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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3대 왕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 소생의 조선 4대 국왕, 세종(世宗)의 안태지(安胎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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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4대 국왕 세종의 태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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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안지는 알 수 없으나 즉위한 1418년 가봉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이 때 태실 가봉을 위해 도감(都監)을 설치했다. 태실 가봉을 위해 도감을 설치한 기록이 처음 보이는 사례이며, 앞 서 다른 국왕의 태실을 가봉할 때도 도감이 설치되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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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오(鄭以吾)를 태실 증고사(胎室證考使)로 삼은지 약 두 달 만에 태실산도(胎室山圖)를 바쳤고 그대로 진주 곤명으로 결정지었다. 이 때 태실에 대한 제도가 갖추어진 것으로 보인다. 태실도감에서는 태실(胎室)에 시위(侍衛)하는 품관(品官) 8인과 수호(守護) 8인을 두기를 청하였고 상왕으로 있던 태종은 이를 따랐다. 또한 태실에 돌난간을 설치하면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이유로 나무를 이용하여 난간을 만들게 했다. 혹 난간이 썩으면 고쳐서 다시 만들라고 했다. 여기에 더해 가봉처로 태를 봉안하는 절차도 갖추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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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태실은 정유재란(1597) 당시 도굴 당해 파손되었다. 이에 선조는 1601년(선조 34)에 다시 정비했다. 현재 전하는 석물의 대부분은 이 때 다시 갖추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태봉비는 숙종 때 마련하였으나 훼손된 것으로 보이며 영조 때 다시 마련되었다. 1734년(영조 10)에 세종·단종·예종·현종의 태봉에 비를 세우게 했다. 이 때 예조의 당상과 선공감역을 각각 1원을 보내 감독하게 했다. 태실이 위치했던 곳은 분묘가 들어서 있으며, 일부 석물은 태실의 것을 활용했을 가능성이 있어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다. 다만 가봉비를 비롯하여 몇몇의 석물은 수습되어 인근 길 옆에 모아져있다. 유물들은 현재 경상남도 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어있다.
  
 
=='''관련 기록'''==
 
=='''관련 기록'''==

2020년 1월 13일 (월) 01:2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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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태실(世宗 胎室)
경남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의 세종 태실 터 전경
식별자 PC004
분류 국왕 태실
한글명 세종 태실
한자명 世宗 胎室
영문명 Placenta Chamber of King Sejong
피안자 명칭 세종(世宗)
피안자 이칭 이도(李祹)·자(字) 원정(元正)·충녕대군(忠寧大君)·장헌대왕(莊憲大王)·영릉(英陵)
피안자 부 태종(太宗)
피안자 모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
피안자 생년월일 1397.04.10
피안자 몰년월일 1450.02.17
안태 연월일 미상
안태지 기록 진주 곤명현가봉 후 곤남군으로로 승격
안태지 기록1 전라도 보성 실록의 오기(誤記)
안태지 기록2 곤양 소곡산 『정조실록』
안태지 기록3 경남 사천군 곤명면 『서삼릉 세종 태실 후면 각자』
안태지 좌표(위도) 35°13'54.87"N
안태지 좌표(경도) 127°90'47.39"E
안태지 주소 경남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산 27
문화재 지정여부 경상남도 기념물 제30호
이안 연월일 1929 추정
이안지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서삼릉 내
이안지 좌표(위도) 37°66'45.61"N,
이안지 좌표(경도) 126°86'06.29"E
지문 世宗大王胎室,皇明萬曆二十九年,三月,二十二日,改藏
지문 찬자 조선 예조(朝鮮 禮曹)
지문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석물 세종 태실 석물군가봉비 외 다수 석재
태항아리 세종 태지석 및 내항아리 몸체와 뚜껑
태항아리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목차

내용

조선 제4대 국왕 세종의 태실이다.

초안지는 알 수 없으나 즉위한 1418년 가봉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이 때 태실 가봉을 위해 도감(都監)을 설치했다. 태실 가봉을 위해 도감을 설치한 기록이 처음 보이는 사례이며, 앞 서 다른 국왕의 태실을 가봉할 때도 도감이 설치되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정이오(鄭以吾)를 태실 증고사(胎室證考使)로 삼은지 약 두 달 만에 태실산도(胎室山圖)를 바쳤고 그대로 진주 곤명으로 결정지었다. 이 때 태실에 대한 제도가 갖추어진 것으로 보인다. 태실도감에서는 태실(胎室)에 시위(侍衛)하는 품관(品官) 8인과 수호(守護) 8인을 두기를 청하였고 상왕으로 있던 태종은 이를 따랐다. 또한 태실에 돌난간을 설치하면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이유로 나무를 이용하여 난간을 만들게 했다. 혹 난간이 썩으면 고쳐서 다시 만들라고 했다. 여기에 더해 가봉처로 태를 봉안하는 절차도 갖추어졌다.

세종 태실은 정유재란(1597) 당시 도굴 당해 파손되었다. 이에 선조는 1601년(선조 34)에 다시 정비했다. 현재 전하는 석물의 대부분은 이 때 다시 갖추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태봉비는 숙종 때 마련하였으나 훼손된 것으로 보이며 영조 때 다시 마련되었다. 1734년(영조 10)에 세종·단종·예종·현종의 태봉에 비를 세우게 했다. 이 때 예조의 당상과 선공감역을 각각 1원을 보내 감독하게 했다. 태실이 위치했던 곳은 분묘가 들어서 있으며, 일부 석물은 태실의 것을 활용했을 가능성이 있어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다. 다만 가봉비를 비롯하여 몇몇의 석물은 수습되어 인근 길 옆에 모아져있다. 유물들은 현재 경상남도 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어있다.

관련 기록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1권, 세종 즉위년(1418) 8월 14일 신묘(辛卯) 9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예조에서 태 봉안을 위해 태실 도감을 설치할 것을 아뢰다》

예조에서 계하기를,

"이제 장차 길한 때를 가리어 태(胎)를 봉할 것이오니, 청컨대 전례에 좇아 태실 도감(胎室都監)을 설치하여 길지(吉地)를 택하도록 하소서."

하여, 그대로 좇았다.

禮曹啓: "今將涓吉朔安胎, 請依前例, 立胎室都監, 擇吉地。" 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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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1권, 세종 즉위년(1418) 8월 14일 신묘(辛卯) 9번째 기사



『세종실록』1권, 세종 즉위년(1418) 8월 29일 병오(丙午)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전 대제학 정이오를 태실 증고사로 삼다》

전 대제학(大提學) 정이오(鄭以吾)를 태실 증고사(胎室證考使)로 삼고, 모관(毛冠)과 목화(靴子)와 약(藥)을 하사하였다.

