신을 먼저 죽여 주소서” 하였다. 인조가 만류하면서 “경은 어찌하여 이러는가. 내 한 몸을 위한 계책이 아니다. 위로는 종묘사직을 위한 것이고, 아래로는 차마 온 겨레를 멸망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하니, 김상헌이 “이제 만약 상하가 한 마음으로 뭉쳐서 남한산성을 지키겠다고 맹세한다면, 전하를 위하여 죽으려고 달려올 자가 어찌 없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김상헌은 마침내 스스로 죽을 결심을 하고 6일 동안 굶었으며, 또 빨리 죽으려고 스스로 목을 매었으나 곁에 있던 사람이 급히 구하였다. 그런 가운데 주화파 최명길과 김류가 청나라 태종과 만나 강화 회담을 계속하였는데, 청나라 태종이 척화파 대신들을 잡아 보내라고 요구하자, 이 말을 들은 김상헌이 다시 음식을 먹으며 자기가 먼저 잡혀가겠다고 자청하였다. 그때 남한산성을 지키던 1만 3천여 명의 군사들은 두 차례나 총궐기하여 인조의 장전 앞에서 척화파 대신들을 잡아 청나라에 보내고 빨리 화해하라고 촉구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나이가 많은 척화파 김상헌·윤황·정온 등을 대신하여 나이가 젊은 홍익한(洪翼漢)·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 3학사(學士)를 보냈다. 이들 3학사는 청나라의 심양으로 압송되었는데, 그 뒤 청나라 태종의 온갖 위협과 회유에도 끝까지 충절을 굽히지 않고 장렬하게 죽음을 당하였다.

그해 1월 22일 강화도가 오랑캐 군사에게 함락되어 왕자와 비빈이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인조는 마침내 항복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1월 30일 남한산성을 내려가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하고, 서울의 궁궐로 돌아왔다. 그때 김상헌은 길가에 나와서 부복(俯伏)하고 망배(望拜)하면서 통곡하였다. 조선의 임금이 오랑캐의 칸[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남한산성의 포위가 풀리자 김상헌은 도성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로 동교의 석실로 돌아왔다. 강화도가 함락당할 때 맏형 김상용이 화약 상자를 폭발하고 스스로 뛰어들어 순절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전란으로 강화도로 직접 들어가 볼 수도 없었다. 그해 2월 그는 경상도 안동 풍산으로 내려가서, 학가산 서미동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이때 깊은 골짜기에 몇 칸의 초가집을 지어놓고 ‘목석헌(木石軒)’이라는 편액을 달아놓고, 항상 세월을 개탄하며 한밤중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효종실록』 3년 6월 25일)

그해 4월 나라에서는 김상헌이 남한산성에 호종한 공로를 포상하여, 종1품상 숭록대부로 가자하였으나, 김상헌은 교지를 봉한 채 돌려보내고 관작을 사양하였다. 그때 김상헌은 상소하기를, “범과 이리와 같은 청나라의 인정(仁政)을 믿지 말며, 부모와 같은 명나라와 가볍게 단교하지 마소서. 신은 선왕(先王 : 선조)의 ‘일만 번 꺾여도 물은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는 주문(奏文)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옷깃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1638년(인조 16) 7월 사헌부 장령유석·박계영(朴啓榮)이 아뢰기를, “군신의 의리는 천지간에 변함이 없으니, 사생(死生)과 영욕에 따라서 다를 수 없습니다. 전 판서김상헌은 주상께서 남한산성을 내려오던 날 병을 핑계대고 누워 끝내 나와서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김상헌은 도리어 길을 돌아 영남으로 내려가서, 방바닥에 편안히 누워 있습니다. 나라에서 호종한 자들에게 상으로 가자하는 것은 곧 임금의 은전인데, 교지를 봉한 채 돌려보내고 마치 교지를 받는 것은 자기 몸을 더럽히는 것처럼 생각하였으니, 그 불경함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김상헌을 멀리 귀양 보내소서” 하였으나, 인조는 “김상헌의 죄를 논하는 것이 너무 늦었으니,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그해 8월, 사헌부 대사헌김반(金槃)이 대간에서 김상헌을 논죄하는 의논을 일절 정지시키고, 정도(正道)를 지키려는 김상헌을 옹호하며 장령유석·박계영을 파직하도록 청하였다. 그러나 대간의 계사(啓辭)로 인하여 김상헌은 벼슬을 삭탈 당하였다.

