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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1일 (일) 00:1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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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 태실(睿宗 胎室)
파일:OGPC Yejong Front View01.JPG
전북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의 태조 태실 터 전경
식별자 PC007
분류 국왕 태실
한글명 예종 태실
한자명 睿宗 胎室
영문명 Placenta Chamber of King Yejong
피안자 명칭 예종(睿宗)
피안자 이칭 이황(李晄)·자(字) 명조(明照)·양도대왕(襄悼大王)·창릉(昌陵)
피안자 부 세조(世祖)
피안자 모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
피안자 생년월일 1450.01.14
피안자 몰년월일 1469.12.31
안태 연월일 1462.10.15 『예종 태지석』
안태지 기록 전라도 전주부(全州府) 『영조실록』
안태지 기록1 전주(全州) 태실산(胎室山) 『정조실록』
안태지 기록2 전북 전주군 구이면 『서삼릉 예종 태실 후면 각자』
안태지 좌표(위도) 35°74'28.17"N
안태지 좌표(경도) 127°14'24.18"E
안태지 주소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 산158
문화재 지정여부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26호
이안 연월일 1929 추정
이안지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서삼릉 내
이안지 좌표(위도) 37°39'52.9"N
이안지 좌표(경도) 126°51'38.0"E
지문 皇明景泰元年庚午,正月,初壹日,酉時生,王世子晃胎,天順陸年,拾月,拾伍日丙子,癸時藏
지문 찬자 조선 예조(朝鮮 禮曹)
지문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석물 태조 가봉태실 경기전 내 복원
태항아리 예종 태지석 및 태항아리 일습
태항아리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목차

정의

조선 7대 왕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 소생의 조선 8대 왕, 예종(睿宗)의 안태지(安胎地).


관련 기록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29권, 세조 8년(1462) 8월 22일 갑신(甲申)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예조에 어태(御胎)·왕세자·원손의 태실에 석난간을 설치하지 말도록 하다》

예조(禮曹)에 전지(傳旨)하기를,

"금후로는 어태(御胎) 및 왕세자(王世子)·원손(元孫)의 태실(胎室)은 모두 석난간(石欄干)을 설치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傳旨禮曹曰: "今後御胎及王世子、元孫胎室, 竝勿設石欄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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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조실록』29권, 세조 8년(1462) 8월 22일 갑신(甲申) 2번째 기사



『영조실록』30권, 영조 7년(1731) 12월 15일 갑진(甲辰)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대신·비국 당상을 소견하여 삼남을 진제할 대책을 강구하다》

임금이 정섭(靜攝)한 나머지 빈연(賓筵)을 오랫동안 비워 두었었는데,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소견(召見)하여 삼남(三南)을 진제(賑濟)할 대책을 강구하였다.

예조 판서 신사철(申思喆)이 말하기를,

"세종 대왕·단종 대왕·예종 대왕·현종 대왕의 태실(胎室) 석물(石物)을 마땅히 명년 봄에 수개(修改)하여야 하는데, 마침 흉년이 든 시기를 만났으니, 청컨대 명년 가을을 기다리게 하소서. 식년(式年)의 대소과(大小科)도 또한 마땅히 명년 가을로 물려서 행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上以靜攝之餘, 賓筵久曠, 召見大臣、 備堂, 講究三南賑濟之策。 禮曺判書申思喆曰: "世宗大王、端宗大王、睿宗大王、顯宗大王胎室石物, 當於明春修改, 而適値時詘, 請待明秋。 式年大小科, 亦當退行於明秋也。" 上竝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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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조실록』29권, 세조 8년(1462) 8월 22일 갑신(甲申) 2번째 기사



『영조실록』30권, 영조 10년(1734) 4월 10일 을묘(乙卯) 3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예종 태봉 비석의 상한 것과 현종 태봉의 붕괴된 곳을 수축할 것을 명하다》