以前大提學鄭以吾爲胎室證考使, 賜毛冠及靴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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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1권, 세종 즉위년(1418) 8월 29일 병오(丙午) 2번째 기사



『세종실록』1권, 세종 즉위년(1418) 10월 25일 신축(辛丑) 5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태실 증고사 정이오가 태실산도를 바치다》

태실 증고사(胎室證考使) 정이오(鄭以吾)가 진양(晉陽)으로부터 와서 태실산도(胎室山圖)를 바치니, 그 산은 진주의 속현 곤명(昆明)에 있는 것이었다.

胎室證考使鄭以吾來自晋陽, 獻胎室山圖。 山在晋州屬縣昆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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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1권, 세종 즉위년(1418) 10월 25일 신축(辛丑) 5번째 기사



『세종실록』2권, 세종 즉위년(1418) 11월 1일 정미(丁未) 3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태실 도감에서 진주 태실에 시위 품관 8인과 수호 8인을 두기를 청하다》

태실 도감(胎室都監)에서 진주(晉州)의 태실(胎室)에 시위(侍衛)하는 품관(品官) 8인과 수호(守護) 8인을 두기를 청하니, 상왕이 그 말을 따랐다.

胎室都監請置晋州胎室侍衛品官八人、守護干八人, 上王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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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2권, 세종 즉위년(1418) 11월 1일 정미(丁未) 3번째 기사



『세종실록』2권, 세종 즉위년(1418) 11월 3일 기유(己酉) 8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이유로 태실에는 돌난간 대신 나무 난간을 세우게 하다》

전교를 내리기를,

"태실(胎室)에 돌난간[石欄]을 설치하면서 땅을 파서 지맥(地脈)을 손상시켰으니, 지금 진주(晉州)의 태실에는 돌난간을 설치하지 말고, 다만 나무를 사용하여 난간을 만들었다가 썩거든 이를 고쳐 다시 만들 것이다. 이를 일정한 법식으로 삼을 것이다."

하였다.

宣旨: "胎室石欄之設, 掘地損脈。 今晋州胎室, 毋設石欄, 只用木爲欄, 朽則改之, 以爲恒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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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2권, 세종 즉위년(1418) 11월 3일 기유(己酉) 8번째 기사



『세종실록』2권, 세종 즉위년(1418) 11월 3일 기유(己酉) 1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태실 도감 제조 김자지에게 동옷 등을 내리다》

태실 도감 제조(胎室都監提調) 김자지(金自知)에게 동옷(襦衣)과 모관(毛冠)과 신을 내려 주었다.

賜胎室都監提調金自知襦衣、毛冠、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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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2권, 세종 즉위년(1418) 11월 3일 기유(己酉) 11번째 기사



『세종실록』2권, 세종 즉위년(1418) 11월 5일 신해(辛亥) 5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서원 부원군 한상경으로 안태사를 대신케 하다》

판한성(判漢城) 권홍(權弘)이 상왕에게 아뢰기를,

"지금 영돈녕(領敦寧) 유정현으로 안태사(安胎使)를 삼았는데, 정현이 의금부(義禁府)의 관직을 겸하고 있으니, 형관(刑官)으로서 일을 실행시킬 수 없습니다."

하니, 상왕이 말하기를,

"그렇다. 그 서원 부원군(西原府院君) 한상경(韓尙敬)으로 이를 대신하게 하라." 하였다.

判漢城權弘啓上王曰: "今以領敦寧柳廷顯爲安胎使。 廷顯職兼義禁府, 不可以刑官將事。" 上王曰: "然。 其以西原府院君 韓尙敬代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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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2권, 세종 즉위년(1418) 11월 5일 신해(辛亥) 5번째 기사



『세종실록』2권, 세종 즉위년(1418) 11월 5일 신해(辛亥) 6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예조에서 태실을 진주에 옮겨 봉안하는 절차에 대해 아뢰다》

예조에서 계(啓)하기를,

"태실(胎室)을 진주(晉州)로 옮겨 봉안(奉安)할 때에, 태(胎)를 모시는 곳에는 채붕(綵棚)을 짓고 나희(儺戱)를 베풀게 하며, 그 지나가는 주(州)·현(縣)에는 다만 관문(館門)에만 채색 누각을 짓고 의장(儀仗)과 고악(鼓樂)을 갖추며 교외(郊外)에서 맞이하고, 각 도의 감사와 수령은 자기의 관내를 넘어오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하니, 그 말을 따랐다.

禮曹啓: "胎室移安晋州時, 令於安胎處, 結綵棚、設儺戱, 其所過州縣, 止於館門結綵, 以儀仗、鼓樂郊迎, 各道監司、守令毋得越境。" 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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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2권, 세종 즉위년(1418) 11월 5일 신해(辛亥) 6번째 기사



『세종실록』2권, 세종 즉위년(1418) 11월 11일 정사(丁巳) 5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진주로 임금의 태를 받들고 가는 권규에게 털옷 등을 내려 주다》

길창군(吉昌君) 권규(權珪)가 유후사(留後司)로부터 임금의 태(胎)를 받들고 진주(晉州) 곤명현(昆明縣)을 향하여 가는데, 모의(毛衣)와 모관(毛冠)을 내려 주었다.

吉昌君 權珪自留後司奉御胎向晋州 昆明縣, 賜毛衣、毛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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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2권, 세종 즉위년(1418) 11월 11일 정사(丁巳) 5번째 기사



『세종실록』3권, 세종 1년(1419) 3월 27일 신미(辛未) 5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진주에 소속되었던 곤명을 남해현에 합하여 곤남군으로 승격시키다》

진주(晉州)에 소속되었던 곤명현(昆明縣)을 남해현(南海縣)과 합하여 승격시켜 곤남군(昆南郡)을 만들었다.

처음에 왕의 태(胎)를 곤명 땅에 매안(埋安)하여, 곤명 사람들이 따로 고을을 설치하자는 주청이 있으므로, 경상도 감사에게 명하여 가부를 살펴서 알리라고 했던 것인데, 요새 와서 감사 신상(申商)이 계하기를,

"곤명을 남해현과 합하여 따로 한 고을을 설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아울러 지도를 올렸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형으로 보면, 곤명이 당연히 남해와 합해야 하겠으나, 곤명을 빼앗아서 남해에게 주면, 진주 사람이 반드시 원통하다 할 것이니 어떻게 하느냐."고 하니,

호조 판서 권진(權軫)·공조 판서 이적(李迹) 등이 아뢰기를,

"진주는 일찍이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진되었는데 목(牧)으로 내려졌으니, 지금 어태(御胎)를 매안한 연고로써 다시 그전대로 올려 주는 것이 편의할 것 같습니다."

