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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예조, 『태봉등록(胎封謄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조선 예조, 『태봉등록(胎封謄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조선 예조, 『세종대왕단종대왕태실수개의궤(世宗大王端宗大王胎室修改儀軌)』,사천시청 소장.
 
*조선 예조, 『세종대왕단종대왕태실수개의궤(世宗大王端宗大王胎室修改儀軌)』,사천시청 소장.
*조선 예조, 『세종대왕단종대왕태실표석견립시의궤(世宗大王端宗大王胎室表石竪立時儀軌)』,사천시청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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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예조, 『세종대왕단종대왕태실표석수립시의궤(世宗大王端宗大王胎室表石竪立時儀軌)』,사천시청 소장.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태봉(胎封)』, 1928,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태봉(胎封)』, 1928,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2020년 8월 28일 (금) 11:46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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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대군 태실(仁城大君 胎室)
경남 사천시 곤명면 작은태봉산 인성대군 태실 터 전경
식별자 PC023
분류 왕자공주 태실
한글명 인성대군 태실
한자명 仁城大君 胎室
영문명 Placenta Chamber of Grand Prince Insung
피안자 명칭 인성대군(仁城大君)
피안자 이칭 이분(李糞)·효소공(孝昭公)
피안자 부 예종(睿宗)
피안자 모 장순왕후(章順王后) 한씨(韓氏)
피안자 생년월일 1461.12.31
피안자 몰년월일 1463.12.04
안태 연월일 1462.04.29
안태지 기록 경상도 곤양군(昆陽郡) 『세조실록』
안태지 좌표(위도) 35°13'39.7"N
안태지 좌표(경도) 127°89'87.3"E
안태지 주소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438 작은태봉산
문화재 지정여부 경상남도 기념물 재31호 단종태실지
이안 연월일 1929.05
이안지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서삼릉 내
이안지 좌표(위도) 37°66'45.61"N,
이안지 좌표(경도) 126°86'06.29"E
지문 皇明天順五年,十一月三十日,戌時生,王孫請冀者胎,天順六年,四月二十九日甲午,午時藏
지문 찬자 조선 예조(禮曹)
지문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석물 단종대왕태실비(端宗大王胎室碑)
유물1 가봉태실 개첨석 및 중동석 일부
유물2 전상석 일습 최연국 묘 봉분 기단석으로 사용중
태항아리 인성대군 태지석 및 태항아리 일습
태항아리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목차

내용[편집]

인성대군은 세조의 손자이자 예종의 장자이다.

세조의 공신 중 한 사람인 홍윤성이 안태사를 맡았다. 세조가 같은해 어태 및 왕세자‧원손 태실 모두 석난간을 설치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인성대군 태실을 조성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인성대군 태실은 조선후기 영조가 아버지 숙종의 유지를 이어 단종을 추존하면서 단종 태실로 오인하게 되고 이 때 태실이 가봉되는 것으로 보인다. 성주군청 문화관광과 관계자에 따르면 단종 태실은 본래 세종대왕자태실에 위치 했다가 후에 옮겨지는데 그 곳이 성주 법림산이라 한다. 왜 영조 때 인성대군 태실이 단종 태실로 오인되었는지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세종 태실이 근방에 위치하는 것이 오인의 한 이유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사천시 역시 현재 인성대군 태실을 단종 태실로 보고 안내판 등을 설치했다. 현재 단종 태실로 오인된 인성대군 태실은 경상남도 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되어 있다.

관련 기록[편집]

조선왕조실록[편집]

『세조실록』29권, 세조 8년(1462) 8월 17일 기묘(己卯) 1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화위당에서 주연을 베풀고 종친·재추·성균 생원들과 경서·병서를 강론하다》

임금이 화위당(華韡堂)에 나아가서 술자리를 베푸니, 내종친(內宗親) 및 판중추원사 김말(金末)·예조 판서 홍윤성(洪允成)·형조 판서 이극감(李克堪), 중추원 부사 어효첨(魚孝瞻)·송처관(宋處寬)·한계희(韓繼禧), 한성부 윤 황효원(黃孝源)과 승지 등이 입시(入侍)하였다.

