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 태실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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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OGPC_Danjong_board.JPG|성주 세종대왕자 태실군 내 단종 원손 태실 안내표석
 
File:OGPC_Danjong_board.JPG|성주 세종대왕자 태실군 내 단종 원손 태실 안내표석
 
File:OGPC_Danjong_biseok.JPG|성주 세종대왕자 태실군 내 단종 원손 태실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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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OGPC_Danjong_Taseok_side.jpg|성주 세종대왕자 태실군 내 단종 원손 태실 중앙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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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OGPC_Danjong_Taseok_left.jpg|성주 세종대왕자 태실군 내 단종 원손 태실 중앙태석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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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OGPC_Danjong_Taseok_back.jpg|성주 세종대왕자 태실군 내 단종 원손 태실 중앙태석 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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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BLPC_Danjong_sanpano1.JPG|성주 단종 태실 이안지 법림산 전경
 
File:BLPC_Danjong_sanpano1.JPG|성주 단종 태실 이안지 법림산 전경
 
File:BLPC_Danjong_tomb_pano.jpg|성주 법림산 단종 태실 터 전경
 
File:BLPC_Danjong_tomb_pano.jpg|성주 법림산 단종 태실 터 전경

2019년 10월 1일 (화) 16:5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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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태실(端宗 胎室)
경북 성주군 법림산 단종 태실 터 전경
식별자 코드 미부여
분류 국왕 태실
한글명 단종 태실
한자명 端宗 胎室
영문명 Placenta Chamber of King Danjong
피안자 명칭 단종(端宗)
피안자 이칭 이홍위(李弘暐)·상왕(上王)·노산군(魯山君)·노산대군(魯山大君)·장릉(莊陵)
피안자 부 문종(文宗)
피안자 모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
피안자 생년월일 1441.07.23
피안자 몰년월일 1457.10.21
안태 연월일 1441 추정
안태지 기록 경상도 성주(星州) 『세종실록』
안태지 기록1 성주 가야산(伽倻山) 『문종실록』
안태지 기록2 법림산(法林山) 『세조실록』
안태지 기록3 경상도 곤양군(昆陽郡) 『영조실록』
안태지 좌표(위도) 36°07'06.3"N 36.014584
안태지 좌표(경도) 128°00'15.9"E 128.294762
안태지 주소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세종대왕자태실로 639-18 월항면 인촌리 산8
문화재 지정여부 사적 제444호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
이안 연월일 1451.03.06
이안지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포천계곡로 468 가천면 법전리 산11-1
이안지 좌표(위도) 37°39'52.9"N 35.873423
이안지 좌표(경도) 126°51'38.0"E 128.135024
지문 ‥ 辛酉七月卄 ‥ 지석 훼손으로 인한 판독불가
지문 찬자 조선 예조(禮曹)
지문 소장처 국립경주박물관
석물 원손아기씨태실비(元孫阿只氏胎室碑)
유물1 전상석(법림산 태실 터에 위치)
유물2 연엽주석(법림산 태실 터에 위치)
태항아리 단종 태항아리(외항아리) 뚜껑
태항아리 소장처 국립대구박물관



목차

정의

조선의 5대 왕인 문종(文宗)과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의 적장남이며, 조선의 제6대 왕인 단종의 안태지(安胎地).

관련 기록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102권, 세종 25년(1443) 12월 11일 신묘(辛卯) 4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원손의 태를 안치한 곳이 해롭지 않은 곳이라 이른 사정 정앙을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다》

처음에 원손(元孫)의 태(胎)를 경상도 성주(星州)에 안치하였는데, 그 도국(圖局) 안에 장경(長庚)의 묘가 있었으니 바로 성원군(星原君) 이정녕(李正寧)의 시조(始祖)이었다. 이때에 정녕이 풍수학(風水學) 제조(提調)가 되고, 성균 직강(成均直講) 윤통(尹統)과 사정(司正) 정앙(鄭秧)이 훈도(訓導)가 되어 장차 태실(胎室)의 돌난간[石欄千]을 만드는데, 풍수학관(風水學官)을 으레 보내어 그 역사를 감독하게 되었으므로 예조에서 윤통(尹統)을 보내려 하매, 통이 난간 만드는 규칙을 앙(秧)에게 물으니, 앙이 말하기를,

"난간은 전 규칙이 있다. 그러나 장경(長庚)의 묘가 태실(胎室) 원국(圓局) 안에 있다 하니 대단히 불리하다. 아는 자가 보면 반드시 그 묘를 옮길 것이다."

하였다. 통이 대답하기를,

"아무리 제조(提調)의 조상의 묘라도 만일 태실에 불리하다면 어찌 아뢰지 않을 수 있는가."

하였다. 이때에 앙(秧)의 어미가 경상도에 있었는데 앙이 일 때문에 돌아가 근친하고자 하여 통의 말을 정녕(正寧)에게 누설하여 이간하였다. 정녕은 통이 풍수학을 알지 못한다고 저지시키고, 앙을 천거하여 보냈다. 통이 예조 정랑 정광원(鄭廣元)에게 말하기를,

"제조가 앙을 보내려고 한 것은 반드시 내가 자기 조상의 묘를 옮길 것이라는 말을 허물한 것이다."

하니, 광원이 말하기를,

"이런 큰 일을 어찌 계달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통이 말하기를,

"앙도 결국은 반드시 아뢸 것이다."

하였다. 앙이 이미 돌아오매 정녕을 고맙게 여기어 이르기를,

"장경의 묘는 태실과 멀리 떨어져서 해로울 것이 없다."

하고, 마침내 아뢰지 않았다. 뒤에 통이 대호군(大護軍) 조유례(趙由禮)에게 말하였기 때문에 일이 발각되니, 이에 앙을 의금부(義禁府)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

初, 安元孫胎于慶尙道 星州, 其圖局內有長庚墓, 乃星原君 李正寧始祖也。 時正寧爲風水學提調, 成均直講尹統、司正鄭秧爲訓導。 及將造胎室石欄干, 例遣風水學官, 監督其役, 禮曹擬遣統。

統問造欄干之規於秧, 秧曰: "欄干自有前規, 但聞長庚之墓在胎室圓局之內, 甚爲不利。 識者見之, 必將移其墓矣。"

統答曰: "雖提調祖上之墓, 若不利於胎室, 則豈得不啓?" 時秧母在慶尙道, 秧欲因事歸覲, 洩統言於正寧以間之。 正寧沮統以不知風水學, 乃擧秧以遣。

統謂禮曹正郞鄭廣元曰: "提調欲遣秧者, 必咎我移祖上墳墓之言也。"

廣元曰: "如此大事, 何不啓達?"

統曰: "秧亦終必啓之。" 秧旣還,

德正寧謂曰: "長庚之墓, 與胎室隔遠, 無害也。" 卒不以聞。

後統言於大護軍趙由禮, 因而事覺, 乃下秧義禁府鞫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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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102권, 세종 25년(1443) 12월 11일 신묘(辛卯) 4번째 기사


『세종실록』102권, 세종 25년(1443) 12월 29일 기유(己酉)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정앙이 정인지를 무고하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정앙(鄭秧)이 공초(供招)를 바치기를, ‘내가 일찍이 정인지(鄭麟趾)에게 이르기를, 「장경(長庚)의 묘가 태실(胎室)에 가까우니 마땅히 옮겨 장사하여야 한다.」 하였더니, 인지가 대답하기를, 「태실에서 멀리 떨어졌으면 무슨 해가 있는가.」 하였다.’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최중겸(崔仲謙)에게 명하여 가서 인지에게 안문(按問)하고, 인하여 인지에게 이르기를,

"인혐(引嫌)하지 말고 행공(行公)하라."

하매, 뒤에 정앙(鄭秧)이 무고한 것을 승복하였다.