당시 인조는 김상헌과 정온 등이 벼슬을 사양하는 것을 매우 불쾌하게 여기고 있었으므로, 주화파의 대간유석·박계영·이계(李烓) 등이 김상헌 등을 탄핵하는 것을 마음에 들어 두둔하였다. 이에 이조 참판이경석(李景奭)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김상헌·정온 등이 고집하는 바는 정당한 주장인데, 어찌 그들을 죄줄 수 있겠습니까. 한 가닥 남은 정론(正論)을 너그럽게 용납해야 합니다. 또 유석과 이계는 김상헌에게 배척을 받아 오래도록 청망(淸望)에 길이 막혀 있었던 만큼, 지금 김상헌에게 보복하는 것처럼 김상헌의 죄목을 따지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니, 인조가 이르기를, “김상헌과 정온은 일체인데, 다만 김상헌만을 들어 논박하는 것은 잘못이다. 다만 김상헌은 자기 임금에게 문안하지 않고 그 형의 죽음에도 곡하지 않았으니, 과연 그가 인륜을 지켰다고 할 수 있겠는가. 김상헌은 나와는 12년 남짓 상종하여 왔는데, 이 망극한 변란을 당하여 임금을 버리고 안부도 묻지 않고 있다. 지금 자기 몸을 깨끗이 한다고 하며 멀리 떠나버리는 자들이 많은데, 김상헌이 그들의 앞잡이가 된 것이다”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심양의 옥중 생활

1639년(인조 17) 나이 70세가 된 김상헌은 치사(致仕)할 때가 되었으나, 그해 10월 나라에서 직첩을 돌려주고 서용하도록 하였다. 그때 청나라에서 조선에 사신을 보내 명나라를 정벌하는 데 필요한 군사를 파견하도록 강요하였는데, 이것은 병자호란 때 맺은 강화조약에 들어 있는 조건의 하나였다. 당시 요동 지역을 점령한 청나라는 산해관(山海關)에서 명나라와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명나라는 하남(河南) 지방에서는 이자성(李自成)의 농민 반란이 일어났고, 북쪽지역은 청나라의 침략을 당해 멸망 직전에 있었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은 오삼계(吳三桂)를 총병(總兵)으로 삼아 산해관에서 청나라 태종의 총공세를 방어하게 하였다. 이에 청나라 태종은 조선의 수군을 동원하여 만주에 남아 있는 명나라 세력을 물리치고 북경으로 침입하려고 계획하였다. 이때 조선의 척화파는 군사를 보내 청나라를 돕는 것을 극력 반대하였으나, 주화파는 청나라의 세력이 한창 강성하므로 군사를 보내지 않으면 장차 큰 화를 당할지 모른다며 군사를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해 12월 안동에 있던 김상헌은 청나라에 군사를 보내는 것을 강력히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인조는 이에 대하여 회답하지 않았다. 1640(인조 18) 11월 청나라 태종은 주화파 유석 등이 김상헌을 탄핵한 계사를 전해 듣고 그 내용을 자세히 알기 위하여 용골대·오목도(梧木道) 등을 의주에 보냈다. 그리고 영의정홍서봉(洪瑞鳳)과 도승지신득연(申得淵) 등을 불러 척화를 주장한 신하 김사양(金斜陽)을 찾았는데, 그가 바로 김상헌이었다. 용골대가 영의정홍서봉 등을 위협하면서, “연명으로 왕에게 치계하여 김상헌 등을 붙잡아 청나라로 보내도록 하시오”라고 하자, 조정이 깜짝 놀라 모두 얼굴빛이 파랗게 질렸으나, 우의정강석기(姜碩期)가 차자를 올려 김상헌 등을 잡아 보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안동에 있던 김상헌이 북쪽으로 잡혀가게 되자, 인조는 내시를 보내 표피(豹皮)와 갖옷을 하사하고, 친필로 쓴 편지를 보내어 간절히 위로하였다. 그리고 12월에 의주에 도착한 김상헌은 용골대 앞에 부축을 받아 들어가서 몸이 아프다며 핑계를 대고 그 옆에 드러누워 버렸다. 용골대가 역관 정명수를 시켜 “국왕이 남한산성에서 내려올 때, 그대는 왜 따르지 않았는가”라고 묻자, 김상헌이 “나는 늙고 병이 들어서 걸음을 걸을 수 없었으므로 따라가지 못하였다”라고 대답하였다. 용골대가 “벼슬을 받지 아니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자, “늙고 병들었으므로 조정에서 애당초 벼슬을 주지 않았다. 너희들은 어디서 이런 말을 얻어 들었는가” 하였다. 다시 용골대가 “그대가 임금에게 수군을 우리나라[청나라]에 보내지 말라고 권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묻자, 김상헌은 “수군을 보내지 말라고 내가 비록 임금께 권하였으나 조정에서 내 말을 듣지 않았다”라면서 도리어 용골대에게 따지기를, “임금과 신하 사이에 사사롭게 서로 주고받은 말들을 어떻게 다른 나라 사람이 이를 알고 말할 수가 있는가” 하였다. 이에 용골대와 오목도 등이 서로 돌아보며 말하기를, “가장 다루기 어려운 자는 이 노인이다” 하였다.

