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묘(光海君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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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위된 조선 15대 왕 광해군과 그 부인 유씨(柳氏)의 무덤.

개설

광해군은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폐위된 뒤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함께 유배된 유씨는 그해에 병으로 죽어 양주 적성동에 묻혔다(『인조실록』 1년 10월 8일). 광해군은 1637년(인조 15)에 제주도로 이배되었다가 1641년(인조 19)에 67세의 나이에 병으로 죽어(『인조실록』 19년 7월 10일), 부인 유씨의 오른쪽에 안장되었다. 묘 뒤쪽으로는 광해군의 형 임해군(臨海君)과 생모 공빈김씨(恭嬪金氏)의 무덤 등이 흩어져 있다. 1991년에 사적 제363호로 지정되었다.

조성 경위

1623년에 폐비 유씨가 죽자 조정에서는 왕자 부인의 예에 따라 예장하기로 하였으며, 묘의 경계는 왕자 묘의 보수(步數)인 300보를 더하였다. 그 뒤 1641년(인조 19) 7월 1일에 광해군이 제주에서 세상을 떠나자, 예조 참의채유후(蔡裕後)를 보내 장례의 절차를 주관하여 시신을 장지인 양주 적성동까지 운구하도록 하였다. 이때 예조(禮曹)에서는 장례를 왕자군 1등의 예로 치르기를 청하였는데, 인조는 그에 더하여 장생전(長生殿)에서 만든 재궁(梓宮)으로 관을 바꾸고 염(斂)을 다시 하게 하였다. 또 승지를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한 다음, 그해 10월 4일 양주에 장사하였다.

조성 상황

묘역은 3단으로 구분된다. 상계에는 봉분 주변에 곡장을 두르고 광해군과 유씨의 봉분을 나란히 배치하였으며, 봉분 앞에 광해군과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 유씨의 묘표를 각각 두었다. 한 단 아래 중계에는 상석과 향로석을 각각 놓고 망주석, 문인석을 좌우에 1쌍씩 설치하였다. 그 아래 하계에는 중앙에 장명등을 두었다.

문성군부인 유씨의 묘표 뒷면에는 ‘천계삼년계해윤시월이십구일예장(天啓三年癸亥閏十月二十九日禮葬)’이라 적혀 있어, 유씨의 사망 직후인 1623년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광해군의 묘표 첫 부분에는 ‘신사칠월초일일병졸어제주(辛巳七月初一日病卒於濟州)’라고 적혀 있고, 제주에서부터 운구하여 장례를 마치기까지의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변천

광해군묘의 제사는 연산군의 예에 따라 외손이 맡기로 하였다. 영조 연간에는 무너진 봉분을 보수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영조실록』 23년 12월 21일)[(『영조실록』 39년 4월 19일).

참고문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월사집(月沙集)』
  • 경기도박물관, 『경기묘제석조미술』, 주자소,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