義禁府啓:

"鄭秧納招云: ‘我嘗謂提調鄭麟趾曰: 「長庚之墓, 近於胎室, 宜當移葬。」

麟趾答曰: 「距胎室遙隔, 何害之有?」’"

上命義禁府都事崔仲謙, 往按麟趾, 仍諭麟趾曰: "毋引嫌行公。" 後秧服其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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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102권, 세종 25년(1443) 12월 29일 기유(己酉) 2번째 기사



『세종실록』103권, 세종 26년(1444) 1월 3일 계축(癸丑) 3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신개 등과 정앙과 정인지를 대질시킬 것인지를 의논하다》

임금이 신개(申槪) 등에게 이르기를,

"정앙(鄭秧)이 공초(供招)하기를, ‘내가 정인지(鄭麟趾)와 더불어 장경묘(長庚墓)를 이장할 것인가 아닌가를 의논하니, 정인지의 말이 「거리가 대단히 머니 해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기에, 또 최중겸(崔仲謙)을 홍주(洪州)에 보내서 인지에게 물었으나, 인지가 승복하지 않으니 두 사람의 공술(供述)이 같지 않다. 그런데 인지는 도리를 아는 영오(領牾) 한 사람이니, 비록 앙(秧)과 대질시킨들 어찌 그 죄를 자복하겠는가. 하물며, 인지는 위임 대신(委任大臣)이니 옥에 가두고 대질시키는 것은 내가 반드시 하지 않을 것이고, 이정녕(李正寧)은 지친(至親)인데 이제 조그만 잘못을 가지고 고략(拷掠)을 감행(敢行)하면, 비록 그 죄를 자복하더라도 이 또한 마음에 유쾌하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이전 국안(鞫案)대로 죄를 결단하고 그 나머지는 차례대로 의논하여 판결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가령 갑(甲)이 도둑질한 것을 을(乙)이 고발하였는데, 갑에게 추문(推問)해서 갑이 불복하면, 마침내 갑의 말한 것을 사실이라 하여 갑이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정앙의 말이 이같이 명백하온데, 어찌 인지의 죄를 면하려고 하는 말을 사실이라 하여 놓아두고 묻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일이 죽을 죄에 관계되는 것을 인지가 반드시 모두 헤아렸을 것이오니, 고문하지 않고서 어찌 실정을 얻을 것입니까. 또 정녕의 죄는 모든 증거가 명백하온데, 큰일을 어찌 한 마디의 말로써 결정할 수 있습니까. 여러 번 고문하여 압슬(壓膝)까지 한 후에 실정을 얻게 되는 것이 자못 많사오니, 정녕이 비록 지친(至親)이라 하더라도 일에 경하고 중함이 있사오매, 이것으로 〈죄를〉 갚을 수는 없습니다. 왕손(王孫)은 나라의 근본임에도 정녕(正寧)의 일이 이와 같사오니, 고문하여 실정을 얻어 냄이 의당하옵고, 인지도 역시 잡아와서 앙과 대질 심문하여 과죄(科罪)함이 마땅합니다."

고 하였으며, 좌참찬(左參贊) 권제(權踶)는 또 말하기를,

"장경(長庚)의 무덤이 조그만큼이라도 태실(胎室)에 불리(不利)함이 있다면, 비록 하루라도 옮기지 않을 수 없사오니, 그 자손으로 하여금 옮기게 함이 편할까 합니다." 하였다.

上又謂申槪等曰: "鄭秧供招云: ‘予與鄭麟趾議長庚墓移置與否, 麟趾云: 「相距遙遠, 無害也。」’ 又遣崔仲謙于洪州, 問麟趾, 麟趾不承。 二人所供不一, 然麟趾, 識理穎悟者也。 雖與秧置對, 豈服其罪乎? 況麟趾, 委任大臣, 繫獄置對, 吾必不爲也。 李正寧, 至親也。 今以違端, 敢行拷掠, 雖服其辜, 是亦不愜於心矣。 宜以前所鞫案斷罪, 其餘以次論決何如?" 僉曰: "假如甲犯盜而乙告之, 推問於甲而甲不服, 則終以甲之言爲實, 而謂甲不犯盜乎? 鄭秧之言明白如此, 豈可以麟趾窺免之辭爲實, 置而不問乎? 事干死罪, 麟趾必皆計料, 不加拷問, 何以得情? 且正寧之罪, 衆證明白, 大事豈可以片言折之乎? 累次拷訊, 以至壓膝, 而後得情者頗多。 正寧雖至親, 然事有輕重, 不可以是貸之也。 王孫, 國本也, 而正寧之事如此, 宜當拷問得情, 麟趾亦宜捕來, 與秧對問科罪。" 左參贊權踶又曰: "長庚之墓, 少有不利於胎室, 雖一日不可不遷, 令其子孫遷之爲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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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103권, 세종 26년(1444) 1월 3일 계축(癸丑) 3번째 기사



『세종실록』103권, 세종 26년(1444) 1월 5일 을묘(乙卯)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지중추원사 민의생과 동지중추원사 이진에게 물어 태실도국 옆에 있는 장경의 묘를 옮기게 하다》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민의생(閔義生)과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이진(李蓁)을 불러 이르기를,

"성주(星州) 태실(胎室)이 장경(長庚)의 무덤과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하니, 진(蓁)이 아뢰기를,

"그 사이의 거리가 겨우 1리(里)로서, 만일 초목이 무성하지 아니하오면 통하여 바라볼 수 있는 지점이옵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태실 도국(胎室圖局) 안에 고총(古塚)이 있으면 길흉(吉凶)이 어떠한고."

하니, 의생이 아뢰기를,

"《안태서(安胎書)》에 이르되, ‘태실은 마땅히 높고 정결한 곳이라야 한다.’ 하였은즉, 장경(長庚)의 묘는 속히 철거함이 마땅하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순흥(順興) 금산(金山)에 안태(安胎)할 때에 간혹 미비된 일이 있었는데, 그때에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태실은 한 몸만을 위하는 것이므로 비록 미비된 일이 있을지라도 또한 가하다. ’고 하였으니, 이제 성주(星州) 태실 도국 안에 고총(古塚)과 사사(社寺)를 철거하여 옮긴다면, 순흥(順興) 금산(金山) 태실 안의 미비되었던 일도 역시 고쳐 정리할 것인가."

하니, 의생(義生)은 아뢰기를,

"순흥 금산 태실에 미비된 일도 고쳐 정리함이 당연합니다."

하고, 진은 아뢰기를,

"태실에 미비된 일은 예전대로 두는 것이 편할까 합니다."

하니, 임금이 즉시 명하여 장경의 묘를 옮기라 하였다.

召知中樞院事閔義生、同知中樞院事李蓁謂曰: "星州胎室距長庚墓幾許?" 蓁啓曰: "其間相距纔一里許, 若草木不茂, 則可通望之地也。"

上曰: "胎室圖局之內有古塚, 則吉凶何如?"

義生啓曰: "《安胎書》云: ‘胎室當於高淨處。’, 則長庚墓當速撤去。"

上曰: "往者順興、金山安胎之時, 間有未備之事,

其時議者曰: ‘胎室但爲一身, 而雖有未備之事, 亦可也。’

今星州胎室圖局內, 移撤古塚與寺社, 則順興、金山胎室內未備之事, 亦可修改歟?"

