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주노(急走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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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각 역참에서 역마의 입대(立待)와 물품의 운송, 문서의 전달 등을 담당한 역노비.

개설

급주노(急走奴)는 조선시대에 역참에 배정된 역노비(驛奴婢) 또는 역졸(驛卒)로, 급주노자(急走奴子) 혹은 급주노비(急走奴婢)로 불리기도 하였다. 역노비는 삼국시대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 기록에는 고려시대 말기부터 등장하는데, 조선시대에 이르러 전운노비(轉運奴婢)와 급주노비로 나뉘어졌다. 전운노비는 역에서 사신의 짐을 비롯해 진상품과 공물 등 각종 관수 물자를 운반하는 일을 주로 맡아보았고, 급주노비는 문자 그대로 다리 힘[脚力]을 이용해 ‘빨리 달려가’ 문서 및 물품을 전달하는 업무를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담당 직무

급주노의 유래는 중국 송나라의 체포(遞鋪)에서 찾을 수 있다. 체포는 공문서를 전달하는 방법의 하나로, 사람의 다리 힘을 이용하는 보체(步遞), 말이나 마차 등을 이용하는 마체(馬遞), 말을 이용하거나 사람이 달려가 급히 전달하는 급각체(急脚遞) 등으로 구분되었다. 이러한 체포 제도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마체는 마종(馬從)으로, 보체는 보종(步從)으로, 급각체는 급주노로 분화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398년(태조 7)에 동북면을 개척하면서 함경도 경성(鏡城)의 각 참(站)에 급주인(急走人) 5명을 배정했다는 기록을(『태조실록』 7년 2월 3일) 통해 최초로 등장한다. 『경양역지(景陽驛誌)』에는 전관급주(傳關急走)라는 명칭으로 7명이 배정되어 관문(關文) 즉 공문서를 전송하는 일을 맡아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급주노는 다리 힘을 이용해 문서 및 물품을 전달하는 일을 담당한 것으로 짐작된다.

변천

조선후기에 이르면 전운노비는 거의 사라지고 급주노비만 존속하였는데, 『경양역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전관급주로 바뀌어 문서를 수발하는 일을 주로 담당하였다.

또한 조선전기에는 전운노비와 급주노비에게 입역의 대가로 각각 50복(卜)과 1결(結)씩의 구분전(口分田)을 지급하여 스스로 경작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에 접어들어서는 ‘각자수세(各自收稅)’라 하여 민전(民田)수조권(收租權)을 설정해 전조(田租)를 수취하게 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참고문헌

  • 『경양역지(景陽驛誌)』
  • 전형택, 『朝鮮後期 奴婢身分硏究』, 일조각, 1989.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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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