하였고, 원숙·김익정 등이 아뢰기를,

"곤명이 진주 사람의 횡포에 시달리어 따로 고을을 만들려고 한 적이 오래였고, 또 진주는 토지도 넓고 인물도 많아서, 남방의 으뜸을 차지하고 있으니, 백 호쯤 되는 곤명이 떨어져 나간다 해도 별 영향이 없을 것이며, 하물며 지금 어태를 그 땅에 매안하지 아니하였습니까. 곤명은 남해에 합쳐, 따로 곤남군을 만드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줄 아옵니다."하였다.

임금이 원숙 등의 제안에 따랐다.

以晋州屬縣昆明, 合於南海縣, 陞爲昆南郡。 初, 安御胎于昆明之地, 昆明人請別置邑, 乃命慶尙道監司, 審視可否以聞。 至是, 監司申商啓: "宜合昆明於南海縣, 別置一邑。" 幷地圖以進。 上曰: "以勢觀之, 昆明當合南海, 然奪昆明與南海, 則晋人必訴冤, 奈何?" 戶曹判書權軫、工曹參判李迹等曰: "晋州嘗陞爲大都護府, 而降爲牧。 今以安胎之故, 復陞其號爲便。" 元肅、金益精等曰: "昆明困於晋人侵暴, 思別爲邑久矣。 且晋之爲州, 土地之廣、人物之多, 爲南州最, 雖減昆明百戶, 不是瘠矣, 況今御胎安於其地乎? 合昆明於南海, 別爲昆南郡, 庶合事宜。" 上從肅等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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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3권, 세종 1년(1419) 3월 27일 신미(辛未) 5번째 기사



『세종실록』13권, 세종 3년(1421) 10월 10일 기해(己亥) 5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태실에 안위하는 제사를 없애라고 명하다》

태실(胎室)에 안위(安慰)하는 제사를 없애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왕자의 태(胎)를 묻은 뒤에 3년만에 한 차례씩 제사지내는 것을 태실 안위제(胎室安慰祭)라 하였다.

이날에 이르러 예조에서 서운관(書雲觀)에 명하여 옛날 규례를 상고하라 하였더니, 태조와 공정왕은 안태(安胎)한 뒤에 다 안위제(安慰祭)를 행하지 아니하였다 하므로, 인하여 없애라고 명하게 되었다.

命除胎室安慰祭。 前此, 安胎後, 每三年一次行祭, 謂之胎室安慰祭。 至是, 禮曹令書雲觀稽舊例, 太祖、恭靖王安胎後, 竝不行安慰祭, 乃命罷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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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13권, 세종 3년(1421) 10월 10일 기해(己亥) 5번째 기사



『명종실록』1권, 명종 즉위년(1545) 7월 19일 기묘(己卯) 5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세종의 태실산의 소나무와 여막 등이 큰 비바람으로 피해를 입다》

전라도 보성군(寶城郡)에 비바람이 크게 일어 세종(世宗)의 태실산(胎室山)의 소나무 70여 그루와 잡목이 다 부러지고 바닷물이 사납게 넘쳐 염막(鹽幕) 13개 소와 민가 42호가 표몰되었으며, 남녀 5명이 익사하였다. 경상도 곤양군(昆陽郡)에도 큰 비바람이 일었다.

全羅道 寶城郡, 風雨大作, 世宗胎室山松木七十餘條雜木, 盡爲摧折。 海水暴溢, 鹽幕十三、人家四十二漂沒, 男女五人溺死。 慶尙道 昆陽郡, 大風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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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명종실록』1권, 명종 즉위년(1545) 7월 19일 기묘(己卯) 5번째 기사



『영조실록』26권, 영조 6년(1730) 5월 10일 정축(丁丑)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연좌와 무관한 역적의 친척 처벌 금지. 농번기 부역을 염려하여 왕실의 일도 연기하다》

… (전략) … 또 아뢰기를,

"곤양(昆陽)에 있는 세종대왕(世宗大王) 태실(胎室) 난간석(欄干石)에 탈(頉)이 있는 곳을 영백(嶺伯)의 장계에 따라 이제 곧 개수(改修)하려고 하오나, 이러한 농번기(農繁期)에 백성을 부역(赴役)시키는 것이 염려되오며, 또 봉내(封內)에 탈이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르니 우선 장마철이 지나기를 기다려 공역(工役)을 시작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다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근래에 풍속이 점점 경박하여 동몽(童蒙)들이 당초에 교관(敎官)에게 나아가 배울 생각을 하지 않으며, 교관도 또한 착실히 가르치지 않습니다. 청컨대 1개월에 세 차례 강독(講讀)하는 규정을 거듭 밝히고 따르지 않는 자는 죄를 주어 태만한 관원을 격려(激勵)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又啓曰: "昆陽 世宗大王胎室欄干石有頉處, 因嶺伯狀啓, 今將修改, 而當此劇農, 役民可慮。 且與封內有頉稍異, 姑待潦後始役, 恐宜矣。" 上曰: "可。" 又啓曰: "近來風俗渝薄, 童蒙初不就學於敎官, 敎官亦不着實訓誨。 請申明一月三講之規,不能者罪之, 以勵怠官。" 上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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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조실록』26권, 영조 6년(1730) 5월 10일 정축(丁丑) 1번째 기사



『영조실록』30권, 영조 7년(1731) 12월 15일 갑진(甲辰)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대신·비국 당상을 소견하여 삼남을 진제할 대책을 강구하다》

임금이 정섭(靜攝)한 나머지 빈연(賓筵)을 오랫동안 비워 두었었는데,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소견(召見)하여 삼남(三南)을 진제(賑濟)할 대책을 강구하였다.

