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성진(龜城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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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안도의 귀성 지역에 설치되었던 지방 방위 조직인 진관.

개설

고려시대 성종 13년에 여진을 쫒아내고 귀주성을 쌓은 것이 귀성진의 출발이었다. 후기에 몽골과의 전쟁, 동녕부의 설치 파동 등을 겪으면서 없어졌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세조 때 이른바 사군(四郡)을 혁파하고, 방위를 강화하기 위해 귀주를 신설하여 그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이를 계기로, 또한 군익도 및 진관(鎭管) 체제로 지방 군제를 개편하면서 1457년에 비로소 귀성진을 설치하였다. 귀성도호부로 승격하고 소속 진이 이동되는 등 약간의 변화를 거쳐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지방 군제를 개편할 때 영장제를 도입하여 별좌영장을 겸하게 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 성종 13년에 여진을 몰아내고 성을 쌓아 귀주(龜州)라 부르면서 시작되었다. 후기에 들어와 몽골과 오랜 기간 전쟁하면서 북계(北界) 지방이 피폐하고 동녕부가 설치되는 등의 파동을 겪으면서 사라졌다. 그 뒤 조선에 들어와 세조 때 사군을 혁파하고 그 주민들을 후방으로 이주시키면서 방위를 위해 귀성군(龜城郡)으로 신설되었다. 즉 여연(閭延)·무창(茂昌)·우예(虞芮) 세 지역 주민 가운데 자성(慈城)·강계(江界)에 거주하고자 하는 자는 들어주고, 나머지는 귀성(龜城)으로 옮기도록 했다. 이때 양계(兩界)의 군익도체제를 전국으로 확장하면서 연해뿐만 아니라 내륙에도 진을 설치하되 거진(巨鎭)을 두고 주변 고을을 분속시켰는데, 삭주(朔州)의 중익(中翼)에 소속되었다(『세조실록』 1년 7월 12일).

이를 계기로 그 강역(疆域)을 대폭 확대시켰는데, 정주(定州)와 삭주의 일부를 옮겨 소속시키고 그에 거주하는 민호(民戶)까지도 소속하게 했다. 곽산(郭山) 땅도 일부 넘겨받았다. 또한 한명회(韓明澮)의 건의로 아전(衙前)과 급사(給事)까지도 보충을 받았다.

1457년에 군익도체제를 진관체제로 개편할 때 주요한 지역을 거진으로 삼고 주변의 제진(諸鎭)을 그 휘하에 소속시켰다. 거점 방어를 강화하면서 일원적 군사체제를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다. 이때 신설된 귀성군은 고을임에도 불구하고 방어상의 중요성 때문에 선천·곽산·태천·운산을 거느린 진관으로 설립되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그 뒤에도 계속해서 확대를 시도하여, 사군 중 하나인 자성마저 혁파한 뒤 주민 중의 일부를 귀성진으로 옮겼다(『세조실록』 5년 1월 15일). 아울러 관사와 창고 등을 짓기 위해 평양·영변·의주의 번상 차례를 당하여 근무 중에 있는 선군(船軍) 200명을 3년간 사역에 동원하기도 했다(『세조실록』 12년 2월 3일). 그럼에도 여전히 군(郡)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도호부로 승격시키려 했다. 진관으로 설정되었음에도 귀성지군사(龜城知郡事)를 차임한다는 것은 격에 맞지 않았다. 1466년(세조 12)에 귀성절제사가 부임한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정식으로 승격된 것으로 추측된다. 방어력을 한층 강화하기 위해 1465년부터 성을 쌓기 시작하여 이듬해 가을까지 마치도록 했다.

1459년에 운산을 영변에 붙이고, 1469년(예종 1)에는 태천을 영변진(寧邊鎭)으로 이속시키는 등의 변화를 거쳐 진관이 확립되어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수록되었다. 다만 병조의 건의로 귀성 등의 8개 고을 수령은 당상관(堂上官)으로 임명하여 번(番)을 나누어 가서 지키게 했다(『성종실록』 8년 9월 4일).