義生啓曰: "順興、金山胎室未備之事, 固當修改。"

蓁啓曰: "胎室未備之事, 仍舊爲便。" 上卽命移長庚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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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103권, 세종 26년(1444) 1월 5일 을묘(乙卯) 1번째 기사



『세종실록』103권, 세종 26년(1444) 1월 7일 정사(丁巳)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경상도 순흥·성주 등의 태실도국 안의 고총과 사사(寺社)를 철거하고 철거해야 할 것을 찾아 살펴 철거하게 하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경상도 순흥(順興)·성주(星州)·곤양(昆陽)·기천(基川) 등의 고을은 태실 도국(胎室圖局) 안의 고총(古塚)과 사사(寺社)를 모두 철거하고, 괴상하게 생긴 나무나 돌과 철거해야 할 것은 그곳 각관으로 하여금 도면을 세밀하게 작성하여 올려보내게 하고, 다시 대신(大臣)을 보내서 살펴보아 철거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禮曹啓: "慶尙道 順興、星州、昆陽、基川等官胎室圖局內, 古塚及寺社, 悉皆撤去。 其怪形木石及可撤之物, 令其所在各官備細圖畫上送, 更遣大臣審視撤去。" 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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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103권, 세종 26년(1444) 1월 7일 정사(丁巳) 2번째 기사



『세종실록』103권, 세종 26년(1444) 2월 27일 정미(丁未) 4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태실도국 안에 장경의 묘가 있는 것이 이롭지 않음을 아뢰지 않은 이정녕·정앙 등을 벌하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이정녕(李正寧)이 상언(上言)하기를, ‘제조(提調)와 승지(承旨)들이 임금님의 뜻을 두려워하여 신의 소원(訴冤)을 믿지 않고 자세하게 그 뜻을 계달하지 않았습니다.’ 하고, 또 이르기를, ‘임금께서 만일 그 정유(情由)를 갖추어 보신다면 반드시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실 것입니다. ’고 하여 인신(人臣)으로서 지존(至尊)의 뜻을 역탐(逆探)하였사오니, 청하옵건대, 사위제서율(詐僞制書律)에 준하면 죄가 참형(斬刑)에 해당하옵고, 윤통(尹統)은 직책이 풍수학(風水學)을 맡았으므로 장경(長庚)의 묘(墓)가 태실(胎室)의 근처에 있는 것이 불가한 줄을 알면서도 아뢰지 않았으니, ‘재상(災祥)같은 것이 있음에도 흠천감(欽天監)이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는 율에 의하면 곤장 80대와 도형 2년에 해당되오며, 정광원(鄭廣元)은 윤통에게서 장경의 묘가 태실 근처에 있음이 마땅하지 않다는 말을 듣고도 즉시 계달하지 않았으므로, 역시 곤장 80대와 도형 2년에 해당되옵고, 정앙(鄭秧)은 일찍이 말하기를, ‘장경의 무덤은 태실 도국(胎室圖局) 안에 있으므로 심히 이롭지 않다. ’고 하였다가, 뒤에 친히 가 보고 정녕(正寧)의 뜻에 아부하여 생략하고 계달하지 않았사오니, 《육전(六典)》의 사람이 난언(亂言)하여, 정리(情理)가 심히 해(害)하려고 한 것에 의하면 죄가 참형에 해당되오며, 또 윤통은 일찍이 정앙에게 이르기를, ‘아무리 제조(提調)의 시조(始祖)의 묘(墓)라 할지라도 마땅히 계달하여야 한다.’ 하니, 정녕이 그 말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통(統)을 싫어하였는데, 행 대호군(行大護軍) 유순도(庾順道)는 정녕이 통을 미워한다는 말로 통에게 전하였으니, 죄가 불응위(不應爲)로 곤장 80대에 해당되옵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정녕은 고신(告身)만 빼앗게 하고, 앙(秧)은 장(杖) 60대에 도(徒) 1년을 속(贖)바치게 하며, 광원(廣元)은 3등을 감하고, 순도(順道)와 통(統)은 모두 용서하여 죄주지 않게 하였다.

義禁府啓: "李正寧上言曰: ‘提調承旨等畏上意不信臣之訴冤, 不備細啓達。’ 其意以謂: ‘上若備覽情由, 則必加寬貸。’ 以人臣逆探至尊之意, 請比詐僞制書律罪當斬。 尹統職掌風水學, 知長庚墓近在胎室之不可而不啓, 依有災祥之類而欽天監不以實對律, 當杖八十, 徒二年。 鄭廣元聞尹統 長庚之墓不宜近在胎室之言, 而不卽啓達, 亦當杖八十, 徒二年。 鄭秧嘗言長庚之塚在胎室圖局, 甚不利, 後親往見之, 而阿正寧之意, 略不啓達, 依《六典》人有亂言情理切害者, 罪當斬。 且尹統嘗謂鄭秧曰: ‘雖提調始祖之墓, 固當啓達。’ 正寧不悅其言, 嘗厭統行大護軍, 庾順道以正寧惡統之言傳說於統, 罪當不應爲杖八十。"

上命正寧只奪告身, 秧贖杖六十徒一年, 廣元減三等, 順道、統皆赦不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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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103권, 세종 26년(1444) 2월 27일 정미(丁未) 4번째 기사



『세종실록』103권, 세종 26년(1444) 3월 11일 신유(辛酉)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이정녕·윤통·유순도 등을 다시 처벌할 것에 대한 사헌부의 상소문》

사헌부(司憲府)에서 상소(上疏)하기를,

"우리 원손(元孫)의 출생하심은 실로 생민의 복이옵고 종사(宗社)의 다행한 것으로 온 나라 신민은 누가 기쁘게 받들지 않사오리까. 이정녕(李正寧)은 종실(宗室)과 연이어 혼인하여 존귀하고 영화로움이 이미 지극하므로, 진실로 조심하고 근신하여야 할 것이옵고, 또 풍수학 제조(風水學提調)가 되였사온즉, 원손의 태장(胎藏)하는 일에 더욱 심력을 다함이 마땅하옵거늘, 도리어 음침하게 저의 조상 분묘를 비호(庇護)하여 천묘(遷墓)하지 않도록 은밀히 꾀한 증거가 명백하오며, 정실과 형적이 폭로되었어도 오히려 굳이 사절하며 문초에 승복하지 않는 것은 대개 그 죄가 중함을 알기 때문이옵니다.

그 심회(心懷)를 추적(追跡)하오면 불경하고 불충하옴이 무엇이 더함이 있사오리까. 마땅히 고문을 더하여 기필코 실토하도록 하여 밝게 법에 처치하여야 할 것이옵니다. 허나 전하(殿下)께서는 특별히 은사[恩貸]를 내리시어 그 원범(元犯)을 놓아 주시고, 다만 상언한 지엽(枝葉)의 말만을 가지고 말감(末減)을 따라 과단(科斷)하시니, 신 등은 분한 생각을 이길 수 없사옵니다. 엎디어 바라옵건대, 정녕을 다시 고문하여 실정을 얻게 하고 중전(重典)으로 처치하여 장래를 경계하시고, 윤통(尹統)과 유순도(庾順道)도 역시 용서하시어 죄를 면하도록 하심은 나라의 법전에 훼손[虧損]됨이 있사오니, 청하옵건대 율(律)에 따라 과단(科斷)하시옵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너희들의 말이 옳다. 그러나 사정이 애매하여 드러나지 않으니, 이로써 죄를 정할 수는 없다."

하였다. 장령 안숭효(安崇孝)가 다시 아뢰기를,

"이정녕의 범한 바는 사증(事證)이 명백하고 애매하지 않사오며, 가령 애매하다 하더라도 율문(律文)에 중증(衆證)으로 죄를 정한다는 말이 있고, 또 말이 이에 관련된 사람은 모두 본범(本犯)으로 죄를 받았사온데 홀로 정녕만이 특별히 은사를 입어, 그 원범(原犯)을 버리고 상언한 죄만으로써 과단(科斷)하시오니, 실로 옳지 못하옵니다. 정녕을 추국하고 실정을 얻어서 그 죄를 바르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방략(榜掠)을 더하게 하였다. 내가 정녕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이 아니다. 고문하여도 불복하여 사정이 애매하니, 애매한 일로써 중죄(重罪)를 가함은 불가하다."

