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용(金尙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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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1년(명종 16)∼1637년(인조 15) = 77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문신이자 서예가. 우의정(右議政) 등을 지냈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자는 경택(景擇)이며, 호는 선원(仙源)·풍계(楓溪)·계옹(溪翁)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거주지는 서울의 순화방(順化坊) 창의동(彰義洞) 청풍계(淸風溪)이다. 아버지는 돈녕부(敦寧府) 도정(都正)김극효(金克孝)이고, 어머니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좌의정정유길(鄭惟吉)의 딸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평양부서윤(平壤府庶尹)김번(金璠)이며, 할아버지는 신천군수(信川郡守)김생해(金生海)이다. 좌의정김상헌(金尙憲)의 형이자, 효종(孝宗)의 왕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인으로, 이상길(李尙吉)·이상의(李尙毅)·황신(黃愼)·이춘영(李春英)과 가까웠고, 이항복(李恒福)·이정구(李廷龜)·오윤겸(吳允謙)·신흠(申欽) 등과도 가깝게 교유하였다. 정치적으로 서인(西人)에 속하였는데, 인조 때 정권을 잡은 서인이 남인(南人)·북인(北人)을 등용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노서(老西)와 소서(少西)로 나뉘자 노서의 영수가 되어 남인·북인의 등용을 주장하였다. 서예에도 정통하여 왕희지(王羲之) 서체의 전서(篆書)와 작은 글자의 해서(楷書)를 잘 썼다.

선조 시대 활동

1582년(선조 15) 2월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試)에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2세였다. 성균관에 들어가서 공부하였으나 대과에 쉽게 급제하지 못하던 가운데, 1589년(선조 22) 겨울 <정여립(鄭汝立)의 옥사>가 일어났다. 당시 성균관 유생들이 이에 대한 상소를 올렸는데, 김상헌이 그 소두(疏頭)가 되었다. 1590년(선조 23) 9월, 음직으로 선릉(宣陵) 참봉(參奉)이 되었다. 그해 10월 증광(增廣)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0세였다.[『방목(榜目)』] 처음에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다가 1591년(선조 24) 6월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임명되어 사관(史官)이 되었으나, 그때 외할아버지인 정유길이 춘추관(春秋館) 지사(知事)로 있었으므로 상피(相避) 관계에 해당되어 벼슬을 그만두고 장동(壯洞) 집에서 글을 읽었다.

1592년(선조 25) 32세 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그해 5월 양친을 모시고 춘천(春川)·가평(加平)·양근(楊根) 등지로 피난을 다니다가, 그해 9월 강화도(江華島)에 들어가서 선원촌(仙源村 : 지금 강화도 선원면 냉천리)에 임시로 거처하였다. 이곳에서 아내 권씨와 여러 아이들, 그리고 부모님을 모시고 행복하게 살았으므로, 스스로 호를 ‘선원(仙源)’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양호체찰사(兩湖體察使)정철(鄭澈)이 그를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자 선원촌을 떠나 충청도로 갔으며, 이어 검찰사(檢察使)김찬(金瓚)의 종사관이 되어 싸움터로 돌아다녔다. 그해 10월 조정으로 돌아와서 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되었다.

1593년(선조 26) 5월 병조 좌랑(佐郞)이 되었다가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과 성균관 전적(典籍)을 거쳐, 그해 9월 이조 좌랑이 되어 지제교를 겸임하였다.(『선조실록』 26년 5월 11일),(『선조실록』 26년 7월 8일),(『선조실록』 26년 9월 3일),(『선조실록』 26년 11월 19일) 1594년(선조 27) 4월, 강화도에서 부인 권씨가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김상용의 나이가 34세였고, 부인 권씨는 33세였다. 그는 부인의 병이 아주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벼슬을 사임하고 강화도로 돌아가서 부인의 병을 극진히 간호하였음에도 결국 부인은 6남매를 남겨 두고 세상을 떠났다. 1595년(선조 28) 1월 이조 정랑(正郞)이 임명되었다가 그해 4월 홍문관(弘文館) 부수찬(副修撰)을 거쳐 그해 6월 성균관 직강(直講)이 되었으나, 병으로 관직을 사임하였다. 그해 말에 접반사(接伴使)김수(金睟)의 종사관(從事官)에 임명되어, 명(明)나라 사신(使臣)을 수행하여 동래(東萊)에 갔다. 당시 명나라와 일본은 강화(講和) 조약을 맺기 위하여 사신들이 오갔으나, 조선은 이에 반대하였으므로 명나라 시신을 동래까지 안내하는 데에 그쳤다.