겸 예문 성균 박사(兼藝文成均博士) 박시형(朴始亨)·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 김종직(金宗直)·예문 대교(藝文待敎) 허선(許譔)과 성균 생원(成均生員) 김종한(金從漢) 등 5사람에게 경서(經書)를 강(講)하게 하고, 술을 내려 주었다.

임금이 종친(宗親)·재추(宰樞)와 더불어 혹은 병서(兵書)를 논(論)하고 혹은 경사(經史)를 의논하기도 하였다.

홍윤성이 안태사(安胎使)로 경상도 성주(星州) 곤양(昆陽)을 향해 떠나려고 하였는데, 돌아올 적에 그 아비를 홍산(鴻山)에 가서 뵙기를 청하니, 충청도관찰사에게 명하여 홍윤성의 어미와 할아버지의 무덤에 치제(致祭)하고 그의 아버지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게 하였다.

御華韡堂, 設酌。

內宗親及判中樞院事金末、禮曹判書洪允成、刑曹判書李克堪、中樞院副使魚孝瞻ㆍ宋處寬ㆍ韓繼禧、漢成府尹黃孝源、承旨等入侍。

講兼藝文成均博士朴始亨、承文院博士金宗直、藝文(侍)〔待〕 敎許譔及成均生員金從漢等五人經書, 賜酒。

上與宗親、宰樞或論兵書, 或議經史, 允成將以安胎使發向慶尙道 星州、昆陽, 請於回還覲父于鴻山, 命忠淸道觀察使致祭于允成母墳、祖墳, 宴其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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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조실록』29권, 세조 8년(1462) 8월 17일 기묘(己卯) 1번째 기사


『세조실록』29권, 세조 8년(1462) 8월 22일 갑신(甲申) 2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예조에 어태(御胎)·왕세자·원손의 태실에 석난간을 설치하지 말도록 하다》

예조(禮曹)에 전지(傳旨)하기를,

"금후로는 어태(御胎) 및 왕세자(王世子)·원손(元孫)의 태실(胎室)은 모두 석난간(石欄干)을 설치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傳旨禮曹曰 :

"今後御胎及王世子、元孫胎室, 竝勿設石欄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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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조실록』29권, 세조 8년(1462) 8월 22일 갑신(甲申) 2번째 기사



『영조실록』30권, 영조 7년(1731) 12월 15일 갑진(甲辰) 2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대신·비국 당상을 소견하여 삼남을 진제할 대책을 강구하다》

임금이 정섭(靜攝)한 나머지 빈연(賓筵)을 오랫동안 비워 두었었는데,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소견(召見)하여 삼남(三南)을 진제(賑濟)할 대책을 강구하였다. 예조 판서 신사철(申思喆)이 말하기를,

"세종 대왕·단종 대왕·예종 대왕·현종 대왕의 태실(胎室) 석물(石物)을 마땅히 명년 봄에 수개(修改)하여야 하는데, 마침 흉년이 든 시기를 만났으니, 청컨대 명년 가을을 기다리게 하소서. 식년(式年)의 대소과(大小科)도 또한 마땅히 명년 가을로 물려서 행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上以靜攝之餘, 賓筵久曠, 召見大臣、 備堂, 講究三南賑濟之策。 禮曺判書申思喆曰: "世宗大王、端宗大王、睿宗大王、顯宗大王胎室石物, 當於明春修改, 而適値時詘, 請待明秋。 式年大小科, 亦當退行於明秋也。" 上竝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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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조실록』30권, 영조 7년(1731) 12월 15일 갑진(甲辰) 2번째 기사



『영조실록』38권, 영조 10년(1734) 7월 11일 갑신(甲申) 2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관원을 보내서 세종·단종·예종·현종의 태봉에 비를 세우는 역사를 감독하게 하다》

세종 대왕(世宗大王)·단종 대왕(端宗大王)의 태봉(胎峰)은 경상도 곤양군(昆陽郡)에 있고, 예종 대왕(睿宗大王)의 태봉은 전라도 전주부(全州府)에 있고, 현종 대왕(顯宗大王)의 태봉은 충청도 대흥군(大興郡)에 있는데, 장차 비(碑)를 세우려 함에 있어서 표석(標石)이 이지러져서 고쳐야 되므로, 예조 당상(禮曹堂上)과 선공감역(繕工監役) 각 1원(員)을 보내서 그 일을 감독하게 할 것을 명하였으니, 선조(先祖) 신묘년의 전례를 적용한 것이었다.