1641년(인조 19) 1월 용골대·오목도 등은 청나라 형부에서 다시 심문하기 위하여 김상헌과 사헌부 지평조한영(曺漢英), 학생 채이항(蔡以恒) 세 사람을 체포하여, 목에 철쇄(鐵鎖 : 쇠로 만든 항쇄)를 씌우고 두 손을 결박한 채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 심양으로 끌고 갔다. 한겨울의 강바람과 눈보라는 70세가 넘은 노인에게는 참을 수가 없는 고통이었다. 용골대는 승정원 도승지신득연도 심문하기 위하여 데려가서, 김상헌 등과 함께 청나라의 북관에 구류하였다. 김상헌 등은 청나라 형부 아문에 끌려가서 심문을 받았는데, 형부를 맡은 질가왕(質可王)과 용골대·비파(比巴)·가린(加麟)·범문정(范文程) 등의 여러 박씨(博氏 : 8기병에 소속된 서기관)가 자리에 나와 앉았다. 또 소현세자와 사은사신경진이 서쪽 벽에 앉고, 형관들은 문밖에 줄 지어 섰다. 형관 세 사람이 나서서 김상헌과 신득연 등에게 차례로 묻고 역관 정명수가 통역하였으며, 질가왕과 여러 박씨 등은 형관의 심문을 지켜보고 죄의 경중을 상의하여 판결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상헌은 조금도 굴복하거나 기운이 꺾이지 않고 늠름하였는데, 역관 정명수도 감동하고 김상헌을 존경하여 통역할 때 ‘너의 나라’ 라는 말을 ‘이곳’이라고 고치는 등 형부의 관원들을 격분시키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이후 김상헌·신득연 등 네 사람은 모두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을 날만 기다렸다. 병중에 있던 김상헌은 오랑캐의 거친 음식을 먹을 수가 없어서 거의 굶어 죽게 되었다. 이에 질자관에서 세자빈 강씨가 미음을 끓여 보내 겨우 목숨을 부지하였다. 얼마 뒤에 용골대가 청나라 태종의 명령을 받들고 질자관으로 소현세자를 찾아와서 “북관에 갇힌 네 사람의 죄는 법으로 보면 죽여야 마땅하지만, 본국에서 네 사람을 즉시 잡아서 보냈으므로, 황제께서 특별히 용서하여 네 사람의 죄를 적당히 감형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어 용골대는 소현세자 옆에 있던 사람들을 물리치고 비밀리 황제의 명령을 통보하기를, “조선에서 1천 명의 정예 포병과 5백 명의 인부를 뽑아 각자 군량미를 준비해 가지고 3월 20일에 심양에 와서 점고(點考)를 받도록 하라”고 하였다. 김상헌 등 네 사람의 사형을 감면하는 대신에 조선에서 포병 1천 명과 인부 5백 명을 급히 청나라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소현세자는 이를 본국에 급히 장계(狀啓)하였다.