1596년(선조 29) 1월 홍문관 부응교(副應敎)가 되었는데, 그해 2월 도원수(都元帥)권율(權慄)의 종사관이 되어 전라도 지방으로 가서 군사를 지휘하며 퇴각하는 왜군과 싸웠다.(『선조실록』 29년 1월 25일)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5월 접반사(接伴使)장운익(張雲翼)의 종사관이 되어 의주(義州)에 가서, 명나라 도독(都督)마귀(麻貴)를 맞이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그해 9월 명나라의 감군(監軍)진효(陳效)가 조선에 오자, 문례관(問禮官)에 임명되어 의주에 가서 그를 맞이하였다. 이때 도로가 막혀 왕래하는 데에 어려움이 많았으나, 나라를 구하겠다는 한 가지 일념으로 사피(辭避)하지 아니하였다. 1598년(선조 31) 2월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으나, 상피 관계로 인하여 체직되었다.(『선조실록』 31년 2월 20일) 그해 4월 성절사(聖節使)로 임명되어 명나라 북경(北京)에 갔다가 그해 12월 돌아와서 복명(復命)하였다. 그러나 북경을 오고가는 도중에 지체하였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599년(선조 32) 2월 형조 참의(參議)가 되었다가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옮겼다.(『선조실록』 32년 2월 20일),(『선조실록』 32년 2월 22일) 1600년(선조 33) 1월 승정원 우승지(右承旨)가 되었다가, 성균관 대사성(大司成)·병조 참의를 거쳐 승정원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선조실록』 33년 1월 21일),(『선조실록』 33년 7월 15일),(『선조실록』 33년 8월 25일),(『선조실록』 33년 11월 18일) 1601년(선조 34) 1월 다시 형조 참의가 되었다가 그해 2월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이 임명되었다.(『선조실록』 34년 1월 26일),(『선조실록』 34년 2월 3일) 그때 김상용이 입대(入對)하여, “언론(言論)이 불통하고 궁위(宮闈 : 궁궐)가 엄숙하지 않다”고 극론(極論)하자, 선조가 “그대가 엄숙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일인지를 숨기지 말고 말하라”고 하였다. 이에 김상용이 여러 소인들이 궁액(宮掖)과 내통하며 나쁜 짓을 저질렀던 사건들을 모두 폭로하였다. 그때 우의정심희수(沈喜壽)와 예조 판서(判書)이정구(李廷龜)가 나서서 김상용을 변명하고 구원한 덕분에 김상용은 파직되는 것으로 그칠 수 있었다. 그해 8월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 34년 8월 28일)

임진왜란 때 분조(分朝)를 이끌기 위하여 선조는 서출 제 2왕자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삼았다. 그러나 1602년(선조 35) 선조는 인목왕후(仁穆王后)를 계비(繼妃)로 맞아들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았고, 이에 선조는 서자 광해군을 세자에서 폐위하고 적자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으려고 하였다. 이를 계기로 북인이 소북(小北)과 대북(大北)으로 나누어졌는데, 선조 말기에 선조의 뜻을 받들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소북의 유영경(柳永慶)이 정권을 잡으면서 세자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의 정인홍(鄭仁弘) 등은 조정에서 쫓겨났다. 이때 영의정유영경은 광해군의 처가와 인척 관계에 있는 김상용·김상헌 형제도 탄압하였다. 1602년(선조 35) 1월 병조 참의가 된 김상용은 유영경의 탄압을 받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그리고 그해 말 정주목사(定州牧使)가 임명되었는데, 소북의 유영경이 그를 조정에서 멀리 추방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김상용은 맏아들이 죽어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있다가, 유영경으로부터 핍박을 당하며 내쫓기다시피 서울을 떠나 평안도 정주에 부임하였다. 3년 동안 선정(善政)을 베푼 덕에 임기가 만료되어 서울로 돌아올 때 정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1604년(선조 37) 11월 경상도상주목사(尙州牧使)에 임명되어 선정을 베풀었고, 1605년(선조 38) 10월에는 동인(東人)의 영수 정경세(鄭經世)와 상주(尙州)의 존애원(存愛院)에서 만나 도학(道學)을 토론하였다.(『선조실록』 37년 11월 8일) 정경세는 유성룡(柳成龍)의 수제자로 상주 출신이었다. 1607년(선조 40) 2월 함경도안변부사(安邊府使)에 임명되었다가 임기를 채우고 집으로 돌아온 후 달포를 넘기지 못하고 다시 외방 수령관으로 내쫓겼다.(『선조실록』 40년 2월 22일) 부임하는 고을이 먼 땅이었으므로, 부모가 매우 상심하였고 친구들도 위로하였으나, 김상용은 불평하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고, 소명(召命)을 받는 즉시 길을 떠났다. 그가 부임하는 고을마다 그 치적이 하나같이 훌륭하였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08년(광해군 즉위년) 2월 선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그해 3월 선조의 명정(銘旌)을 쓰는 서사관(書寫官)으로 선임되어 조정으로 돌아왔다. 이어 그해 7월 형조 참의가 되었다가, 목릉(穆陵 : 선조의 왕릉)의 산역(山役)을 끝마치자 수고한 공으로 가자(加資)되었다. 이때 정권을 잡은 대북의 정인홍은 광해군을 폐위하려던 소북의 유영경을 처형하였다. 김상용은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호조 참판(參判)을 거쳐 승정원 도승지(都承旨)에 발탁되었다. 광해군이 서인 김상용을 도승지로 발탁한 것은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柳希奮)이 자신의 이종 4촌인 김상용을 적극 추천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때 아버지 김극효가 지어준 청풍계 별장에 ‘태고정(太古亭)’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김상용과 김상관(金商寬)·김상건(金商謇)·김상헌·김상복(金尙宓) 5형제는 태고정에 함께 모여 아버지를 모시고 정담을 나누었는데, 김상용 형제가 서로 정의를 나누던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김상용의 ‘풍계’라는 호는 청풍계의 유명한 가을 단풍에서 딴 것이다.