예조 판서 신사철(申思喆)이 말하기를,

"세종 대왕·단종 대왕·예종 대왕·현종 대왕의 태실(胎室) 석물(石物)을 마땅히 명년 봄에 수개(修改)하여야 하는데, 마침 흉년이 든 시기를 만났으니, 청컨대 명년 가을을 기다리게 하소서. 식년(式年)의 대소과(大小科)도 또한 마땅히 명년 가을로 물려서 행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上以靜攝之餘, 賓筵久曠, 召見大臣、 備堂, 講究三南賑濟之策。 禮曺判書申思喆曰: "世宗大王、端宗大王、睿宗大王、顯宗大王胎室石物, 當於明春修改, 而適値時詘, 請待明秋。 式年大小科, 亦當退行於明秋也。" 上竝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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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조실록』30권, 영조 7년(1731) 12월 15일 갑진(甲辰) 2번째 기사



『영조실록』38권, 영조 10년(1734) 7월 11일 갑신(甲申)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관원을 보내서 세종·단종·예종·현종의 태봉에 비를 세우는 역사를 감독하게 하다》

세종 대왕(世宗大王)·단종 대왕(端宗大王)의 태봉(胎峰)은 경상도 곤양군(昆陽郡)에 있고, 예종 대왕(睿宗大王)의 태봉은 전라도 전주부(全州府)에 있고, 현종 대왕(顯宗大王)의 태봉은 충청도 대흥군(大興郡)에 있는데, 장차 비(碑)를 세우려 함에 있어서 표석(標石)이 이지러져서 고쳐야 되므로, 예조 당상(禮曹堂上)과 선공감역(繕工監役) 각 1원(員)을 보내서 그 일을 감독하게 할 것을 명하였으니, 선조(先祖) 신묘년의 전례를 적용한 것이었다.

世宗、端宗大王胎峰, 在慶尙道 昆陽郡, 睿宗大王胎峰, 在全羅道 全州府, 顯宗大王胎峰, 在忠淸道 大興郡, 將竪碑以標石缺當改, 命遣禮曹堂上、繕工監役各一員, 蕫其事, 用先朝辛卯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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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조실록』38권, 영조 10년(1734) 7월 11일 갑신(甲申) 2번째 기사



『순조실록』32권, 순조 31년(1831) 11월 12일 경신(庚申)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홍희근이 경종 대왕 태실의 작변을 이유로 백성과 감관을 처벌한 것에 대해 의논하다》

공충 감사 홍희근(洪羲瑾)이 치계(馳啓)하기를,

"이달 초4일 충주 구만리(九萬里)에 있는 경종 대왕 태실(胎室)의 개첨석(蓋簷石)·우상석(隅裳石)·좌대석(坐臺石)과 정남쪽 아래 전석(磚石)·횡대석(橫帶石)·연엽주석(蓮葉柱石)에 모두 작변(作變)한 흔적이 있어서, 산하(山下)에 사는 백성과 감관(監官)을 일체 잡아다 가두었고, 죄인은 방금 기포(譏捕)하는 중입니다."

하였는데, 하교하기를,

"밤에 공충 감사의 장계(狀啓)를 보고는 놀랍고 송구함을 견디지 못하겠는데, 태봉(胎封)에 변고를 일으킨 일이 옛날에도 있었는지 모르겠다. 또 변고가 생긴 일이 이미 도내(道內)에 있으면 지방관과 도백(道伯)에 대해 마땅히 감죄(勘罪)가 있어야 될지 여부와 그 전례의 유무를 아울러 알려고 하니, 대신들은 들어와서 품처(稟處)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좌상·우상을 소견하였는데, 좌의정 이상황이 말하기를,

"태봉에 변고를 일으킨 일이 이미 도내에 있었으면 도신과 지방관에 대해 죄를 논감(論勘)하는 거조가 없어서는 안되겠지만, 전에부터 외도(外道)에 일이 있어 비록 강상(綱常) 등에 관련된 옥사(獄事)와 같이 관계가 매우 중대하여도 도신이 이로 인해 죄를 입은 전례는 없었습니다. 지방관에 있어서는 논감함이 없을 수 없습니다만, 생각건대, 전패(殿牌)에 작변한 고을의 수령(守令)을 논감하지 않았던 것은 실로 선조(先朝) 때 깊이 생각하시고 멀리 보시는 성의(聖意)에서 나왔습니다.

또 《춘관통고(春官通考)》를 상고해 보건대, 옛날에도 서산(瑞山)의 태봉에 작변한 일이 있었는데, ‘사단(事端)이 본관(本官)을 모해하려는 데에서 말미암았다.’고 말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에 만약 수령을 논감한다면, 지금은 민심이 옛 같지 않아서 앞으로의 우려가 없을 것이라고는 보장하기 어렵기 때문에 감히 논죄(論罪)해서는 안된다고 우러러 아룁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숙묘조(肅廟朝) 때 곤양(昆陽)·전주(全州)·대흥(大興)에 있는〈세종·단종·예종·현종〉 4조(朝)의 태봉(胎峰)에 표석(表石)을 세우고 탈이 난 곳을 보수하는 역사(役事)로 인하여 예조 당상과 감역관(監役官)을 내려 보내는 것을 드러나게 법식으로 정했는데, 영묘조(英廟朝) 때 임천(林川)에 있는 〈선조(宣祖)의〉 태실을 개수할 때에도 역시 이 전례를 좇았으니, 이번에도 역시 이에 의하여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이번은 보통 탈이 있는 것과는 차이가 있으니, 만약 별도로 사람을 보내어 봉심(奉審)한다면 정리와 예의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예조 당상을 보내 봉심하라고 명하였다.

公忠監司洪羲瑾馳啓言: "今月初四日, 忠州 九萬里, 景宗大王胎室蓋簷石、隅裳石、坐臺石、正南下磚石、橫帶石、蓮葉柱石、俱有作變之痕, 山下居民及監官, 一倂捉囚, 罪人則今方譏捕。" 敎曰: "夜見錦伯狀啓, 不勝驚悚, 而不知胎封作變, 古亦有之。 且作變旣在道內, 則地方官, 與道伯, 當有勘罪與否, 其例有無, 幷欲知之, 大臣入來, 稟處。" 仍召見左右相, 左議政李相璜言: ‘胎封作變, 旣在道內, 則道臣地方官, 不可無論勘之擧, 而從前外道有事, 雖干係甚重, 如事關綱常等獄, 道臣無因此被罪之例。 至於地方官, 不可無論勘, 而第念殿牌作變邑守令之不爲論勘, 實出先朝深惟遠覽之聖竟。 且考見《春官通考》, 古亦有瑞山胎封作變之事, 而有曰, 「事端由於謀害本宮」 云。 今若論勘守令, 則以今民心之不古, 難保無來後之慮, 故不敢以論罪仰奏矣。’ 又言, ‘肅廟朝因昆陽、全州、大興四朝胎峰立表補頉之役, 以禮曹堂上及監役官下去, 著爲定式, 英廟朝林川胎室修改時, 亦遵行此例, 今亦當依此擧行, 今番則與尋常有頉有異, 若別遣奉審, 則恐合情文矣。’ 命遣禮堂奉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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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조실록』32권, 순조 31년(1831) 11월 12일 경신(庚申) 1번째 기사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 706책 (탈초본 39책) 영조 6년(1730) 5월 10일 정축(丁丑) 18/18 기사