世宗、端宗大王胎峰, 在慶尙道 昆陽郡, 睿宗大王胎峰, 在全羅道 全州府, 顯宗大王胎峰, 在忠淸道 大興郡, 將竪碑以標石缺當改, 命遣禮曹堂上、繕工監役各一員, 蕫其事, 用先朝辛卯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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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조실록』38권, 영조 10년(1734) 7월 11일 갑신(甲申) 2번째 기사



『정조실록』18권, 정조 8년(1784) 9월 15일 정묘(丁卯) 1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예조에서 열성조의 태봉을 써서 바치다》

예조에서 열성조(列聖朝)의 태봉(胎峰)을 써서 바쳤다.

태조 대왕(太祖大王)의 태봉(胎封)은 진산(珍山) 만인산(萬仞山)에, 정종 대왕(定宗大王)의 태봉은 금산(金山) 직지사(直持寺) 뒤에, 태종 대왕(太宗大王)의 태봉은 성산(星山) 조곡산(祖谷山)에, 세종 대왕(世宗大王)의 태봉은 곤양(昆陽) 소곡산(所谷山)에, 문종 대왕(文宗大王)의 태봉은 풍기(豊基) 명봉사(鳴鳳寺) 뒤에, 단종 대왕(端宗大王)의 태봉은 곤양(昆陽) 소곡산(所谷山)에, 세조 대왕(世祖大王)의 태봉은 성주(星州) 선석사(禪石寺) 뒤에, 예종 대왕(睿宗大王)의 태봉은 전주(全州) 태실산(胎室山)에, 성종 대왕(成宗大王)의 태봉은 광주(廣州) 경안역(慶安驛) 뒤에, 중종 대왕(中宗大王)의 태봉은 가평(加平) 서면(西面)에, 인종 대왕(仁宗大王)의 태봉은 영천(永川) 공산(公山)에, 명종 대왕(明宗大王)의 태봉은 서산(瑞山) 동면(東面)에, 선조 대왕(宣祖大王)의 태봉은 임천(林川) 서면(西面)에 있었다.

현종 대왕(顯宗大王)의 태봉은 대흥(大興) 원동면(遠東面)에 있는데, 신유년 10월에 돌 난간을 배설(排設)한 뒤에 대흥현(大興縣)을 승호(陞號)하여 군수(郡守)를 두었다. 숙종 대왕(肅宗大王)의 태봉은 공주(公州) 남면(南面) 오곡(吳谷) 무수산(無愁山) 동구(洞口)에, 경종 대왕(景宗大王)의 태봉은 충주(忠州) 엄정립비(嚴政立碑)의 북쪽 이삼리 쯤에, 영종 대왕(英宗大王)의 태봉은 청주(淸州) 산내(山內) 일동면(一東面) 무쌍리(無雙里)에 있었다.

禮曹書進列聖朝胎(峰)〔封〕 。 太祖大王胎封珍山 萬仞山, 定宗大王胎封金山 直持寺後, 太宗大王胎封星山 祖谷山, 世宗大王胎封昆陽 所公山, 文宗大王胎封豐基 鳴鳳寺後, 端宗大王胎封昆陽 所谷山, 世祖大王胎封星州 禪石寺後, 睿宗大王胎封全州 胎室山, 成宗大王胎封廣州 慶安驛後, 中宗大王胎封加平西面。 仁宗大王胎封永川 公山, 明宗大王胎封瑞山東面, 宣祖大王胎封林川西面。 顯宗大王胎封大興遠東面, 辛酉年十月, 石欄干排設後, 大興縣陞號爲郡守。 肅宗大王胎封公州南面吳谷 無愁山洞口, 景宗大王胎封忠州嚴政立碑北數里許, 英宗大王胎封淸州山內一東面 無雙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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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18권, 정조 8년(1784) 9월 15일 정묘(丁卯) 1번째 기사