1609년(광해군 1) 7월 품계(品階)를 초자(超資)하여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어 도총관(都摠管)을 겸임하였다.(『광해군일기』 1년 7월 3일) 수도 서울의 치안과 왕궁의 수비를 강화하였는데, 명나라에서 광해군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고, 사신을 보내 왕위 계승 서열을 조사하였으므로, 광해군의 동복형 임해군(臨海君)을 강화도로 추방하였다. 그해 8월 의금부(義禁府) 지사를 겸임하면서 <임해군옥사(臨海君獄事)> 처리 과정에서 광해의 선처를 호소하였다. 이어 12월에는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궁중에 좌도(左道 : 유교 이외의 다른 사교)가 점차 성행하므로, 빨리 엄하게 단속해야 합니다”고 극론하였다.(『광해군일기』 1년 12월 10일) 1610년(광해군 2) 1월 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가 되었다가, 그해 8월 다시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 1611년(광해군 3) 8월 다시 한성부판윤이 되어 도총관을 겸임하였으며, 1612년(광해군 4) 4월에는 부호군(副護軍)이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53세 때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서 영창대군과 그 외할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처형당하였다. 동생 김상헌의 양아들 김광찬(金光燦)이 김제남의 손녀와 혼인하면서 동생 김상헌이 연루되자, 김상용도 체포되었으나 공사(供辭) 내용이 명백하여 그날로 석방되었다.(『광해군일기』 5년 5월 15일),(『광해군일기』 5년 5월 16일) 그러나 대간(臺諫)에서 탄핵하는 바람에 김상용·김상헌 형제는 마침내 파직되었다. 동생 김상헌은 문외(門外) 출송(黜送)당하여 가족을 데리고 경상도 안동(安東) 풍산(豊山)의 옛집으로 돌아가서 은거하였다. 광해군 초기에 서인의 김상용·김상헌 형제는 광해군의 처가 친족으로서 청요직(淸要職)에 발탁되었으나, 당시 정권을 잡은 대북의 정인홍·이이첨(李爾瞻) 일당과 사이가 나빠지는 바람에 결국 계축옥사 이후에 김상헌은 쫓겨나고 김상용은 한직으로 밀려난 것이다.

1614년(광해군 6) 9월 중추부 지사에 임명되었다가 1616년(광해군 8) 돈녕부 지사가 되었다.(『광해군일기』 6년 9월 14일) 1617년(광해군 9) 3월 도총관을 겸임하였으나, 대북의 폐모론에 반대하면서 이이첨 등이 추진하던 <정청운동(庭請運動)>에 불참하였다.(『광해군일기』 10년 1월 4일),(『광해군일기』 10년 1월 20일) 이에 양사(兩司)에서 김상용을 귀양 보낼 것을 청하였으나 광해군은 허락하지 않았다.(『광해군일기』 10년 2월 6일),(『광해군일기』 10년 2월 8일),(『광해군일기』 10년 3월 12일),(『광해군일기』 10년 4월 8일) 1618년(광해군 10) 2월 부친상을 당하였다. 그해 10월 이이첨 일당이 대간을 사주하여 김상용을 탄핵한 후 문외 출송하자, 상례(喪禮)의 궤연(几筵)을 받들고 강원도 원주(原州)로 옮겨가서 3년 동안 임시로 살았다. 1621년(광해군 13) 귀양살이에서 풀려났으나 서울 청풍계(淸風溪)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서강(西江)으로 옮겨 임시로 살던 중 그해 11월 모친상을 당하였다. 광해군 후기에 김상용은 거듭 부모의 상을 당하고, 7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인조 시대

1623년(인조 1)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났을 때 상중에 있었기 때문에 적극 참여하지 못하였다. 이듬해인 1624년(인조 2) 64세 때 1월 돈녕부 판사(判使)가 되었으나,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충청도검찰사(忠淸道檢察使)에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충청도에서 군사를 모집하고 군량미를 수송하며 인조가 공주(公州)로 피난하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도록 하였다. 그해 2월 반란이 평정되자, 인조의 어가(御駕)를 호종하여 서울 도성으로 돌아왔으며, 다음 달인 3월에 원임(原任) 대신으로서 성균관 동지사를 겸임하였다. 4월에는 사명을 받들고 가도(椵島)의 모문룡(毛文龍)을 찾아가서 가도에 있는 요동(遼東) 난민들을 처리하는 문제를 의논하였으며, 가도에서 돌아오던 5월에 병조 판서로 임명되었다.(『인조실록』 2년 5월 8일),(『인조실록』 2년 5월 29일) 1625년(인조 3) 4월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철산(鐵山)에 가서 명나라 조사(詔使)왕민정(王敏政)과 호양보(胡良輔)를 맞이하였고, 6월에는 반송사(伴送使)로서 명나라 조사 두 사람을 사포(蛇浦)까지 전송하였다.(『인조실록』 3년 4월 11일) 그해 7월 경연청(經筵廳) 동지사(同知事)를 겸임하였고, 예조 판서로 옮겨 도총관을 겸임하였다.

