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빈 성씨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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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빈성씨묘(宜嬪成氏墓)
서삼릉 빈·귀인 분묘 집장지 의빈성씨 묘
식별자 RT037
분류 분묘
한글명 의빈성씨묘
한자명 宜嬪成氏墓
영문명 Tomb of Royal Noble Consort Ui of the Changnyeong Sung clan
피장자 명칭 의빈(宜嬪) 창녕성씨(昌寧成氏)
피장자 이칭 정조 후궁 의빈 성씨
피장자 부 성윤우(成胤祐)
피장자 모 임종주(林宗冑)의 딸
피장자 생년월일 1753.07.08
피장자 몰년월일 1786.09.14
초장 연월일 1786.11.20
초장지 기록 고양군 율목동 임좌원(壬坐原)의빈성씨묘비
초장지 기록1 효창묘(孝昌墓) 좌강(左岡)정조실록
초장지 기록2 경성부 금정(錦町) 이정목(二丁目)능원묘천봉안
문화재 지정여부 미지정
이장 연월일 1940.05.15
이장지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서삼릉 내
이장지 좌표(위도) 37°66'56.84"N
이장지 좌표(경도) 126°85'84.06"E
지문 宜嬪昌寧成氏之墓
지문 찬자 정조(正祖)
지문 소장처 조선왕릉 서부지구관리소



목차

내용

조선 22대 왕 정조의 후궁인 의빈 성씨(1753~1786)의 묘 이다. 의빈 성씨의 본관은 창녕이고, 아버지는 성윤우(成胤祐)이며, 어머니는 임종주(林宗冑)의 딸이다.

1782년(정조 6) 상의(尙儀)의 신분으로 왕자를 출산한 뒤 소용(昭容)에 봉해졌다. 1783년(정조 7) 2월에는 의빈에 봉해졌고, 1784년(정조 8) 옹주를 출산하였다. 1786년(정조 10) 9월 사망하였다.

사망 이후 의빈 성씨는 아들의 묘인 효창묘 좌강(左岡)에 안장되었다. 정조를 비롯해 이후 국왕들의 전알 및 치제 등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1940년 서삼릉 경내로 이장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권14, 정조 6년(1782) 8월 26일 경인(庚寅)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서유경을 권초관으로 삼다》

서유경(徐有慶)을 권초관(捲草官)으로 삼았다. 이때 상의(尙儀) 성씨(成氏)가 해산할 달이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以徐有慶爲捲草官。 是時, 尙儀成氏彌月將屆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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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14, 정조 6년(1782) 8월 26일 경인(庚寅) 1번째 기사



『정조실록』권14, 정조 6년(1782) 9월 7일 신축(辛丑)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문효 세자의 탄생을 기뻐하다》

왕자(王子)가 탄생하였다. 임금이 승지와 각신(閣臣)들을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 "궁인(宮人) 성씨(成氏)가 태중(胎中)이더니 오늘 새벽에 분만하였다. 종실이 이제부터 번창하게 되었다. 내 한 사람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머지않아 이 나라의 경사가 계속 이어지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으므로 더욱더 기대가 커진다. ‘후궁은 임신을 한 뒤에 관작을 봉하라.’는 수교(受敎)가 이미 있었으니, 성씨를 소용(昭容)170) 으로 삼는다." 하니, 신하들이 경사를 기뻐하는 마음을 아뢰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를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하였다. 또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을 불러 보았는데, 모두가 말하기를, "하늘에 계신 조종께서 우리 나라를 돌보시어서 남아가 태어난 경사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 달은 우리 선대왕께서 탄생하신 달이고 우리 전하께서 탄생하신 달인데다가 왕자께서 또 이 달에 탄생하셨으니, 경사에 대한 기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대신이 뜨락에서 문안을 올리려고 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인데, 명호(名號)를 정하기 전에 뜨락에서 문안을 드리는 것은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다. 더구나 을묘년에도 이러한 예가 없었으니, 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王子生。 上召見承旨ㆍ閣臣, 敎曰: "宮人成氏有娠, 今曉分娩。 宗英之自此蕃衍。 非但一己之幸, 繼此邦慶, 明知其非久, 益切顒企。 後宮有娠, 然後封爵, 旣有受敎, 成氏爲昭容。" 諸臣陳慶忭之忱。 上曰: "始聞爲人父之稱, 是可幸也。" 又召見時原任大臣。 僉曰: "皇天祖宗, 眷佑邦家, 乃有斯男之慶。 況是月, 卽我先大王誕彌之月, 我殿下流虹之節, 王子誕生, 又在是月, 不勝慶忭之至。 大臣欲行庭候。" 敎曰: "凡事自有次序, 名號未定之前, 設庭候, 旣無前例可據。 況乙卯年, 亦無是例, 其已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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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14, 정조 6년(1782) 9월 7일 신축(辛丑) 1번째 기사



