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유약조(己酉約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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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9년 일본에 통교를 허용하기 위하여 대마도주와 맺은 강화조약.

개설

대마도주 소 종의지(宗義智)는 임진왜란 직후인 1599년(선조 32) 정권을 장악한 덕천가강(德川家康,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서 조선과의 국교(國交)를 회복하는 교섭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 침략의 선봉군 구실을 한 대마도는 전쟁이 끝나자 이제 다시 조일(朝日) 양국 사이에서 강화 교섭의 주역이 되었다. 대마도는 임진왜란 후 국교를 다시 정상화하기까지 무려 23차례에 걸쳐 조선에 강화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그 결과 1607년(선조 40) 조선 조정에서 일본 덕천막부(德川幕府)로 제1차 회답겸쇄환사를 파견함으로써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였다. 이어 2년 뒤인 1609년(광해군 1)에는 대마도주와 기유약조를 체결함으로써 조선후기의 대일 외교 체제를 정립하였다. 기유약조의 명칭은 두 나라의 사료에 따라 기유개정약조·기유년신정약조·송사약조 등으로 다양하게 기술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609년(광해군 1) 3월 대마도주가 파견한 324명의 사절단이 왜관에 도착하였다. 사절단의 정관(正官)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조선 외교의 일선에서 활약하였던 외교 승려 현소(玄蘇), 부관은 유천경직(柳川景直, [야나가와 가게나오])이었다. 이해 5월 왜관에서 선위사 이지완(李趾完)과 현소 사이에 12개 조목의 약조를 체결하였다. 이 약조 체결을 위한 교섭은 양자 간의 협의라는 형식을 취하였지만, 조선 조정에서 일방적으로 정하여 통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조선 조정은 1607년(선조 40) 제1차 회답겸쇄환사를 파견함으로써 덕천막부와 국교를 재개하였다(『선조실록』 40년 1월 5일). 그러나 이것은 급변하는 동북아의 정세 속에서 보국안민을 위하여 중앙정부 차원에서 우호를 확인하는 수준이었다. 교역을 포함한 교린(交隣) 체제의 구체적인 재편성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선 조정은 1604년(선조 37) 대마도에 사명당유정(惟政)과 손문욱(孫文彧)을 탐적사(探賊使)로 파견할 때 조정의 허화(許和) 방침을 전하면서 개시(開市: 공무역)를 허락하였다.

대마도는 조선전기의 공무역을 회복하기 위하여 조선 조정에 끈질기게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은 1609년 일본의 덕천막부로부터 조선 외교의 가역(家役)으로 위임받은 대마도주와 기유약조를 체결함으로써 합법적인 교역의 길을 열어 주었다. 이로써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단절되었던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조선후기의 대일 외교 체제를 정비하고자 하였다. 기유약조에 따라 1611년(광해군 3) 9월 대마도주가 조선후기 들어 최초의 세견선을 파견하였다. 이로써 임진왜란 이후 단절되었던 양국 관계는 외교와 교역 관계가 모두 재개되었다.

그런데 조선에서 사절을 파견하고 대마도주에게 교역을 허락한 조처는 적극적인 교린의 입장이라기보다 기미외교정책의 일환에서 나온 것이었던 만큼 조선전기에 비하여 훨씬 제한적이었고 엄격히 규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내용

12개조에 달하는 기유약조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왜관의 접대는 3가지 예가 있다. 국왕사(國王使)가 한 예, 대마도주특송(對馬島主特送)이 한 예, 대마도수직인(對馬島受職人)이 한 예이다. ②국왕 사절이 나올 때는 상선(上船)과 부선(副船)만 허락한다. ③대마도 세견선 20척 안에 특송선(特送船) 3척이 있다. ④대마도주의 세사미두는 모두 100석을 지급한다. ⑤수직인은 1년에 1번 내조(來朝)하며, 다른 사람을 보낼 수 없다. 임진왜란 이전의 수직인은 죄를 면해 주며 다시 거론하지 않는다.

⑥배에는 3등급이 있는데, 승선 인원이 25명 이하를 소선(小船), 26~27명을 중선(中船), 28~30명을 대선(大船)이라 한다. ⑦선부(船夫)는 대선 40명, 중선 30명, 소선 20명을 정수로 한다. 선체의 크기를 재고 선부의 수가 정액(定額)을 넘었는지 점고(點考)하며, 부족할 경우 선부 수에 따라 급료를 지불한다. ⑧조선에 보내는 배는 모두 대마도주의 문인(文引)을 받아야 한다.