1626년(인조 4) 1월 인조가 생모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상사(喪事)를 당하여 3년 상례를 치르려고 하자 신하들이 이를 반대하였는데, 임금이 예관(禮官)을 꾸짖으며 상복을 바치도록 하였다. 이에 언관(言官)들이 인책(引責)하였으므로, 김상용도 스스로 예조 판서에서 물러났다. 그해 3월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에 임명되었다가, 윤6월 중추부 동지사가 되었다.(『인조실록』 4년 3월 4일) 1627년(인조 5) 1월 다시 예조 판서가 되었을 때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났다. 후금(後金)의 장수 아민(阿敏)이 오랑캐 군사 3만여 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공략하였다.(『인조실록』 5년 1월 17일) 그에 앞서 심하(深河) 전투에서 누르하치에게 항복한 강홍립(姜弘立)을 길잡이로 내세워, ‘전왕 광해군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내걸고, 안주(安州)·평산(平山)·평양의 성을 차례로 점령하고 황주(黃州)로 진군하였다. 이에 인조는 황급히 강화도로 피난을 갔는데, 김상용을 유도대장(留都大將)에 임명하여, 서울에 남아 수도를 지키도록 명하였다.(『인조실록』 5년 1월 19일) 그해 2월 황주를 점령한 후금군은 부장 유해(劉海)를 강화도에 보내 강화 조약을 맺고 ‘형제의 나라’가 되어 서로 적대시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 후 그해 3월 후금의 군사가 철수하였다.

1628년(인조 6) 12월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남이공(南以恭)·이경석(李景奭) 등 광해군 시대 인물을 등용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노서(老西)와 소서(少西)가 대립하였다.(『인조실록』 6년 12월 3일) 이조 판서를 맡았던 김류(金瑬)·김상용 등의 노서는 광해군 때 인물이더라도 능력이 있으면 당파를 초월하여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유백증(兪伯曾)·나만갑(羅萬甲)·유석(柳碩) 등의 소서는 광해군 때 간신 이이첨과 같이 일한 사람들은 일절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인조반정에 적극 참여한 공서(功西)파 안에서도 이귀(李貴)·윤방(尹昉) 등은 소서파를 적극 옹호하였다. 이때 노서는 ‘삼색도화론(三色桃花論)’을 주장하였는데, “복사꽃 하나의 꽃잎에 빨강·분홍·흰색의 3가지 색이 들어 있는것처럼 하나의 조정에 서인과 남인·북인이 함께 벼슬하여 화합하자”고 주장하였다.

1629년(인조 7) 9월 예조 판서가 되었다가, 1630년(인조 8) 나이 70세로 그해 1월 관례에 따라 관직을 치사(致仕)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인조실록』 7년 9월 20일),(『인조실록』 8년 1월 19일) 그해 4월 한직인 돈녕부 판사가 되었다가, 1631년(인조 9) 10월 다시 이조 판서가 되었으나, 원종(元宗 : 인조의 생부 정원군)의 장릉(章陵)을 보수하지 않았다며 왕릉을 소홀히 관리한 죄로 파직되었는데, 이때 인조가 매우 격분하였다.(『인조실록』 8년 4월 2일),(『인조실록』 9년 10월 4일),(『인조실록』 9년 11월 11일) 1632년(인조 10) 1월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김상용은 집안이 너무 번창하는 것을 경계하는 한편 오래도록 정승의 자리에 있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우의정을 사임하겠다는 상소를 29번에 걸쳐 올렸다.(『인조실록』 10년 1월 19일),(『인조실록』 11년 5월 18일) 이에 인조가 마지못하여 허락하여, 1633년(인조 11) 5월 체직되어 다시 돈녕부 판사가 되었다.

1634년(인조 12) 9월 다시 우의정에 임명되었는데, 서인의 영수로서 김상용의 영향력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인조실록』 12년 9월 11일) 인조 때 정권을 잡은 서인은 남인·북인을 포용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노서와 소서로 나뉘었는데, 김상용은 노서의 우두머리로서 광해군 때 벼슬한 남인 남이공·이원익 등을 등용하기를 주장하였으나, 유백증·나만갑 등은 이에 반대하였다. 그때 김상용 등이 남인을 천거하고, 인조가 남인을 동정하여 벼슬에 임명하자, 대간의 유백증과 나만갑 등이 이를 반대하였다. 상소의 내용이 노서의 대신들을 비난하였으므로, 인조가 크게 노하여 소서의 인물들을 모두 지방 수령관으로 좌천시켜버리자 우의정김상용이 그들을 용서해주기를 간청하였으나 인조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혹자가 소서의 인물들을 비판하기를, “그들은 시세(時勢)의 변화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라고 하였으나, 김상용은 “내가 삼공(三公)의 자리에 있으면서 조정에 과실이 있는데, 어찌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겠는가”라며 탄식하였다.

1635년(인조 13) 4월 우의정김상용이 소서의 유백증과 나만갑 등을 적극 변호하여 그들을 구원하였고,(『인조실록』 13년 4월 5일) 6월에는 우의정에서 체직되어 돈녕부 영사(領事)가 되었다.(『인조실록』 13년 6월 12일),(『인조실록』 13년 7월 2일) 1636년(인조 14) 2월 국호를 ‘후금(後金)’에서 ‘대청(大淸)’으로 바꾼 홍타지는 스스로 ‘황제(皇帝)’라고 일컫고 용골대(龍骨大)·마부태(馬夫太) 등을 조선에 사신으로 보내 인조에게 칭신(稱臣 : 신하라고 일컬음)하기를 강요하였다. 이에 인조는 후금 사신의 접견마저 거절하고 8도에 선전유문(宣戰諭文 : 싸움을 선포하는 임금의 글)을 내리고, 후금과 싸울 결심을 굳혔다. 인조는 원임대신 김상용과 윤방(尹昉)을 종묘사직의 제조(提調)로 삼아 종묘사직의 신주 40여 기를 받들고, 먼저 강화도로 들어가서 비변사(備邊司)의 분사(分司)를 설치하여, 강화도검찰사(江華島檢察使)김경징(金慶徵)·부검찰사이민구(李敏求)와 강화유수장신(張紳) 등을 지휘하여 강화도를 방어하게 하였다.