『정조실록』권14, 정조 6년(1782) 12월 28일 경인(庚寅)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성씨를 소용으로 삼다》

성씨(成氏)를 소용(昭容)으로 삼았다. 영의정 서명선이 또 건의하자, 윤허한 것이다.

以成氏爲昭容, 領議政徐命善, 又建請。 允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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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14, 정조 6년(1782) 12월 28일 경인(庚寅) 2번째 기사



『정조실록』권15, 정조 7년(1783) 2월 19일 경진(庚辰) 4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소용 성씨에게 의빈의 칭호를 내리다》

소용 성씨(昭容成氏)에게 의빈(宜嬪)이란 칭호를 내렸다.

賜昭容成氏號曰宜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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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15, 정조 7년(1783) 2월 19일 경진(庚辰) 4번째 기사



『정조실록』권17, 정조 8년(1784) 윤3월 20일 을해(乙亥)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호산청을 설치하다》

호산청(護産廳)을 설치하였는데, 당시 의빈 성씨(宜嬪成氏)가 딸을 낳았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設護産廳。 時宜嬪成氏生女, 故有是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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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17, 정조 8년(1784) 윤3월 20일 을해(乙亥) 1번째 기사



『정조실록』권22, 정조 10년(1786) 9월 14일 갑신(甲申)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의빈 성씨의 졸기》

의빈(宜嬪) 성씨(成氏)가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의빈의 상례(喪禮)는 갑신년의 예에 따라 후정(後庭)의 1등의 예로 거행하라." 하였다. 처음에 의빈이 임신하였을 때 약방 도제조 홍낙성이 호산청(護産廳)을 설치하자고 청하자, 출산할 달을 기다려 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병에 걸려 졸(卒)한 것이다. 임금이 매우 기대하고 있다가 그지없이 애석해 하고 슬퍼하였으며, 조정과 민간에서는 너나없이 나라의 근본을 걱정하였다. 홍낙성이 아뢰기를, "5월 이후로 온 나라의 소망이 오직 여기에 달려 있었는데 또 이런 변을 당하였으니, 진실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제부터 국사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 하였다. 이는 대체로 의빈의 병 증세가 심상치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무슨 빌미가 있는가 의심하였다고 하였다.

宜嬪成氏卒。 敎曰: "嬪喪, 依甲申年例, 以後庭一等例行之。" 初宜嬪有身, 藥房都提調洪樂性, 請設護産廳。 命待當朔, 至是遘疾而卒。 上企待方切, 不勝悼惜。 朝野莫不以國本爲憂。 樂性奏曰: "五月以後, 一國係望, 惟在於此, 而又遭此變, 誠罔措矣。" 上曰: "病情奇怪, 竟至於此。 從今國事尤靡托矣。" 蓋嬪病症非常, 時疑其有祟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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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22, 정조 10년(1786) 9월 14일 갑신(甲申) 2번째 기사



『정조실록』권22, 정조 10년(1786) 9월 16일 병술(丙戌)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안현의 본궁에 의빈의 빈소를 차리다》

안현(安峴)의 본궁(本宮)에다 의빈의 빈소를 차렸다. 상구(喪柩)를 소난상(小欄床)에다 봉안하고 흰 비단 보자기로 덮고 난 다음 유장(帷帳)을 설치하였다. 단양문(端陽門)을 거처 단봉문(丹鳳門)을 나와서 견여(肩輿)로 옮겨 나아갔다.

殯宜嬪于安峴本宮。 以喪柩, 安于小欄床, 覆素錦褚, 設行帷帳。 由端陽門, 出丹鳳門, 移安肩輿以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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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22, 정조 10년(1786) 9월 16일 병술(丙戌) 1번째 기사



『정조실록』권22, 정조 10년(1786) 11월 18일 무자(戊子)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의빈의 장사날을 맞아 궁과 묘소에 제사를 전례에 따라 정하다》

예조 판서 서유린(徐有隣)이 아뢰기를, "의빈(宜嬪)의 장사날이 머지 않았으니, 궁과 묘소에 제사를 지금 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의열궁의 전례를 상고해 보니, 궁에는 사중삭(四仲朔)과 사명일(四名日)에 봉상시(奉常寺)에서 제사를 지냈고 묘소에는 기신과 사명일에 본궁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번에도 이에 따라 거행할 것입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체모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으니, 그에 따라서 거행하라." 하였다.