『순종실록부록』2권, 순종 4년(1911) 10월 13일 양력 2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가토 헤이지를 파견하여 경상 남북도에 있는 태실 묻은 산의 토지 경계를 정할 때 입회하게 하다》

이왕직 속(李王職屬) 가토 헤이지〔加藤兵次〕를 파견하여 경상남도(慶尙南道)와 경상북도(慶尙北道) 각군(各郡)에 있는 【곤양(昆陽), 금산(金山), 성주(星州), 순흥(順興), 풍기(豐基), 영천(永川)의 6개 군이다.】 태실(胎室)을 묻은 산의 토지 경계를 정할 때 입회하게 하였다.

派遣本職屬加藤兵次, 慶尙南北道各郡 【昆陽、金山、星州、順興、豐基、永川六郡】 所在胎峯山土地定界時, 使之立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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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종실록부록』2권, 순종 4년(1911) 10월 13일 양력 2번째 기사



『순종실록부록』3권, 순종 5년(1912) 4월 1일 양력 1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단종과 현종의 태실을 묻은 산 이외의 경계를 결정하는 일에 농상공부 장관의 통지를 받다》

단종 대왕(端宗大王)의 태실(胎室)을 묻은 산 이외 1개소(箇所), 현종 대왕(顯宗大王)의 태실을 묻은 산 이외 5개소의 경계를 결정하는 일에 관한 농상공부 장관(農商工部長官)의 통첩(通牒)을 받았다.

端宗大王胎峯外一箇所、顯宗大王胎峯外五箇所境界決定事, 接農商工部長官通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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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종실록부록』3권, 순종 5년(1912) 4월 1일 양력 1번째 기사


승정원일기[편집]

『승정원일기』 717책 (탈초본 39책) 영조 7년(1731) 1월 22일 병술(丙戌) 22/23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領敦寧魚有龜疏曰, 伏以臣伏見禮曹啓目, 則慶尙道昆陽地, 世宗大王·端宗大王胎室, 石物修改吉日, 擇定於來二月十三日及十九日, 而禮曹堂上·繕工提調, 將於今晦前, 及期發行矣。臣待罪該監提擧, 職事所管, 當爲進去, 而身帶將任, 不敢循例辭陛, 在前冬, 有急時陵寢奉審, 而以臣之故, 致令工曹堂上替行, 前例雖或如此, 事體未免苟簡。且臣之衰昏, 日甚月增, 軍門重務, 轉就曠廢, 其在朝體, 尤宜先加變通。伏乞聖明, 量察事役之緊重, 許遞臣所帶將任, 俾以該監職掌, 依例進去, 以效臣子往役之義, 不勝幸甚。臣無任屛營祈懇之至, 謹昧死以聞。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717책 (탈초본 39책) 영조 7년(1731) 1월 22일 병술(丙戌) 22/23 기사



『승정원일기』 720책 (탈초본 39책) 영조 7년(1731) 4월 5일 정유(丁酉) 29/29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端宗大王胎室, 自上峯至峯底, 爲四十餘步, 犯民田處四面各二百五十餘步, 民田斗數十七石九斗零落只, 人家撤毁, 亦三四處矣。民田若欲仍存, 則違式, 不欲仍存, 則當給其代, 而給其代亦難矣。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720책 (탈초본 39책) 영조 7년(1731) 4월 5일 정유(丁酉) 29/29 기사



『승정원일기』 723책 (탈초본 39책) 영조 7년(1731) 5월 23일 을유(乙酉) 30/30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世宗大王胎室步數廣, 而端宗大王胎峯步數至近, 三面皆民畓矣。胎峯之無火巢, 而以民田入案者, 殊涉怪異, 而本官及監營戶曹, 俱無可考文書。若欲定其步數, 割其田土, 則居民不無稱冤之端, 而景象慘然矣。此意下詢大臣而處之, 何如?