전주(全州)에 있는 예종(睿宗) 태봉(胎峰) 비석(碑石)의 절상(折傷)된 것과 대흥(大興)에 있는 현종(顯宗) 태봉의 붕괴된 곳을 모두 수축(修築)할 것을 명하였는데, 예조 판서 윤순(尹淳)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全州 睿宗胎峰碑石折傷, 大興 顯宗胎峰崩頹, 命竝修築, 從禮曹判書尹淳之言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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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조실록』30권, 영조 10년(1734) 4월 10일 을묘(乙卯) 3번째 기사



『영조실록』38권, 영조 10년(1734) 7월 11일 갑신(甲申)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관원을 보내서 세종·단종·예종·현종의 태봉에 비를 세우는 역사를 감독하게 하다》

세종 대왕(世宗大王)·단종 대왕(端宗大王)의 태봉(胎峰)은 경상도 곤양군(昆陽郡)에 있고, 예종 대왕(睿宗大王)의 태봉은 전라도 전주부(全州府)에 있고, 현종 대왕(顯宗大王)의 태봉은 충청도 대흥군(大興郡)에 있는데, 장차 비(碑)를 세우려 함에 있어서 표석(標石)이 이지러져서 고쳐야 되므로, 예조 당상(禮曹堂上)과 선공감역(繕工監役) 각 1원(員)을 보내서 그 일을 감독하게 할 것을 명하였으니, 선조(先祖) 신묘년의 전례를 적용한 것이었다.

世宗、端宗大王胎峰, 在慶尙道 昆陽郡, 睿宗大王胎峰, 在全羅道 全州府, 顯宗大王胎峰, 在忠淸道 大興郡, 將竪碑以標石缺當改, 命遣禮曹堂上、繕工監役各一員, 蕫其事, 用先朝辛卯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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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조실록』38권, 영조 10년(1734) 7월 11일 갑신(甲申) 2번째 기사



『정조실록』18권, 정조 8년(1784) 9월 15일 정묘(丁卯)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예조에서 열성조(列聖朝)의 태봉(胎峰)을 써서 바쳤다》

태조 대왕(太祖大王)의 태봉(胎封)은 진산(珍山) 만인산(萬仞山)에,

정종 대왕(定宗大王)의 태봉은 금산(金山) 직지사(直持寺) 뒤에,

태종 대왕(太宗大王)의 태봉은 성산(星山) 조곡산(祖谷山)에,

세종 대왕(世宗大王)의 태봉은 곤양(昆陽) 소곡산(所谷山)에,

문종 대왕(文宗大王)의 태봉은 풍기(豊基) 명봉사(鳴鳳寺) 뒤에,

단종 대왕(端宗大王)의 태봉은 곤양(昆陽) 소곡산(所谷山)에,

세조 대왕(世祖大王)의 태봉은 성주(星州) 선석사(禪石寺) 뒤에,

예종 대왕(睿宗大王)의 태봉은 전주(全州) 태실산(胎室山)에,

성종 대왕(成宗大王)의 태봉은 광주(廣州) 경안역(慶安驛) 뒤에,

중종 대왕(中宗大王)의 태봉은 가평(加平) 서면(西面)에,

인종 대왕(仁宗大王)의 태봉은 영천(永川) 공산(公山)에,

명종 대왕(明宗大王)의 태봉은 서산(瑞山) 동면(東面)에,

선조 대왕(宣祖大王)의 태봉은 임천(林川) 서면(西面)에 있었다.

현종 대왕(顯宗大王)의 태봉은 대흥(大興) 원동면(遠東面)에 있는데, 신유년 10월에 돌 난간을 배설(排設)한 뒤에 대흥현(大興縣)을 승호(陞號)하여 군수(郡守)를 두었다.

숙종 대왕(肅宗大王)의 태봉은 공주(公州) 남면(南面) 오곡(吳谷) 무수산(無愁山) 동구(洞口)에,

경종 대왕(景宗大王)의 태봉은 충주(忠州) 엄정립비(嚴政立碑)의 북쪽 이삼리 쯤에,

영종 대왕(英宗大王)의 태봉은 청주(淸州) 산내(山內) 일동면(一東面) 무쌍리(無雙里)에 있었다.