禮曹判書徐有隣啓言: "宜嬪禮葬不遠, 宮墓祭享, 當趁今酌定, 而取考義烈宮前例, 宮享則四仲朔、四名日, 自太常擧行; 墓享則忌辰四名日, 自本宮擧行。 今番亦依此擧行乎?" 敎曰: "體貌不可不顧, 依此爲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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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22, 정조 10년(1786) 11월 18일 무자(戊子) 2번째 기사



『정조실록』권22, 정조 10년(1786) 11월 20일 경인(庚寅)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효창묘의 왼쪽 산등성이에 의빈 성씨의 장사를 치르다》

의빈(宜嬪) 성씨(成氏)의 장사를 치렀는데, 효창묘(孝昌墓)의 왼쪽 산등성이였다.

葬宜嬪成氏。 卽孝昌墓左岡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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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22, 정조 10년(1786) 11월 20일 경인(庚寅) 1번째 기사



『정조실록』권23, 정조 11년(1787) 1월 9일 무인(戊寅)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선혜청 제조 서유린이 의빈묘의 위전을 절수하는 일로 아뢰다》

선혜청 제조 서유린(徐有隣)이 의빈묘(宜嬪墓)의 위전(位田)을 절수(折受)하는 일로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근래에 어찌 버려져 있는 땅이 있겠는가? 산허리를 침범해 경작하는 것이 참으로 하나의 고질적인 폐단이어서 도끼로 베기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곳곳마다 산이 벌거숭이다. 이는 모두 수령들이 공가(公家)에서 세금을 매기지 않는 것을 이롭게 여겨 백성들에게 경작하기를 허락한 것이니, 읍력(邑力)으로 손을 댈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이제 만약 이를 빙자하여 향으로 쓸 향나무와 숯을 만들 참나무를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사방에서 널리 구하는데 뒤따라 모리(牟利)하는 자들이 동쪽 서쪽을 가리키며 소란을 피우며 그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내 뜻이겠는가? 경 등은 이런 뜻을 본받아서 궁방(宮房)이나 혹은 영문(營門)·아문(衛門)을 가리키며 소란을 피우며 시장(柴場) 가운데서 유명 무실한 곳은 혁파하고, 만일 합당한 곳을 얻으면 품처하라. 그렇지 않으면 비록 기일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절대로 외읍(外邑)에 양안(量案) 밖의 명색(名色)을 획정(劃定)하지 못하게 하라." 하니, 서유린이 말하기를, "이천부(伊川府)에 마땅한 송산(松山) 한 곳이 있기에 처음에는 황장 봉산(潢腸封山)으로 여겼었는데, 작년 본주(本州)의 백성이 소송으로 인하여 예조에서 봉산안(封山案)을 조사해 보니 원래 기록된 일이 없어서 효창묘(孝昌墓)의 위전(位田)으로 의정(擬定)하였습니다. 본 부사(府使)의 말을 듣건대, 소나무는 아주 무성하나 토지는 척박하여 개간할 수가 없으며, 또 그 옆에 삼화세(蔘火稅) 몇 결(結)이 있어서 장차 모두 넣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송정(松政)과 삼세(蔘稅)의 두 가지 일에 대해서는 성상의 뜻을 여러 차례 사륜(絲綸)에 나타내셨습니다. 이제 연교(筵敎)를 받들건대 더욱 향탄(香炭)·송전(松田)에 대하여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음을 깨달았으니 그대로 봉산(封山)을 만들고 삼화세는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전대로 수세(收稅)하게 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읍민(邑民)이 진고(陳告)한 것은 처음부터 경청(傾廳)할 일이 아니었고, 설사 또 땅이 척박하지 않고 옆에 삼세가 없었더라도 지금 산목(山木)이 곳곳마다 민둥산이 되어 있을 때에 크고 작은 나무 천만 주(株)를 베어 내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삼화세는 실로 적자(赤子)의 목숨과 관계되는데, 이제 만약 공가(公家)에 소속시킨다면 급대(給代)할 밑천을 어디서 만들어 내겠는가? 그리고 읍지(邑誌)를 상고하건대, 고미탄(古味灘) 근처에 끼어 있으니 관방(關防)의 중요한 땅이 됨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그곳에는 일찍이 성(城)을 쌓고 소나무를 심은 일이 있었으니 설치한 법의(法意)가 매우 면밀하였다. 이런 곳들은 거론하지 말아야 할 뿐만이 아니라, 진고(陳告)한 사람을 마땅히 먼저 엄중히 다스려서 간사한 백성들이 무엇을 엿보고 바라는 습성을 막아야 할 것이다. 대저 산택(山澤)의 정사는 나라의 중대한 일인데, 근래에 백성들의 습성이 아주 교활하여 이런 폐단이 있게 된 듯하니, 반드시 이 한 곳에만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이후에는 비록 사사로운 양산(養山)의 절수(折受)라도 비변사를 거쳐서 계하(啓下)해서 행회(行會)한 것이 아니면 궁방(宮房) 및 영문·아문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스스로 조치해 주지 말라는 일을 탁지(度支)의 등록(謄錄)에 기재하라." 하였다.

