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소공주 묘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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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23권, 세종 6년(1424) 2월 25일 신미(辛未) 1번째 기사====
 
====『세종실록』23권, 세종 6년(1424) 2월 25일 신미(辛未) 1번째 기사====
{{Blockquote|왕녀(王女)가 궁중에서 졸(卒)하였으니, 나이 13세였다. 3일 동안 조회와 저자를 정지하고 육선(肉膳)도 철수하였다. 예장(禮葬)·조묘(造墓) 두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부정윤(副正尹) [[이석(李碩)]]이 상례를 주장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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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왕녀(王女)가 궁중에서 졸(卒)하였으니, 나이 13세였다. 3일 동안 조회와 저자를 정지하고 육선(肉膳)도 철수하였다. 예장(禮葬)·조묘(造墓) 두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부정윤(副正尹) [[이석(李碩)]]이 상례를 주장하게 하였다(王女卒于宮內, 年十三。 停朝市三日, 輟肉膳, 設禮葬、造墓兩都監, 命副正尹碩主喪).|출처=[http://sillok.history.go.kr/id/kda_10602025_001 『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1424) 2월 25일 신미(辛未) 1번째 기사]}}
 
 
王女卒于宮內, 年十三。 停朝市三日, 輟肉膳, 設禮葬、造墓兩都監, 命副正尹碩主喪.|출처=[http://sillok.history.go.kr/id/kda_10602025_001 『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1424) 2월 25일 신미(辛未) 1번째 기사]}}
 
 
 
 
====『세종실록』23권, 세종 6년(1424) 2월 25일 신미(辛未) 4번째 기사====
 
====『세종실록』23권, 세종 6년(1424) 2월 25일 신미(辛未) 4번째 기사====
{{Blockquote|왕녀(王女)의 습(襲)과 대·소렴(大小斂)과 전(奠)의 품수(品數)를 [[정선공주(貞善公主)]]의 예에 의하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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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왕녀(王女)의 습(襲)과 대·소렴(大小斂)과 전(奠)의 품수(品數)를 [[정선공주(貞善公主)]]의 예에 의하도록 명하였다(命王女襲大小斂奠品, 依貞善公主例).|출처=[http://sillok.history.go.kr/id/kda_10602025_004 『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1424) 2월 25일 신미(辛未) 4번째 기사]}}
 
 
命王女襲大小斂奠品, 依貞善公主例.|출처=[http://sillok.history.go.kr/id/kda_10602025_004 『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1424) 2월 25일 신미(辛未) 4번째 기사]}}
 
 
 
 
====『세종실록』23권, 세종 6년(1424) 3월 3일 기묘(己卯) 4번째 기사====
 
====『세종실록』23권, 세종 6년(1424) 3월 3일 기묘(己卯) 4번째 기사====
{{Blockquote|왕녀에게도 [[정선공주(貞善公主)]]의 초상과 같이 [[칠곽(漆槨)]]을 사용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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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왕녀에게도 [[정선공주(貞善公主)]]의 초상과 같이 [[칠곽(漆槨)]]을 사용하라고 명하였다(命王女與貞善公主喪, 皆用漆槨).|출처=[http://sillok.history.go.kr/id/kda_10603003_004 『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1424) 3월 3일 기묘(己卯) 4번째 기사]}}
 
 
命王女與貞善公主喪, 皆用漆槨.|출처=[http://sillok.history.go.kr/id/kda_10603003_004 『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1424) 3월 3일 기묘(己卯) 4번째 기사]}}
 
 
 