하였다.

司憲府上疏曰:

我元孫之生, 實是生民之福, 宗社之幸, 擧國臣民, 孰不欣戴? 李正寧連姻宗室, 尊榮已極, 誠小心謹愼。 且爲風水學提調則其於元孫胎藏之事, 尤當盡心, 顧乃陰庇祖墳, 潛謀不遷, 事證明白, 情迹暴露, 而猶且牢辭, 終不承招者, 蓋知其罪之重也。 迹其心懷, 不敬不忠, 孰有加焉? 宜加拷訊, 期以吐實, 明置於法, 殿下特垂恩貸, 捨其元犯, 只將上言枝節辭因而又從末減科斷, 臣等不勝憤憾。 伏望將正寧, 更加拷訊, 推明得情, 置之重典, 以戒後來。 尹統、庾順道, 亦令原免, 有虧邦典, 請皆依律科斷。

上曰: "汝等之言是矣。 然事情曖昧未著, 不可以此而定罪。" 掌令安崇孝更啓: "李正寧所犯, 事證明白, 非曖昧也。 且曰曖昧, 律文衆證定罪之語, 且辭連之人, 皆以本犯抵罪, 獨正寧特蒙恩貸, 捨其原犯, 以上言之罪科斷, 實爲未便。 正寧不可不推明得情, 以正其罪。" 上曰: "已加搒掠, 予非愛惜正寧也。 拷問不服, 事情曖昧, 不可以曖昧之事而加重罪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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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종실록』103권, 세종 26년(1444) 3월 11일 신유(辛酉) 1번째 기사



『문종실록』3권, 문종 즉위년(1450) 9월 8일 기유(己酉) 4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풍수학에서 왕세자의 태실을 옮기도록 청하다》

풍수학(風水學)에서 아뢰기를,

"《태장경(胎藏經)》에 이르기를, ‘대체 하늘이 만물(萬物)을 낳는데 사람으로써 귀하게 여기며, 사람이 날 때는 태(胎)로 인하여 장성(長成)하게 되는데, 하물며 그 현우(賢愚)와 성쇠(盛衰)가 모두 태(胎)에 매여 있으니 태란 것은 신중히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무릇 태(胎)에서 내려온 지 3월에는 명칭을 화정태(和正胎)라 하고, 5월에는 연장태(軟藏胎)라 하고, 3년에는 장응태(壯應胎)라 하고, 5년에는 중부태(中符胎)라 하고, 7년에는 향양태(向陽胎)라 하고, 15년에는 과양태(過陽胎)라 하니, 이를 육안태법(六安胎法)이라 이른다.’고 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경서(經書)에 이르기를, ‘남자가 15세가 되면 학문에 뜻을 둘 나이고, 여자가 15세가 되면 남편을 따라야 할 나이라.’ 하였으니, 그렇다면 남자는 마땅히 연장태(軟藏胎)·중부태(中符胎)·향양태(向陽胎) 중의 연월(年月)에서 간수하여 학문에 뜻을 둘 나이를 기다려야만 하고, 여자도 또한 화정태(和正胎)·장응태(壯應胎)·과양태(過陽胎)의 연월(年月)에서 간수하여 남편을 따라야 할 나이를 기다려야만 하니, 남자가 만약 좋은 땅을 만난다면 총명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구경(九經)에 정통(精通)하며 단상(團爽)하여 병이 없으며, 관직이 높은 곳에 승진되는 것입니다. 지금 왕세자(王世子)의 태실(胎室)이 성주(星州)의 여러 대군(大君)들의 태실(胎室) 옆에 기울어져 보토(補土)한 곳에 있으니 진실로 옳지 못합니다. 태경(胎經)의 땅을 가리는 법에 의하여 길지(吉地)를 경기(京畿)와 하삼도(下三道)에 널리 구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風水學啓: "《胎藏經》曰: ‘夫天生萬物, 以人爲貴, 人生之時, 因胎而長, 況其賢愚衰盛, 皆在於胎, 胎者不可不愼。 凡降胎之三月, 名爲和正胎, 五月軟藏胎, 三年壯應胎, 五年中符胎, 七年向陽胎, 十五年過陽胎, 謂之六安胎法也。’ 故經曰: ‘男子十五年, 則志學之年, 女子十五年, 則遵家之年。’ 然則男子, 宜當軟藏、中符、向陽胎中年月, 藏待於志學之年, 女子亦當和正、壯應、過陽胎之年月, 藏待於遵家之年。 男子若値好地, 聰明愛學, 事業九經, 團爽無病, 官職高遷。 今王世子胎室, 在星州諸大君胎室之旁, 傾側補土之處, 誠爲不可。 依胎經擇地之法, 廣求吉地於京畿下三道。" 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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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종실록』3권, 문종 즉위년(1450) 9월 8일 기유(己酉) 4번째 기사



『문종실록』5권, 문종 1년(1451) 1월 22일 임술(壬戌) 4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박연이 태봉 아래의 백성들의 집과 전토를 철거하지 않도록 상언하다》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박연(朴堧)이 상언(上言)하기를,

"태봉(胎峯)의 아래에 백성들의 여사(盧舍)를 철거하고 그 전토(田土)를 폐지하니, 지극히 통석(痛惜)합니다. 지리(地理)094) 의 설에 말하기를, ‘닭이 울고 개가 짖고 저자가 열리고 마을에 연기가 나면 은연중에 융성하니, 누가 그 근원을 찾아내겠는가?’ 하고, 또 말하기를, ‘산조(山朝)는 수조(水朝)와 같지 아니하고, 수조(水朝)는 인조(人朝)와 같지 아니하다.’고 하였으니, 사람이 거주함을 꺼리지 않는 것이 분명합니다. 만약 산수(山水)의 기운이 사람이 거주하기 때문에 손해가 있다고 하나, 즉 도성(都城)의 주·현(州縣)은 백성이 모여사는 바가 여러 해 계속되었으나 부유하고 번성하기가 한결같으니 인연(人煙)095) 이 풍수(風水)에 해(害)가 없음을 족히 증험할 만합니다. 또 장법(葬法)을 상고하면, 고금(古今)의 경험이 모두 사람이 거주하는 것을 꺼리지 않습니다.

신이 보건대 신라(新羅)의 능묘(陵墓)는 왕성(王城) 안에 많이 있었으나 나라를 천년이나 계승하였고 성대(盛代)라고 일컬었습니다. 중국 사람들의 묘(墓)는 전원(田園)의 두둑에 있으나 가세(家世)가 끊이지 않고 명현(明賢)이 나왔으니 인연(人煙)이 모인 것도 또한 길(吉)한 기운이 되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태실(胎室)은 능묘(陵墓)의 깊고 미묘함에 비길 바가 못되므로 더욱 인연(人煙)을 꺼려할 것이 못되는데 어찌 반드시 태봉(胎峯)의 천 길 아래에 있고, 그 산맥(山脈)에 간범되지 않는 평지 아래 땅인 전원과 제택(第宅)를 모두 남김없이 철수한 뒤에야 길(吉)하겠습니까? 이것은 심히 이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초목(草木)이 거칠고 무성한 것을 귀하게 여긴다면 뽕나무 밭과 대나무 숲도 또한 초목(草木)의 아름다운 것인데, 무슨 까닭으로 뽕나무 밭을 폐지하고서 풀숲을 보호하여야 하며, 사람의 거처를 철거시키고서 벌레와 뱀을 길러야 하는 것입니까? 생각건대 악례(惡例)를 만든 자가 어찌 공경하고 삼가지 아니하며, 지극히 곡진하게 특별한 의논을 내어서 이처럼 정도에 지나친 금방(禁防)을 하겠습니까? 만약 이러한 예(例)를 굳게 고집하여 항구한 법규를 세운다면 자손 만년에 내려가더라도 태소(胎所)도 또한 같으니 나라의 전토(田土)는 줄어들어 민생(民生)의 원망이 그칠 날이 없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태평한 날이 오래 되어 백성들이 지극히 번성하여 사람은 많아지고 땅이 좁아지면 한 조각의 빈 땅도 없을 것이니, 백성들을 보호하고 먹는 것[食]을 풍족하게 하는 것도 또한 왕정(王政)의 급한 바입니다. 진실로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지리(地理)의 여러 책과 태경(胎經)의 설(說)을 두루 고찰하도록 명령하여, 만약 가옥(家屋)을 철거하고 농경을 금지하는 글귀가 없거든 특별히 덕음(德音)을 내려서 옛날 구업(舊業)을 그대로 허락하시고, 그 태봉(胎峯) 주변에 절이 있는 곳에는 인하여 축령(祝齡)097) 하는 곳으로 삼아서 옛사람의 태실(胎室)의 예(例)와 같이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명하여 풍수학(風水學)에 내려 이를 의논하게 하였다. 그때 허후(許詡)가 안태사(安胎使)로서 경상도 성주(星州)에 가 있었다. 임금이 허후에게 유시하기를,