上曰, 元無定步數之事, 故百姓似當耕之食之, 詳考古例後處之宜矣。

錫五曰, 古例無詳考處矣。致中曰, 觀象監及禮曹, 無胎峯謄錄矣。蓋近來則儀文甚備, 而古則不然矣。

上曰, 諸道所在胎峯步數, 尺量以來事, 曾有下敎矣。

思喆曰, 多有上來者矣。

致中曰, 胎峯例於田畓無處有之, 故火巢廣矣, 民田有處, 則自然步數狹矣。端宗胎室, 以其峯低, 故步數之狹, 至於如此, 事體殊甚未安, 詳考古例, 斟酌爲之, 何如?

文命曰, 仍舊, 何如?

上曰, 觀其步數尺量之上來, 稟于次對時,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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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23책 (탈초본 39책) 영조 7년(1731) 5월 23일 을유(乙酉) 30/30 기사



『승정원일기』 727책 (탈초본 40책) 영조 7년(1731) 7월 28일 기축(己丑) 34/35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思喆曰, 今春昆陽地世宗大王·端宗大王胎峯石物修改時, 因本道監司狀啓, 兩胎室皆無標石, 待今秋豎立事啓下, 所當趁今擇日擧行, 而頃日全州睿宗大王胎峯石物及大興顯宗大王胎峯石物有頉處修改, 竝待明春擧行事, 定奪矣。今此昆陽兩胎峯碑石豎立之役, 亦爲待明春擧行, 何如?

上曰, 依爲之。 出擧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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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27책 (탈초본 40책) 영조 7년(1731) 7월 28일 기축(己丑) 34/35 기사



『승정원일기』 747책 (탈초본 41책) 영조 8년(1732) 7월 5일 기축(己丑) 36/36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成明曰, 昨年昆陽端宗大王胎室, 全州睿宗大王胎室, 大興顯宗大王胎室, 石物修改, 以待明春擧行事, 定奪矣。今春則勢難爲之, 故將爲待秋擧行, 而湖中年事若失稔, 則何以爲之?

文命曰, 如此莫重之事, 不可以年事停止, 從當更爲稟定矣。

上曰, 依爲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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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47책 (탈초본 41책) 영조 8년(1732) 7월 5일 기축(己丑) 36/36 기사


『승정원일기』 748책 (탈초본 41책) 영조 8년(1732) 8월 5일 기미(己未) 31/31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宋成明曰, 昆陽地世宗大王·端宗大王胎封及全州地睿宗大王胎封及大興地顯宗大王胎封, 碑石之役, 頃以更觀年事進退之意, 仰達矣。今年兩南之凶, 又如是孔慘, 似難擧行, 何以爲之乎?

命均曰, 事體雖重大, 聞昆陽等地, 被災尤慘云, 旣已停退, 姑爲待豐擧行, 亦好矣。

上曰, 事體重大, 何可待豐乎? 待明秋擧行, 可也。出擧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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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48책 (탈초본 41책) 영조 8년(1732) 8월 5일 기미(己未) 31/31 기사



『승정원일기』 762책 (탈초본 42책) 영조 9년(1733) 7월 15일 갑오(甲午) 28/28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思喆曰, 上年秋, 因禮官所達昆陽地世宗大王·端宗大王胎封碑石, 及全州地睿宗大王胎封, 大興地顯宗大王胎封石物, 有頉處修改之役, 因三南年事之凶歉, 待今秋擧行事, 定奪矣。連歲荐飢之餘, 今年穡事之豐歉, 姑不可知, 而累次請退, 事體未安, 何以爲之?

上曰, 大臣之意, 如何?

