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물헌(觀物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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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의 동궁 영역에 속하며, 왕이 신하를 소견하고 진강하던 장소로 쓰인 건물.

개설

정조 때 관물헌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 나타난다(『정조실록』 7년 11월 26일). 규모가 협소한 데다 영역이 좁으며, 담장은 전각에 바짝 붙어 있고 사방에서 햇볕이 들어 더위에 열악한 곳이었다. 그러므로 신하들은 정조에게 옮겨 거처하라고 했으나 주위가 고요한 것은 물론, 좁은 방이 마음을 안정시켜 준다며 정조 자신은 편안해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정조는 중희당(重熙堂)이 완성되기 전까지 매일 앞뒤로 연달아 놓인 성정각(誠正閣)과 관물헌을 오가며 신하들을 소대했다. 관물헌에서 문신들에게 강경(講經) 시험·과차(科次)를 치르게도 했고, 약방을 들게 하여 진료를 받기도 하였다.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孝明世子) 역시 이곳을 서연의 장소로 썼고 고종도 즉위 초 약 2년간 소대와 진강, 약방의 입진 등으로 빈번히 사용했다. 현재 관물헌에 걸린 ‘집희(緝熙)’라는 현판의 글씨는 이때의 고종이 쓴 것으로 보인다. 이후, 관물헌에서는 1874년(고종 11) 2월 8일 고종과 명성황후(明成皇后)와의 사이에서 순종이 탄생하였고, 백일이 될 때까지 이 집에서 성장하였다(『고종실록』 11년 5월 19일).

위치 및 용도

성정각의 동북쪽에 연이어 있다. 희정당(熙政堂) 동쪽, 중희당 서쪽 그 사이에 들어 있는 동궁 영역의 전각 중 하나였다. 왕이 편하게 신하를 대면하는 편전으로 전용되기도 하였고 왕후의 산실청으로 쓰여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탄생처가 되기도 하였다. 「동궐도(東闕圖)」에는 유여청헌(有餘淸軒)으로 표기되어 있고, 「동궐도형(東闕圖形)」에는 관물헌으로 표기되어 있다.

변천 및 현황

「동궐도」 상에서 관물헌은 북쪽에 자리하며, 단청하지 않은 여러 채의 집과 초가집, 모정 등이 모여 있는 소박한 공간이었다. 이후 순종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궐도형」에서는 부속 건물이 모두 사라졌고 「동궐도」와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어 지금에 이른다.

형태

정면 6칸, 측면 3칸, 익공계집이다. 정면 두 칸은 대청, 양쪽 각 두 칸씩은 온돌이며 각기둥으로 꾸몄는데 동쪽 끝에 반 칸을 뒤로 물려 ‘루(樓)’를 달아 놓았다. 이중처마에 팔작지붕을 얹었고 7단의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높은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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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건 및 일화

관물헌은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金玉均) 등에 의해 고종과 왕비가 경우궁, 계동궁 등으로 이어하였다가 창덕궁으로 환궁하면서 머문 시어소가 되기도 했다. 왕을 감시하던 개화당의 거점이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고종실록』 24년 윤4월 19일).

고종의 서거 이후 덕수궁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던 덕혜옹주(德惠翁主)가 그의 어머니 복녕당(福寧堂) 양씨(梁氏)와 함께 창덕궁에 들어와 관물헌에서 살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경헌집(敬軒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궁궐지(宮闕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홍재전서(弘齋全書)』「동궐도(東闕圖)」「동궐도형(東闕圖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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