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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과 명빈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인 연령군의 태실이다.  
 
숙종과 명빈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인 연령군의 태실이다.  
  
연령군은 5살에 생모 명빈박씨가 죽어 봉군(封君)된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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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군은 1699년(숙종 25) 6월 13일 창경궁 집복헌(集福軒)에서 태어났다.
  
《태봉등록》에 태실 조성과 관련하여 대강의 기록이 있다. 연령군의 태실은 충청도 예산 동면 궐동으로 낙점하였다. 8월 26일 공사를 시작하고, 서울에서 태를 꺼내는 때는 9월 25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태를 안치하는 때는 9월 29일이었는데 이는 태지석에 기록된 때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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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군의 생모 명빈 박씨는 숙종의 승은을 입고도 10여 년간 상궁으로만 있고 후궁으로 봉작되지 못하다가 연령군을 회임하고 1698년 11월 4일 종4품 숙원(淑媛)에 봉작되었다. 이틀 뒤인 11월 6일 노산대군(魯山大君)을 단종(端宗)으로 추존하였는데, 이를 기념하여 1699년 10월 23일 종2품 숙의(淑儀)로 승품(陞品) 되었으며, 1701년(숙종 27) 3월 23일 종1품 귀인(貴人)으로, 1702년(숙종 28) 10월 18일 정1품 빈(嬪)으로 승품되었다. 1703년(숙종 29) 7월 15일 명빈 박씨가 사망하였다.
  
태실지에는 별다른 석물은 확인되지 않으나 태실이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인위적인 큰 구덩이가 남아있다. 다만 연령군 태실비와 태석함은 충남대학교로 옮겨져 야외 전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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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연령군은 5살의 나이로 봉군(封君)되었다. 예법에는 6세 이후 봉작하는 것이 관례이나 당시 생모인 명빈 박씨의 상을 주관하게 하기 위해 봉작한 것이다. 상중(喪中)에 봉작하는 것은 상복을 벗고 장복(章服)을 입어 의식을 행해야 하는데, 이는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여 반대 여론이 있었으나, 숙종은 받아들이지 않고 연령군의 봉작을 행햇다. 아울러 종친부(宗親府) 유사당상(有司堂上)이 되어 종친부의 일을 관리하게 하였다.
  
석함은 잘 다듬어진 둥근 형태로 부분이 돌출되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태실비인데 이복형인 경종과 영조의 안태비와 형태가 닮아있어 비슷한 시기의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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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7년(숙종 33) 2월 6일 저작(著作) 김동필(金東弼)의 딸과 가례를 올렸으며, 숙종은 연령군의 가례 때 백관에게 명하여 위요(衛繞)하도록 하였다. 연령군은 어린 나이에도 예를 행하는 모습에 부족함이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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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9년(숙종 45) 10월 2일 2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시호를 효헌(孝憲)이라 하였다. 1718년(숙종 44) 형인 연잉군(훗날의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가 죽자 연령군은 “형님이 참으로 슬플 것이지만 나보다는 낫다. 나는 우리 어머니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한다.”라고 하였고 자신이 죽으면 어머니 옆에 묻히고 싶다고 하였는데, 그 뜻대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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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군의 묘는 명빈 박씨 묘와 함께 경기도 금천현(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길동)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경성 토지구획 정리에 따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으로 옮겨졌다. 연령군의 신도비는 그대로 남아 있다가 1967년 공릉동 육군사관학교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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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봉등록》에는 연령군 태실 조성과 관련하여 대강의 기록이 있다. 연령군의 태실은 충청도 예산 동면 궐동으로 낙점하였다. 8월 26일 공사를 시작하고, 서울에서 태를 꺼내는 때는 9월 25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태를 안치하는 때는 9월 29일이었는데 이는 태지석에 기록된 때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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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실지에는 별다른 석물은 확인되지 않으나 태실이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인위적인 큰 구덩이가 남아있다. 인근 민가에는 연령군 태석함의 함신이 남아있으며, 태실비와 태석함의 덮개돌은 충남대학교로 옮겨져 야외 전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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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함 덮개돌은 잘 다듬어진 둥근 형태로 부분이 돌출되어 있으며, 한 부분은 결락이 일어난 상태이다. 흥미로운 것은 태실비인데 이복형인 경종과 영조의 안태비와 형태가 닮아있어 비슷한 시기의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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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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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현용, 『한국 태실 연구』, 경인문화사, 2016.
 
*심현용, 『한국 태실 연구』, 경인문화사, 2016.
 
*윤진영, 김호, 이귀영, 홍대한, 김문식 공저, 『조선왕실의 태실 의궤와 장태 문화』,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
 
*윤진영, 김호, 이귀영, 홍대한, 김문식 공저, 『조선왕실의 태실 의궤와 장태 문화』,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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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예산군 편, 『예산군 태실조사 용역』, 예당기획, 2016.
  