그해 12월 청나라 태종홍타지가 8기병(旗兵) 12만 명을 직접 거느리고 조선을 대대적으로 침입하였다. 오랑캐 군사는 압록강을 건너서, 의주·평양의 성을 피하여 5일 만에 서울 근교로 육박하였다. 인조는 맏아들 소현세자(昭顯世子)에게 명하여 정묘호란 때처럼 분조를 거느리고 전주(全州)로 가서, 서울과 강화도가 적에게 함락되면, 후방에서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적과 싸우도록 하였다. 또 제 2왕자 봉림대군(鳳林大君 : 효종)에게 명하여 세자빈강씨(世子嬪姜氏)와 원손(元孫)을 비롯한 비빈(妃嬪)과 왕자 맟 종실들을 인솔하여 먼저 강화도로 피난하게 하였다. 그 뒤에 왕의 대가(大駕)가 따라 출발하였으나, 숭례문(崇禮門)에 도착하였을 때 벌써 오랑캐의 기병이 서쪽 교외에까지 이르렀으므로, 인조 일행은 방향을 바꾸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는 1만 3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청나라 태종홍타지가 이끄는 12만 명의 오랑캐 군사와 45일 동안 공방전을 벌였다.

검찰사김경징·부검찰사이민구와 강화 유수장신(張紳) 등은 강화도가 천연의 요새라고 믿고 오랑캐 군사를 방어할 대책을 세우지 않은 채 섬에 피난하여 편안하게 지내려고 하였다. 그때 강화도에는 서울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차고 넘쳤다. 이에 원임대신 김상용이 부검찰사이민구에게 “임금의 행재소(行在所)에서 포위당한 지 오래 되어 위급함이 조석(朝夕)에 달려 있다. 혹자는 말하기를, ‘충청도 지방에는 군사(軍事)를 주관할 자가 없다’고 하는데, 강화도에는 검찰사 1인이면 족하니, 부사(副使)는 마땅히 충청도 지방으로 가서 의병(義兵)을 규합하여, 임금의 위급함을 가서 구원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부검찰사이민구는 듣지 못한 체하고 실행하지 않았다. 김상용이 검찰사김경징에게 명하기를, “남한산성의 소식이 불통(不通)하니, 상금을 후하게 내걸고 군사를 모집하여 그곳에 보내어 안부를 알아봐야 할 것이다. 열 번을 보낸다면 반드시 한 번쯤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신하의 도리로서 어찌 손발을 묶고서 가만히 앉아서 볼 수만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나, 김경징과 이민구는 김상용의 명령을 뒤로 비난하고, 마침내 아무 것도 시행하지 않았다.

청나라 태종홍타지는 남한산성의 항복을 빨리 받기 위하여, 동생 예친왕(睿親王)돌곤에게 군사 3만 명을 떼어주어 먼저 강화도를 점령하게 하였다. 예친왕돌곤은 삼판선(三板船) 80척에 군사를 나누어 태우고, 갑곶진(甲串津)으로 진격하면서 잇따라 홍이포(紅夷砲)를 발사하니, 우리의 수군과 육군이 겁에 질려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오랑캐 군사들이 이 틈을 타서 급히 임진강을 건너자, 강화유수장신과 충청도수사(忠淸道水使)강진흔(姜晉昕)은 오랑캐의 대군을 보고 겁에 질려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도망쳤고, 검찰김경징·이민구 등도 모두 도망쳐버렸다.

1637년(인조 15) 1월 22일 오랑캐 군사가 임진강을 건너 강화도에 상륙하여 강화성을 포위하였다. 김상용은 적병이 성 아래에 몰려오는 것을 보고, 항복할 수 없다는 생각에 자결할 결심을 하였다. 이에 입었던 융의(戎衣 : 군복)를 벗어 하인에게 맡기고, 화약이 있는 남문루(南門樓)로 올라가서 방 가운데에 화약 상자를 쌓아놓고 그 위에 걸터앉은 다음에 담뱃불을 던져서 화약을 폭발시켜 스스로 불에 타서 죽었다. 손자 한 사람과 종 한 사람도 모두 따라서 죽었다.(『인조실록』 15년 1월 22일),[『연려실기술』 권26]

김상용은 시와 글씨에 뛰어났는데, 특히 서체는 왕희지와 왕헌지(王獻之) 부자의 2왕(王) 서체에 정통하여, 전서와 해서를 잘 썼다. 당시 비석의 전액은 거의 그의 글씨이고, 종묘사직의 신주(神主)와 애책문(哀冊文)을 쓴 해서도 그의 글씨이다. 지금 남아 있는 그의 작품으로는 평양의 숭인전비(崇仁殿碑)의 전서와 풍덕군수(豊德郡守)장인정(張麟禎)의 전액 등이 있다.

