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태지봉(槐台之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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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직봉 노선 중 제5봉수로의 연변봉수(沿邊烽燧)로, 오늘날 경기도 평택시포승면 원정리의 봉화재 구릉에 위치.

개설

조선시대에 전라도 순천 방답진(防踏鎭)의 돌산도(突山島)에서 처음 봉화가 오르면 정해진 봉수를 거쳐 같은 지역의 망해산(望海山)에서 보내는 신호를 받아 경기도 화성의 흥천산(興天山)으로 연결되었다. 그 외에도 옥구의 화산(花山)에서 초기(初起)하는 제5봉수로 간봉 제2노선의 봉수는 면천 창택곶(倉宅串)에 이르러 제5봉수로의 직봉과 연결되었다. 괴태지봉은 1454년(단종 2) 이전에 설치되었으며, 1895년(고종 32)에 봉수제가 폐지됨에 따라 철폐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괴태지봉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서해안을 침범하는 왜구의 침입 여부를 한양의 경봉수(京烽燧)에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에 속하였으며, 경기수군절도사(京畿水軍節度使)가 이를 관할하였다. 1783년(정조 7)에 간행된 『강화신지(江華新誌)』에 따르면, 괴태지봉은 통어영(統禦營)에 속하여 동쪽으로는 직산망해산(望海山), 북쪽으로는 수원흥천산(興天山)에 응하였으며 봉수군(烽燧軍)은 100명이었다.

조직 및 역할

괴태지봉의 역할은 1690년(숙종 16)에 왕이 대신과 비변사의 재신(宰臣)들을 인견(引見)할 때, 호조 참판 이의징(李義徵)이 변사(邊事)에 대비하기 위해 건의한 대책에 나타나 있다. 이의징은 봉화와 척후(斥候)를 언급하면서, 경기도의 중진(重鎭)인 수원의 천주봉수(天柱烽燧)에 대응하는 봉수로 양성(陽城)의 괴태봉수(槐台烽燧)가 있다고 하였다(『숙종실록』 16년 4월 23일). 즉 괴태지봉은 수원의 천주봉수와 서로 응하면서 신호를 주고받았음을 알 수 있다.

변천

괴태지봉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괴태길곶봉화(槐台吉串烽火)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남쪽으로는 면천명해산(明海山), 북쪽으로는 수원흥천산(興天山)의 봉수와 서로 연결되었다. 괴태지봉의 위치와 상응하는 봉수는 이후에 발간된 지리지에도 별다른 차이 없이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다만 봉수 명칭의 한자 표기만 약간 차이가 있다. 『경기지(京畿誌)』의 「양성현읍지(陽城縣邑誌)」에 따르면, 현(縣)의 서쪽 100리 지점에 있으며, 남쪽으로는 충청도 면천의 창택산(倉宅山)과 직산망해산에 응하며, 북쪽으로는 수원흥천산에 응하였다고 한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을 계기로 봉수제가 철폐되고, 이듬해 군부의 주청(奏請)에 의해 각지의 봉대와 봉수군이 폐지되면서 괴태지봉도 사라지게 되었다.

봉수의 형태

괴태지봉의 봉수는 평면 형태가 동서 방향이 장축을 이루는 직사각형 모양의 세장방형으로, 상단 대지와 하단 대지를 갖춘 이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단면 형태는 동서 방향으로 긴 ‘철(凸)’ 자 모양이다. 상단 대지의 길이는 남북이 12m, 동서가 63m이고, 하단 대지의 길이는 남북이 31m, 동서가 89m이다. 하단 대지의 전체 둘레는 239m이며, 3m~3.5m의 높이로 흙을 쌓아 만들었다. 상단 대지는 둘레가 138m로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외벽의 최고 높이는 약 4m이다. 내부 시설물에는 연조 4기와 건물 터 1동, 출입 시설 3개소가 있다. 봉수의 상단 대지 주변에서는 어골문·파도문·무문의 기와 조각들과 토기 및 자기의 조각 등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채집됐다. P00012507 01.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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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강화신지(江華新誌)』
  • 『경기지(京畿誌)』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경기도박물관, 『평택 관방유적(Ⅰ)』, 경기도박물관, 1999.
  • 김주홍, 『조선시대의 연변봉수』, 한국학술정보,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