禮曹書進列聖朝胎(峰)〔封〕 。 太祖大王胎封珍山 萬仞山, 定宗大王胎封金山 直持寺後, 太宗大王胎封星山 祖谷山, 世宗大王胎封昆陽 所公山, 文宗大王胎封豐基 鳴鳳寺後, 端宗大王胎封昆陽 所谷山, 世祖大王胎封星州 禪石寺後, 睿宗大王胎封全州 胎室山, 成宗大王胎封廣州 慶安驛後, 中宗大王胎封加平西面。 仁宗大王胎封永川 公山, 明宗大王胎封瑞山東面, 宣祖大王胎封林川西面。 顯宗大王胎封大興遠東面, 辛酉年十月, 石欄干排設後, 大興縣陞號爲郡守。 肅宗大王胎封公州南面吳谷 無愁山洞口, 景宗大王胎封忠州嚴政立碑北數里許, 英宗大王胎封淸州山內一東面 無雙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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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18권, 정조 8년(1784) 9월 15일 정묘(丁卯) 1번째 기사



『순조실록』32권, 순조 31년(1831) 11월 12일 경신(庚申)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홍희근이 경종 대왕 태실의 작변을 이유로 백성과 감관을 처벌한 것에 대해 의논하다》

공충 감사 홍희근(洪羲瑾)이 치계(馳啓)하기를,

"이달 초4일 충주 구만리(九萬里)에 있는 경종 대왕 태실(胎室)의 개첨석(蓋簷石)·우상석(隅裳石)·좌대석(坐臺石)과 정남쪽 아래 전석(磚石)·횡대석(橫帶石)·연엽주석(蓮葉柱石)에 모두 작변(作變)한 흔적이 있어서, 산하(山下)에 사는 백성과 감관(監官)을 일체 잡아다 가두었고, 죄인은 방금 기포(譏捕)하는 중입니다."

하였는데, 하교하기를,

"밤에 공충 감사의 장계(狀啓)를 보고는 놀랍고 송구함을 견디지 못하겠는데, 태봉(胎封)에 변고를 일으킨 일이 옛날에도 있었는지 모르겠다. 또 변고가 생긴 일이 이미 도내(道內)에 있으면 지방관과 도백(道伯)에 대해 마땅히 감죄(勘罪)가 있어야 될지 여부와 그 전례의 유무를 아울러 알려고 하니, 대신들은 들어와서 품처(稟處)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좌상·우상을 소견하였는데, 좌의정 이상황이 말하기를,

"태봉에 변고를 일으킨 일이 이미 도내에 있었으면 도신과 지방관에 대해 죄를 논감(論勘)하는 거조가 없어서는 안되겠지만, 전에부터 외도(外道)에 일이 있어 비록 강상(綱常) 등에 관련된 옥사(獄事)와 같이 관계가 매우 중대하여도 도신이 이로 인해 죄를 입은 전례는 없었습니다. 지방관에 있어서는 논감함이 없을 수 없습니다만, 생각건대, 전패(殿牌)에 작변한 고을의 수령(守令)을 논감하지 않았던 것은 실로 선조(先朝) 때 깊이 생각하시고 멀리 보시는 성의(聖意)에서 나왔습니다. 또 《춘관통고(春官通考)》를 상고해 보건대, 옛날에도 서산(瑞山)의 태봉에 작변한 일이 있었는데, ‘사단(事端)이 본관(本官)을 모해하려는 데에서 말미암았다.’고 말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에 만약 수령을 논감한다면, 지금은 민심이 옛 같지 않아서 앞으로의 우려가 없을 것이라고는 보장하기 어렵기 때문에 감히 논죄(論罪)해서는 안된다고 우러러 아룁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숙묘조(肅廟朝) 때 곤양(昆陽)·전주(全州)·대흥(大興)에 있는〈세종·단종·예종·현종〉 4조(朝)의 태봉(胎峰)에 표석(表石)을 세우고 탈이 난 곳을 보수하는 역사(役事)로 인하여 예조 당상과 감역관(監役官)을 내려 보내는 것을 드러나게 법식으로 정했는데, 영묘조(英廟朝) 때 임천(林川)에 있는 〈선조(宣祖)의〉 태실을 개수할 때에도 역시 이 전례를 좇았으니, 이번에도 역시 이에 의하여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이번은 보통 탈이 있는 것과는 차이가 있으니, 만약 별도로 사람을 보내어 봉심(奉審)한다면 정리와 예의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예조 당상을 보내 봉심하라고 명하였다.

