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평군 태실지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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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박물관 문서 가운데 1934년 조선총독부 고적조사 촉탁으로 근무하던 노모리 겐(野守健)<ref>노모리 겐(野守健)은 1887년에 태어나 1970년에 사망했다. 고적조사 사업을 주도했던 세키노 다다시의 친동생으로 태어났는데 노모리 가(野守家)에 양자로 입양되어 성이 바뀌었다. 형 세키노의 권유로 1916년부터 조선총독부 고적조사 촉탁이 되어 총독부박물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1916년도에 실시된 낙랑 고분의 조사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평양지역의 고구려와 낙랑 유적의 조사를 주도한 ‘세키노조사단’의 중요한 일원이 되어 활동하였다. 경상북도 달성군의 달서고분군 조사에서 중요 멤버였으며 공주 송산리의 백제 고분 발굴조사에도 참가하였다. 1930년도에 실시된 평양 오야리 낙랑 고분의 발굴조사에서도 다수의 고분에 대한 현장조사를 도맡았으며, 1937년에 실시된 강동군 만달산록의 고구려 고분의 발굴조사에도 주도적으로 참가했다.</ref>의 복명서(復命書)에는 경평군 태실 발굴조사 내용이 기술되어 있어 참조가 가능하다.<ref>野守健, 『大田郡胎峰調査復命書』, 朝鮮總督府 博物館, 1934.</ref> 노모리 겐은 1934년 9월 15일 경 충청남도 학무과장 이와무라 토시오(岩村俊雄)로부터 대전군 기성면(杞城面) 가수원리(佳水院里)에 태봉이 발견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조사 보고의 명을 받아 현장으로 파견됐다. 당시 태봉은 조선인 3명이 9월 7일부터 다음날 오전까지 도굴을 진행하였는데, 현지인의 신고로 가수원리 경찰관이 도굴꾼을 체포하였다고 한다. 이에 조선고적조사 사업이 한창이던 당시 상황과 맞물려 해당 태봉에 대한 조사를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지시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조선총독부 박물관 문서 가운데 1934년 조선총독부 고적조사 촉탁으로 근무하던 노모리 겐(野守健)<ref>노모리 겐(野守健)은 1887년에 태어나 1970년에 사망했다. 고적조사 사업을 주도했던 세키노 다다시의 친동생으로 태어났는데 노모리 가(野守家)에 양자로 입양되어 성이 바뀌었다. 형 세키노의 권유로 1916년부터 조선총독부 고적조사 촉탁이 되어 총독부박물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1916년도에 실시된 낙랑 고분의 조사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평양지역의 고구려와 낙랑 유적의 조사를 주도한 ‘세키노조사단’의 중요한 일원이 되어 활동하였다. 경상북도 달성군의 달서고분군 조사에서 중요 멤버였으며 공주 송산리의 백제 고분 발굴조사에도 참가하였다. 1930년도에 실시된 평양 오야리 낙랑 고분의 발굴조사에서도 다수의 고분에 대한 현장조사를 도맡았으며, 1937년에 실시된 강동군 만달산록의 고구려 고분의 발굴조사에도 주도적으로 참가했다.</ref>의 복명서(復命書)에는 경평군 태실 발굴조사 내용이 기술되어 있어 참조가 가능하다.<ref>野守健, 『大田郡胎峰調査復命書』, 朝鮮總督府 博物館, 1934.</ref> 노모리 겐은 1934년 9월 15일 경 충청남도 학무과장 이와무라 토시오(岩村俊雄)로부터 대전군 기성면(杞城面) 가수원리(佳水院里)에 태봉이 발견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조사 보고의 명을 받아 현장으로 파견됐다. 당시 태봉은 조선인 3명이 9월 7일부터 다음날 오전까지 도굴을 진행하였는데, 현지인의 신고로 가수원리 경찰관이 도굴꾼을 체포하였다고 한다. 이에 조선고적조사 사업이 한창이던 당시 상황과 맞물려 해당 태봉에 대한 조사를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지시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노모리의 현장 조사 당시 태실 석함의 우측 상부 함개와 함신 접합부가 일부 결손이 있었음을 파악하였으며, 석함 내부 조사를 위해 가수원 경찰관 및 현지인 5, 6명의 협조를 얻어 석함을 개봉하였다. 석함 내부에는 금박 2편과 동전 1개, 백자 태항아리 및 태지석이 발견되었는데, 태지석에는 “皇明萬曆二十八年六月十八日寅時生王子阿只氏胎, 皇明萬曆三十六年十月初七日藏”이라는 명문이 확인되어 노모리는 이를 토대로 이곳이 경평군의 태실임을 고증하였다. 조사완료 후 태실은 도굴 직전과 같이 봉토를 덮어 복원하였다고 하며, 석함에서 발견된 태항아리 및 기타유물은 경성으로 봉송되어 서삼릉 태실에 이안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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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모리의 현장 조사 당시 태실 석함의 우측 상부 함개와 함신 접합부가 일부 결손이 있었음을 파악하였으며, 석함 내부 조사를 위해 가수원 경찰관 및 현지인 5, 6명의 협조를 얻어 석함을 개봉하였다. 석함 내부에는 금박 2편과 동전 1개, 백자 태항아리 및 태지석이 발견되었는데, 태지석에는 “皇明萬曆二十八年六月寅時生王子阿只氏胎, 皇明萬曆三十六年十月初七日藏”이라는 명문이 확인되어 노모리는 이를 토대로 이곳이 경평군의 태실임을 고증하였다. 조사완료 후 태실은 도굴 직전과 같이 봉토를 덮어 복원하였다고 하며, 석함에서 발견된 태항아리 및 기타유물은 경성으로 봉송되어 서삼릉 태실에 이안된 것으로 추정된다.
  
 
해방 이후 태봉은 1991년까지 잔존하였으나 도시개발과 맞물리며 태봉 자체가 사라졌다. 석함은 대전시에서 수습하여 향토사료관을 거쳐 현재 대전역사박물관에서 야외전시 중이다. 석함의 직경은 115센티미터, 높이는 142센티미터이다.
 
해방 이후 태봉은 1991년까지 잔존하였으나 도시개발과 맞물리며 태봉 자체가 사라졌다. 석함은 대전시에서 수습하여 향토사료관을 거쳐 현재 대전역사박물관에서 야외전시 중이다. 석함의 직경은 115센티미터, 높이는 142센티미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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