"태봉(胎峯) 근방의 인가(人家)와 토전(土田)의 수와 태봉(胎峯)과 인가(人家)와의 거리의 보(步) 수와 인민(人民)이 옮겨 거주하는 것과 전토(田土)를 개간하는 것의 편하고 편하지 않은 것을 조사하여 오라."

하였다. 뒤에 풍수학(風水學)에서 의논하여 아뢰기를,

"태봉(胎峯)에 너무 가까이 사람이 거주(居住)하면 화재(火災)가 가히 두려우니, 도국(圖局)098) 의 밖에 옮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만약 태봉(胎峯)의 주혈(主穴) 산기슭 이외에는 일찍이 경작한 토전(土田)과 태봉 주변의 사사(寺社)는 다른 태실(胎室)의 예에 의하여 옛날 그대로 하소서."

하였다.

中樞院副使朴堧上言: "胎峯之下, 撤民盧舍, 廢其田土, 極爲痛惜。 地理之說, 有曰: ‘雞鳴犬吠, 鬧市烟村, 隱隱隆隆, 孰探其源?’ 又曰: ‘山朝不如水朝, 水朝不如人朝’, 則不以人居爲忌, 明矣。 若曰: ‘山水之氣, 因人居而有損’, 則都城州、縣, 民所聚也, 而綿歷多年, 富庶如一, 則人烟之不害於風水, 足可驗也。 又以葬法考之, 古今經驗, 皆不忌人居。 臣見, 新羅陵墓, 多在王城之內, 而享國千年, 號稱盛代。 中國之人, 墓在田園之畔, 而家世不絶, 名賢出焉, 則人烟團集, 亦爲吉氣無疑矣。 而況胎室不比陵墓之幽玄, 尤不嫌於人烟, 何必胎峯千仞之下, 其不干山脈平下之地田園、第宅, 盡撤無遺, 然後爲吉也哉? 此甚無理。 如以草木荒茂爲貴, 則桑田、竹卉, 亦草木之美者也, 何故廢桑田而護榛莾, 撤人居而養蟲蛇爲哉? 意其作俑者, 豈不敬謹之? 至曲生別議, 爲此過中之禁防乎? 若堅據此例, 立爲恒規, 則傳祚萬年, 胎所亦同, 國田之減, 民生之怨, 靡有止息。 況昇平日久, 生齒極繁, 人多地窄, 片無閑土, 保民足食, 亦王政之所急。 誠願殿下, 命令徧考地理諸書及胎經之說, 如無撤屋禁耕之文, 則特渙德音, 許仍舊業。 其峯邊有寺之處, 因爲祝齡之所, 如古人胎室之例, 何如?"

命下風水學, 議之。

時許詡以安胎使, 往慶尙道 星州。

下諭于詡: "令審胎峯傍近人家、土田之數、胎峯與人家相距步數及人民移居田土開墾便否, 以來。"

後風水學議啓曰: "胎峯逼近人居, 火災可畏, 宜移於圖局之外。 若胎峯主穴山麓外, 曾耕土田及峯邊寺社, 依他胎室例, 仍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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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종실록』5권, 문종 1년(1451) 1월 22일 임술(壬戌) 4번째 기사



『문종실록』6권, 문종 1년(1451) 2월 18일 정해(丁亥) 5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박연이 성주 태봉 밑의 민가를 철거하지 말도록 상언하다》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박연(朴堧)이 상언(上言)하기를,

"풍수학설(風水學說)에, ‘산근(山根)에 너무 가깝지 아니하고 인가에서 멀리 떨어지면 철거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제 성주(星州) 태봉(胎峯)은 봉 밑[峯下] 좌액(左腋)에 법림사(法林寺)가 가장 산근(山根) 가까이 있고 민가(民家)는 한 곳에 모여 살며, 법림사 밑에 있어서 서로 거리가 멀리 떨어졌으니, 가축이 밟을 까닭이 없고, 만약 민가에 불이 나는 일이 있을지라도 법림사 뒷봉[後峯]을 지난 뒤에야 태봉(胎峯)에 이를 것입니다. 이는 신이 혼자 본 것이며 다른 사람은 본 이가 없습니다. 백성을 해롭게 함은 중한 일인데 성상의 마음을 수고롭게 할까 두려워하여 그대로 있지 못하고 다시 천총(天聰)을 어지럽게 하니, 실로 소신(小臣)의 명예를 요구하는 계책이 아니고 진실로 성상의 덕이 곤궁한 백성에게 미쳐 한 사람이라도 살 곳을 얻지 못하는 자가 없게 하고자 함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마음을 살펴 의심없이 시행하소서."

하였다.

中樞院副使朴堧上言曰: "風水學之議: ‘其不逼山根, 隔遠人家, 毋令撤去。’ 今星州 胎峰, 則峰下左腋法林寺, 在山根最近, 若民居則聚居一處, 在法林寺下, 相距隔遠, 家畜無由踐踏, 又倘有民家失火, 須歷法林寺後峰, 然後延及胎峰。 此則愚臣獨見, 更無見者。 傷民重事, 恐勞聖慮, 不能含默, 再瀆天聰, 實非小臣自求要譽之計, 誠欲德洽窮民, 俾無一夫一婦, 不獲其所云爾。 諒臣愚衷, 勿疑施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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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종실록』6권, 문종 1년(1451) 2월 18일 정해(丁亥) 5번째 기사



『문종실록』6권, 문종 1년(1451) 3월 6일 을사(乙巳)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안태사 허후가 동궁의 태실을 성주 가야산에 옮겨 모시고 수호하게 하였음을 아뢰다》

안태사(安胎使) 예조 판서 허후(許詡)가 돌아와서 아뢰기를,

"이제 동궁(東宮)의 태실(胎室)을 성주 가야산(伽倻山)에 옮겨 모시고 그 사역(四域)을 정하였는데, 동쪽과 남쪽을 각 9천 6백 보(步), 서쪽을 9천 5백 90보, 북쪽을 4백 70보로 하여 표(標)를 세우고, 또 품관(品官) 이효진(李孝眞) 등 여덟 사람과 백성(百姓) 김도자(金道者) 등 여섯 사람을 정하여 수호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安胎使禮曹判書許詡還啓: "今已移安東宮胎室于星州 伽倻山, 定其四域, 東南各九千六百步, 西九千五百九十步, 北四百七十步, 爲之立標, 又定品官李孝眞等八人、百姓金道者等六人, 使之守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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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종실록』6권, 문종 1년(1451) 3월 6일 을사(乙巳) 2번째 기사