公忠監司洪羲瑾馳啓言: "今月初四日, 忠州 九萬里, 景宗大王胎室蓋簷石、隅裳石、坐臺石、正南下磚石、橫帶石、蓮葉柱石、俱有作變之痕, 山下居民及監官, 一倂捉囚, 罪人則今方譏捕。" 敎曰: "夜見錦伯狀啓, 不勝驚悚, 而不知胎封作變, 古亦有之。 且作變旣在道內, 則地方官, 與道伯, 當有勘罪與否, 其例有無, 幷欲知之, 大臣入來, 稟處。" 仍召見左右相, 左議政李相璜言: ‘胎封作變, 旣在道內, 則道臣地方官, 不可無論勘之擧, 而從前外道有事, 雖干係甚重, 如事關綱常等獄, 道臣無因此被罪之例。 至於地方官, 不可無論勘, 而第念殿牌作變邑守令之不爲論勘, 實出先朝深惟遠覽之聖竟。 且考見《春官通考》, 古亦有瑞山胎封作變之事, 而有曰, 「事端由於謀害本宮」 云。 今若論勘守令, 則以今民心之不古, 難保無來後之慮, 故不敢以論罪仰奏矣。’ 又言, ‘肅廟朝因昆陽、全州、大興四朝胎峰立表補頉之役, 以禮曹堂上及監役官下去, 著爲定式, 英廟朝林川胎室修改時, 亦遵行此例, 今亦當依此擧行, 今番則與尋常有頉有異, 若別遣奉審, 則恐合情文矣。’ 命遣禮堂奉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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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조실록』32권, 순조 31년(1831) 11월 12일 경신(庚申) 1번째 기사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 724책 (탈초본 40책) 영조 7년(1731) 6월 10일 신축(辛丑) 33/33 기사

Quote-left blue.png 六月初十日辰時, 上御月臺。大臣·備局堂上引見入侍時, 右議政趙文命, 禮曹判書申思喆, 兵曹判書金在魯, 吏曹判書宋寅明, 訓鍊大將張鵬翼, 靈城君朴文秀, 刑曹參判洪鉉輔, 大司成宋眞明, 左副承旨李春躋, 應敎任守迪, 掌令金廷潤, 正言尹興茂, 假注書鄭權, 事變假注書權瑞東, 記事官洪昌漢·趙明履。

… (중략) …

思喆曰, 全羅監司, 以全州睿宗大王胎峯石物有頉事狀啓, 下本曹, 而考見狀啓, 則胎室裳石, 擧皆動退, 而二立則折爲兩段, 且碑石, 自前面徹于後面, 有大段欲折之橫紋七處, 似於匪久有折傷之患云。

忠淸監司, 以大興顯宗大王胎室有頉事狀聞, 及碑石罅隙處印出者, 竝下于本曹, 而碑石字畫缺落, 罅隙處又至五處, 亦爲大段, 裳石擧皆退隙, 其中二立, 又爲缺傷云。此兩處胎室碑石及裳石之折傷者, 不可不速爲改造。

本曹堂上·郞廳及觀象監·繕工監提調, 當爲進去, 而考諸謄錄, 則胎室石物修改之役, 或因事故, 或因年事之失稔, 多有退行之例, 此兩處修改之役, 以明春擧行, 何如?

上曰, 顯廟胎室碑石缺隙處, 不至大段乎?

