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 태실지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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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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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23대 국왕 순조의 태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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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2대 왕 정조와 유비 박씨 소생의 조선 23대 왕, 순조(純祖)의 안태지(安胎地).
  
강원도 홍천·충청도 보은 속리산·음성현 등이 안태지로 거론되었다. 그 중 속리산으로 정해졌다. 정조는 안태 비용으로 저치미(儲置米)를 사용해 지방민들의 피해가 없도록 하였고, 안태사로 오재순(吳載純)을 임명했다. 정조는 안태사부터 하리에 이르기까지 고루 포상하고 안태하고 돌아온 오재순에게 태실에 대해 꼼꼼히 물었다. 이처럼 정조는 순조의 태실을 조성하는데 큰 관심을 기울였다.
 
 
순조는 즉위 후 먼저 아버지 정조의 태실을 가봉한 뒤 1806년(순조 6)에 자신의 태실을 가봉하였다. 이 때 순조의 태실 역시 아버지 정조와 같이 영조 태실의 제도를 쫓았다. 태실을 가봉하는데 소용하는 석재는 회인현감이 담당한 것으로 보이며 서표관은 관상감 제조였던 김사목이 맡았다. 그리고 돌을 다듬는 석수와 각수는 서울에서 내려간 이들이었다.
 
 
이러한 순조 태실 가봉에 관한 내용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중인 《순조태실석난간조배의궤》(규 13968)에 자세히 전한다. 또한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과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순조 태봉의 모습을 그린 태봉도(덕수 6374)가 전한다. 보은현은 순조 태실 가봉이 이루어지고 4년 뒤 군으로 승격되었다.
 
 
순조 태실은 태항아리의 반출이 이루어졌음에도 본래의 모습을 거의 잃지 않았다. 또한 화소비를 비롯해 금표비, 법주사 앞에 하마비가 남아있다.
 
  
 
=='''관련 기록'''==
 
=='''관련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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