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 태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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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태실(世祖 胎室)
경북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군 경내의 세조대왕 태실
식별자 PC006
분류 국왕 태실
한글명 세조 태실
한자명 世祖 胎室
영문명 Placenta Chamber of King Sejo
피안자 명칭 세조(世祖)
피안자 이칭 이유(李瑈)·자(字) 수지(粹之)·수양대군(首陽大君)·광릉(光陵)·영창전(永昌殿)
피안자 부 세종(世宗)
피안자 모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
피안자 생년월일 1417.09.24
피안자 몰년월일 1468.09.08
안태지 기록 성주(星州) 북쪽 20리 선석산(禪石山) 세종실록
안태지 좌표(위도) 36°01'43.7"N
안태지 좌표(경도) 128°29'50.1"E
안태지 주소 경상북도 성주군 월향면 인촌동 산8번지(선석사 뒤)
문화재 지정여부 사적 444호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
이안 연월일 1929.05(추정)
이안지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서삼릉 내
이안지 좌표(위도) 37°66'45.61"N,
이안지 좌표(경도) 126°86'06.29"E
지문 明永樂十五年丁酉,九月二十四日生,晋陽大君講琉胎,正統三年戊午三月□,十日藏
지문 찬자 조선 예조(禮曹)
지문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석물 세조 태실 가봉비
태항아리 세조 태지석 및 태항아리 일습
태항아리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내용

조선 제7대 국왕 세조의 태실이다.

본래 문종을 제외한 세종의 여러 아들들의 태실은 성주 선석산에 위치했다. 계유정난 이후 세조가 즉위한 이후 1458년(세조 4) 예조에서는 단종과 안평대군의 태실이 세조의 태실과 함께 있으니 다른 곳을 정해 가봉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단종의 태실을 다른 곳으로 옮겼으며, 안평대군의 태실의 중동석을 없애고 비석을 파괴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조 태실 역시 다른 가봉 석물은 보이지 않고 가봉비만 입석하는 것으로 간략하게 가봉되었다.

세조는 아버지 세종의 뜻에 따라 국왕은 물론 왕세자, 원손의 태실에 석난간을 설치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후 국왕의 태실에는 석난간이 설치되는 것으로 보아 잘 지켜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관련 기록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13권, 세조 4년(1458) 7월 8일 계사(癸巳)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주상의 태실을 봉안한 성주 선석산의 다른 태실을 옮기거나 철거할 것을 청하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성주(星州) 선석산(禪石山)에 주상(主上)의 태실(胎室)을 봉안(奉安)하였으나, 그러나 여러 대군(大君)과 여러 군(君)과 난신(亂臣) 이유(李瑜) 금성대군(錦城大君) 의 태실(胎室)이 그 사이에 섞여서 자리하였고, 또 법림산(法林山)에 노산군(魯山君)의 태실(胎室)이 있으니, 청컨대 여러 대군(大君)과 여러 군(君)의 태실(胎室)을 옮기고, 유(瑜)와 노산군(魯山君)의 태실은 철거(撤去)하게 하소서."

禮曹啓: "星州 禪石山奉安主上胎室, 而諸大君、諸君及亂臣瑜胎室雜處其間, 且法林山有魯山君胎室, 請移諸大君、諸君胎室而撤去瑜及魯山君胎室。" 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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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조실록』13권, 세조 4년(1458) 7월 8일 계사(癸巳) 2번째 기사


『세조실록』29권, 세조 8년(1462) 8월 17일 기묘(己卯)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화위당에서 주연을 베풀고 종친·재추·성균 생원들과 경서·병서를 강론하다》

임금이 화위당(華韡堂)에 나아가서 술자리를 베푸니, 내종친(內宗親) 및 판중추원사 김말(金末)·예조 판서 홍윤성(洪允成)·형조 판서 이극감(李克堪), 중추원 부사 어효첨(魚孝瞻)·송처관(宋處寬)·한계희(韓繼禧), 한성부 윤 황효원(黃孝源)과 승지 등이 입시(入侍)하였다.

겸 예문 성균 박사(兼藝文成均博士) 박시형(朴始亨)·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 김종직(金宗直)·예문 대교(藝文待敎) 허선(許譔)과 성균 생원(成均生員) 김종한(金從漢) 등 5사람에게 경서(經書)를 강(講)하게 하고, 술을 내려 주었다.