思喆曰, 見道臣狀啓, 則碑石罅隙五處, 皆大段, 裳石亦皆退動有隙云矣。

上曰, 竝待明春修改,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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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24책 (탈초본 40책) 영조 7년(1731) 6월 10일 신축(辛丑) 33/33 기사



『승정원일기』 727책 (탈초본 40책) 영조 7년(1731) 7월 28일 기축(己丑) 34/35 기사

Quote-left blue.png 辛亥七月二十八日巳時, 上御時敏堂。藥房入診, 禮曹判書申思喆, 請對同爲入侍時, 藥房提調金在魯, 禮曹判書申思喆, 左承旨李春躋, 假注書曺命敬, 記注官金洌·趙昌來, 醫官權聖徵·玄悌綱·許信·李徵夏·金德履·柳徵瑞入侍。

… (중략) …

思喆曰, 今春昆陽地世宗大王·端宗大王胎峯石物修改時, 因本道監司狀啓, 兩胎室皆無標石, 待今秋豎立事啓下, 所當趁今擇日擧行, 而頃日全州睿宗大王胎峯石物及大興顯宗大王胎峯石物有頉處修改, 竝待明春擧行事, 定奪矣。今此昆陽兩胎峯碑石豎立之役, 亦爲待明春擧行, 何如?

上曰, 依爲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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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27책 (탈초본 40책) 영조 7년(1731) 7월 28일 기축(己丑) 34/35 기사



『승정원일기』 736책 (탈초본 40책) 영조 7년(1731) 12월 16일 정미(丁未) 9/9 기사

Quote-left blue.png 十六日未時, 上御進修堂, 大臣·備局堂上引見。

京畿監司洪鉉輔, 同爲入侍時, 領議政洪致中, 兼禮曹判書申思喆, 行戶曹判書金東弼, 左參贊金在魯, 兵曹判書金取魯, 行副護軍宋寅明, 京畿監司洪鉉輔, 右副承旨徐命淵, 掌令權相一, 正言宋徵啓, 應敎李宗城, 假注書朴成玉, 事變假注書李山培, 記事官金益憲·趙明履, 以次入伏。

… (중략) … 思喆又啓曰, 昆陽地世宗大王·端宗大王·胎室標石及全州地睿宗大王胎室, 大興地顯宗大王胎室石物, 有頉等處修改之役, 竝待明春擧行事, 頃已定奪矣。所當趁明春擇日擧行, 而年事如此, 事役頗鉅, 勢難動役, 竝待明秋擧行, 何如?

上曰, 依爲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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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36책 (탈초본 40책) 영조 7년(1731) 12월 16일 정미(丁未) 9/9 기사



『승정원일기』 748책 (탈초본 41책) 영조 8년(1732) 8월 5일 기미(己未) 31/31 기사

Quote-left blue.png 壬子八月初五日巳時, 上御時敏堂, 大臣·備局堂上引見入侍時, 右議政徐命均, 左參贊宋寅明, 判尹張鵬翼, 禮曹判書宋成明, 刑曹判書李廷濟, 右副承旨李匡世, 假注書鄭基安, 事變假注書金錫一, 記事官金宗台, 記事官趙明履。

… (중략) … 宋成明曰, 昆陽地世宗大王·端宗大王胎封及全州地睿宗大王胎封及大興地顯宗大王胎封, 碑石之役, 頃以更觀年事進退之意, 仰達矣。今年兩南之凶, 又如是孔慘, 似難擧行, 何以爲之乎?