문집은 『선원유고(仙源遺稿)』 7권이 남아 있는데, 판본은 안동 봉정사(鳳停寺)에 보관되어 있다. 김상용이 지은 연시조 「오륜가(五倫歌)」 5수와 가사 「훈계자손가(訓戒子孫歌)」 9편이 문집 『선원유고』에 실려 있다. 그 밖에도 그가 지은 여러 편의 시조가 『가곡원류(歌曲源流)』 등에 남아 있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 함락과 김상용의 순절

1632년(인조 10) 후금의 칸[임금] 홍타지는 만주 전역을 점령하고 요동에서 명나라를 공격하면서, 먼저 조선을 쳐서 그 배후 세력을 없애려고 계획하였다 이에 후금은 조선에 대하여 ‘형제의 나라[兄弟之國]’에서 ‘군신의 나라[君臣之義]’로 바꾸고, 막대한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 명을 요구하였는데, 이것은 조선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1636년(인조 14) 2월 국호를 ‘후금’에서 ‘대청’으로 바꾼 홍타지는 스스로 ‘황제’라고 일컫고 용골대(龍骨大)·마부태(馬夫太) 등을 조선에 사신으로 보내 인조에게 칭신하기를 강요하였다. 이에 인조는 후금 사신의 접견마저 거절하고 8도에 선전유문을 내리며 후금과 싸우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집권한 서인은 명분론(名分論)을 중시하여 대다수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였고, 청(淸)나라와 화해를 주장하는 주화론자(主和論者)는 소수에 불과하였다.

그해 12월 2일 청나라 태종홍타지는 만주인 8기병 7만 명, 몽고인 8기병 3만 명, 한족 8기병 2만 명, 도합 오랑캐 군사 12만여 명을 직접 거느리고 후금의 수도 심양(瀋陽)을 출발하였다.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너 의주성·평양성·안주성(安州城) 등을 피해 곧바로 서울로 직행하였다. 중국 본토를 정복하려는 야망에 불타던 홍타지는 조선을 점령하는 것보다 조선의 항복을 받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인조를 빨리 만나 항복을 받으려고 서둘렀다. 그러므로 청나라 태종(太宗)은 산성 등을 일부러 피하며 서울로 향하여 쏜살같이 남하하였던 것이다. 12월 14일 눈이 내리는 밤 오랑캐의 선봉 부대가 경기도 땅에 도착하였다. 오랑캐의 기병이 압록강을 건넌 지 불과 5일만이었다.

인조는 정묘호란 때처럼 강화도로 피난을 가기로 결정하고, 급히 한성부판윤김경징을 강화도검찰사로, 이조 참판이민구를 부검찰사로, 강화부유수장신을 주사대장(舟師大將 : 수군을 지휘하는 책임자)으로, 심기원(沈器遠)을 유도대장으로 각각 임명하여, 강화도와 서울을 수비하게 하였다. 맏아들 소현세자는 정묘호란 때처럼 분조를 거느리고 전주로 내려가게 하였는데, 서울과 강화도가 적에게 함락되면, 후방에서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적과 싸우기 위해서였다. 또 제 2왕자 봉림대군과 제 3왕자 인평대군(麟坪大君)은 세자빈강씨와 원손을 비롯한 비빈과 왕자들, 그리고 종실들을 인솔하여 먼저 강화도로 피난하게 하였다. 그때 인조는 원임대신 전 우의정김상용과 전 영의정윤방에게 명하여, 종묘사직의 제조로서 종묘사직의 신주 40여 기를 강화도로 옮겨 보관하게 하고, 비변사의 분사를 강화도에 설치하여, 원임대신들이 검찰사를 지휘하게 하였다.

12월 14일 오후 인조 일행이 숭례문을 나가 강화도로 향하려는데, 척후병이 달려와서 “적이 이미 홍제원(弘濟院)에 도착하여, 양천강(陽川江)을 차단하고 강화도로 가는 길을 끊었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인조는 도로 도성 안으로 들어와 숭례문 문루에 앉아 적의 동정을 살피다가 그날 저녁 적을 피해 임시로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12월 15일 훈련대장신경진(申景禛)이 서울에서 뒤따라 군사를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들어오자, 1만 3천여 명의 군사를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성벽을 지키게 하고, 45일 동안 오랑캐 군사와 공방전을 벌였다.[『병자록』] 12월 16일 청나라 마부태가 이끄는 선봉 부대가 남한산성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1637년(인조 15) 1월 1일 청나라 태종이 도착하여 남한산성 아래 탄천(炭川)에 군영을 차리고 12만 명의 오랑캐 군사를 총집결시켜, 남한산성을 일제히 공격하였다.

강화도검찰사김경징과 부검찰사이민구 등은 강화도가 바위섬으로 천연의 요새라고 생각하였으므로, 오랑캐 군사가 감히 임진강을 건너서 강화도로 쳐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믿고 아무런 방어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이들은 원임대신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분사의 모든 정령(政令)을 마음대로 처리하였다. 이에 원임대신 김상용이 검찰사에 명령하기를, “강화도에는 검찰사 1인이면 족하니, 부검찰사는 마땅히 전라도 지방으로 가서 의병을 규합하여, 임금의 위급함을 먼저 구원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부검찰사이민구는 듣지 못한 체하고 전라도로 가지 않았다. 그 뒤에 인조 일행이 남한산성에 포위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원임대신 김상용과 윤방은 검찰사김경징·부검찰사이민구에게 명령하기를, “상금을 내걸고 전령을 구해서 몇 번이고 남한산성으로 전령을 보내어 남한산성과 연락을 취하여 군사를 협력하여 임금을 구원할 방안을 모색하라”고 하였으나, 검찰사와 부검찰사는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비문]