宣惠廳提調徐有隣啓宜嬪墓位田折受事。 上曰: "近來豈有曠棄之地? 山腰犯耕, 誠一痼弊, 不待斧斤, 在在童濯。 此蓋守令, 利其無公家之定稅, 許民耕作, 可知邑力之無着手也。 今若藉此, 香炭之名, 四處廣求, 從以牟利者, 指東指西, 紛紜不止, 則是豈予意? 卿等體此, 就罷宮房或營、衙門柴場中有名無實處, 如得可合者, 稟處。 否則雖未及期, 切勿以外邑量外名色劃定也。" 有隣曰: "伊川府有宜松山一處, 初認以黃腸封山, 昨年本州民訴, 禮曹考見封山案, 則元無載錄之事, 擬定孝昌墓位田矣。 聞本府使之言, 則松木頗茂密, 而土地則瘠薄, 無以起墾, 且其傍有蔘火稅幾結, 將竝入云。 蓋松政、蔘稅兩事, 聖意屢形於絲綸, 而今承筵敎, 益覺其不可輕議於香炭、松田, 則仍作封山, 蔘火稅, 則請令本官, 依前收稅。" 上曰: "邑民之陳告, 初非傾聽之事, 設又土不瘠薄, 傍無蔘稅, 以今山木在處濯濯之時, 斫出大小千萬株, 且非得計。 況蔘火稅, 實關赤子之命脈, 今若屬之公家, 則給代之資, 將何辦出? 且考邑誌, 介在古味灘近處, 可知爲關防重地。 況其地曾有築城植松之擧, 設置法意, 至爲縝密。 此等處, 非惟勿擧論, 陳告人宜先嚴治, 以杜奸民覬覦之習。 大抵山澤之政, 有國重事, 近來民習至巧, 似此弊端, 必當不止此一處。 此後雖於私養山折受, 如非關由備局啓下行會, 則宮房及營衙門, 無得擅自劃屬事, 載之度支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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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23, 정조 11년(1787) 1월 9일 무인(戊寅) 2번째 기사



『정조실록』권23, 정조 11년(1787) 1월 10일 기묘(己卯)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문희묘를 의빈묘 근처로 복지하고 사당터를 의빈궁 서쪽 담장 밖으로 정하다》

하교하기를, "문희묘(文禧廟)를 처음에는 경모궁(景慕宮) 남쪽 담장 밖에다 정했었는데, 작년 9월 이후에 신리(神理)와 인정(人情)으로 헤아려서 의빈묘(宜嬪廟) 근처로 복지(卜地)하는 것이 실로 편리하고 합당하여 사당 터를 의빈궁 서쪽 담장 밖으로 옮겨 정했었다. 이번에는 청(廳)을 설치하지 말고, 호조·공조의 당상(堂上)과 낭관(郞官) 각 1원(員)씩이 감독하라." 하였다.

敎曰: "文禧廟, 初定於景慕宮南墻外, 昨年九月後, 揆以神理、人情, 就宜嬪廟近處卜地, 實爲便當, 廟基以宜嬪宮西墻外移定。 今番勿設廳, 戶、工曹堂郞, 各一員監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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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23, 정조 11년(1787) 1월 10일 기묘(己卯) 1번째 기사



『정조실록』권26, 정조 12년(1788) 7월 8일 무진(戊辰)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각신을 보내 효창묘에 전작례를 행하고, 승지로 하여금 의빈묘에 치제케 하다》

각신(閣臣)을 보내어 효창묘(孝昌墓)에 전작례(奠酌禮)를 행하고, 승지를 보내어 의빈묘(宜嬪墓)에 치제(致祭)하였다.

