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구(高麗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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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대 성경장군의 관할 지역에 있던 지역.

개설

고려구는 청대 성경장군(盛京將軍)의 관할 지역으로, 동변외(東邊外)에 해당하여 백성들이 함부로 이 지역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청의 백성들이 몰래 벌목(伐木)하거나 어업을 하였고, 결국 1803년에 대규모 벌목 사건이 일어났다. 청은 이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성경장군 등을 대거 문책하였고, 해결 과정에서 조선의 장자도(獐子島)로 도망갔던 우두머리인 유문희(劉文喜) 등을 잡아갔다. 이러한 사건을 방지하기 위하여 조선은 1808년(순조 8)에 장자도에 첨사진(僉使鎭)을 두었다.

관련 기록

유조변(柳條邊)은 수축 시기에 따라 노변(老邊)과 신변(新邊)으로 나뉘고, 이는 다시 동변(東邊)과 서변(西邊)으로 구분되었다. 동변은 봉황성(鳳凰城)에서 시작하여 위원보(威遠堡)에 이르렀다. 특히 동변외 지역, 즉 유조변의 동변에서 압록강 서안에 이르는 지역은 일찍부터 한인(漢人)은 물론 기인(旗人) 중 허가를 받지 않은 자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고려구 역시 이 범위 안에 해당되었다.

고려구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1784년(정조 8) 6월의 『일성록』 기록에 의하면, 고려구자(高麗溝子)는 평안도 용천부(龍川府)의 미곶진(彌串鎭) 건너편 중국 땅에 있다고 하였다. 또한 『순조실록』에 용천부 장자도와 40리 거리라고 하였다. 이를 고려하면 고려구는 지금의 요녕성(遼寧省) 동항시(東港市) 일대로 보인다. 이곳은 어업의 이익이 풍부하기 때문에 요동(遼東) 출신의 어민들이 여기에서 생계를 마련하고 있었다. 또한 선박이 모두 모이는 곳이므로 용천(龍川)과 박천(博川)의 백성들이 몰래 국경을 넘어가는 폐단과 약탈하는 일도 있었다.

고려구가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803년이었다. 1803년 7월에 가경제(嘉慶帝)는 동변외의 고려구 일대에서 대규모 불법 벌목이 이루어진다는 보고를 받았다. 가경제는 이 사건의 책임을 물어 성경장군진창(晉昌) 등 관련 관원들을 대거 문책하였다.

같은 해 9월에 청조에서는 대규모 벌목을 주도하였던 유문희 등 6명이 조선의 장자도 일대로 도망갔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을 나포하기 위하여 조선에 협조를 요청하였다(『순조실록』 3년 9월 2일). 청은 여순(旅順)의 수군(水軍)과 수암현(岫巖縣)의 군사들을 조발(調發)하여 고려구와 장자도 등지에 주둔하여 모여 있는 비적(匪賊)을 엄습하였다. 청군은 그 수범(首犯) 4명을 체포하였는데, 유독 유문희·고학언(顧學彦) 2명을 잡지 못하였다고 한다. 문제는 청에서 이 지방에 군사를 조발하여 머물게 하고 방수하려 한다는 소문도 있었다는 것이다(『순조실록』 3년 11월 15일).

조선의 동지사(冬至使)는 북경에서 이 사안에 대한 사실 관계를 파악하여 보고하였다. 즉, 흠차부도통(欽差副都統)책발극(策拔克) 등이 청은 고려구, 조선은 장자도에 목책(木柵)과 진터를 설치하여 방어하자고 주청한 사실을 알렸다(『순조실록』 4년 3월 22일)(『순조실록』 4년 3월 25일).

이 때문에 조선은 본격적으로 장자도에 진을 설치하는 내용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1807년(순조 7) 9월에 조선은 청의 예부(禮部)에 자문(咨文)을 보내 장자도에 진을 설치하겠다는 의향을 보여 같은 해 11월에 허가를 받았다(『순조실록』 7년 11월 26일). 결국, 조선은 1808년 1월에 장자도에 진을 설치하였다(『순조실록』 8년 1월 4일).

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
  • 『동문휘고(同文彙考)』
  • 『청실록(淸實錄)』
  • 구범진, 「19세기 盛京 東邊外 山場의 管理와 朝·淸 公同會哨」, 『사림』 32, 200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