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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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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이자 제2대 이왕 영친왕의 태실이다. 영친왕은 태어난 직후 태실이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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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高宗)의 7남 영친왕(英親王)은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嚴氏)의 소생이다.<ref>『高宗實錄』 34년(1897) 10월 20일 양력, 詔曰 宮人嚴氏 今日亥時生男 護産等節 依例擧行.</ref>
  
태실은 창덕궁 후원의 능허정 인근에 마련되었다. 덕혜옹주를 비롯한 다른 형제들의 태실 역시 능허정 인근에 마련한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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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 태실은 1765년 영조의 전교<ref>『英祖實錄』 41년(1765) 5월 13일 정해, 仍敎曰 國初獻陵陵上四方石 大爲民弊 故聖祖親詣陵所 改以兩片石 國朝陵誌 古則以石 而予於丁丑以後 仰體列朝儉德 以磁代之 莫重之處猶然 況其次乎 藏胎之弊 予知熟矣 以古例爲難更也 今於舊闕 得藏胎石函 此中葉以後事也 前已封胎者 今無論 自今藏胎 必於御苑潔淨處 以陶缸埋之 以此載于.</ref>에 따라 1897년 10월 1일 창덕궁 후원의 능허정(凌虛亭) 남쪽 기슭 자좌(子座)에 조성되었다.<ref>국립문화재연구소, 『국역 호산청일기』, 만속원, 2007, 95쪽.</ref><ref>『王殿下胎誌石』, 1929, 明治三十年丁酉九月二十五日生 王殿下胎 明治三十年丁酉十月一日 藏于昌德宮秘苑 昭和四年月 日移藏.</ref>
  
이후 일제가 서삼릉으로 태실을 모을 때 함께 반출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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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규식(池圭植)의 『하재일기(荷齋日記)』에는 분원공소(分院貢所)에 영친왕 태실의 조성을 위한 태항아리(胎缸)을 주문한 기록이 등장하고 있어 대한제국기 안태의례용 물품 조달 방식의 한 단면을 확인할 수 있다.<ref>『荷齋日記』 丁酉(1897) 9월 7일 계사, 晴 自京廣橋 專人來書中 以爲楊廣州火粟踏驗次 訓令二度成送 且大內所用胎缸時急 燔造事緊託.</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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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이왕직은 전국의 태실을 서삼릉으로 이안하는 과정에서 영친왕 태실을 비롯한 창덕궁 후원 소재 태실의 도면을 작성했다. 현재 이 도면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태봉산도(胎封山圖)』라는 서명으로 소장되어 있으며 태실을 조성한 위치에 동그라미를 표시하였다. 그리고 각각 ‘정유태봉(丁酉胎封)’, ‘임자태봉(壬子胎封)’, ‘갑인태봉(甲寅胎封)’이라 표기해두었는데 이 가운데 정유태봉은 바로 영친왕의 태실이다.<ref>윤진영, 『조선왕실의 태봉도』,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68~72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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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영친왕 태실 초안지로 추정되는 장소는 인위적인 구덩이와 함께 배수로가 조성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인근에 창덕궁 관리소에서 사용하는 방공호가 태실의 산세를 깎아 주변 지형을 변형시켜 해당 초안지의 경관을 훼손시키고 있는 상황이라 표지판을 설치하는 등의 보존 대책이 필요하다.
  
 
=='''지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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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실 지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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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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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11일 (금) 22:34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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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 태실(英親王 胎室)
창덕궁 후원 내 정유 태봉의 영친왕 태실 터 전경
식별자 PC021
분류 왕자공주 태실
한글명 영친왕 태실
한자명 英親王 胎室
영문명 Placenta Chamber of Prince Imperial Yeong
피안자 명칭 영친왕(英親王)
피안자 이칭 이은(李垠)·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자(字) 광천(光天)·호(號) 명휘(明輝)
피안자 부 고종(高宗)
피안자 모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嚴氏)
피안자 생년월일 1897.09.25
피안자 몰년월일 1970.05.01
안태 연월일 1897.10.01 『영친왕 태지석』
안태지 기록 창덕궁 후원 경내 정유(丁酉) 태봉(胎峯) 『창덕궁 태봉도』
안태지 좌표(위도) 37°58'52.58"N
안태지 좌표(경도) 126°99'00.44"E
안태지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2-71
문화재 지정여부 미지정
이안 연월일 1929 추정
이안지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서삼릉 내
이안지 좌표(위도) 37°66'45.61"N,
이안지 좌표(경도) 126°86'06.29"E
지문 明治三十年丁酉,九月,二十五日生,王殿下胎,明治三十年丁酉,十月,一日,藏于昌德宮秘苑,昭和四年,月,日移藏
지문 찬자 이왕직 예식과(李王職 禮式課)
지문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태항아리 영친왕 태지석 및 태항아리 일습
태항아리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내용[편집]