 
====『세종실록』23권, 세종 6년(1424) 3월 23일 기해(己亥) 5번째 기사====
 
====『세종실록』23권, 세종 6년(1424) 3월 23일 기해(己亥) 5번째 기사====
{{Blockquote|왕녀 묘지명(王女墓誌銘)에 말하기를, "영락 22년 갑진 2월 경자에 우리 주상 전하의 맏딸이 병으로 졸(卒)하였으니, 연령이 겨우 13세이다. 특히 공주(公主)의 칭호를 주시고, 올해 4월 신유에 고양현(高陽縣) 북쪽 산리동(酸梨洞) 언덕에다 장사한다. 공주는 나면서부터 현숙하고 완순(婉順)하며, 자태와 용모가 단정하고 개결(介潔)하였다. 총명하고 슬기롭기가 범인과 달랐으며, 자라서는 장중(莊重)하고 말이 적었고, 즐거워하고 성냄이 얼굴빛에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양궁(兩宮)께서 자애하기를 더욱 두터이 하였으며, 궁액(宮掖) 가운데에서 모두 공경하고 우러러보아, 엄숙하면서 화목한 행실이 있어 길이 귀척(貴戚)들의 의범이 될 것을 기대하였더니, 불행하게도 나이가 계(筓)할 때도 미치지 못하고 급거히 양궁(兩宮)의 슬픔을 끼치었으니, 진실로 천도(天道)란 앎이 없는 것이라 하겠다. 아아, 슬픈 일이로다."하고, 명(銘)에 말하기를, "애처롭다 현철한 아가씨여, 일찍부터 태교(胎敎)를 받으시어 덕도 있고 용모도 뛰어났으며, 능히 삼가하며 효도하였는데, 천도가 창망(蒼茫)하여 어느덧 유명을 달리 하였도다. 국인(國人)들의 슬픔을 어찌 다함이 있으리오. 길한 땅으로 점을 치고 좋은 날로 정했으니, 이미 굳고 또 정밀하여 만세토록 갈무려 계실 곳이라." 하였으니, 예문 제학(藝文提學) [[윤회(尹淮)]]가 찬(撰)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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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왕녀 묘지명(王女墓誌銘)에 말하기를, "영락 22년 갑진 2월 경자에 우리 주상 전하의 맏딸이 병으로 졸(卒)하였으니, 연령이 겨우 13세이다. 특히 공주(公主)의 칭호를 주시고, 올해 4월 신유에 고양현(高陽縣) 북쪽 산리동(酸梨洞) 언덕에다 장사한다. 공주는 나면서부터 현숙하고 완순(婉順)하며, 자태와 용모가 단정하고 개결(介潔)하였다. 총명하고 슬기롭기가 범인과 달랐으며, 자라서는 장중(莊重)하고 말이 적었고, 즐거워하고 성냄이 얼굴빛에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양궁(兩宮)께서 자애하기를 더욱 두터이 하였으며, 궁액(宮掖) 가운데에서 모두 공경하고 우러러보아, 엄숙하면서 화목한 행실이 있어 길이 귀척(貴戚)들의 의범이 될 것을 기대하였더니, 불행하게도 나이가 계(筓)할 때도 미치지 못하고 급거히 양궁(兩宮)의 슬픔을 끼치었으니, 진실로 천도(天道)란 앎이 없는 것이라 하겠다. 아아, 슬픈 일이로다."하고, 명(銘)에 말하기를, "애처롭다 현철한 아가씨여, 일찍부터 태교(胎敎)를 받으시어 덕도 있고 용모도 뛰어났으며, 능히 삼가하며 효도하였는데, 천도가 창망(蒼茫)하여 어느덧 유명을 달리 하였도다. 국인(國人)들의 슬픔을 어찌 다함이 있으리오. 길한 땅으로 점을 치고 좋은 날로 정했으니, 이미 굳고 또 정밀하여 만세토록 갈무려 계실 곳이라." 하였으니, 예문 제학(藝文提學) [[윤회(尹淮)]]가 찬(撰)한 것이었다(王女墓誌銘曰: 永樂二十二年甲辰二月庚子, 今我主上殿下之長女, 以疾卒, 年甫十有三歲矣。 特贈公主, 以是年四月辛酉, 葬于高陽縣北酸梨洞之原。 公主生而淑婉, 姿容端潔, 聰慧異常。 稍長, 莊重寡言, 喜慍不見于色, 兩宮慈愛尤篤。 宮掖之中, 咸致敬慕, 期以肅雍之治, 永爲戚畹之儀, 不幸年未及䈂, 遽貽兩宮之慟悼, 信乎天道之無知也。 嗚呼悲夫! 銘曰: 嗟嗟淑媛, 夙承胎敎。 有德有容, 克愼克孝。 天道蒼茫, 奄爾不淑。 國人之哀, 曷其有極? 卜地之吉, 揆日之良, 旣固且密, 萬世之藏。藝文提學尹淮所撰也).|출처=[http://sillok.history.go.kr/id/kda_10603023_005 『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1424) 3월 23일 기해(己亥) 5번째 기사]}}
 