Quote-left blue.png 五月初十日巳時, 上御興政堂。藥房入診時, 提調尹淳, 副提調鄭錫五, 假注書金聲大,

編修官張斗周, 記事官李日瑞, 醫官權聖徵·金應三·玄悌綱·許信·李徵夏·玄起鵬入侍。

… (중략) … 淳曰, 昆陽世宗大王胎室欄干石竹石有頉處修改事, 因嶺伯狀啓, 今將擇日擧行, 而似聞胎室, 內封堅密, 安排石甕, 藏聖胎於磁器, 奉安於甕內, 覆以石蓋, 此則雖千年, 可無動撓之慮, 而卽今有頉處, 只是外面排設而已。

昆陽, 道里絶遠, 擇日知委, 動民浮石之際, 必當六月潦雨之節, 事役難於就緖, 且當劇農, 役民可慮。修改處旣與封內有間, 則稍待潦雨後始役, 似不至大段未安。修改吉日, 以七月晦八月初推擇, 恐或得宜, 何以爲之?

上曰, 此與陵寢有頉有異, 且非封內, 乃是外排設, 則不但潦雨可慮。方當劇農, 擇日事, 依所達爲之,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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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06책 (탈초본 39책) 영조 6년(1730) 5월 10일 정축(丁丑) 18/18 기사



『승정원일기』 717책 (탈초본 39책) 영조 7년(1731) 1월 22일 병술(丙戌) 22/23 기사

Quote-left blue.png 領敦寧魚有龜疏曰, 伏以臣伏見禮曹啓目, 則慶尙道昆陽地, 世宗大王·端宗大王胎室, 石物修改吉日, 擇定於來二月十三日及十九日, 而禮曹堂上·繕工提調, 將於今晦前, 及期發行矣。

臣待罪該監提擧, 職事所管, 當爲進去, 而身帶將任, 不敢循例辭陛, 在前冬, 有急時陵寢奉審, 而以臣之故, 致令工曹堂上替行, 前例雖或如此, 事體未免苟簡。且臣之衰昏, 日甚月增, 軍門重務, 轉就曠廢, 其在朝體, 尤宜先加變通。

伏乞聖明, 量察事役之緊重, 許遞臣所帶將任, 俾以該監職掌, 依例進去, 以效臣子往役之義, 不勝幸甚。臣無任屛營祈懇之至, 謹昧死以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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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17책 (탈초본 39책) 영조 7년(1731) 1월 22일 병술(丙戌) 22/23 기사



『승정원일기』 719책 (탈초본 39책) 영조 7년(1731) 3월 25일 무자(戊子) 38/39 기사

Quote-left blue.png 辛亥三月二十五日巳時, 上御進修堂。

大臣·備局堂上引見時, 領議政洪致中, 右議政趙文命, 戶曹判書金東弼, 刑曹判書尹游, 判義禁徐命均, 大司成宋眞明, 左副承旨李匡輔, 執義韓師得, 校理李宗白, 正言閔珽, 假注書鄭權, 事變假注書安后奭, 記事官朴宗儒, 編修官李麟興入侍。

… (중략) … 致中曰, 此則昆陽胎室奉審狀啓也。今此胎室禁標內, 民人田畓, 多至十七結六十餘負, 亦有民家四戶云。二百年民人耕食居住之地, 一朝陳廢, 則必有失業難保之弊, 宜有給價代土之事, 而但胎室, 例封高絶處, 去乎地甚遠, 豈有十七結入禁標之理乎?

必是尺量時不能詳審之致, 更爲詳細尺量, 定禁標, 禁標內民田·民家, 則給價代土間, 合有變通之擧矣。

上曰, 依爲之。想是尺量不能詳審之致也。

尹游曰, 臣於再昨年, 淸州胎室奉標時, 進參矣。胎室禁標, 宣德年間, 以三百步爲定式, 今此昆陽, 旣在定式之前, 當初定以三百步, 未可知矣。胎室占地, 例在高尖處, 從上頭尺量民田, 似不多入矣。今此十七結, 似爲過多, 慮或尺量, 有未審矣。

上曰, 雖平地, 三百步之內, 民田, 豈至十七結之多乎?

李匡輔曰, 胎室, 例在於土山高尖處, 而近來民繁土貴, 山腰以上, 亦皆開墾, 十七結之入於禁標, 亦非異事矣。游曰, 必以三百步爲定界乎?

上曰, 彼處地形, 詳問于今番奉審諸臣, 且令觀象監, 考出當初禁標文書, 陳達,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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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19책 (탈초본 39책) 영조 7년(1731) 3월 25일 무자(戊子) 38/39 기사



『승정원일기』 720책 (탈초본 39책) 영조 7년(1731) 4월 5일 정유(丁酉) 29/29 기사

Quote-left blue.png 辛亥四月初五日午時, 上御進修堂。

大臣·備局堂上引見入侍時, 左議政李㙫, 兼禮曹判書申思喆, 戶曹判書金東弼, 行副司直張鵬翼, 刑曹參判洪鉉輔, 行大司成宋眞明, 左副承旨李匡輔, 掌令李台徵, 校理尹彙貞, 假注書趙明履, 事變假注書安后奭, 記注官趙昌來, 記事官洪昌漢同爲入侍。

… (중략) … 㙫曰, 天啓甲子仁祖初年, 胎峯始爲定式, 大王胎峯, 則三百步矣。世宗大王胎室, 自上峯至峯底, 爲一百四五十步, 犯民田處四面各一百五六十步, 民田斗數七石十一斗零落只。端宗大王胎室, 自上峯至峯底, 爲四十餘步, 犯民田處四面各二百五十餘步, 民田斗數十七石九斗零落只, 人家撤毁, 亦三四處矣。民田若欲仍存, 則違式, 不欲仍存, 則當給其代, 而給其代亦難矣。

上曰, 仁廟以後, 則定以三百步, 而仁廟以前步數幾何?