고종(高宗)의 7남 영친왕(英親王)은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嚴氏)의 소생이다.[1]

영친왕 태실은 1765년 영조의 전교[2]에 따라 1897년 10월 1일 창덕궁 후원의 능허정(凌虛亭) 남쪽 기슭 자좌(子座)에 조성되었다.[3][4]

지규식(池圭植)의 『하재일기(荷齋日記)』에는 분원공소(分院貢所)에 영친왕 태실의 조성을 위한 태항아리(胎缸)을 주문한 기록이 등장하고 있어 대한제국기 안태의례용 물품 조달 방식의 한 단면을 확인할 수 있다.[5]

1929년 이왕직은 전국의 태실을 서삼릉으로 이안하는 과정에서 영친왕 태실을 비롯한 창덕궁 후원 소재 태실의 도면을 작성했다. 현재 이 도면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태봉산도(胎封山圖)』라는 서명으로 소장되어 있으며 태실을 조성한 위치에 동그라미를 표시하였다. 그리고 각각 ‘정유태봉(丁酉胎封)’, ‘임자태봉(壬子胎封)’, ‘갑인태봉(甲寅胎封)’이라 표기해두었는데 이 가운데 정유태봉은 바로 영친왕의 태실이다.[6]

현재 영친왕 태실 초안지로 추정되는 장소는 인위적인 구덩이와 함께 배수로가 조성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인근에 창덕궁 관리소에서 사용하는 방공호가 태실의 산세를 깎아 주변 지형을 변형시켜 해당 초안지의 경관을 훼손시키고 있는 상황이라 표지판을 설치하는 등의 보존 대책이 필요하다.

지식 관계망[편집]

태실 지식 관계망[편집]

계보도 지식관계망[편집]


시각자료[편집]

파노라마[편집]

스틸샷 갤러리[편집]

수치지형도[편집]

전자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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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편집]

학술적 성격의 저작물[편집]

1.고문헌

  •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태봉(胎封)』, 1928,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2.단행본

  •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삼릉태실』,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 심현용, 『한국 태실 연구』, 경인문화사, 2016.

3.논문

  • 윤석인, 『조선왕실의 태실 변천 연구』,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

대중적 성격의 콘텐츠[편집]

주석[편집]

  1. 『高宗實錄』 34년(1897) 10월 20일 양력, 詔曰 宮人嚴氏 今日亥時生男 護産等節 依例擧行.
  2. 『英祖實錄』 41년(1765) 5월 13일 정해, 仍敎曰 國初獻陵陵上四方石 大爲民弊 故聖祖親詣陵所 改以兩片石 國朝陵誌 古則以石 而予於丁丑以後 仰體列朝儉德 以磁代之 莫重之處猶然 況其次乎 藏胎之弊 予知熟矣 以古例爲難更也 今於舊闕 得藏胎石函 此中葉以後事也 前已封胎者 今無論 自今藏胎 必於御苑潔淨處 以陶缸埋之 以此載于.
  3. 국립문화재연구소, 『국역 호산청일기』, 만속원, 2007, 95쪽.
  4. 『王殿下胎誌石』, 1929, 明治三十年丁酉九月二十五日生 王殿下胎 明治三十年丁酉十月一日 藏于昌德宮秘苑 昭和四年月 日移藏.
  5. 『荷齋日記』 丁酉(1897) 9월 7일 계사, 晴 自京廣橋 專人來書中 以爲楊廣州火粟踏驗次 訓令二度成送 且大內所用胎缸時急 燔造事緊託.
  6. 윤진영, 『조선왕실의 태봉도』,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68~7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