⑨대마도주에게는 전례에 따라 도서(圖書)를 만들어 지급하고, 종이에 견본을 찍어 예조·교서관·부산포에 보관하여 서계(書契)가 올 때마다 진위를 살피며 격식을 위배한 자는 되돌려 보낸다. ⑩문인이 없는 자와 부산포 외에 도박(到泊)하는 자는 적으로 논단(論斷)한다. ⑪과해료(過海料)는 대마도인에게는 5일, 도주특송인(島主特送人)에게는 10일, 일본국왕사에게는 20일분을 지급한다. ⑫나머지 다른 일은 모두 전례에 따른다.

이상 기유약조의 내용은 조선전기의 여러 약조와 마찬가지로 세견선, 접대, 문인, 세사미두, 수직인, 수도서인에 대한 규정이 대부분이며, 1443년(세종 25) 계해약조, 1512년(중종 7) 임신약조, 1547년(명종 2) 정미약조 등을 종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기유약조의 내용을 보면 조선전기에 비해 더 엄격하고 교역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주요 차이점은 세견선을 20척으로 제한하였고, 세사미두를 200석에서 100석으로 반감하였으며, 개항장을 부산포 1곳으로 제한하였다. 또 일본국왕사이건 대마도주 사절이건 간에 일본 사신의 상경을 일절 금하였고, 서울의 동평관(東平館)도 폐쇄하였다. 사절의 왕래에 따른 정탐 행위를 막아 재침략을 예방하려는 차원이었다.

변천

기유약조는 조선후기 대마도와의 교역에 대한 기본적인 조약으로서 그 골격은 개항 후인 1876년(고종 13) 일본의 명치정부(明治政府)와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할 때까지 유지되었지만, 부분적인 개정과 보완은 수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1653년(효종 4) 계사약조, 1683년(숙종 9) 계해약조, 1712년(숙종 38) 임진약조 등의 약조 개정이 있었고, 왜관에서의 일본인들의 위반 행위를 금지하는 금조(禁條)가 마련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유약조의 틀을 벗어나는 내용의 개정이 아니라 보완하는 수준이었다.

의의

기유약조는 임진왜란 전까지 대마도와 맺었던 약조를 집약하여 대마도를 조선의 기미권(羈縻圈) 안에 재편입시킨 것이었다. 동시에 대마도를 통한 일본 막부와의 간접적인 통교 루트를 설정하여 새로 개편된 외교 체제 속에서 대마도주의 기득권을 보장함으로써 조선후기 조일 관계의 기본 골격을 제시한 것이었다. 한편으로 그 내용을 보면 대마도가 요청한 교역 확대 요구를 최대한 억제하였으며 조선전기에 비하여 매우 엄격하게 제한하였다.

기유약조는 형식상 대마도주와 체결한 것이지만 대마도주가 일본에서 조선 외교의 전담 임무[家役]를 맡았기 때문에 덕천막부를 대행한 것이었다. 따라서 약조는 대마도에 대한 규정이지만 조선후기 조일 관계를 규정하는 기본 약조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기유약조는 임진왜란 이후 대일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성격을 이해해야 한다. 약조의 주체와 주된 내용이 대마도를 대상으로 하는 점은 당시 대마도가 막부의 의사를 대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후기에는 전기와 같은 ‘다원적 통교 체제’가 아니라 막부와 대마도라는 단일 구조 속에서 운영되었다. 조선후기 대마도는 일본의 막번(幕藩) 체제라는 새로운 체제 속으로 편입되었고, 조선과의 관계도 막부의 감독과 지시를 받아 진행되었다. 막부도 대마도주를 통하여 조선에 대한 정책을 시행하였고, 조선 또한 대마도주를 통한 교린 정책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양자의 이해가 일치하였다.

따라서 기유약조는 단순히 대마도와의 통교 무역 규정이라기보다 조선후기 조선과 일본의 교린 체제를 규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때 이루어진 양국의 외교 체제는 조선전기와 다소 달라진 면도 있지만 조선 왕과 덕천막부가 대등교린외교로, 대마도와는 기미교린외교라는 이중 구조로 된 점에서는 기본적으로 조선전기와 같은 형태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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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문관지(通文館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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