眞明曰, 故[古]則無定步數之事, 天啓六年, 始限以三百步矣。㙫曰, 此事令道臣奉審, 方便處置, 何如?

上曰, 道臣諉廟堂, 廟堂諉道臣, 如是遷就, 豈有了期? 太祖以後, 自太宗, 已有胎峯, 天啓後, 若不皆定步數, 則仍之, 若皆定焉, 則給代土, 此二者中決之, 可也。

眞明曰, 列聖胎峯步數, 使之一一尺量上聞似好。

上曰, 退出詳知後, 更稟處之, 可也。

上又曰, 太祖胎峯, 亦封之乎? 在於何處?

匡輔曰, 在於高山。臣曾任南平時, 僧徒數人, 持勸緣文來言, 太祖胎峯, 在高山, 而無守護之事, 請令百姓, 各出物, 以爲守護之地。臣以爲如此, 則事甚猥越, 宜自監營狀達, 經禮曹奉審後, 定式爲之, 而臣適遞歸, 未知其後事矣。

上曰, 何年間事乎?

匡輔曰, 癸卯年也。其時守令, 或有給錢物者, 且已成牒於政府, 小臣見之寒心。

上曰, 政府踏印以給, 極可怪也。

㙫曰, 江華留守兪拓基狀啓, 城門及體城崩頹處浩大, 而客舍重建, 一日爲急, 又當方農, 有難竝擧矣。城役則待秋成修開事, 分付, 何如?

上曰, 依爲之。

㙫曰, 鎭海寺城門上伏波樓柱木, 太半腐朽, 以長木支撑, 先毁其樓, 然後樓下城頹處, 可以改築云, 令禁衛營, 卽速毁撤事, 分付, 何如?

上曰, 築城之役, 亦是禁衛營之所管乎?

眞明曰, 築城之役, 自江華府爲之, 城上之樓, 則是禁衛營之所管, 故大臣陳達如此矣。

上曰, 依爲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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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20책 (탈초본 39책) 영조 7년(1731) 4월 5일 정유(丁酉) 29/29 기사



『승정원일기』 723책 (탈초본 39책) 영조 7년(1731) 5월 23일 을유(乙酉) 30/30 기사

Quote-left blue.png 二更五點, 諸臣少退後還入。

假注書權贒, 身病猝重, 洪尙賓, 以此意微稟, 假注書姜必文, 追後入侍,

… (중략) … 鄭錫五曰, 小臣向者復命後, 未及入侍矣。世宗大王胎室步數廣, 而端宗大王胎峯步數至近, 三面皆民畓矣。胎峯之無火巢, 而以民田入案者, 殊涉怪異, 而本官及監營戶曹, 俱無可考文書。若欲定其步數, 割其田土, 則居民不無稱冤之端, 而景象慘然矣。此意下詢大臣而處之, 何如?

上曰, 元無定步數之事, 故百姓似當耕之食之, 詳考古例後處之宜矣。

錫五曰, 古例無詳考處矣。

致中曰, 觀象監及禮曹, 無胎峯謄錄矣。蓋近來則儀文甚備, 而古則不然矣。

上曰, 諸道所在胎峯步數, 尺量以來事, 曾有下敎矣。

思喆曰, 多有上來者矣。

致中曰, 胎峯例於田畓無處有之, 故火巢廣矣, 民田有處, 則自然步數狹矣。端宗胎室, 以其峯低, 故步數之狹, 至於如此, 事體殊甚未安, 詳考古例, 斟酌爲之, 何如?

文命曰, 仍舊, 何如?

上曰, 觀其步數尺量之上來, 稟于次對時,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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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23책 (탈초본 39책) 영조 7년(1731) 5월 23일 을유(乙酉) 30/30 기사



『승정원일기』 727책 (탈초본 40책) 영조 7년(1731) 7월 28일 기축(己丑) 34/35 기사

Quote-left blue.png 辛亥七月二十八日巳時, 上御時敏堂。

藥房入診, 禮曹判書申思喆, 請對同爲入侍時, 藥房提調金在魯, 禮曹判書申思喆, 左承旨李春躋, 假注書曺命敬, 記注官金洌·趙昌來, 醫官權聖徵·玄悌綱·許信·李徵夏·金德履·柳徵瑞入侍。

… (중략) … 思喆曰, 今春昆陽地世宗大王·端宗大王胎峯石物修改時, 因本道監司狀啓, 兩胎室皆無標石, 待今秋豎立事啓下, 所當趁今擇日擧行, 而頃日全州睿宗大王胎峯石物及大興顯宗大王胎峯石物有頉處修改, 竝待明春擧行事, 定奪矣。今此昆陽兩胎峯碑石豎立之役, 亦爲待明春擧行, 何如?

上曰, 依爲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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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27책 (탈초본 40책) 영조 7년(1731) 7월 28일 기축(己丑) 34/35 기사



『승정원일기』 736책 (탈초본 40책) 영조 7년(1731) 12월 16일 정미(丁未) 9/9 기사

Quote-left blue.png 十六日未時, 上御進修堂, 大臣·備局堂上引見。

京畿監司洪鉉輔, 同爲入侍時, 領議政洪致中, 兼禮曹判書申思喆, 行戶曹判書金東弼, 左參贊金在魯, 兵曹判書金取魯, 行副護軍宋寅明, 京畿監司洪鉉輔, 右副承旨徐命淵, 掌令權相一, 正言宋徵啓, 應敎李宗城, 假注書朴成玉, 事變假注書李山培, 記事官金益憲·趙明履, 以次入伏。

… (중략) … 思喆又啓曰, 昆陽地世宗大王·端宗大王·胎室標石及全州地睿宗大王胎室, 大興地顯宗大王胎室石物, 有頉等處修改之役, 竝待明春擧行事, 頃已定奪矣。所當趁明春擇日擧行, 而年事如此, 事役頗鉅, 勢難動役, 竝待明秋擧行, 何如?