命均曰, 胎封事體, 非不重大, 而今年年事, 雖或稍登, 荐歉之餘, 公私物力俱殫, 此時動役, 似涉重難矣。興慶曰, 石物有頉處, 果若難支一時, 則其勢宜不可他顧, 而如不至此, 則姑觀前頭, 徐徐擧行, 似好矣。

上曰, 待明年更稟, 可也。出擧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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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62책 (탈초본 42책) 영조 9년(1733) 7월 15일 갑오(甲午) 28/28 기사



『승정원일기』 777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4월 10일 을묘(乙卯) 24/24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淳曰, 小臣欲有所仰達矣。世宗·端宗兩朝胎封, 在於昆陽, 睿宗朝胎封, 在於全州, 顯宗朝胎封, 在於大興, 而昆陽則初無表石, 全州及大興兩所, 則所舖裳石動退, 其中兩石折傷。自辛亥年, 有修改之命, 而連値凶荒, 未卽擧行, 上年又爲稟達, 有待明年擧行之敎, 何以爲之? 惶恐敢達矣。

上曰, 表石則雖待年豎立, 亦或無妨, 而全州·大興兩所, 則似甚大段, 不可不急速修改也。宗城曰, 使道臣奉審以報, 何如?

上曰, 每於此等事, 人情不能無少忽, 而以至於此矣。近來禮曹堂上, 未有行公者, 遷延至此, 事在緊急, 則豈計農節耶? 若以妨農爲慮, 則雖役以僧軍, 不可已也。且此與改封築, 異矣。

游曰, 胎封必於尖峯上占地, 故裳石, 每易於流移矣。至於缺傷處, 尤難於待秋遲緩矣。

上曰, 分付道臣, 使卽奉審馳啓, 而若其最爲緊急, 則卽爲定行, 如不至大悶急, 則事體雖甚未安, 姑爲待秋, 而擇日則趁今預爲之, 可也。

淳曰, 昆陽表石, 亦已浮置。以役事言之, 不過豎立而已, 似不大段矣。

上曰, 大興·全州畢役之後, 仍爲始役於昆陽, 可也。 抄出擧行條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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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77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4월 10일 을묘(乙卯) 24/24 기사



『승정원일기』 779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5월 12일 정해(丁亥) 16/28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鄭必寧, 以禮曹言啓曰, 昆陽地, 世宗大王·端宗大王胎峯, 初無表石, 全州地睿宗大王胎峯, 裳石擧皆動退, 而二立折爲兩段, 表石有大段欲折之橫紋七處。大興地, 顯宗大王胎峯表石, 字畫缺落, 罅隙處又至五處, 而亦大段, 裳石擧皆退隙, 其中二立, 又爲缺傷等處, 分付本道道臣, 使卽奉審馳啓, 而若其最爲悶急, 則卽爲定行, 如不至悶急則事勢雖甚未安, 姑爲待秋而擇日, 則趁今預爲之, 可也事, 頃因傳敎, 分付三道矣。卽見慶尙監司金始炯, 全羅監司趙顯命, 忠淸監司李壽沆狀啓, 則昆陽兩胎峯表石豎立, 則姑觀年事登場, 擧行爲請, 而全州胎峯表石·裳石有頉外, 又有川防之役, 大興胎峯表石·裳石, 竝待秋改鋪改立之意, 狀聞矣。三處胎峯, 表石及裳石修改之役, 不可不趁今秋擧行, 依前例令該監, 擇日修改, 本曹堂上郞廳及觀象監·繕工監提調, 趁期下去, 與本道監司, 會同改排, 而容入石物, 令本道預爲浮取事, 分付三道監司處, 何如?

傳曰, 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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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79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5월 12일 정해(丁亥) 16/28 기사