命均曰, 事體雖重大, 聞昆陽等地, 被災尤慘云, 旣已停退, 姑爲待豐擧行, 亦好矣。

上曰, 事體重大, 何可待豐乎? 待明秋擧行,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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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48책 (탈초본 41책) 영조 8년(1732) 8월 5일 기미(己未) 31/31 기사



『승정원일기』 762책 (탈초본 42책) 영조 9년(1733) 7월 15일 갑오(甲午) 28/28 기사

Quote-left blue.png 巳時, 上御熙政堂, 大臣·備局堂上引見時, 左議政徐命均, 右議政金興慶, 禮曹判書申思喆, 工曹判書金東弼, 戶曹判書金在魯, 左參贊宋寅明, 刑曹判書趙尙絅, 江華留守李瑜, 右副承旨鄭羽良, 校理尹得和, 司諫李榕, 假注書鄭履儉, 事變假注書金錫一, 記事官趙榮國, 記事官李鼎輔入侍。

… (중략) … 思喆曰, 上年秋, 因禮官所達昆陽地世宗大王·端宗大王胎封碑石, 及全州地睿宗大王胎封, 大興地顯宗大王胎封石物, 有頉處修改之役, 因三南年事之凶歉, 待今秋擧行事, 定奪矣。連歲荐飢之餘, 今年穡事之豐歉, 姑不可知, 而累次請退, 事體未安, 何以爲之?

上曰, 大臣之意, 如何?

命均曰, 胎封事體, 非不重大, 而今年年事, 雖或稍登, 荐歉之餘, 公私物力俱殫, 此時動役, 似涉重難矣。

興慶曰, 石物有頉處, 果若難支一時, 則其勢宜不可他顧, 而如不至此, 則姑觀前頭, 徐徐擧行, 似好矣。

上曰, 待明年更稟,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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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62책 (탈초본 42책) 영조 9년(1733) 7월 15일 갑오(甲午) 28/28 기사



『승정원일기』 777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4월 10일 을묘(乙卯) 24/24 기사

Quote-left blue.png 午時, 復命入侍。禮曹判書尹淳, 承牌而至, 亦同爲入侍。

… (중략) … 淳曰, 小臣欲有所仰達矣。世宗·端宗兩朝胎封, 在於昆陽, 睿宗朝胎封, 在於全州, 顯宗朝胎封, 在於大興, 而昆陽則初無表石, 全州及大興兩所, 則所舖裳石動退, 其中兩石折傷。自辛亥年, 有修改之命, 而連値凶荒, 未卽擧行, 上年又爲稟達, 有待明年擧行之敎, 何以爲之? 惶恐敢達矣。

上曰, 表石則雖待年豎立, 亦或無妨, 而全州·大興兩所, 則似甚大段, 不可不急速修改也。

宗城曰, 使道臣奉審以報, 何如?

上曰, 每於此等事, 人情不能無少忽, 而以至於此矣。近來禮曹堂上, 未有行公者, 遷延至此, 事在緊急, 則豈計農節耶? 若以妨農爲慮, 則雖役以僧軍, 不可已也。且此與改封築, 異矣。

游曰, 胎封必於尖峯上占地, 故裳石, 每易於流移矣。至於缺傷處, 尤難於待秋遲緩矣。

上曰, 分付道臣, 使卽奉審馳啓, 而若其最爲緊急, 則卽爲定行, 如不至大悶急, 則事體雖甚未安, 姑爲待秋, 而擇日則趁今預爲之, 可也。

淳曰, 昆陽表石, 亦已浮置。以役事言之, 不過豎立而已, 似不大段矣。

上曰, 大興·全州畢役之後, 仍爲始役於昆陽,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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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77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4월 10일 을묘(乙卯) 24/24 기사



『승정원일기』 779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5월 12일 정해(丁亥) 16/28 기사

Quote-left blue.png 鄭必寧, 以禮曹言啓曰, 昆陽地, 世宗大王·端宗大王胎峯, 初無表石, 全州地睿宗大王胎峯, 裳石擧皆動退, 而二立折爲兩段, 表石有大段欲折之橫紋七處。

大興地, 顯宗大王胎峯表石, 字畫缺落, 罅隙處又至五處, 而亦大段, 裳石擧皆退隙, 其中二立, 又爲缺傷等處, 分付本道道臣, 使卽奉審馳啓, 而若其最爲悶急, 則卽爲定行, 如不至悶急則事勢雖甚未安, 姑爲待秋而擇日, 則趁今預爲之, 可也事, 頃因傳敎, 分付三道矣。