上曰, 依爲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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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36책 (탈초본 40책) 영조 7년(1731) 12월 16일 정미(丁未) 9/9 기사



『승정원일기』 747책 (탈초본 41책) 영조 8년(1732) 7월 5일 기축(己丑) 36/36 기사

Quote-left blue.png 初五日辰時, 上御時敏堂。

藥房入診, 三大臣, 同爲入侍。備局堂上, 謝恩副使, 書狀官, 追後入侍時, 謝恩正使判府事李宜顯, 左議政趙文命, 右議政徐命均, 藥房提調金在魯, 副提調尹惠敎, 醫官權聖徵·金應三·許信·玄起鵬·金壽煃, 假注書權瑞東, 記事官金夢垕·金宗台入侍。左參贊宋寅明, 江華留守尹游, 禮曹判書宋成明, 刑曹判書李廷濟, 禮曹參判沈珙, 副護軍李瑜, 副使趙最壽, 書狀官韓德厚, 獻納閔珽, 修撰趙明澤·右副承旨金應福, 事變假注書李命弼, 追後入侍。

… (중략) … 成明曰, 昨年昆陽端宗大王胎室, 全州世宗大王胎室, 大興顯宗大王胎室, 石物修改, 以待明春擧行事, 定奪矣。今春則勢難爲之, 故將爲待秋擧行, 而湖中年事若失稔, 則何以爲之?

文命曰, 如此莫重之事, 不可以年事停止, 從當更爲稟定矣。

上曰, 依爲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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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47책 (탈초본 41책) 영조 8년(1732) 7월 5일 기축(己丑) 36/36 기사



『승정원일기』 748책 (탈초본 41책) 영조 8년(1732) 8월 5일 기미(己未) 31/31 기사

Quote-left blue.png 壬子八月初五日巳時, 上御時敏堂, 大臣·備局堂上引見入侍時, 右議政徐命均, 左參贊宋寅明, 判尹張鵬翼, 禮曹判書宋成明, 刑曹判書李廷濟, 右副承旨李匡世, 假注書鄭基安, 事變假注書金錫一, 記事官金宗台, 記事官趙明履。

… (중략) … 宋成明曰, 昆陽地世宗大王·端宗大王胎封及全州地睿宗大王胎封及大興地顯宗大王胎封, 碑石之役, 頃以更觀年事進退之意, 仰達矣。今年兩南之凶, 又如是孔慘, 似難擧行, 何以爲之乎?

命均曰, 事體雖重大, 聞昆陽等地, 被災尤慘云, 旣已停退, 姑爲待豐擧行, 亦好矣。

上曰, 事體重大, 何可待豐乎? 待明秋擧行,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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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48책 (탈초본 41책) 영조 8년(1732) 8월 5일 기미(己未) 31/31 기사



『승정원일기』 762책 (탈초본 42책) 영조 9년(1733) 7월 15일 갑오(甲午) 28/28 기사

Quote-left blue.png 巳時, 上御熙政堂, 大臣·備局堂上引見時, 左議政徐命均, 右議政金興慶, 禮曹判書申思喆, 工曹判書金東弼, 戶曹判書金在魯, 左參贊宋寅明, 刑曹判書趙尙絅, 江華留守李瑜, 右副承旨鄭羽良, 校理尹得和, 司諫李榕, 假注書鄭履儉, 事變假注書金錫一, 記事官趙榮國, 記事官李鼎輔入侍。

… (중략) … 思喆曰, 上年秋, 因禮官所達昆陽地世宗大王·端宗大王胎封碑石, 及全州地睿宗大王胎封, 大興地顯宗大王胎封石物, 有頉處修改之役, 因三南年事之凶歉, 待今秋擧行事, 定奪矣。連歲荐飢之餘, 今年穡事之豐歉, 姑不可知, 而累次請退, 事體未安, 何以爲之?

上曰, 大臣之意, 如何?

命均曰, 胎封事體, 非不重大, 而今年年事, 雖或稍登, 荐歉之餘, 公私物力俱殫, 此時動役, 似涉重難矣。

興慶曰, 石物有頉處, 果若難支一時, 則其勢宜不可他顧, 而如不至此, 則姑觀前頭, 徐徐擧行, 似好矣。

上曰, 待明年更稟,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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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62책 (탈초본 42책) 영조 9년(1733) 7월 15일 갑오(甲午) 28/28 기사



『승정원일기』 777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4월 10일 을묘(乙卯) 24/24 기사

Quote-left blue.png 午時, 復命入侍。禮曹判書尹淳, 承牌而至, 亦同爲入侍。

… (중략) … 淳曰, 小臣欲有所仰達矣。世宗·端宗兩朝胎封, 在於昆陽, 睿宗朝胎封, 在於全州, 顯宗朝胎封, 在於大興, 而昆陽則初無表石, 全州及大興兩所, 則所舖裳石動退, 其中兩石折傷。自辛亥年, 有修改之命, 而連値凶荒, 未卽擧行, 上年又爲稟達, 有待明年擧行之敎, 何以爲之? 惶恐敢達矣。

上曰, 表石則雖待年豎立, 亦或無妨, 而全州·大興兩所, 則似甚大段, 不可不急速修改也。

宗城曰, 使道臣奉審以報, 何如?

上曰, 每於此等事, 人情不能無少忽, 而以至於此矣。近來禮曹堂上, 未有行公者, 遷延至此, 事在緊急, 則豈計農節耶? 若以妨農爲慮, 則雖役以僧軍, 不可已也。且此與改封築, 異矣。

游曰, 胎封必於尖峯上占地, 故裳石, 每易於流移矣。至於缺傷處, 尤難於待秋遲緩矣。

上曰, 分付道臣, 使卽奉審馳啓, 而若其最爲緊急, 則卽爲定行, 如不至大悶急, 則事體雖甚未安, 姑爲待秋, 而擇日則趁今預爲之, 可也。

淳曰, 昆陽表石, 亦已浮置。以役事言之, 不過豎立而已, 似不大段矣。

上曰, 大興·全州畢役之後, 仍爲始役於昆陽,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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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77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4월 10일 을묘(乙卯) 24/24 기사



『승정원일기』 779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5월 12일 정해(丁亥) 16/28 기사

Quote-left blue.png 鄭必寧, 以禮曹言啓曰, 昆陽地, 世宗大王·端宗大王胎峯, 初無表石, 全州地睿宗大王胎峯, 裳石擧皆動退, 而二立折爲兩段, 表石有大段欲折之橫紋七處。

大興地, 顯宗大王胎峯表石, 字畫缺落, 罅隙處又至五處, 而亦大段, 裳石擧皆退隙, 其中二立, 又爲缺傷等處, 分付本道道臣, 使卽奉審馳啓, 而若其最爲悶急, 則卽爲定行, 如不至悶急則事勢雖甚未安, 姑爲待秋而擇日, 則趁今預爲之, 可也事, 頃因傳敎, 分付三道矣。

卽見慶尙監司金始炯, 全羅監司趙顯命, 忠淸監司李壽沆狀啓, 則昆陽兩胎峯表石豎立, 則姑觀年事登場, 擧行爲請, 而全州胎峯表石·裳石有頉外, 又有川防之役, 大興胎峯表石·裳石, 竝待秋改鋪改立之意, 狀聞矣。

三處胎峯, 表石及裳石修改之役, 不可不趁今秋擧行, 依前例令該監, 擇日修改, 本曹堂上郞廳及觀象監·繕工監提調, 趁期下去, 與本道監司, 會同改排, 而容入石物, 令本道預爲浮取事, 分付三道監司處, 何如?