『승정원일기』 783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7월 11일 갑신(甲申) 25/26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都提調金興慶所啓, 昆陽地世宗大王·端宗大王胎峯, 將立表石, 全州地睿宗大王胎峯表石, 有欲折之橫紋, 大興地顯宗大王胎峯表石, 字劃缺落, 罅隙又有五處, 而全州·大興胎室裳石, 擧皆有頉, 故今方自本道修治, 而禮曹堂郞·觀象監·繕工監提調臨時下去董役事, 頃因禮曹草記定奪矣。蓋曾前則胎室碑石磨治, 及石物修改時, 或觀象監官員, 與本道, 眼同修改, 或禮曹郞廳, 及監役官, 進去矣。己巳年珍山胎室碑石修改時, 有禮曹堂郞, 兩監提調進去之事, 故辛卯年林川胎室碑石修改時, 以兩監提調進去事, 定奪矣。故相臣徐宗泰, 以依舊例, 禮郞及監役官進去之意稟達, 則先朝以兩監提調之竝往, 似太重, 只送禮郞與監役, 又似太輕, 禮曹堂上及監役官下送爲敎矣。其後庚戌年昆陽胎室修改時, 引己巳年例, 禮堂及兩監提調進去之故, 今番禮曹, 以此例定奪, 而第胎室, 事體不如陵寢。頃者莊陵碑石豎立時, 只令禮曹堂上監董, 則今此昆陽·全州·大興等地, 依辛卯定奪, 禮曹堂上及監役官進去, 未知何如。

上曰, 已有先朝定奪, 依定式擧行, 可也。出擧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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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83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7월 11일 갑신(甲申) 25/26 기사



『승정원일기』 783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7월 16일 기축(己丑) 16/20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又以禮曹言啓曰, 昆陽地, 世宗大王·端宗大王兩胎室, 初無表石, 今始新建, 全州地睿宗大王胎室, 大興地顯宗大王胎室表石, 傷破, 竝爲重建事, 擇日啓下矣。取考謄錄, 則大王胎室石物加封時, 表石前面, 臨御時則書之以主上殿下胎室, 先王胎室則書之以廟號, 而辛卯年瑞山明宗大王胎室表石重建時, 因禮官陳達, 表石後面所書皇明年號, 到今, 改書以彼國年號未安, 雖改新石, 而所書則依當初書之, 年月之下, 註之以後幾年干支月日改石, 以此刻矣。今此昆陽兩胎室表石書標時, 前面書廟號, 後面似當以崇禎紀元後幾年干支月日建。全州胎室表石後面, 則仍存當初所刻中朝年號, 而年月之下, 註之以後幾年改石。如瑞山胎室之例, 恐爲得宜。大興胎室表石, 旣以康熙二十年書刻, 則今於改建, 亦當以卽今年號註刻矣。胎室表石書標式, 別單書入, 以此擧行,

何如? 傳曰, 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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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83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7월 16일 기축(己丑) 16/20 기사



『승정원일기』 783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7월 16일 기축(己丑) 20/20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上曰, 世宗·端宗胎室表石, 古有之乎?

興慶曰, 古有之。前面, 書廟號, 世宗胎室表石, 書崇禎紀元後, 睿宗胎室表石, 書萬曆六年矣。

上曰, 誰寫之乎?

尙賓曰, 承文參下寫之矣。

上曰, 草記, 書允字以下,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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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83책 (탈초본 43책) 영조 10년(1734) 7월 16일 기축(己丑) 20/20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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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편집]

학술적 성격의 저작물[편집]

1.고문헌

  • 조선 예조, 『태봉등록(胎封謄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조선 예조, 『세종대왕단종대왕태실수개의궤(世宗大王端宗大王胎室修改儀軌)』,사천시청 소장.
  • 조선 예조, 『세종대왕단종대왕태실표석수립시의궤(世宗大王端宗大王胎室表石竪立時儀軌)』,사천시청 소장.
  •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태봉(胎封)』, 1928,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2.단행본

  •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삼릉태실』,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 심현용, 『한국 태실 연구』, 경인문화사, 2016.
  • 이규상, 『한국의 태실』, 청원문화원, 2005.
  • 윤진영, 김호, 이귀영, 홍대한, 김문식 공저, 『조선왕실의 태실 의궤와 장태 문화』,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
  •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조선의 태실』, 전주이씨대동종약원, 1999.
  • 이은석 편역, 『세종대왕 단종대왕 태실의궤』, 사천문화원, 2001.

3.논문

  • 윤석인, 『조선왕실의 태실 변천 연구』,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
  • 신라오악종합학술조사단, 「세종·단종대왕의 태실조사」, 『고고미술』85호, 8권, 8호, 1967.

대중적 성격의 콘텐츠[편집]

주석[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