청나라는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조선의 군사를 끌어들여 조선과 명나라의 화친 관계를 깨뜨리고, 조선의 수군과 포병을 이용하여 전쟁에서 빨리 승리하려고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의주부윤(義州府尹)임경업(林慶業)에게 명하여 120척의 전함에 포수와 사수 5천여 명을 태우고 만주의 금주(錦州) 등지로 가서 청나라를 돕게 하였다. 이때 영의정최명길은 임경업에게 군사를 이끌고 가서 전세를 관망하며 명나라 군사와 가능한 한 싸움을 피하도록 하였다. 또 승려 독보(獨步)를 시켜 등주(登州)의 명나라 군문(軍門) 홍승주(洪承疇)에게 비밀히 편지를 보내, 청나라에 원군을 보낸 것은 청나라의 강압에 의한 것이고, 명나라에 대한 조선의 우의는 변함이 없다고 강조하며, 양국의 전함은 서로 만나더라도 싸우지 말도록 요청하였다.

1642년(인조 20) 만주의 금주가 함락되자, 명나라 등주 군문홍승주가 마침내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하였다. 또 선천부사이계의 밀고로 최명길과 임경업이 독보를 보내 명나라와 내통한 사실이 알려지자, 임경업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하였다. 독보를 도운 정태화(鄭太和)·박황(朴潢) 등 여러 사람이 위험해지자 최명길은 혼자 모든 책임을 지고 스스로 체포되어 청나라 심양으로 압송된 후 혹독한 심문을 받고 북관에 구류되었다. 이때 김상헌은 북관에서 남관으로 옮겨 구류되었는데, 질자관에서 음식을 마련하여 김상헌에게 공급하였기 때문에 질자관과 가까운 남관으로 옮겼던 것이다.

최명길의 아들 최후량(崔後亮)은 아버지를 구원하려고 몸값으로 금과 은을 수천 냥씩 싸가지고 청나라 심양에 가서 권력을 가진 마부대·용골대 등을 찾아다니며 뇌물을 주고 아버지 목숨을 구하려고 애를 썼다. 이때 질자관에 있던 세자시강원 관료가 최후량에게 “청음김상헌은 본래 바르고 엄격한 사람이다. 반드시 청음 선생은 자네가 뇌물을 주어서 아버지를 살리려고 하는 것을 그르다고 여길 것이다” 하였다. 이에 최후량이 옥중의 김상헌을 면회하다가, 갑자기 묻기를, “산의생(散宜生)은 어떠한 사람이었습니까” 하니, 김상헌이 “옛날의 성인이었다”라고 하였다. 산의생은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신하인데, 주나라 문왕이 은(殷)나라 폭군 주왕(紂王)에 의해 유리(羑里)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산의생이 뇌물로 주고 주나라 문왕을 구출하였던 것이다. 최후량이 나와서 말하기를, “김 대감의 은미한 뜻을 알 수 있다”고 하며, 역관 정명수를 시켜 예친왕(睿親王)과 질가왕(質可王) 등에게 뇌물을 주고 아버지 최명길의 목숨을 겨우 구하였다.