遣閣臣, 行奠酌禮于孝昌墓, 遣承旨, 致祭于宜嬪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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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26, 정조 12년(1788) 7월 8일 무진(戊辰) 1번째 기사



『정조실록』권27, 정조 13년(1789) 4월 25일 신해(辛亥)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문희묘가 완성되다. 문효 세자 혼궁·효창묘·의빈묘에서 다례를 행하다》

문희묘가 완성되었다. 상이 왕림하여 재실에서 영건청(營建廳)의 당상과 낭관을 불러 보았다. 경희궁(慶熙宮)에 가서 문효 세자 혼궁(文孝世子魂宮)에 다례를 행하고서 이어 효창묘(孝昌墓)와 의빈묘(宜嬪墓)에 가서 다례를 행하였다.

文禧廟成。 上駕臨, 召見營建堂郞于齋室。 詣慶熙宮, 行茶禮于文孝世子魂宮, 仍臨孝昌墓、宜嬪墓, 行茶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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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27, 정조 13년(1789) 4월 25일 신해(辛亥) 1번째 기사



『정조실록』권27, 정조 13년(1789) 4월 26일 임자(壬子)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문효 세자의 신위를 문희묘로 옮겨 봉안하고, 봉안제와 별다례를 행하다》

문효 세자의 신위(神位)를 문희묘로 옮겨 봉안하였다. 상이 친히 구묘(舊廟)에서 고동련제(告動輦祭)를 행하고, 옮겨 봉안한 뒤에는 신묘(新廟)에서 봉안제(奉安祭)를 행하고 또 별다례(別茶禮)를 행하였다. 이어 의빈묘로 가서 별다례를 행하였다. 중궁전(中宮殿)은 문희묘에 갔다가 예가 끝나자 환궁하였다.

移奉文孝世子神位于文禧廟。 上親行告動輦祭于舊廟, 移奉後, 親行奉安祭于新廟, 又行別茶禮。 仍臨宜嬪廟, 行別茶禮。 中宮殿臨廟, 禮畢還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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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27, 정조 13년(1789) 4월 26일 임자(壬子) 1번째 기사



『정조실록』권28, 정조 13년(1789) 12월 28일 기묘(己卯)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경모궁에 전배하고 문희묘, 의빈묘에 전작례를 행하다》

경모궁(景慕宮)에 전배하고, 지나는 길에 문희묘(文禧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들러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

展拜景慕宮, 歷臨文禧廟、宜嬪廟, 行奠酌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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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28, 정조 13년(1789) 12월 28일 기묘(己卯) 1번째 기사



『정조실록』권29, 정조 14년(1790) 3월 24일 갑진(甲辰)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경모궁에 전배하다》

경모궁(景慕宮)에 전배(殿拜)하였다. 문희묘(文禧廟)에 나아가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고, 이어 의빈묘(宜嬪廟)에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에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의 집 앞에 이르러 그의 병이 심하다는 말을 듣고 사관(史官)을 보내 병문안을 하였다.

展拜于景慕宮, 詣文禧廟, 行奠酌禮, 仍臨宜嬪廟, 駕還錦城尉 朴明源家前, 聞其病甚, 遣史官存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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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29, 정조 14년(1790) 3월 24일 갑진(甲辰) 1번째 기사



『순조실록』권6, 순조 4년(1804) 9월 1일 정해(丁亥)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궐리사에 정경을 보내 전작하고, 효령 대군 등의 묘에 사람을 보내 치제하다》

(전략)……창빈(昌嬪)·명빈(䄙嬪)·의빈(宜嬪)·연령군(延齡君)·해창위(海昌尉)의 묘에는 내시(內侍)를 보내 치제하라고 명하였다.