傳曰, 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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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79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5월 12일 정해(丁亥) 16/28 기사



『승정원일기』 779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5월 14일 기축(己丑) 22/29 기사

Quote-left blue.png 《吉日 등에 관한 禮曹의 草記》

又以禮曹言啓曰, 昆陽地世宗大王胎室表石, 全州地睿宗大王胎室裳石·表石, 大興地顯宗大王胎室裳石·表石有頉處, 修改及始役吉日時, 推擇以入, 而觀象監官員及繕工監監役官各一員, 令本監擇定, 前期下去本道, 眼同看役, 觀象監官員下去時, 告由祭香祝, 仍爲受去設行, 而本曹堂上郞廳及觀象監繕工監提調, 則石物排設, 臨時下去, 先詣大興, 董役事畢後, 轉詣全州及昆陽監董事役事, 分付本道及該監, 何如?

傳曰, 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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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79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5월 14일 기축(己丑) 22/29 기사



『승정원일기』 783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7월 11일 갑신(甲申) 25/26 기사

Quote-left blue.png 甲寅七月十一日辰時, 上御熙政堂。

藥房入診, 都提調金興慶, 提調宋寅明, 右承旨鄭來周, 假注書李長夏, 編修官李檥, 記注官盧以亨, 醫官權聖徵·金應三·許信·金德履·許錭入侍。

… (중략) … 都提調金興慶所啓, 昆陽地世宗大王·端宗大王胎峯, 將立表石, 全州地睿宗大王胎峯表石, 有欲折之橫紋, 大興地顯宗大王胎峯表石, 字劃缺落, 罅隙又有五處, 而全州·大興胎室裳石, 擧皆有頉, 故今方自本道修治, 而禮曹堂郞·觀象監·繕工監提調臨時下去董役事, 頃因禮曹草記定奪矣。

蓋曾前則胎室碑石磨治, 及石物修改時, 或觀象監官員, 與本道, 眼同修改, 或禮曹郞廳, 及監役官, 進去矣。己巳年珍山胎室碑石修改時, 有禮曹堂郞, 兩監提調進去之事, 故辛卯年林川胎室碑石修改時, 以兩監提調進去事, 定奪矣。故相臣徐宗泰, 以依舊例, 禮郞及監役官進去之意稟達, 則先朝以兩監提調之竝往, 似太重, 只送禮郞與監役, 又似太輕, 禮曹堂上及監役官下送爲敎矣。

其後庚戌年昆陽胎室修改時, 引己巳年例, 禮堂及兩監提調進去之故, 今番禮曹, 以此例定奪, 而第胎室, 事體不如陵寢。頃者莊陵碑石豎立時, 只令禮曹堂上監董, 則今此昆陽·全州·大興等地, 依辛卯定奪, 禮曹堂上及監役官進去, 未知何如。

上曰, 已有先朝定奪, 依定式擧行,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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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83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7월 11일 갑신(甲申) 25/26 기사



『승정원일기』 783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7월 16일 기축(己丑) 16/20 기사

Quote-left blue.png 又以禮曹言啓曰, 昆陽地, 世宗大王·端宗大王兩胎室, 初無表石, 今始新建, 全州地睿宗大王胎室, 大興地顯宗大王胎室表石, 傷破, 竝爲重建事, 擇日啓下矣。取考謄錄, 則大王胎室石物加封時,

表石前面, 臨御時則書之以主上殿下胎室, 先王胎室則書之以廟號, 而辛卯年瑞山明宗大王胎室表石重建時, 因禮官陳達, 表石後面所書皇明年號, 到今, 改書以彼國年號未安, 雖改新石, 而所書則依當初書之, 年月之下, 註之以後幾年干支月日改石, 以此刻矣。

今此昆陽兩胎室表石書標時, 前面書廟號, 後面似當以崇禎紀元後幾年干支月日建。

全州胎室表石後面, 則仍存當初所刻中朝年號, 而年月之下, 註之以後幾年改石。

如瑞山胎室之例, 恐爲得宜。大興胎室表石, 旣以康熙二十年書刻, 則今於改建, 亦當以卽今年號註刻矣。胎室表石書標式, 別單書入, 以此擧行, 何如?

傳曰, 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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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83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7월 16일 기축(己丑) 16/20 기사



『승정원일기』 783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7월 16일 기축(己丑) 20/20 기사

Quote-left blue.png 甲寅七月十六日辰時, 上御熙政堂。藥房入診, 慶尙監司金在魯同爲入侍時, 都提調金興慶, 提調宋寅明, 左承旨洪尙賓, 假注書李長夏, 編修官李檥, 記注官盧以亨, 醫官權聖徵·金應三·許信·金必佑·李壽祺, 入侍。

… (중략) … 上曰, 世宗·端宗胎室表石, 古有之乎?

興慶曰, 古有之。前面, 書廟號, 世宗胎室表石, 書崇禎紀元後, 睿宗胎室表石, 書萬曆六年矣。 上曰, 誰寫之乎?

尙賓曰, 承文參下寫之矣。

上曰, 草記, 書允字以下, 可也。

尙賓曰, 此時急擧行之事, 出送, 何如?

上曰, 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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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83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7월 16일 기축(己丑) 20/20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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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학술적 성격의 저작물

1.고문헌

  • 조선 예조, 『태봉등록(胎封謄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태봉(胎封)』, 1928,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 조선 예조, 『세종대왕단종대왕태실표석견립시의궤(世宗大王端宗大王胎室表石竪立時儀軌)』,사천시청 소장.
  •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태봉(胎封)』, 1928,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2.단행본

  •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삼릉태실』,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 심현용, 『한국 태실 연구』, 경인문화사, 2016.
  • 윤진영, 김호, 이귀영, 홍대한, 김문식 공저, 『조선왕실의 태실 의궤와 장태 문화』,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

3.논문

  • 윤석인, 『조선왕실의 태실 변천 연구』,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

대중적 성격의 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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