 
王女墓誌銘曰: 永樂二十二年甲辰二月庚子, 今我主上殿下之長女, 以疾卒, 年甫十有三歲矣。 特贈公主, 以是年四月辛酉, 葬于高陽縣北酸梨洞之原。 公主生而淑婉, 姿容端潔, 聰慧異常。 稍長, 莊重寡言, 喜慍不見于色, 兩宮慈愛尤篤。 宮掖之中, 咸致敬慕, 期以肅雍之治, 永爲戚畹之儀, 不幸年未及䈂, 遽貽兩宮之慟悼, 信乎天道之無知也。 嗚呼悲夫! 銘曰: 嗟嗟淑媛, 夙承胎敎。 有德有容, 克愼克孝。 天道蒼茫, 奄爾不淑。 國人之哀, 曷其有極? 卜地之吉, 揆日之良, 旣固且密, 萬世之藏。藝文提學尹淮所撰也.|출처=[http://sillok.history.go.kr/id/kda_10603023_005 『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1424) 3월 23일 기해(己亥) 5번째 기사]}}
 
 
 
 
====『세종실록』23권, 세종 6년(1424) 3월 23일 기해(己亥) 6번째 기사====
 
====『세종실록』23권, 세종 6년(1424) 3월 23일 기해(己亥) 6번째 기사====
{{Blockquote|예조에서 계하기를, "아이로 성인(成人) 전에 죽은 왕녀(王女)에 대한 추증(追贈)은 옛날 법제를 참고하여 보건대, 송나라 공복제희(恭福帝姬)가 나이 다섯 살에 훙서(薨逝)하였는데 [[수국공주(隋國公主)]]를 봉하였으니, 이제 왕녀의 추증도 이 제도에 의하여 시행하소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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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예조에서 계하기를, "아이로 성인(成人) 전에 죽은 왕녀(王女)에 대한 추증(追贈)은 옛날 법제를 참고하여 보건대, 송나라 공복제희(恭福帝姬)가 나이 다섯 살에 훙서(薨逝)하였는데 [[수국공주(隋國公主)]]를 봉하였으니, 이제 왕녀의 추증도 이 제도에 의하여 시행하소서."하였다(禮曹啓: "殤內王女追贈, 參考古制, 宋 恭福帝姬年五歲薨, 封隋國公主, 今王女追贈, 乞依此制施行").|출처=[http://sillok.history.go.kr/id/kda_10603023_006 『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1424) 3월 23일 기해(己亥) 6번째 기사]}}
 
 
禮曹啓: "殤內王女追贈, 參考古制, 宋 恭福帝姬年五歲薨, 封隋國公主, 今王女追贈, 乞依此制施行".|출처=[http://sillok.history.go.kr/id/kda_10603023_006 『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1424) 3월 23일 기해(己亥) 6번째 기사]}}
 
 
 
 
====『세종실록』23권, 세종 6년(1424) 3월 27일 계묘(癸卯) 2번째 기사====
 
====『세종실록』23권, 세종 6년(1424) 3월 27일 계묘(癸卯) 2번째 기사====
{{Blockquote|왕녀(王女)에게 추증(追贈)하기를 정혜공주(貞惠公主)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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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왕녀(王女)에게 추증(追贈)하기를 정혜공주(貞惠公主)로 하였다(追贈王女貞惠公主).|출처=[http://sillok.history.go.kr/id/kda_10603027_002 『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1424) 3월 27일 계묘(癸卯) 2번째 기사]}}
 
 
追贈王女貞惠公主.|출처=[http://sillok.history.go.kr/id/kda_10603027_002 『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1424) 3월 27일 계묘(癸卯) 2번째 기사]}}
 
