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충격(祈充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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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5년 청나라에서 조선에 파견한 세자 책봉 사절단의 대표 관료.

개설

기충격은 두만강 일대 여진인의 일족인 와이객(瓦爾喀) 출신으로 누르하치[奴兒哈赤]에게 귀부하고 만주양백기(滿洲鑲白旗) 소속이 된 인물이었다.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1645년 조선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1651년 청 세조(순치제)가 친정한 직후, 섭정왕이던 예친왕(睿親王,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에게 아첨하였다는 이유로 강림(剛林)과 함께 참수를 당하였다.

활동 사항

기충격은 문사(文史)에 뛰어나 누르하치([奴兒哈赤], 후일 청 태조)의 여덟째 아들 황태극(皇太極, 후일 청 태종)의 서기(書記) 직을 관장하였다. 청태종 시기였던 1631년 예부(禮部) 계심랑(啟心郎), 1634년 우록액진(牛錄額真)을 지냈다. 1636년에는 예친왕이 명나라를 정벌할 때, 요녕성(遼寧省) 금주(錦州) 공격에 공을 세웠다. 1645년 홍문관(弘文館) 대학사(大學士) 관직을 받고, 『명사(明史)』의 총재관(總裁官) 직을 맡았다. 같은 해 조선의 세자 책봉 사절단 정사(正使)를 맡아 조선에 다녀왔다. 1649년 청『태종실록(太宗實錄)』총재관(總裁官)을 맡았다.

기충격은 조선에 세자 책봉 칙서를 전달하였는데, 인조로부터 임경업(林慶業)을 되돌려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인조실록』 23년 12월 28일). 임경업은 조선의 무관이었는데, 명나라로 망명하여 청과의 전쟁을 지휘하다가 청의 심양(瀋陽)에 붙잡혀 있던 상황이었다. 청조는 조선의 요구를 받아 1646년 임경업을 조선에 돌려보냈다. 한편 이때의 사행에서는 청나라에 표류하였던 일본인 13명을 조선을 통하여 일본에 돌려보내는 방안도 논의하였다.

한편 조선은 변방의 성을 수리하고 병기를 정돈하는 이유를 일본에 대한 방비라고 이야기하였으나,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이에 기충격은 경상도관찰사이만(李曼)과 동래부사노협(盧協) 등을 직접 심문하여 조선과 일본에는 전쟁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청 조정에 보고하기도 하였다(『효종실록』 1년 8월 27일).

『조선왕조실록』에는 해당 이름의 한자가 기충격(祈充格)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중국 측 사료에는 기충격(祁充格)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조선 내 사료 중 『연려실기술』·『오주연문장전산고』 등에는 기충격(祁充格)으로 기재되었다.

참고문헌

  • 『청사고(淸史稿)』
  •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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