『세조실록』13권, 세조 4년(1458) 7월 8일 계사(癸巳)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주상의 태실을 봉안한 성주 선석산의 다른 태실을 옮기거나 철거할 것을 청하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성주(星州) 선석산(禪石山)에 주상(主上)의 태실(胎室)을 봉안(奉安)하였으나, 그러나 여러 대군(大君)과 여러 군(君)과 난신(亂臣) 이유(李瑜)의 태실(胎室)이 그 사이에 섞여서 자리하였고, 또 법림산(法林山)에 노산군(魯山君)의 태실(胎室)이 있으니, 청컨대 여러 대군(大君)과 여러 군(君)의 태실(胎室)을 옮기고, 유(瑜)와 노산군(魯山君)의 태실은 철거(撤去)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禮曹啓: "星州 禪石山奉安主上胎室, 而諸大君、諸君及亂臣瑜胎室雜處其間, 且法林山有魯山君胎室, 請移諸大君、諸君胎室而撤去瑜及魯山君胎室。" 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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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조실록』13권, 세조 4년(1458) 7월 8일 계사(癸巳) 2번째 기사



『영조실록』30권, 영조 7년(1731) 12월 15일 갑진(甲辰)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대신·비국 당상을 소견하여 삼남을 진제할 대책을 강구하다》

임금이 정섭(靜攝)한 나머지 빈연(賓筵)을 오랫동안 비워 두었었는데,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소견(召見)하여 삼남(三南)을 진제(賑濟)할 대책을 강구하였다. 예조 판서 신사철(申思喆)이 말하기를,

"세종 대왕·단종 대왕·예종 대왕·현종 대왕의 태실(胎室) 석물(石物)을 마땅히 명년 봄에 수개(修改)하여야 하는데, 마침 흉년이 든 시기를 만났으니, 청컨대 명년 가을을 기다리게 하소서. 식년(式年)의 대소과(大小科)도 또한 마땅히 명년 가을로 물려서 행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上以靜攝之餘, 賓筵久曠, 召見大臣、 備堂, 講究三南賑濟之策。 禮曺判書申思喆曰: "世宗大王、端宗大王、睿宗大王、顯宗大王胎室石物, 當於明春修改, 而適値時詘, 請待明秋。 式年大小科, 亦當退行於明秋也。" 上竝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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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조실록』30권, 영조 7년(1731) 12월 15일 갑진(甲辰) 2번째 기사



『영조실록』38권, 영조 10년(1734) 7월 11일 갑신(甲申)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관원을 보내서 세종·단종·예종·현종의 태봉에 비를 세우는 역사를 감독하게 하다》

세종 대왕(世宗大王)·단종 대왕(端宗大王)의 태봉(胎峰)은 경상도 곤양군(昆陽郡)에 있고, 예종 대왕(睿宗大王)의 태봉은 전라도 전주부(全州府)에 있고, 현종 대왕(顯宗大王)의 태봉은 충청도 대흥군(大興郡)에 있는데, 장차 비(碑)를 세우려 함에 있어서 표석(標石)이 이지러져서 고쳐야 되므로, 예조 당상(禮曹堂上)과 선공감역(繕工監役) 각 1원(員)을 보내서 그 일을 감독하게 할 것을 명하였으니, 선조(先祖) 신묘년의 전례를 적용한 것이었다.

世宗、端宗大王胎峰, 在慶尙道 昆陽郡, 睿宗大王胎峰, 在全羅道 全州府, 顯宗大王胎峰, 在忠淸道 大興郡, 將竪碑以標石缺當改, 命遣禮曹堂上、繕工監役各一員, 蕫其事, 用先朝辛卯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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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조실록』38권, 영조 10년(1734) 7월 11일 갑신(甲申) 2번째 기사



『정조실록』18권, 정조 8년(1784) 9월 15일 정묘(丁卯)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예조에서 열성조의 태봉을 써서 바치다》

예조에서 열성조(列聖朝)의 태봉(胎峰)을 써서 바쳤다.

태조 대왕(太祖大王)의 태봉(胎封)은 진산(珍山) 만인산(萬仞山)에, 정종 대왕(定宗大王)의 태봉은 금산(金山) 직지사(直持寺) 뒤에, 태종 대왕(太宗大王)의 태봉은 성산(星山) 조곡산(祖谷山)에, 세종 대왕(世宗大王)의 태봉은 곤양(昆陽) 소곡산(所谷山)에, 문종 대왕(文宗大王)의 태봉은 풍기(豊基) 명봉사(鳴鳳寺) 뒤에, 단종 대왕(端宗大王)의 태봉은 곤양(昆陽) 소곡산(所谷山)에, 세조 대왕(世祖大王)의 태봉은 성주(星州) 선석사(禪石寺) 뒤에, 예종 대왕(睿宗大王)의 태봉은 전주(全州) 태실산(胎室山)에, 성종 대왕(成宗大王)의 태봉은 광주(廣州) 경안역(慶安驛) 뒤에, 중종 대왕(中宗大王)의 태봉은 가평(加平) 서면(西面)에, 인종 대왕(仁宗大王)의 태봉은 영천(永川) 공산(公山)에, 명종 대왕(明宗大王)의 태봉은 서산(瑞山) 동면(東面)에, 선조 대왕(宣祖大王)의 태봉은 임천(林川) 서면(西面)에 있었다.

현종 대왕(顯宗大王)의 태봉은 대흥(大興) 원동면(遠東面)에 있는데, 신유년 10월에 돌 난간을 배설(排設)한 뒤에 대흥현(大興縣)을 승호(陞號)하여 군수(郡守)를 두었다. 숙종 대왕(肅宗大王)의 태봉은 공주(公州) 남면(南面) 오곡(吳谷) 무수산(無愁山) 동구(洞口)에, 경종 대왕(景宗大王)의 태봉은 충주(忠州) 엄정립비(嚴政立碑)의 북쪽 이삼리 쯤에, 영종 대왕(英宗大王)의 태봉은 청주(淸州) 산내(山內) 일동면(一東面) 무쌍리(無雙里)에 있었다.

禮曹書進列聖朝胎(峰)〔封〕 。 太祖大王胎封珍山 萬仞山, 定宗大王胎封金山 直持寺後, 太宗大王胎封星山 祖谷山, 世宗大王胎封昆陽 所公山, 文宗大王胎封豐基 鳴鳳寺後, 端宗大王胎封昆陽 所谷山, 世祖大王胎封星州 禪石寺後, 睿宗大王胎封全州 胎室山, 成宗大王胎封廣州 慶安驛後, 中宗大王胎封加平西面。 仁宗大王胎封永川 公山, 明宗大王胎封瑞山東面, 宣祖大王胎封林川西面。 顯宗大王胎封大興遠東面, 辛酉年十月, 石欄干排設後, 大興縣陞號爲郡守。 肅宗大王胎封公州南面吳谷 無愁山洞口, 景宗大王胎封忠州嚴政立碑北數里許, 英宗大王胎封淸州山內一東面 無雙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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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18권, 정조 8년(1784) 9월 15일 정묘(丁卯) 1번째 기사



『순종실록부록』2권, 순종 4년(1911) 10월 13일 양력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가토 헤이지를 파견하여 경상 남북도에 있는 태실 묻은 산의 토지 경계를 정할 때 입회하게 하다》

이왕직 속(李王職屬) 가토 헤이지〔加藤兵次〕를 파견하여 경상남도(慶尙南道)와 경상북도(慶尙北道) 각군(各郡)에 있는 【곤양(昆陽), 금산(金山), 성주(星州), 순흥(順興), 풍기(豐基), 영천(永川)의 6개 군이다.】 태실(胎室)을 묻은 산의 토지 경계를 정할 때 입회하게 하였다.