처음에 최명길은 청나라 심양의 북관에 갇혔다가, 1643년(인조 21) 4월 남관으로 옮겨 구금되었다. 최명길과 김상헌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 방에 같이 있었다. 최명길은 처음에 김상헌이 명예를 구하는 마음이 있다고 의심하여 정승을 천거할 때 명단에서 삭제하여 버리기까지 하였는데, 심양의 남관에서 같이 구금되자, 죽음이 눈앞에 닥쳐와도 확고한 신념으로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김상헌의 절개를 보고 그 충절에 탄복하였다. 김상헌은 처음에 최명길을 중국 남송(南宋)의 간신 재상 진회(秦檜)와 다름이 없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척화파를 비난하기를, “간악한 무리가 오랑캐를 끼고 임금을 위협하여 국가를 팔아서 자기 자신의 공적으로 삼고 있으니, 밤낮으로 마음에 맹세하는 것은 한 칼로 간신의 심장을 찌르는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최명길이 청나라의 혹독한 심문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명나라와 화친하려는 뜻을 굽히지 않는 것을 보고, 최명길의 마음이 본래 오랑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라와 겨레를 구원하려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두 사람이 서로 공경하고 각자의 주장을 존중하게 되었다.

성품과 일화

김상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염정(廉正)하고 온아(溫雅)하며, 또 문학에 재질이 있었다. 사람됨이 바르고 강직하며 남달리 자기 주관이 뚜렷했다. 집안에서는 효도와 우애가 독실하였고, 조정에서 벼슬한 지 거의 오십 년이 되었는데, 큰일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자기 말을 다하고 조금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으며, 자기 말이 채용되지 않으면 번번이 관직을 사직하고 집으로 물러났다. 악한 사람을 보면 장차 자기 몸마저 더럽혀질까봐 멀리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공경하였으나 매우 어렵게 여겼다. 영의정김류가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숙도 김상헌을 만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등에 식은땀이 난다”고 하였다.(『효종실록』 3년 6월 25일)

김상헌은 1570년(선조 3) 6월 3일 서울 중부(中部) 수진방(壽進坊)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1572년(선조 5) 나이 2세 때 큰아버지 김대효(金大孝)가 후사를 두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그 양자로 들어갔으며, 9세이던 1578년(선조 11)부터 친아버지 김극효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1585년(선조 18) 나이 15세 때 선전관(宣傳官)이의로(李義老)의 딸 성주 이씨(星州李氏)와 혼인하고 윤근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이때 큰형 김상용과 4촌형 김상준(金尙寯)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천품(天稟)이 매우 고상하여 어려서부터 『소학(小學)』을 즐겨 읽고 평생 『소학』의 가르침대로 살았는데, 그 대요(大要)는 지경(持敬)과 역행(力行)을 위주로 하였다는 점이다. 집에 있을 때에는 그 도리를 곡진히 하여 윤리를 반드시 바르게 하고, 은의(恩義)를 독실하게 하였으며, 조정에 들어가서 임금을 섬길 때에는 예(禮)를 다하여 아무리 조그마한 일이라도 예사롭게 넘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인조가 말하기를 “김상헌이 승정원에 있을 때에는 대궐 안이 숙연(肅然)하더니, 다른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하였다. 그가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갈 때에는 모든 행동과 절차를 하나같이 주희(朱熹)의 법도대로 따랐다.

송시열은 김상헌의 학문과 인품에 대하여 찬양하기를, “대개 그의 도(道)는 수신(修身)·제가(齊家)에서 비롯되었으므로 그 본말(本末)이 겸비되고 그 내외(內外)가 구비되어,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큰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수립한 대절(大節)에 있어서도 일월(日月)처럼 빛나고, 천지(天地)에 드높으므로, 하루아침에 습취(襲取)한 사람과는 견줄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고 하였다. 또 그의 공적에 대해서는 “그의 공적을 논한다면, 질서와 예의는 사람에게 큰 것이므로, 하루라도 이를 폐지하여 버린다면, 사람이 짐승으로 변하고 중화(中華)가 이적(夷狄)으로 변할 것이다. 명나라 말년을 당하여, 선생은 삼강(三綱)이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떠받들었다. 대저 세상의 치란(治亂)은 비록 기수(氣數)의 승침(昇沈)에 따라서 언제나 피하지 못할 바가 있으나, 하늘은 반드시 그 난세를 다스리는 큰 사람을 보내어 세상을 구원하게 하는 법인데, 선생이 바로 그 사람이 아니었겠는가”라고 찬양하였다.