 
 
 
====『세종실록』24권, 세종 6년(1424) 4월 4일 기유(己酉) 4번째 기사====
 
====『세종실록』24권, 세종 6년(1424) 4월 4일 기유(己酉) 4번째 기사====
{{Blockquote|왕녀(王女)의 시호(諡號) 정혜(貞惠)를 고쳐서 정소(貞昭)라고 하였는데, 운성군(雲城君) [[박종우(朴從愚)]] 옹주와 시호가 같은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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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왕녀(王女)의 시호(諡號) 정혜(貞惠)를 고쳐서 정소(貞昭)라고 하였는데, 운성군(雲城君) [[박종우(朴從愚)]] 옹주와 시호가 같은 때문이었다(改諡王女貞惠爲貞昭, 以與雲城君 朴從愚翁主同號故也).|출처=[http://sillok.history.go.kr/id/kda_10604004_004 『세종실록』24권, 세종 6년(1424) 4월 4일 기유(己酉) 4번째 기사]}}
 
 
改諡王女貞惠爲貞昭, 以與雲城君 朴從愚翁主同號故也.|출처=[http://sillok.history.go.kr/id/kda_10604004_004 『세종실록』24권, 세종 6년(1424) 4월 4일 기유(己酉) 4번째 기사]}}
 
 
 
 
====『세종실록』24권, 세종 6년(1424) 4월 10일 을묘(乙卯) 2번째 기사====
 
====『세종실록』24권, 세종 6년(1424) 4월 10일 을묘(乙卯) 2번째 기사====
{{Blockquote|예조에서 계하기를, "정소공주(貞昭公主)를 추증(追贈)하는 것은 옛 제도대로 계빈(啓殯)하는 날에 내시(內侍)를 보내어 추증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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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예조에서 계하기를, "정소공주(貞昭公主)를 추증(追贈)하는 것은 옛 제도대로 계빈(啓殯)하는 날에 내시(內侍)를 보내어 추증하도록 하소서." 하였다(禮曹啓: "貞昭公主追贈, 依古制, 啓殯日遣內侍追贈").|출처=[http://sillok.history.go.kr/id/kda_10604010_002 『세종실록』24권, 세종 6년(1424) 4월 10일 을묘(乙卯) 2번째 기사]}}
 
 
禮曹啓: "貞昭公主追贈, 依古制, 啓殯日遣內侍追贈".|출처=[http://sillok.history.go.kr/id/kda_10604010_002 『세종실록』24권, 세종 6년(1424) 4월 10일 을묘(乙卯) 2번째 기사]}}
 
  
 
====『세종실록』24권, 세종 6년(1424) 4월 15일 경신(庚申) 1번째 기사====
 
====『세종실록』24권, 세종 6년(1424) 4월 15일 경신(庚申) 1번째 기사====
{{Blockquote|정소공주(貞昭公主)를 고양현(高陽縣)에 장사(葬事)지냈다. 삼공신(三功臣)과 의정부 육조 당상이 성문 밖까지 장송(葬送)하고 각기 노제(路祭)를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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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정소공주(貞昭公主)를 고양현(高陽縣)에 장사(葬事)지냈다. 삼공신(三功臣)과 의정부 육조 당상이 성문 밖까지 장송(葬送)하고 각기 노제(路祭)를 베풀었다(葬貞昭公主于高陽縣。 三功臣及議政府、六曹堂上送至門外, 各設路祭).|출처=[http://sillok.history.go.kr/id/kda_10604015_001 『세종실록』24권, 세종 6년(1424) 4월 15일 경신(庚申) 1번째 기사]}}
 
 
葬貞昭公主于高陽縣。 三功臣及議政府、六曹堂上送至門外, 各設路祭.|출처=[http://sillok.history.go.kr/id/kda_10604015_001 『세종실록』24권, 세종 6년(1424) 4월 15일 경신(庚申) 1번째 기사]}}
 
  
 