派遣本職屬加藤兵次, 慶尙南北道各郡 【昆陽、金山、星州、順興、豐基、永川六郡】 所在胎峯山土地定界時, 使之立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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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종실록부록』2권, 순종 4년(1911) 10월 13일 양력 2번째 기사



『순종실록부록』3권, 순종 5년(1912) 4월 1일 양력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단종과 현종의 태실을 묻은 산 이외의 경계를 결정하는 일에 농상공부 장관의 통지를 받다》

단종 대왕(端宗大王)의 태실(胎室)을 묻은 산 이외 1개소(箇所), 현종 대왕(顯宗大王)의 태실을 묻은 산 이외 5개소의 경계를 결정하는 일에 관한 농상공부 장관(農商工部長官)의 통첩(通牒)을 받았다.

端宗大王胎峯外一箇所、顯宗大王胎峯外五箇所境界決定事, 接農商工部長官通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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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종실록부록』3권, 순종 5년(1912) 4월 1일 양력 1번째 기사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 717책 (탈초본 39책) 영조 7년(1731) 1월 22일 병술(丙戌) 22/23 기사

Quote-left blue.png 領敦寧魚有龜疏曰, 伏以臣伏見禮曹啓目, 則慶尙道昆陽地, 世宗大王·端宗大王胎室, 石物修改吉日, 擇定於來二月十三日及十九日, 而禮曹堂上·繕工提調, 將於今晦前, 及期發行矣。臣待罪該監提擧, 職事所管, 當爲進去, 而身帶將任, 不敢循例辭陛, 在前冬, 有急時陵寢奉審, 而以臣之故, 致令工曹堂上替行, 前例雖或如此, 事體未免苟簡。且臣之衰昏, 日甚月增, 軍門重務, 轉就曠廢, 其在朝體, 尤宜先加變通。伏乞聖明, 量察事役之緊重, 許遞臣所帶將任, 俾以該監職掌, 依例進去, 以效臣子往役之義, 不勝幸甚。臣無任屛營祈懇之至, 謹昧死以聞。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717책 (탈초본 39책) 영조 7년(1731) 1월 22일 병술(丙戌) 22/23 기사



『승정원일기』 720책 (탈초본 39책) 영조 7년(1731) 4월 5일 정유(丁酉) 29/29 기사

Quote-left blue.png 端宗大王胎室, 自上峯至峯底, 爲四十餘步, 犯民田處四面各二百五十餘步, 民田斗數十七石九斗零落只, 人家撤毁, 亦三四處矣。民田若欲仍存, 則違式, 不欲仍存, 則當給其代, 而給其代亦難矣。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720책 (탈초본 39책) 영조 7년(1731) 4월 5일 정유(丁酉) 29/29 기사



『승정원일기』 723책 (탈초본 39책) 영조 7년(1731) 5월 23일 을유(乙酉) 30/30 기사

Quote-left blue.png 世宗大王胎室步數廣, 而端宗大王胎峯步數至近, 三面皆民畓矣。胎峯之無火巢, 而以民田入案者, 殊涉怪異, 而本官及監營戶曹, 俱無可考文書。若欲定其步數, 割其田土, 則居民不無稱冤之端, 而景象慘然矣。此意下詢大臣而處之, 何如?

上曰, 元無定步數之事, 故百姓似當耕之食之, 詳考古例後處之宜矣。

錫五曰, 古例無詳考處矣。致中曰, 觀象監及禮曹, 無胎峯謄錄矣。蓋近來則儀文甚備, 而古則不然矣。

上曰, 諸道所在胎峯步數, 尺量以來事, 曾有下敎矣。

思喆曰, 多有上來者矣。

致中曰, 胎峯例於田畓無處有之, 故火巢廣矣, 民田有處, 則自然步數狹矣。端宗胎室, 以其峯低, 故步數之狹, 至於如此, 事體殊甚未安, 詳考古例, 斟酌爲之, 何如?

文命曰, 仍舊, 何如?

上曰, 觀其步數尺量之上來, 稟于次對時,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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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23책 (탈초본 39책) 영조 7년(1731) 5월 23일 을유(乙酉) 30/30 기사



『승정원일기』 727책 (탈초본 40책) 영조 7년(1731) 7월 28일 기축(己丑) 34/35 기사

Quote-left blue.png 思喆曰, 今春昆陽地世宗大王·端宗大王胎峯石物修改時, 因本道監司狀啓, 兩胎室皆無標石, 待今秋豎立事啓下, 所當趁今擇日擧行, 而頃日全州睿宗大王胎峯石物及大興顯宗大王胎峯石物有頉處修改, 竝待明春擧行事, 定奪矣。今此昆陽兩胎峯碑石豎立之役, 亦爲待明春擧行, 何如?

上曰, 依爲之。 出擧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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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27책 (탈초본 40책) 영조 7년(1731) 7월 28일 기축(己丑) 34/35 기사



『승정원일기』 747책 (탈초본 41책) 영조 8년(1732) 7월 5일 기축(己丑) 36/36 기사

Quote-left blue.png 成明曰, 昨年昆陽端宗大王胎室, 全州世宗大王胎室, 大興顯宗大王胎室, 石物修改, 以待明春擧行事, 定奪矣。今春則勢難爲之, 故將爲待秋擧行, 而湖中年事若失稔, 則何以爲之?

文命曰, 如此莫重之事, 不可以年事停止, 從當更爲稟定矣。

上曰, 依爲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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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47책 (탈초본 41책) 영조 8년(1732) 7월 5일 기축(己丑) 36/36 기사



『승정원일기』 748책 (탈초본 41책) 영조 8년(1732) 8월 5일 기미(己未) 31/31 기사

Quote-left blue.png 宋成明曰, 昆陽地世宗大王·端宗大王胎封及全州地睿宗大王胎封及大興地顯宗大王胎封, 碑石之役, 頃以更觀年事進退之意, 仰達矣。今年兩南之凶, 又如是孔慘, 似難擧行, 何以爲之乎?

命均曰, 事體雖重大, 聞昆陽等地, 被災尤慘云, 旣已停退, 姑爲待豐擧行, 亦好矣。

上曰, 事體重大, 何可待豐乎? 待明秋擧行, 可也。出擧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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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48책 (탈초본 41책) 영조 8년(1732) 8월 5일 기미(己未) 31/31 기사



『승정원일기』 762책 (탈초본 42책) 영조 9년(1733) 7월 15일 갑오(甲午) 28/28 기사

Quote-left blue.png 思喆曰, 上年秋, 因禮官所達昆陽地世宗大王·端宗大王胎封碑石, 及全州地睿宗大王胎封, 大興地顯宗大王胎封石物, 有頉處修改之役, 因三南年事之凶歉, 待今秋擧行事, 定奪矣。連歲荐飢之餘, 今年穡事之豐歉, 姑不可知, 而累次請退, 事體未安, 何以爲之?

上曰, 大臣之意, 如何?

命均曰, 胎封事體, 非不重大, 而今年年事, 雖或稍登, 荐歉之餘, 公私物力俱殫, 此時動役, 似涉重難矣。興慶曰, 石物有頉處, 果若難支一時, 則其勢宜不可他顧, 而如不至此, 則姑觀前頭, 徐徐擧行, 似好矣。

上曰, 待明年更稟, 可也。出擧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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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62책 (탈초본 42책) 영조 9년(1733) 7월 15일 갑오(甲午) 28/28 기사



『승정원일기』 777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4월 10일 을묘(乙卯) 24/24 기사

Quote-left blue.png 淳曰, 小臣欲有所仰達矣。世宗·端宗兩朝胎封, 在於昆陽, 睿宗朝胎封, 在於全州, 顯宗朝胎封, 在於大興, 而昆陽則初無表石, 全州及大興兩所, 則所舖裳石動退, 其中兩石折傷。自辛亥年, 有修改之命, 而連値凶荒, 未卽擧行, 上年又爲稟達, 有待明年擧行之敎, 何以爲之? 惶恐敢達矣。

上曰, 表石則雖待年豎立, 亦或無妨, 而全州·大興兩所, 則似甚大段, 不可不急速修改也。宗城曰, 使道臣奉審以報, 何如?