임금이 종친(宗親)·재추(宰樞)와 더불어 혹은 병서(兵書)를 논(論)하고 혹은 경사(經史)를 의논하기도 하였다. 홍윤성이 안태사(安胎使)로 경상도 성주(星州) 곤양(昆陽)을 향해 떠나려고 하였는데, 돌아올 적에 그 아비를 홍산(鴻山)에 가서 뵙기를 청하니, 충청도관찰사에게 명하여 홍윤성의 어미와 할아버지의 무덤에 치제(致祭)하고 그의 아버지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게 하였다.

己卯/御華韡堂, 設酌。 內宗親及判中樞院事金末、禮曹判書洪允成、刑曹判書李克堪、中樞院副使魚孝瞻ㆍ宋處寬ㆍ韓繼禧、漢成府尹黃孝源、承旨等入侍。 講兼藝文成均博士朴始亨、承文院博士金宗直、藝文(侍)〔待〕 敎許譔及成均生員金從漢等五人經書, 賜酒。 上與宗親、宰樞或論兵書, 或議經史, 允成將以安胎使發向慶尙道 星州、昆陽, 請於回還覲父于鴻山, 命忠淸道觀察使致祭于允成母墳、祖墳, 宴其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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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조실록』29권, 세조 8년(1462) 8월 17일 기묘(己卯) 1번째 기사


『세조실록』29권, 세조 8년(1462) 8월 22일 갑신(甲申)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예조에 어태(御胎)·왕세자·원손의 태실에 석난간을 설치하지 말도록 하다》

예조(禮曹)에 전지(傳旨)하기를,

"금후로는 어태(御胎) 및 왕세자(王世子)·원손(元孫)의 태실(胎室)은 모두 석난간(石欄干)을 설치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傳旨禮曹曰: "今後御胎及王世子、元孫胎室, 竝勿設石欄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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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조실록』29권, 세조 8년(1462) 8월 22일 갑신(甲申) 2번째 기사


『세조실록』29권, 세조 8년(1462) 9월 14일 을사(乙巳)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성주에 있는 어태실(御胎室)의 의물 설치를 불허하고 비(碑)만 세우다》

먼저 예조에서 아뢰기를,

"어태실(御胎室)이 성주(星州)의 대군(大君)과 여러 군(君)의 태실(胎室) 곁에 있으며, 또한 의물(儀物)도 없으니, 청컨대 장소를 가려서 이안(移安)하고 선왕(先王)의 구례(舊禮)에 의하여 의물을 설치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고 다만 명하여 표석(標石)을 없애고 비를 세워 구별하도록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비(碑)를 세웠다. 그 글은 이러하였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세종 장헌 대왕(世宗莊憲大王)께서 즉위(卽位)한 21년 에 유사(有司)에 명하여 땅을 점(占)치게 하고 대군(大君)과 여러 군(君)의 태(胎)를 성주(星州) 북쪽 20리 선석산(禪石山)의 산등성이에 갈무리하게 하고 각각 돌을 세워 이를 표(標)하였는데, 주상의 성태(聖胎)도 또한 그 가운데 들어 있어 표하여 이르기를, ‘수양 대군(首陽大君) 【휘(諱).】의 실(室)’이라 하였다.

지금은 하늘의 명(命)을 받들어 왕위에 오른 지 이미 8년이 지났으므로 예관(禮官)이 급히 조종(祖宗)의 고사(故事)에 의하여 따로 자리를 보아 어태(御胎)를 이안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형제가 태(胎)를 같이하였는데 어찌 고칠 필요가 있겠는가?’ 하시고, 의물(儀物)을 설치하기를 청하여도 역시 윤허하지 아니하시며 다만 표석을 없애고 비(碑)를 세워 기록할 것을 명하여 힘써 일을 덜게 하셨다.

아아! 우리 주상께서는 하늘을 받들고 도(道)를 몸받아서 문(文)에 빛나시고 무(武)에 뛰어나시고, 전하의 총명(聰明) 예지(叡智)하시고 겸손(謙遜) 검약(儉約)한 덕은 이루 다 이름하여 말할 수 없으나, 이 한가지 일을 가지고도 그 겸손하고 검소함을 숭상하여 지위가 더욱 높을수록 덕이 빛나는 지극함을 알 수 있으니, 조선 억만년의 무강(無彊)한 기초가 더욱 길이 아름다울 것을 또한 여기에서도 점칠 수 있을 것이다.