命…(중략)…昌嬪、䄙嬪、宜嬪、延齡君、海昌尉墓, 遣內侍致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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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조실록』권6, 순조 4년(1804) 9월 1일 정해(丁亥) 2번째 기사



『순조실록』권10, 순조 7년(1807) 9월 1일 기해(己亥)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효창묘에 나아가 작헌례하고 김재찬을 소견하다》

효창묘(孝昌墓)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의빈묘(宜嬪墓)에 역림(歷臨)하였다가, 이어 남관왕묘(南關王廟)에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詣孝昌墓, 行酌獻禮, 歷臨宜嬪墓, 仍詣南關王廟, 行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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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조실록』권10, 순조 7년(1807) 9월 1일 기해(己亥) 1번째 기사



『순조실록』권13, 순조 10년(1810) 8월 28일 경술(庚戌)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명빈 등의 묘소와 조광조 등의 사판과 서원에 사람을 보내 제사지내도록 하다》

명빈(䄙嬪)과 의빈(宜嬪)의 묘에 내시를 보내 제사를 지내라고 명하였다.

命䄙嬪、宜嬪墓, 遣內侍致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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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조실록』권13, 순조 10년(1810) 8월 28일 경술(庚戌) 2번째 기사



『철종실록』권13, 철종 12년(1861) 2월 6일 갑자(甲子)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능창 대군 등의 묘에 치제하게 하다》

하교하기를, "능창 대군(綾昌大君) 묘(墓)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영온 옹주(永溫翁主) 묘(墓)에 내시(內侍)를 보내어 치제하게 하라. 정문공(正文公) 김수근(金洙根) 묘(墓)는 연로(輦路)에 있고 또 면례(緬禮)가 멀지 않았다고 하니, 지방관(地方官)을 보내어 치제하고, 의빈묘(宜嬪墓)에는 내시를 보내어 치제하며, 현절사(顯節祠)에는 승지(承旨)를 보내어 치제토록 하라." 하였다.

敎曰: "綾昌大君墓, 遣禮官致祭, 永溫翁主墓, 遣內侍致祭, 正文公ㆍ金洙根墓, 在輦路, 且緬禮不遠云, 遣地方官致祭, 宜嬪墓, 遣內侍致祭, 顯節祠, 遣承旨致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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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철종실록』권13, 철종 12년(1861) 2월 6일 갑자(甲子) 2번째 기사



『고종실록』권7, 고종 7년(1870) 1월 2일 무진(戊辰)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인빈, 영빈, 화빈, 희빈, 정빈, 의빈, 영빈 등의 사당의 신주를 옮기다》

전교하기를, "친진(親盡)하여 조천(祧遷)하는 것은 어길 수 없는 제도이며 역시 옛날부터 전해오는 제왕들의 가법(家法)이다. 그런데 유독 의소묘(懿昭廟)의 사우(祠宇)를 아직 옮기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실로 겨를이 없었던 일이다. 그리고 각궁(各宮)에 따로 사당을 세운 것은 당시로서는 없어서는 안될 일이라고 하여 그렇게 된 것이지만, 오늘에 와서는 어느 한 곳의 별묘(別廟)에 합쳐 봉안(奉安)하는 것이 사리에 부합되는 것이다. 인빈 김씨(仁嬪金氏)·영빈 김씨(寧嬪金氏)·화빈 윤씨(和嬪尹氏)의 사우는 경우궁(景祐宮) 안의 별묘에 함께 모시고, 희빈 장씨(禧嬪張氏)·정빈 이씨(靖嬪李氏)·영빈 이씨(暎嬪李氏)·의빈 성씨(宜嬪成氏)의 사우는 육상궁(毓祥宮) 안의 별묘에 함께 모시며, 문효 세자(文孝世子)의 사우는 의소묘 안의 별묘에 이봉(移奉)하여야 할 것이다. 제반 의식 절차는 호조(戶曹)와 예조(禮曹)의 당상(堂上)으로 하여금 대원군(大院君)에게 품처(稟處)하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敎曰: "親盡而祧, 卽莫越之制, 而亦自古帝王家法。 然而惟獨懿昭廟之尙未祧遷, 實是未遑之事也。 且各宮之別立廟貌, 在當時雖不可闕而然矣, 到今則合奉於一處別廟, 正合事宜。 仁嬪金氏、寧嬪金氏、和嬪尹氏祠宇, 合奉於景祐宮內別廟; 禧嬪張氏、靖嬪李氏、暎嬪李氏、宜嬪成氏祠宇, 合奉於毓祥宮內別廟; 文孝世子祠宇, 移奉於懿照廟內別廟。 諸般儀節, 令戶禮堂, 稟處於大院君前擧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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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종실록』권7, 고종 7년(1870) 1월 2일 무진(戊辰) 2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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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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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문헌

  •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능원묘천봉안(陵園墓遷奉案)』, 1929 ~ 1945,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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