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진창(貢津倉)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충청도 일대에서 생산되는 세곡을 서울로 운송하기 위하여 충청도 아산 공세리에 설치한 조창.

개설

공진창은 충청도에 설치되었던 조창(漕倉)이다. 조선초 정부는 전국에서 생산되는 세곡을 중앙으로 운송하기 위하여 각 도에 조창을 설치하였는데, 충청도에는 공진창이 설치되었다. 조창에는 세곡을 운반할 조선(漕船)과 조운활동에 종사하는 인력인 조군(漕軍)이 각각 배치되는데, 공진창에는 60척의 조선이 배치되어 있었고, 1척에는 대략 18명의 조군이 승선하였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경강상인(京江商人)의 사선임운(私船任運)이 활발해지면서 공진창의 세곡 징수 및 관리 영역은 점차 축소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충청도는 전라도에 못지않은 곡창지대로서 일찍부터 국가 재정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조선초 정부는 이 일대의 세곡을 운송하기 위하여 면천현 삽교천 인근에 조창을 설치하였으나, 물길이 얕아지고 갯벌이 쌓이자 조창을 다른 데로 옮겨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세종대 정부는 조창을 아산군 인주면 공세리로 옮기고 공세곶창이라 불렀다. 그러나 아직 창사가 설치되지 않아 연해안 포구에 세곡을 노적해두었다. 1523년(중종 18) 비로소 이곳에 80칸의 창사를 마련하고, 창고의 명칭을 공진창이라 불렀다. 공진창은 국가가 세곡 운송에 직접 관여하여 안정적으로 세곡을 조달하려는 의도에서 설치하였다.

조직 및 역할

공진창은 국가에서 관리하는 조창이었던 만큼 해운판관(海運判官)의 감독과 지휘를 받았다. 해운판관은 전함사(典艦司) 소속의 종5품 관리로 수운판관(水運判官)과 함께 국가의 조운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중앙에서 파견하는 경관직이기 때문에 조창에 상주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직접 세곡을 징수하여 조창에 보관하는 등의 실질적인 책임은 기본적으로 해당 지역의 수령, 즉 아산현감에게 있었다. 공진창에는 이외에도 감관(監官), 색리(色吏), 고직(庫直), 선직(船直) 등의 구성원이 존재하였다. 감관은 향소(鄕所)에서 선출된 인물로 조운선에 탑승하여 세곡 운송을 감독하였다. 색리는 공진창의 실무자로 곡식을 거두고 배분하는 역할을 맡았고, 고직은 창고에 보관된 세곡을 지키는 인원이었으며, 선직은 조창에 배속된 조운선을 관리하였다.

변천

조선전기 공진창은 충주의 가흥창(可興倉)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조창이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연해 조창에 배속된 조운선이 155척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 38%에 해당하는 60척이 공진창에 소속되었다. 그리고 충청도 40고을에서 수취한 약 4만 6,800여 석의 세곡을 보관하고 운송하는 창고였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사선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공진창의 역할은 점차 축소되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경강에서 선상활동을 하던 상인들이 세곡 운수업에 적극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16세기 공진창에서 세곡을 수납하던 고을은 아산·목천·연기·천안·온양·전의·청주 등 7개 고을로 대폭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세곡을 운송하던 조선도 60척에서 15척으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해운판관이 폐지되고, 그 업무를 충청도도사(都事)가 겸임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1762년(영조 38)부터는 아산현감이 직접 조선을 이끌고 납입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19세기에 이르면 속읍이 4~5개 고을로 줄어드는 등 점차 그 영향력을 잃어 갔다. 이후 공진창은 그 명맥을 유지하다가 19세기 후반에 폐지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
  • 최완기(崔完基), 『조선후기(朝鮮後期) 선운업사연구(船運業史硏究)』, 일조각(一潮閣), 1989.
  • 안길정, 「『조행일록』으로 본 19세기 조운의 운영실태」, 『사림』 29, 수선사학회, 2008.
  • 최완기(崔完基), 「조선시대(朝鮮時代) 아산(牙山) 공진창(貢津倉)의 설치와 운영」, 『전농사론(典農史論)』 7, 서울시립대학교, 200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