명(銘)에 이르기를, ‘아아! 빛나는 오얏나무[李], 천 가지 만 잎사귀라. 산매자꽃[棣華] 함께 비치는데 홀로 빼어나 밝게 빛난다. 용이 날아 하늘에 오르니 세상이 맑고 편하며, 우뚝한 신공(神功)은 제도를 갖추고 밝게 하였다. 돌아보건대, 성태(聖胎)를 예전대로 두고 옮기지 아니하여 예관(禮官)이 상청(上請)하여 옛 법을 따르기를 원하였으나 겸손하여 윤허하지 않으시니 검소한 덕이 더욱 빛난다.

귀부(龜趺)가 높이 섰으니 억만 년의 표석이라. 선산(禪山)이 높고 높아 그 맑고 아름다움을 간직하였으니, 천지(天地)와 같이 길고 오래도록 창성하고 빛나리라.’고 하였다."

乙巳/先是, 禮曹啓: "御胎室在星州大君、諸君胎室之旁, 且無儀物, 請擇地移安, 依先王舊例設儀物。" 不允, 只命去標石, 立碑以別之, 至是立碑。

其文曰:

恭惟我世宗莊憲大王卽位之二十一年命有司卜地, 藏諸大君、諸君之胎于星州治北二十里禪石山之岡, 各立石標之, 主上聖胎亦列其行, 表曰首陽大君諱之室。 厥今膺景命, 御瑤圖已踰八禩, 禮官亟請依祖宗故事, 別爲相攸, 移安御胎, 不允曰, "兄弟同胎, 何必改爲?" 請設儀物, 亦不允, 乃命只去標石, 樹碑志之, 務令省事。 於虖我主上, 承天體道, 烈文英武, 殿下聰明睿智, 謙遜儉約之德, 莫罄名言, 然猶卽此一事, 亦可知其執謙崇儉, 處愈尊德愈光之至也。 而朝鮮億萬年無疆之基, 益以永孚于休者, 亦於是乎可占矣。

銘曰,

於赫仙李, 本支萬葉。 棣華交暎, 獨秀曄曄。 龍飛御天, 海宇淸寧。 巍乎神功, 制度備明。 顧惟聖胎, 仍舊不移, 禮官上請, 願遵往規, 謙光不允, 險德彌昭。 龜趺卓立, 億載之標。 禪山峩峩, 秘厥英粹, 天長地久, 克昌以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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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조실록』29권, 세조 8년(1462) 9월 14일 을사(乙巳) 1번째 기사


『연산군일기』41권, 연산군 7년(1501) 9월 28일 계묘(癸卯)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상참을 받고 경연에 나오다》

상참을 받고 경연에 납시었다. 사간 박중간(朴仲幹)이 아뢰기를,

"근래에 천변이 자주 일어나니, 전하는 진실로 마땅히 두려워하고 수양 반성하여 대신들을 자주 만나서 치도(治道)를 물으시고, 무릇 형벌을 삼가하고 원통한 일을 펴주며 백성들의 괴로움을 풀어주는 일들을 모두 강구하여 하늘의 견책에 보답하셔야 합니다."

하였다.

장령 정인인(鄭麟仁)이 아뢰기를,

"신은 듣건대, 선왕조(先王朝)에 있어서는 여덟 대군(大君)의 태(胎)를 한 곳에 같이 묻었는데, 세조(世祖)께서 즉위하시자 그 태를 다른 곳에 묻기를 청하니, 세조께서 이르시기를 ‘옮기지 말라. 본래 형제는 태를 같이 하였으니, 같이 묻는 것이 무엇이 해롭겠느냐. 표석(標石)을 없애고 지석(誌石)을 묻어서 구별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또한 이 예에 따라 여러 군(君)들의 태를 한곳에 같이 묻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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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산군일기』41권, 연산군 7년(1501) 9월 28일 계묘(癸卯) 1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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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학술적 성격의 저작물

1.고문헌

  •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태봉(胎封)』, 1928,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2.단행본

  •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삼릉태실』,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 심현용, 『한국 태실 연구』, 경인문화사, 2016.
  • 이규상 편, 『한국의 태실』, 청원문화원, 2005.
  • 윤진영, 김호, 이귀영, 홍대한, 김문식 공저, 『조선왕실의 태실 의궤와 장태 문화』,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

3.논문

  • 윤석인, 『조선왕실의 태실 변천 연구』,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

대중적 성격의 콘텐츠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