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봉(廣山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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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제2봉수로의 간봉 제1노선에 속한 봉수로, 오늘날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봉화산(烽火山) 정상에 위치.

개설

조선시대에 동래 간비오(干飛烏)에서 처음 봉수가 오르면 정해진 노선을 따라 같은 지역의 대소산(大所山)을 거쳐 안동봉지산(峰枝山)에서 일대의 봉수가 합쳐졌다. 이 노선은 제2봉수로 직봉(直烽)에 속한 간봉 제1노선에 해당한다. 이후 직봉이 만나는 안동 개목산(開目山)에서 합쳐졌다가, 경상도와 충청도에 위치한 여러 봉수를 경유하여 당일 경기도의 천림산(天臨山)에 이르고 최종적으로 한양목멱산(木覓山) 제2봉수에 응하였다. 광산봉은 1425년(세종 7) 이전에 처음 설치했으며, 1895년(고종 32)에 봉수제가 철폐되면서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광산봉은 영해부(寧海府)에 소속되었으며, 경상좌도병마절도사의 지휘를 받았다. 조선시대에 경상도 남해안을 침범하는 왜구의 침입 여부를 수도 한양의 경봉수(京烽燧)에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했다.

변천

광산봉은 조선시대 전기에 영해도호부(寧海都護府)에 속하였는데, 이후 조선시대 전 기간 동안 운용되었다. 최초의 기록은 1425년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에 광산봉화(廣山烽火)라는 명칭으로 나타나는데, 서쪽 진보현의 남각산봉화(南角山烽火)와 27리(약 10㎞)의 거리를 두고 바라본다고 하였다. 또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는 광산연대봉화(廣山煙臺烽火)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는데, 동쪽 대소산연대봉화(大所山煙臺烽火)에 응하는 노선이 신설되어 한동안 유지되었다고 한다. 1760년(영조 36)에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종전에 서쪽으로 응하였던 진보현 남각산봉수 대신 신법산봉수(神法山烽燧)가 신설되었다. 그에 따라 조선후기에는 동래 간비오에서 봉화가 오르면 같은 지역에 있는 대소산봉수를 거쳐 광산봉에 도착한 뒤 진보현 신법산봉수에 응하였다. 이후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을 계기로 봉수제가 철폐되고, 이듬해 군부의 주청(奏請)에 의해 각지의 봉대와 봉수군이 폐지되면서 광산봉 역시 없어졌다(『고종실록』 32년 윤5월 9일).

광산봉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1746년(영조 22)에 영해부사 이징하(李徵夏)가 올린 상소에서 등장한다. 이징하의 상소는 원래 봉수가 있던 영양과 덕현은 예부터 길이 매우 순탄하였는데 중간에 영해부 광산(廣山)으로 이설하면서 산세가 험준하고 외져서 지키는 자가 고생을 견디지 못하니 광산봉을 철폐하고 다시 덕현으로 이설해 달라는 내용이었다(『영조실록』 22년 12월 6일).

한편, 봉수제가 철폐된 뒤 오늘날까지도 이곳 주민들은 매년 초파일에 마을의 평안을 빌고 호환(虎患)을 물리치기 위해 봉수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봉수의 부속 시설

광산봉은 해발 고도가 높은 내지에 위치해 있지만, 구조 및 형태상 석축의 연대를 갖춘 연변봉수에 해당한다. 산 정상 남쪽에서 북쪽으로 길게 능선을 이루는 곳에 자연 암반을 기저부로 하여 석축의 방호벽(防護壁) 내에 연대(煙臺) 1기와 개방형의 출입 시설 및 창고를 갖추고 있다. P00012506 01.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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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김주홍, 『조선시대의 연변봉수』, 한국학술정보, 2010.
  • 대구대학교 중앙박물관, 『盈德 烽燧臺 地表調査報告書』, 대구대학교 중앙박물관,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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