청나라 태종홍타지는 군사 3만 명을 막냇동생 예친왕돌곤에게 주어 빨리 강화도를 점령하게 하였다. 예친왕돌곤은 삼판선을 만들어 80여 척의 배에 군사들을 나누어 태우고, 갑곶진으로 진격하면서 잇따라 홍이포를 발사하니, 강화도의 수군과 육군이 겁에 질려 대항하지 못하였다. 오랑캐 군사들이 이 틈을 타서 임진강을 건너자, 강화부유수 장신과 충청도수사(忠淸道水使) 강진흔은 오랑캐의 대군을 보고 겁에 질려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도망쳐버렸다. 김경징·이민구 등도 이를 멀리서 바라보다가 모두 황급하게 강화성 안으로 들어가서 몸을 숨겼다. 김상용은 이것을 보고 강화성을 지킬 수 없다 판단하고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에 자결을 결심하였다.

1637년(인조 15) 1월 22일과 23일은 ‘강화도의 비극적인 날’이었다. 1월 22일 예친왕돌곤의 8기병들이 삼판선을 타고 강을 건너 강화성의 남문(南門)으로 들이닥치자, 환관 김인(金仁) 등이 원손을 업고 작은 배를 이용해 주문도(注文島)로 도망갔다. 분사의 대신 김상용은 적병이 강화성을 사방으로 포위하자, 분사에 들어가서 자결하려고 하다가 적병을 피하여 성의 남문루(南門樓)로 올라가서 앞에 화약을 장치한 뒤에 좌우의 사람들을 물리치고 불 속에 뛰어들어 타죽었다. 이때 그의 어린 손자 한 명과 노복 한 명, 별좌(別坐)권순장(權順長)과 생원(生員) 김익겸(金益兼), 우승지홍명형(洪命亨) 등도 김상용을 따라서 스스로 불 속에 뛰어들어 죽었다. 강화도가 함락되자 공조 판서이상길(李尙吉)·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필선(弼善)윤전(尹烇)·전 관찰사정효성(鄭孝誠)·전 장령정백형(鄭百亨)·병조 좌랑이사규(李士珪)·현감정수(鄭洙)·주부송시영(宋時榮) 등도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성품과 일화

김성용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돈후(惇厚)하고 겸손 신중하며, 용모가 온화하고 청수(淸粹)하여 겉모습과 속마음이 다르지 않았다. 누구나 김상용을 한번 만나보면, 그가 장자(長者)의 덕을 가진 군자(君子)라는 것을 금방 알 수가 있었다.[비문] 이식(李植)은 김상용의 성품과 재능을 평하기를, “점잖고 질박하지만, 임기응변하는 재주는 부족하다”고 하였다.[『택당집』 권17]

1561년(명종 16) 5월 9일 김상용은 서울 중부(中部) 수진방(壽進坊)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모습이 반듯하고 머리가 영특하여 보통 아이들과는 달랐다.[행장] 어려서 가학(家學)으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배워 그 대의(大義)를 통하였고, 자라면서 고문(古文)과 시를 외할아버지 정유길에게 배워 시와 문장에 뛰어났다. 1576년(선조 9) 16세 때 한 살 아래인 15세의 안동 권씨(安東權氏)와 혼인하였다. 그 뒤에 파주(坡州)로 가서 성혼·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김상용은 봉록(俸祿)을 받으면, 그 반을 고아 및 과부나 곤궁한 집에 보내주었으므로, 정작 집에는 남은 곡식이 없었다. 일찍이 대목을 불러 지붕을 수리하였는데, 대목이 집을 둘러본 뒤에 몰래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많은 집을 다녀 봤지만, 높은 벼슬하는 집이 이와 같이 곳간이 텅텅 빈 것은 보지 못하였다” 하였다. 그를 잘 안다고 하는 친구들조차도 청풍계에 아버지가 지어준 집이 화려하고 집 밖의 연못이나 태고정에 꽃과 대나무가 우거진 아름다운 전경을 보고, 김상용이 빈한하고 검소하게 지내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실지로는 집안 식구들이 안에서 곤궁하게 지내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평상시에 한가롭게 거처할 적에는 물색옷을 입지 않았으며, 밥을 먹을 적에는 반찬을 많이 차려 놓지 못하게 하였다.[비문]

서책을 좋아하여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는 때가 없었다. 또 고금의 훌륭한 글씨와 유명한 그림을 많이 소장하고 있어서 ‘와유암(臥遊庵)’이라는 암자의 좌우에 글씨와 그림을 죽 걸어놓고 감상하였다. 문장을 지을 때에는 뜻을 전달하는 것을 중시하여 문맥의 이치가 잘 맞았으며, 또 시를 지을 때에도 내용이 청초하고 운율에도 잘 맞았다. 그러나 김상용은 문장을 잘 짓는다고 하여 자기 이름을 문단(文壇)에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또 서예의 필법이 단아하고 아름다웠는데, 특히 해서의 작은 글자를 잘 썼다. 중국왕희지·왕헌지 부자의 서법을 깊이 터득하였으므로, 나라의 종묘 신주는 대부분 김상용의 글씨였다. 특히 창힐(蒼頡 : 한자를 만든 주나라 사람)과 사주(史籒 : 전자를 만든 주나라 사람)의 전자 서체에 아주 정통하여 조선 시대에 가장 뛰어났으므로, 양반 사대부 집안에서 묘지의 비석에 전서를 새길 때 글씨를 김상용에게만 부탁하였다. 심지어 이미 새겨 놓은 비석을 없애 버리고 김상용에게 전서를 부탁해서 다시 새기기도 하였다.