 
3.논문
 
3.논문

2021년 6월 25일 (금) 14:31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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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군 태실(延齡君 胎室)
충남 예산군 대술면 궐곡리 태봉산 연령군 태실 터 전경
식별자 PC041
분류 왕자공주 태실
한글명 연령군 태실
한자명 延齡君 胎室
영문명 Placenta Chamber of prince Yonryeong
피안자 명칭 연령군(延齡君)
피안자 이칭 이훤(李昍)·인수(仁壽)·이헌(李憲)·자(字) 문숙(文叔)·효헌공(孝憲公)
피안자 부 숙종(肅宗)
피안자 모 명빈 박씨(䄙嬪 朴氏)
피안자 생년월일 1699.06.13
피안자 몰년월일 1719.10.02
안태 연월일 1699.09.29
안태지 기록 충청도 예산 궐동
안태지 좌표(위도) 36°69'07.91"N
안태지 좌표(경도) 126°89'67.49"E
안태지 주소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궐곡리 산54-2
문화재 지정여부 미지정
이안 연월일 1929 추정
이안지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서삼릉 내
이안지 좌표(위도) 37°39'52.9"N
이안지 좌표(경도) 126°51'38.0"E
지문 康熙三十三年,九月十三日,寅時,誕生王子阿只氏胎,康熙三十四年,正月二十八日,辰時藏
지문 찬자 조선 예조(禮曹)
지문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석물 연령군 태실비 및 태실 석재 유구 일부 충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태항아리 연령군 태지석 및 태항아리 일습
태항아리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내용[편집]

숙종과 명빈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인 연령군의 태실이다.

연령군은 1699년(숙종 25) 6월 13일 창경궁 집복헌(集福軒)에서 태어났다.

연령군의 생모 명빈 박씨는 숙종의 승은을 입고도 10여 년간 상궁으로만 있고 후궁으로 봉작되지 못하다가 연령군을 회임하고 1698년 11월 4일 종4품 숙원(淑媛)에 봉작되었다. 이틀 뒤인 11월 6일 노산대군(魯山大君)을 단종(端宗)으로 추존하였는데, 이를 기념하여 1699년 10월 23일 종2품 숙의(淑儀)로 승품(陞品) 되었으며, 1701년(숙종 27) 3월 23일 종1품 귀인(貴人)으로, 1702년(숙종 28) 10월 18일 정1품 빈(嬪)으로 승품되었다. 1703년(숙종 29) 7월 15일 명빈 박씨가 사망하였다.

같은 해 연령군은 5살의 나이로 봉군(封君)되었다. 예법에는 6세 이후 봉작하는 것이 관례이나 당시 생모인 명빈 박씨의 상을 주관하게 하기 위해 봉작한 것이다. 상중(喪中)에 봉작하는 것은 상복을 벗고 장복(章服)을 입어 의식을 행해야 하는데, 이는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여 반대 여론이 있었으나, 숙종은 받아들이지 않고 연령군의 봉작을 행햇다. 아울러 종친부(宗親府) 유사당상(有司堂上)이 되어 종친부의 일을 관리하게 하였다.

1707년(숙종 33) 2월 6일 저작(著作) 김동필(金東弼)의 딸과 가례를 올렸으며, 숙종은 연령군의 가례 때 백관에게 명하여 위요(衛繞)하도록 하였다. 연령군은 어린 나이에도 예를 행하는 모습에 부족함이 없었다고 한다.

1719년(숙종 45) 10월 2일 2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시호를 효헌(孝憲)이라 하였다. 1718년(숙종 44) 형인 연잉군(훗날의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가 죽자 연령군은 “형님이 참으로 슬플 것이지만 나보다는 낫다. 나는 우리 어머니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한다.”라고 하였고 자신이 죽으면 어머니 옆에 묻히고 싶다고 하였는데, 그 뜻대로 되었다.

연령군의 묘는 명빈 박씨 묘와 함께 경기도 금천현(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길동)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경성 토지구획 정리에 따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으로 옮겨졌다. 연령군의 신도비는 그대로 남아 있다가 1967년 공릉동 육군사관학교로 옮겨졌다.

《태봉등록》에는 연령군 태실 조성과 관련하여 대강의 기록이 있다. 연령군의 태실은 충청도 예산 동면 궐동으로 낙점하였다. 8월 26일 공사를 시작하고, 서울에서 태를 꺼내는 때는 9월 25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태를 안치하는 때는 9월 29일이었는데 이는 태지석에 기록된 때와 같다.

태실지에는 별다른 석물은 확인되지 않으나 태실이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인위적인 큰 구덩이가 남아있다. 인근 민가에는 연령군 태석함의 함신이 남아있으며, 태실비와 태석함의 덮개돌은 충남대학교로 옮겨져 야외 전시 중이다.

석함 덮개돌은 잘 다듬어진 둥근 형태로 네 부분이 돌출되어 있으며, 한 부분은 결락이 일어난 상태이다. 흥미로운 것은 태실비인데 이복형인 경종과 영조의 안태비와 형태가 닮아있어 비슷한 시기의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지식 관계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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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편집]

학술적 성격의 저작물[편집]

1.고문헌

  • 조선 예조, 『태봉등록(胎封謄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태봉(胎封)』, 1928,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2.단행본

  •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삼릉태실』,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 이규상 편, 『한국의 태실』, 청원문화원, 2005.
  • 심현용, 『한국 태실 연구』, 경인문화사, 2016.
  • 윤진영, 김호, 이귀영, 홍대한, 김문식 공저, 『조선왕실의 태실 의궤와 장태 문화』,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
  •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예산군 편, 『예산군 태실조사 용역』, 예당기획, 2016.

3.논문

  • 윤석인, 『조선왕실의 태실 변천 연구』,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

대중적 성격의 콘텐츠[편집]

주석[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