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백순(金伯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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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801년(순조 1) = ?]. 조선 후기 정조(正祖)~순조(純祖) 때의 천주교도로, <신유박해(辛酉迫害)> 때의 순교자.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인조(仁祖) 대 활동한 김상헌(金尙憲)의 후손이기도 하다.

정조~순조 시대 활동

김백순(金伯淳)은 노론가의 자손으로 태어났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입신양명할 목적으로 열심히 책을 읽던 중 “사람은 죽어도 그 영혼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영혼불멸사상을 접한 것을 계기로 천주교를 알게 되었다. 그의 천주교 입교에 가족들은 거세게 반대하였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1801년(순조 1) 어린 순조(純祖)를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고, 천주교에 대한 금압령을 내리면서 천주교도들을 탄압하는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시작되었다.(『순조실록(純祖實錄)』 1년 1월 10일) 그러면서 서학(西學)과 관련된 이들을 체포하였는데, 이전에 서학과 관련이 있었다고 알려진 정약용(丁若鏞)도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정약용을 취조하던 중 김백순이 천주교 신자임이 밝혀지면서 김백순도 체포되어 그해 2월 13일 의금부에 갇혔다. 그는 심문과정에서 마음이 약해져 배교의 뜻을 내비쳤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천주교 신앙을 드러내며 자신의 신앙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순조실록』 1년 2월 25일),(『순조실록』 1년 3월 29일) 결국 김백순은 요서(妖書)와 요언(妖言)을 전해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켰다는 죄로 1801년 5월 11일 서소문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편 김백순은 천주교의 세례는 받지 않았으나 순교로써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였으므로 천주교 내에서는 혈세자(血洗者)라고 불린다.

성품과 일화

김백순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김백순이 처음 천주교에 입교하자 그의 외숙부는 그를 배교케 하려고 의절을 선언했으나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신자임을 공공연하게 밝히고 다녔다. 이후 체포를 당해 의금부에 투옥되어 심문을 받을 때는 부모에게 근심과 걱정을 끼칠 것이 염려되어 잠시 배교하려 한 적이 있었지만, 천주교에만 뜻을 기울인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밝혔다.(『순조실록』 1년 2월 25일),(『순조실록』 1년 3월 18일)

그는 추국장에서 “어려서부터 주서(朱書)를 읽고 흐릿하게나마 스스로 깨달은 것이 있었으므로 이단에 현혹되지 않을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 서양의 서책을 보고서 통렬하게 이를 배척하고자 하여 비로소 펼쳐 보았더니, 전에 듣던 것과 아주 다를 뿐만 아니라 진실로 크게 올바르고 지극히 공변된 도(道)였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종사(從事)하게 되었지만, 조금도 후회할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강생(降生)한 후 제사를 폐지하게 된 것은 스스로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라며, 끝까지 자신의 신앙을 자신 있게 드러내보였다.(『순조실록』 1년 3월 29일)

참고문헌

  • 『순조실록(純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한국교회사연구소,1980
  • 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가톨릭대사전』2,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