卽見慶尙監司金始炯, 全羅監司趙顯命, 忠淸監司李壽沆狀啓, 則昆陽兩胎峯表石豎立, 則姑觀年事登場, 擧行爲請, 而全州胎峯表石·裳石有頉外, 又有川防之役, 大興胎峯表石·裳石, 竝待秋改鋪改立之意, 狀聞矣。

三處胎峯, 表石及裳石修改之役, 不可不趁今秋擧行, 依前例令該監, 擇日修改, 本曹堂上郞廳及觀象監·繕工監提調, 趁期下去, 與本道監司, 會同改排, 而容入石物, 令本道預爲浮取事, 分付三道監司處, 何如?

傳曰, 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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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79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5월 12일 정해(丁亥) 16/28 기사



『승정원일기』 779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5월 14일 기축(己丑) 22/29 기사

Quote-left blue.png 《吉日 등에 관한 禮曹의 草記》

又以禮曹言啓曰, 昆陽地世宗大王胎室表石, 全州地睿宗大王胎室裳石·表石, 大興地顯宗大王胎室裳石·表石有頉處, 修改及始役吉日時, 推擇以入, 而觀象監官員及繕工監監役官各一員, 令本監擇定, 前期下去本道, 眼同看役, 觀象監官員下去時, 告由祭香祝, 仍爲受去設行, 而本曹堂上郞廳及觀象監繕工監提調, 則石物排設, 臨時下去, 先詣大興, 董役事畢後, 轉詣全州及昆陽監董事役事, 分付本道及該監, 何如?

傳曰, 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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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79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5월 14일 기축(己丑) 22/29 기사



『승정원일기』 783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7월 11일 갑신(甲申) 25/26 기사

Quote-left blue.png 甲寅七月十一日辰時, 上御熙政堂。

藥房入診, 都提調金興慶, 提調宋寅明, 右承旨鄭來周, 假注書李長夏, 編修官李檥, 記注官盧以亨, 醫官權聖徵·金應三·許信·金德履·許錭入侍。

… (중략) … 都提調金興慶所啓, 昆陽地世宗大王·端宗大王胎峯, 將立表石, 全州地睿宗大王胎峯表石, 有欲折之橫紋, 大興地顯宗大王胎峯表石, 字劃缺落, 罅隙又有五處, 而全州·大興胎室裳石, 擧皆有頉, 故今方自本道修治, 而禮曹堂郞·觀象監·繕工監提調臨時下去董役事, 頃因禮曹草記定奪矣。

蓋曾前則胎室碑石磨治, 及石物修改時, 或觀象監官員, 與本道, 眼同修改, 或禮曹郞廳, 及監役官, 進去矣。己巳年珍山胎室碑石修改時, 有禮曹堂郞, 兩監提調進去之事, 故辛卯年林川胎室碑石修改時, 以兩監提調進去事, 定奪矣。故相臣徐宗泰, 以依舊例, 禮郞及監役官進去之意稟達, 則先朝以兩監提調之竝往, 似太重, 只送禮郞與監役, 又似太輕, 禮曹堂上及監役官下送爲敎矣。

其後庚戌年昆陽胎室修改時, 引己巳年例, 禮堂及兩監提調進去之故, 今番禮曹, 以此例定奪, 而第胎室, 事體不如陵寢。頃者莊陵碑石豎立時, 只令禮曹堂上監董, 則今此昆陽·全州·大興等地, 依辛卯定奪, 禮曹堂上及監役官進去, 未知何如。

上曰, 已有先朝定奪, 依定式擧行,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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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83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7월 11일 갑신(甲申) 25/26 기사



『승정원일기』 783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7월 16일 기축(己丑) 16/20 기사

Quote-left blue.png 又以禮曹言啓曰, 昆陽地, 世宗大王·端宗大王兩胎室, 初無表石, 今始新建, 全州地睿宗大王胎室, 大興地顯宗大王胎室表石, 傷破, 竝爲重建事, 擇日啓下矣。取考謄錄, 則大王胎室石物加封時,