====『세종실록』32권, 세종 8년(1426) 4월 12일 을해(乙亥) 4번째 기사====
 
====『세종실록』32권, 세종 8년(1426) 4월 12일 을해(乙亥) 4번째 기사====
{{Blockquote|정소 공주(貞昭公主)의 담제(禫祭)를 지냈는데, 그 제문에 이르기를, "장수(長壽)와 단명(短命)에 기수(氣數)가 있으니, 예로부터 피하기 어렵지만, 부녀간(父女間)의 정은 언제나 변할 리가 없는 것이다. 대개 사랑하고 귀여워하는 마음은 천성에서 나오는데 어찌 존망(存亡)을 가지고서 다름이 있다 하겠는가. 아아, 네가 죽은 것이 갑진년(甲辰年)이었는데, 세월이 여러번 바뀌매 느끼어 생각함이 더욱 더하도다. 이제 담제일(禫祭日)이 닥쳐오매 내 마음의 슬픔은 배나 절실하며, 나이 젊고 예쁜 모습을 생각하매 영원히 유명(幽明)이 가로막혔도다. 이에 중관(中官)을 명하여 사실을 진술하고 전(奠)을 드리게 하노라. 아아, 제도는 비록 한정이 있지마는 정에는 한정이 없도다. 영혼이여, 어둡지 않거든 와서 흠향하기를 바라노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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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정소 공주(貞昭公主)의 담제(禫祭)를 지냈는데, 그 제문에 이르기를, "장수(長壽)와 단명(短命)에 기수(氣數)가 있으니, 예로부터 피하기 어렵지만, 부녀간(父女間)의 정은 언제나 변할 리가 없는 것이다. 대개 사랑하고 귀여워하는 마음은 천성에서 나오는데 어찌 존망(存亡)을 가지고서 다름이 있다 하겠는가. 아아, 네가 죽은 것이 갑진년(甲辰年)이었는데, 세월이 여러번 바뀌매 느끼어 생각함이 더욱 더하도다. 이제 담제일(禫祭日)이 닥쳐오매 내 마음의 슬픔은 배나 절실하며, 나이 젊고 예쁜 모습을 생각하매 영원히 유명(幽明)이 가로막혔도다. 이에 중관(中官)을 명하여 사실을 진술하고 전(奠)을 드리게 하노라. 아아, 제도는 비록 한정이 있지마는 정에는 한정이 없도다. 영혼이여, 어둡지 않거든 와서 흠향하기를 바라노라." 하였다(行貞昭公主禫祭。 其祭文曰: 脩短之數, 自昔難逃。 父子之情, 無時或替。 蓋慈愛眷憐之心, 本乎天性, 豈以存亡而有異也? 嗟汝之逝, 歲在甲辰。 星霜屢換, 感念彌增。 今忽禫晨之臨, 倍切予懷之愴。 追惟婉孌, 永隔幽明。 爰命中官, 敍事致奠。 於戲! 制雖有限, 而情則無窮。 魂其不昧, 庶幾來歆).|출처=[http://sillok.history.go.kr/id/kda_10804012_004 『세종실록』32권, 세종 8년(1426) 4월 12일 을해(乙亥) 4번째 기사]}}
 
 
行貞昭公主禫祭。 其祭文曰: 脩短之數, 自昔難逃。 父子之情, 無時或替。 蓋慈愛眷憐之心, 本乎天性, 豈以存亡而有異也? 嗟汝之逝, 歲在甲辰。 星霜屢換, 感念彌增。 今忽禫晨之臨, 倍切予懷之愴。 追惟婉孌, 永隔幽明。 爰命中官, 敍事致奠。 於戲! 制雖有限, 而情則無窮。 魂其不昧, 庶幾來歆.|출처=[http://sillok.history.go.kr/id/kda_10804012_004 『세종실록』32권, 세종 8년(1426) 4월 12일 을해(乙亥) 4번째 기사]}}
 
  
 
====『세종실록』93권, 세종 23년(1441) 8월 8일 임신(壬申) 2번째 기사====
 
====『세종실록』93권, 세종 23년(1441) 8월 8일 임신(壬申) 2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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