김상헌이 청나라 심양에 붙잡혀 갈 때 살아서 돌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때 처절한 심정을 노래한 시조 한 수가 남아 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등지고자 하랴마는, 세월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고국의 산천을 등지고 오랑캐의 땅으로 잡혀가는 김상헌의 마음을 그대로 읊은 작품이다. 또 김상헌은 심양의 북관에 갇혀 있을 때 청나라 오랑캐에게 죽음을 당하여 무덤과 비명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일찍이 스스로 자기의 광명(壙銘 : 광중에 묻는 비명)을 짓기를, “지극한 충성은 금석처럼 굳건하고[至誠矢諸金石], 커다란 절의는 일월처럼 빛나는데[大義懸乎日月], 아! 백세가 지난 뒤에 가서야[嗟百世之後], 사람들이 내 마음을 알아주리라[人知我心]”고 하였다. 그 뒤에 송시열이 김상헌의 신도비명을 지을 때 따로 비명을 짓지 않고, 김상헌이 심양의 옥중에서 지은 자기 자신의 비명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 동쪽 석실의 선영에 있는데, 송시열이 지은 묘지명이 남아 있다. 무덤은 지금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德沼里)에 있다. 1653년(효종 4) 나라에서 영의정에 증직하고, 시호를 ‘문정’이라고 내려주었다. 1661년(현종 2) 효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경기도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과 남한산성의 현절사(顯節祠), 경상도 상주(尙州)의 서산서원(西山書院), 평안도 정주(定州)의 봉명서원(鳳鳴書院), 함경도 종성(鐘城)의 종산서원(鍾山書院), 정평(定平)의 망덕서원(望德書院),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에 제향되었다. 양주의 석실서원에는 후손들이 김상헌과 그의 맏형 김상용을 함께 모셨다. 화가 정선(鄭歚)의 「석실서원도」는 남양주 미사리 한강변에 자리 잡은 석실서원을 그린 그림이다. 석실서원은 김상헌이 기거하던 별장인데, 그 뒤에 안동 김씨 세도 정치의 요람이 되었기 때문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없어지고 지금은 서원 터를 알리는 비석만 남아 있다.

부인 성주 이씨는 이의로의 딸인데, 자녀는 1남을 낳았다. 외아들 김종경은 3살 때 죽었으므로 형 김상관의 둘째 아들 김광찬을 양자로 삼았다. 김광찬은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김제남의 아들 김래(金琜)의 딸에게 장가들어 3형제를 낳았다. 맏손자 김수증(金壽增)은 부사(府使)를 지냈고, 둘째 손자 김수흥은 문과에 급제하여 영의정을 지냈으며, 셋째 손자 김수항은 문과에 급제하여 영의정을 지냈는데, 사람들은 이들 3형제를 ‘3수(壽)’라고 일컫는다. 막내 김수항의 아들 김창집(金昌集)·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김창업(金昌業)·김창집(金昌緝)·김창립(金昌立) 6형제가 모두 뛰어난 인물들로, 안동 김씨를 중흥시킨 이른바 ‘6창(昌)’이다. (신)안동김씨의 주류를 형성한 청음파(淸陰派)는 대개 ‘3수·6창’의 후손들이다. 김창집의 아들 김제겸(金濟謙)에서 김달행(金達行)-김이중(金履中)을 거쳐 김조순(金祖淳)에 이르기까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이루어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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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청음집(淸陰集)』
  • 『선원유고(仙源遺稿)』
  • 『송자대전(宋子大全)』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기언(記言)』
  • 『미수기언(眉叟記言)』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심양일기(瀋陽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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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연행록(燕行錄)』
  • 『연행일기(燕行日記)』
  • 『열하일기(熱河日記)』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우계집(牛溪集)』
  • 『월사집(月沙集)』
  • 『임하필기(林下筆記)』
  • 『종묘의궤(宗廟儀軌)』
  • 『청성잡기(靑城雜記)』
  • 『청성집(靑城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택당집(澤堂集)』
  • 『홍재전서(弘齋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