表石前面, 臨御時則書之以主上殿下胎室, 先王胎室則書之以廟號, 而辛卯年瑞山明宗大王胎室表石重建時, 因禮官陳達, 表石後面所書皇明年號, 到今, 改書以彼國年號未安, 雖改新石, 而所書則依當初書之, 年月之下, 註之以後幾年干支月日改石, 以此刻矣。

今此昆陽兩胎室表石書標時, 前面書廟號, 後面似當以崇禎紀元後幾年干支月日建。

全州胎室表石後面, 則仍存當初所刻中朝年號, 而年月之下, 註之以後幾年改石。

如瑞山胎室之例, 恐爲得宜。大興胎室表石, 旣以康熙二十年書刻, 則今於改建, 亦當以卽今年號註刻矣。胎室表石書標式, 別單書入, 以此擧行, 何如?

傳曰, 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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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83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7월 16일 기축(己丑) 16/20 기사



『승정원일기』 783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7월 16일 기축(己丑) 20/20 기사

Quote-left blue.png 甲寅七月十六日辰時, 上御熙政堂。藥房入診, 慶尙監司金在魯同爲入侍時, 都提調金興慶, 提調宋寅明, 左承旨洪尙賓, 假注書李長夏, 編修官李檥, 記注官盧以亨, 醫官權聖徵·金應三·許信·金必佑·李壽祺, 入侍。

… (중략) … 上曰, 世宗·端宗胎室表石, 古有之乎?

興慶曰, 古有之。前面, 書廟號, 世宗胎室表石, 書崇禎紀元後, 睿宗胎室表石, 書萬曆六年矣。 上曰, 誰寫之乎?

尙賓曰, 承文參下寫之矣。

上曰, 草記, 書允字以下, 可也。

尙賓曰, 此時急擧行之事, 出送, 何如?

上曰, 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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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83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7월 16일 기축(己丑) 20/20 기사



『승정원일기』 1014책 (탈초본 55책) 영조 23년(1747) 3월 25일 을묘(乙卯) 30/30 기사

Quote-left blue.png 丁卯三月二十五日未時, 上御歡慶殿。藥房都提調趙顯命來待。引見入侍時, 藥房都提調趙顯命, 右副承旨尹東浚, 記事官徐孝修·鄭恒齡·鄭光震, 首醫金應三·金壽煃·鄭文恒, 禮曹參判金尙魯, 副提學趙明履追後入侍。諸臣以次進伏。

… (중략) … 尙魯曰, 日昨筵中, 有胎室碑改豎時, 前面書規, 考稟之敎, 故取考本曹謄錄, 則瑞山地, 明宗大王胎室改碑時, 前面書以廟號, 後面仍書以舊碑豎建時, 年號月日, 其下以後幾年月日改石, 書刻小註, 而其後全州地, 睿宗大王胎室改碑時, 亦用此例矣。今此林川胎室修改之碑, 前面則當依例, 書以廟號, 而至於後面, 不必以舊建時年月書之。臣意則一從改建時月日, 書以崇禎紀元後幾年干支某月日建, 以註書其下曰, 某年號幾年某月日建碑, 而歲久字缺, 故改豎云, 則似好矣。

上曰, 所達誠然, 依此爲之。出擧條 諸臣遂以次退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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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014책 (탈초본 55책) 영조 23년(1747) 3월 25일 을묘(乙卯) 30/30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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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학술적 성격의 저작물

1.고문헌

  • 조선 예조, 『태봉등록(胎封謄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태봉(胎封)』, 1928,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2.단행본

  •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삼릉태실』,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 심현용, 『한국 태실 연구』, 경인문화사, 2016.
  • 윤진영, 김호, 이귀영, 홍대한, 김문식 공저, 『조선왕실의 태실 의궤와 장태 문화』,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

3.논문

  • 윤석인, 『조선왕실의 태실 변천 연구』,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

대중적 성격의 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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