조직 및 역할

『경국대전』에 의하면 귀성도호부사가 종3품의 병마첨절제사를 겸하면서 진관을 통솔하되, 그에 소속된 선천·곽산에는 군수가 종4품의 병마동첨절제사를 겸하여 지휘를 받게 했다. 중앙에 올라가 대열(大閱) 등에 참가했을 때에는 중앙 군사 조직인 오위(五衛)에 소속되는데, 우위(右衛)였던 호분위(虎賁衛)의 좌부(左部)에 속하였다.

광해군 때 종9품 무관인 부사용한교(韓嶠)의 상소에 따르면, 압록강 일대의 각 읍을 일위 독진(一衛獨陣)으로 만들어 외적을 지키되 본도의 내지 또는 황해도의 군사를 합하여 윤번제로 들어가 지키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변방의 경보에 대비해 안팎에서 서로 돕도록 귀성 등 5개의 진관을 설치하여 오위연진(五衛連陣) 제도를 만들었다. 이는 혹시라도 변성(邊城)이 수비를 못할 상황이 되면 주현의 군민이 각각의 소속 진관에 들어가 방어하도록 하는 제도였다(『광해군일기』 3년 3월 29일).

변천

임진왜란 이후 지방 군제를 개편하면서 진관체제에도 변화가 생겼다. 광해군 때 평안도관찰사를 지낸 박엽(朴燁)이 5진 대신 7진을 배치하면서 성천·영변·귀성·평양 등의 4진은 폐지되었다가 인조반정 이후에 복구되었다(『인조실록』 3년 7월 6일).

1681년(숙종 7) 비변사의 건의로 평안도의 조직 체계가 바뀌면서 귀성이 독진(獨鎭)이 되어 형세를 관찰하면서 변통(變通)에 대비하게 되었다(『숙종실록』 7년 8월 2일). 여러 갈래의 길이 하나로 합쳐지는 요충지이므로 독진임에도 불구하고 곽산에 소속시켜 영장(營將)의 통솔에 따르도록 했다. 이로 인해 사변(事變)이 있으면 곽산에서 관할하게 되어 귀성을 지키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따라서 영장(營將)의 칭호를 겸해서 주되 태천, 안의, 식송 등 부근의 진을 아울러 소속시켰다(『숙종실록』 7년 11월 27일).

아울러 진관 소속의 제진에도 변동이 생겼다. 선천은 부사가 종2품 방어사를 겸하면서 승격되어 나갔으며 대신 안의와 청강(淸江)이 관할로 들어왔으나 『대전통편』에서 후자가 서림(西林)으로 바뀌었다. 곽산의 경우 『대전회통』에서 첨절제사로 승격되어 나갔다.

다른 한편 지방군의 강화하고자 영장제(營將制)를 도입하여 처음에는 전임 영장을 두었으나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폐지했다. 병자호란 이후에 충청도·전라도·경상도를 제외하고는 수령에게 영장을 겸임시켰다. 1722년(경종 2) 청천강 남북의 영장을 9명에서 5명으로 줄이되 모두 토포사를 겸하게 하면서, 귀성진의 수령은 수성장(守城將)을 겸직시켰다. 그리고 안의·식송진은 그대로 소속시켰다(『경종실록』 2년 3월 13일). 뒷날 다시 9명으로 늘어나면서 『속대전』에 이르러 귀성부사가 별좌영장을 겸하도록 규정하였다. 안의·청강·식송진을 소속시켰다. 『대전통편』에서는 청강을 서림으로 고쳤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속대전(續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민현구, 『조선초기의 군사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 서태원, 『조선후기 지방군제연구』, 혜안, 1999.
  • 오종록, 『조선초기 양계의 군사제도와 국방체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육군본부, 『한국군제사 - 근세조선 전기편 -』, 1968.
  •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