上曰, 每於此等事, 人情不能無少忽, 而以至於此矣。近來禮曹堂上, 未有行公者, 遷延至此, 事在緊急, 則豈計農節耶? 若以妨農爲慮, 則雖役以僧軍, 不可已也。且此與改封築, 異矣。

游曰, 胎封必於尖峯上占地, 故裳石, 每易於流移矣。至於缺傷處, 尤難於待秋遲緩矣。

上曰, 分付道臣, 使卽奉審馳啓, 而若其最爲緊急, 則卽爲定行, 如不至大悶急, 則事體雖甚未安, 姑爲待秋, 而擇日則趁今預爲之, 可也。

淳曰, 昆陽表石, 亦已浮置。以役事言之, 不過豎立而已, 似不大段矣。

上曰, 大興·全州畢役之後, 仍爲始役於昆陽, 可也。 抄出擧行條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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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77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4월 10일 을묘(乙卯) 24/24 기사



『승정원일기』 779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5월 12일 정해(丁亥) 16/28 기사

Quote-left blue.png 鄭必寧, 以禮曹言啓曰, 昆陽地, 世宗大王·端宗大王胎峯, 初無表石, 全州地睿宗大王胎峯, 裳石擧皆動退, 而二立折爲兩段, 表石有大段欲折之橫紋七處。大興地, 顯宗大王胎峯表石, 字畫缺落, 罅隙處又至五處, 而亦大段, 裳石擧皆退隙, 其中二立, 又爲缺傷等處, 分付本道道臣, 使卽奉審馳啓, 而若其最爲悶急, 則卽爲定行, 如不至悶急則事勢雖甚未安, 姑爲待秋而擇日, 則趁今預爲之, 可也事, 頃因傳敎, 分付三道矣。卽見慶尙監司金始炯, 全羅監司趙顯命, 忠淸監司李壽沆狀啓, 則昆陽兩胎峯表石豎立, 則姑觀年事登場, 擧行爲請, 而全州胎峯表石·裳石有頉外, 又有川防之役, 大興胎峯表石·裳石, 竝待秋改鋪改立之意, 狀聞矣。三處胎峯, 表石及裳石修改之役, 不可不趁今秋擧行, 依前例令該監, 擇日修改, 本曹堂上郞廳及觀象監·繕工監提調, 趁期下去, 與本道監司, 會同改排, 而容入石物, 令本道預爲浮取事, 分付三道監司處, 何如?

傳曰, 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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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79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5월 12일 정해(丁亥) 16/28 기사



『승정원일기』 783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7월 11일 갑신(甲申) 25/26 기사

Quote-left blue.png 都提調金興慶所啓, 昆陽地世宗大王·端宗大王胎峯, 將立表石, 全州地睿宗大王胎峯表石, 有欲折之橫紋, 大興地顯宗大王胎峯表石, 字劃缺落, 罅隙又有五處, 而全州·大興胎室裳石, 擧皆有頉, 故今方自本道修治, 而禮曹堂郞·觀象監·繕工監提調臨時下去董役事, 頃因禮曹草記定奪矣。蓋曾前則胎室碑石磨治, 及石物修改時, 或觀象監官員, 與本道, 眼同修改, 或禮曹郞廳, 及監役官, 進去矣。己巳年珍山胎室碑石修改時, 有禮曹堂郞, 兩監提調進去之事, 故辛卯年林川胎室碑石修改時, 以兩監提調進去事, 定奪矣。故相臣徐宗泰, 以依舊例, 禮郞及監役官進去之意稟達, 則先朝以兩監提調之竝往, 似太重, 只送禮郞與監役, 又似太輕, 禮曹堂上及監役官下送爲敎矣。其後庚戌年昆陽胎室修改時, 引己巳年例, 禮堂及兩監提調進去之故, 今番禮曹, 以此例定奪, 而第胎室, 事體不如陵寢。頃者莊陵碑石豎立時, 只令禮曹堂上監董, 則今此昆陽·全州·大興等地, 依辛卯定奪, 禮曹堂上及監役官進去, 未知何如。

上曰, 已有先朝定奪, 依定式擧行, 可也。出擧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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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83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7월 11일 갑신(甲申) 25/26 기사



『승정원일기』 783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7월 16일 기축(己丑) 16/20 기사

Quote-left blue.png 又以禮曹言啓曰, 昆陽地, 世宗大王·端宗大王兩胎室, 初無表石, 今始新建, 全州地睿宗大王胎室, 大興地顯宗大王胎室表石, 傷破, 竝爲重建事, 擇日啓下矣。取考謄錄, 則大王胎室石物加封時, 表石前面, 臨御時則書之以主上殿下胎室, 先王胎室則書之以廟號, 而辛卯年瑞山明宗大王胎室表石重建時, 因禮官陳達, 表石後面所書皇明年號, 到今, 改書以彼國年號未安, 雖改新石, 而所書則依當初書之, 年月之下, 註之以後幾年干支月日改石, 以此刻矣。今此昆陽兩胎室表石書標時, 前面書廟號, 後面似當以崇禎紀元後幾年干支月日建。全州胎室表石後面, 則仍存當初所刻中朝年號, 而年月之下, 註之以後幾年改石。如瑞山胎室之例, 恐爲得宜。大興胎室表石, 旣以康熙二十年書刻, 則今於改建, 亦當以卽今年號註刻矣。胎室表石書標式, 別單書入, 以此擧行,

何如? 傳曰, 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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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83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7월 16일 기축(己丑) 16/20 기사



『승정원일기』 783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7월 16일 기축(己丑) 20/20 기사

Quote-left blue.png 上曰, 世宗·端宗胎室表石, 古有之乎?

興慶曰, 古有之。前面, 書廟號, 世宗胎室表石, 書崇禎紀元後, 睿宗胎室表石, 書萬曆六年矣。

上曰, 誰寫之乎?

尙賓曰, 承文參下寫之矣。

上曰, 草記, 書允字以下,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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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83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7월 16일 기축(己丑) 20/20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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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학술적 성격의 저작물

1.고문헌

  • 조선 예조, 『태봉등록(胎封謄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조선 예조, 『세종대왕단종대왕태실수개의궤(世宗大王端宗大王胎室修改儀軌)』,사천시청 소장.
  • 조선 예조, 『세종대왕단종대왕태실표석견립시의궤(世宗大王端宗大王胎室表石竪立時儀軌)』,사천시청 소장.
  •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태봉(胎封)』, 1928,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2.단행본

  •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삼릉태실』,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 심현용, 『한국 태실 연구』, 경인문화사, 2016.
  • 이규상, 『한국의 태실』, 청원문화원, 2005.
  • 윤진영, 김호, 이귀영, 홍대한, 김문식 공저, 『조선왕실의 태실 의궤와 장태 문화』,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
  •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조선의 태실』, 전주이씨대동종약원, 1999.
  • 이은석 편역, 『세종대왕 단종대왕 태실의궤』, 사천문화원, 2001.

3.논문

  • 윤석인, 『조선왕실의 태실 변천 연구』,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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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현용, 「성주 세종대왕자태실 연구」, 『박물관연보』2, 강릉대학교박물관, 2005.

대중적 성격의 콘텐츠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