자녀들을 가르치고 훈계할 적에 하나같이 법도를 따르게 하며, 부화(浮華)하고 사치하는 습관을 깊이 경계하였다. 언문으로 「오륜가(五倫歌)」라는 연시조를 지어 항상 자녀들로 하여금 외우도록 하며 스스로 깨우치게 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충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동쪽 도혈리(陶穴里)의 선영에 있는데, 동생 김상헌이 지은 신도비명이 남아있다. 지금 그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德沼里)에 있다. 김상용이 순절하자 나라에서 그 집에 ‘충신지문(忠臣之門)’이란 정려(旌閭)를 세워주고 복호(復戶)하였다. 1661년(현종 2)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강화도의 충렬사(忠烈祠),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평안북도 정주(定州)의 봉명서원(鳳鳴書院), 함경북도 안변(安邊)의 옥동서원(玉洞書院), 경상북도 상주(尙州)의 서산서원(西山書院), 함경남도 정평(定平)의 모현사(慕賢祠)에 제향되었다. 강화의 선비들이 강화성 남쪽 7리에 사우(祠宇)를 짓고 김상용과 함께 순절한 별좌권순장과 진사 김익겸은 물론 강화도가 함락당할 때 순절한 공조 판서이상길 등 11명을 제향하였는데, 나중에 나라에서 ‘충렬사’라고 사액(賜額)하였다.

‘김상용 순의비(殉義碑 : 순절비)’는 현재 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데, 신구비가 있다. 순조 때 강화부유수로 부임한 7대손 김매순(金邁淳)이 김상용이 순절한 강화성 남문 자리에 순절비를 세웠다. 그런데 1976년 강화읍에서 중요 유적을 복원 정화할 때 현재 위치로 옮겨 세우던 중에 1700년(숙종 26) 김상용의 종증손인 김창집(金昌集)이 강화부유수로 있으면서 세운 구비가 발견되어, 지금 신구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부인 안동 권씨는 공조 좌랑권개(權愷)의 딸이고 영의정권철(權轍)의 손녀인데, 자녀는 3남 3녀를 낳았다. 장남 김광형(金光烱)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차남 김광환(金光煥)은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지냈으며, 3남 김광현(金光炫)은 호조 참판(參判)을 지냈다. 장녀는 사어(司禦)남호학(南好學)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우의정장유(張維)의 처가 되었으며, 3녀는 군수(郡守)이이성(李以省)의 처가 되었다. 측실(側室)에서도 1남 4녀를 두었는데, 서자 김광소(金光◎火肅)는 현감(縣監)을 지냈고 진무공신(振武功臣)이 되었고 그 맏아들 김수전(金壽全)이 바로 김상용을 따라서 순사(殉死)하였다. 서출 4녀 중에서 두 사람은 판서한인급(韓仁及), 군수이석망(李碩望)의 첩이 되었으며, 두 사람은 현감이응인(李應寅)과 성후룡(成後龍)의 처가 되었다. 김상용의 차녀와 장유 사이에 태어난 딸이 봉림대군에게 시집가서 뒤에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가 되었다.

1637년(인조 15) 1월 22일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오랑캐 군사에게 함락되자, 김상용은 화약을 폭발시키고 그 손자 김수전과 함께 폭사하였다. 그의 두 아들 김광환과 김광현이 달려가서 10일간 시신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으므로, 그가 남긴 의관을 가지고 초혼하며 그 위패를 선원리의 옛집에 봉안하였다가, 그해 4월 양주 덕소리 선영에 장사지냈다. 그보다 앞서 부인 권씨는 임진왜란 때 강화도로 피난 가서 아이들과 함께 피난살이하다가, 1594년(선조 27) 병에 걸려 33세의 나이로 돌아가는 바람에 강화도 진강리(鎭江里)에 장사지냈다. 김상용은 항상 부인 권씨를 잊지 못하여 평생 재혼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 또 아들 형제에게 부인 권씨와 합장해 달라고 유언하였으므로, 1641년(인조 19) 부인의 묘소를 덕소리 선영으로 옮겨 합장하였다. 김상용이 살아 있을 때 자기의 지문(誌文)과 부인의 지문을 지었으므로, 부인을 이장할 때 그 지문을 사용하였다.[비문]

(신)안동김씨는 ‘선원파’와 ‘청음파’로 나누어지는데, 선원파는 선원김상용의 후손이고, 청음파는 청음(淸陰)김상헌의 후손이다. (신)안동김씨는 인왕산과 경복궁 사이의 장의동(壯義洞 : 지금 종로구 청운동~효자동 일대)에 많이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장동김씨(壯洞金氏)’라고도 부른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선원유고(仙源遺稿)』
  • 『청음집(淸陰集)』
  • 『계곡집(谿谷集)』
  • 『상촌집(象村集)』
  • 『농암집(農巖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해동명신전(海東名臣傳)』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우계집(牛溪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