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균(紀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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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대 건륭제 시기 사고전서 찬수를 맡았던 관료이자 학자.

개설

기균은 청의 관료로서 중앙과 지방의 과거(科擧) 관리 및 『사고전서』 편찬의 책임을 맡았다. 조선의 연행사절단 인원들과 학술적 교류를 나누었던 것으로도 유명하였다.

활동 사항

기균은 대대로 관료를 지낸 집안 출신으로 직예성(直隸省) 헌현(獻縣)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기용서(紀容舒)는 청조의 중앙 관료를 지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여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1747년 순천향시(順天鄕試)에 수석으로 합격하였고, 1754년에는 진사(進士)가 된 사람 중에 학문이 우수한 자나 글씨를 잘 쓰는 자를 뽑아 임명하는 한림원(翰林院) 서길사(庶吉士)가 되었다. 좌춘방(左春坊) 좌서자(左庶子)를 거쳐 귀주 도균부(貴州 都勻府)의 지부(知府)를 맡았다. 건륭제가 그의 학문을 높게 평가하여 한림원(翰林院) 시독학사(侍讀學士)가 되었다. 1768년에는 사돈 노견증(盧見曾)을 옹호하다 신강(新疆) 지역으로 유배되었다. 당시의 경험 등을 후일 정리하여 『열미초당필기(閱微草堂筆記)』를 펴내기도 하였다. 유배에서 돌아온 후 중요 관직을 역임하다가, 1773년 사고전서 총재관(四庫全書 總裁官)에 임명되어 『사고전서』 및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를 편찬하였다. 1805년 협판대학사(協辦大學士)와 태자소보(太子少保)를 겸임하던 중 사망하였다.

기균은 학문과 문장이 뛰어난 조선의 관리 홍양호(洪良浩)와 깊은 교유를 나누었다. 또한 기균의 뛰어난 학문에 대한 실력은 조선의 사신단이 연행을 마친 후 조정에 보고할 정도로 평가받고 있었다[『정조실록』 23년 11월 17일 신미 7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 및 조선 측 자료에는 해당 이름의 한자가 기균(紀均)·기균(紀勻)·기윤(紀昀) 3가지로 기록되어 있는데, 모두 동일인이다. 『청실록』에는 기윤(紀昀)으로 기재되었다.

저술 및 작품

『기문달공집(紀文達公集)』, 『대씨고공기도서(戴氏考工記圖序)』, 『열미초당필기(閱微草堂筆記)』

참고문헌

  • 벤저민 엘먼(Benjamin A. Elman) 지음, 양휘웅 옮김, 『성리학에서 고증학으로』, 예문서원, 2004.
  • 서울대학교 동양사학연구실 편, 『강좌 중국사 4: 제국질서의 완성』, 지식산업사, 1989.
  • 임계순, 『청사: 만주족이 통치한 중국』, 신서원, 2000.
  • 이민숙, 「《열미초당필기》에 나타난 작자의 창작동기와 심리상태」, 『중국연구』 30, 2002.
  • 진재교, 「18세기 조선조와 청조 학인의 학술교류-홍양호와 기윤을 중심으로-」, 『고전문학연구』 23, 200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