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빈 성씨 묘"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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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호조가 아뢰기를, “대빈궁(大嬪宮)ㆍ연호궁(延祜宮)ㆍ선희궁(宣禧宮)ㆍ의빈(宜嬪) 사우(祠宇)의 정초(定礎)는 4월 9일, 입주(立柱)는 같은 달 13일, 상량(上樑)은 14일 묘시, 화빈(和嬪) 사우의 정초는 4월 9일, 입주는 같은 달 13일, 상량은 17일 자시가 특별히 길하다고 합니다. 모두 이 일시(日時)로 정하여 행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Blockquote|호조가 아뢰기를, “대빈궁(大嬪宮)ㆍ연호궁(延祜宮)ㆍ선희궁(宣禧宮)ㆍ의빈(宜嬪) 사우(祠宇)의 정초(定礎)는 4월 9일, 입주(立柱)는 같은 달 13일, 상량(上樑)은 14일 묘시, 화빈(和嬪) 사우의 정초는 4월 9일, 입주는 같은 달 13일, 상량은 17일 자시가 특별히 길하다고 합니다. 모두 이 일시(日時)로 정하여 행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戶曹啓曰, 大嬪宮·延祜宮·宣禧宮·宜嬪祠宇定礎, 四月初九日, 立柱, 同月十三日, 上樑, 十四日卯時, 和嬪祠宇定礎, 四月初九日, 立柱, 同月十三日, 上樑, 十七日子時爲吉云。 竝以此日時, 定行之意, 敢啓。 傳曰, 知道。|출처=『승정원일기』2748책(탈초본 129책), 고종 7년(1870) 2월 26일 임술(壬戌) 4/7 기사}}
 
戶曹啓曰, 大嬪宮·延祜宮·宣禧宮·宜嬪祠宇定礎, 四月初九日, 立柱, 同月十三日, 上樑, 十四日卯時, 和嬪祠宇定礎, 四月初九日, 立柱, 同月十三日, 上樑, 十七日子時爲吉云。 竝以此日時, 定行之意, 敢啓。 傳曰, 知道。|출처=『승정원일기』2748책(탈초본 129책), 고종 7년(1870) 2월 26일 임술(壬戌) 4/7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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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2751책(탈초본 129책), 고종 7년(1870) 5월 20일 을유(乙酉) 10/11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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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이어 적도록 명하고 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에 내시를 보내어 봉심하게 하고, 의빈묘(宜嬪廟)에 내시를 보내어 간심하게 하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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仍命書傳敎曰, 禧嬪廟, 遣內侍奉審, 宜嬪廟, 遣內侍看審。|출처=『승정원일기』2751책(탈초본 129책), 고종 7년(1870) 5월 20일 을유(乙酉) 10/11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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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2756책(탈초본 129책), 고종 7년(1870) 10월 7일 기해(己亥) 7/31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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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전교하기를, “의빈묘(宜嬪墓)에 내시를 보내어 간심하고 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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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曰, 宜嬪墓, 遣內侍, 看審以來。|출처=『승정원일기』2756책(탈초본 129책), 고종 7년(1870) 10월 7일 기해(己亥) 7/31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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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2756책(탈초본 129책), 고종 7년(1870) 10월 7일 기해(己亥) 32/31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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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이어, 쓰라고 명하고 전교하기를, “의빈묘(宜嬪墓), 흥인군 부인(興寅君夫人)묘, 영온옹주(永溫翁主)묘, 박 숙의(朴淑儀)묘, 화빈묘(和嬪墓)에 내시를 보내 간심하고 오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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仍命書傳敎曰, 宜嬪墓·興寅君夫人墓·永溫翁主·朴淑儀墓·和嬪墓, 遣內侍, 看審以來。|출처=『승정원일기』2756책(탈초본 129책), 고종 7년(1870) 10월 7일 기해(己亥) 32/31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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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2761책(탈초본 129책), 고종 8년(1871) 2월 30일 경인(庚寅) 8/22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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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전교하기를, “의빈(宜嬪)의 사우(祠宇)에 내시를 보내어 살펴보고 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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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曰, 宜嬪祠宇, 遣內侍看審以來。|출처=『승정원일기』2761책(탈초본 129책), 고종 8년(1871) 2월 30일 경인(庚寅) 8/22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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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2761책(탈초본 129책), 고종 8년(1871) 2월 30일 경인(庚寅) 21/22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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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전교하기를, “의빈의 사우에 내시를 보내어 살펴보고 오라.” 하였다. - 전교를 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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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曰, 宜嬪祠宇, 遣內侍看審以來。 出傳敎|출처=『승정원일기』2761책(탈초본 129책), 고종 8년(1871) 2월 30일 경인(庚寅) 21/22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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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2775책(탈초본 130책), 고종 9년(1872) 4월 2일 을묘(乙卯) 8/19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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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전교하기를, “의빈(宜嬪)의 사우(祠宇)에 중관을 보내 간심하여 오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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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曰, 宜嬪祠宇, 遣內侍看審以來。|출처=『승정원일기』2775책(탈초본 130책), 고종 9년(1872) 4월 2일 을묘(乙卯) 8/19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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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2775책(탈초본 130책), 고종 9년(1872) 4월 2일 을묘(乙卯) 18/19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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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전교하기를, “의빈묘(宜嬪廟)에 내시를 보내어 간심하여 오도록 하라.” 하였다. - 전교를 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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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曰, 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 出傳敎|출처=『승정원일기』2775책(탈초본 130책), 고종 9년(1872) 4월 2일 을묘(乙卯) 18/19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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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2786책(탈초본 130책), 고종 10년(1873) 3월 22일 경자(庚子) 12/12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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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전교하기를, “희빈묘와 의빈묘를 내시가 봉심하고 오라.” 하였다. - 전교를 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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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曰, 禧賓廟·宜嬪廟, 遣內侍, 看審以來。 出傳敎|출처=『승정원일기』2786책(탈초본 130책), 고종 10년(1873) 3월 22일 경자(庚子) 12/12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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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2799책(탈초본 130책), 고종 11년(1874) 3월 5일 정미(丁未) 36/38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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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상이 이르기를, “무과(武科)에서 삭천(削薦)된 사람들 가운데 육상궁(毓祥宮)과 선희궁(宣禧宮)의 본가 사람으로서 삭천된 자들은 모두 천망을 복구하는 것이 좋겠다.”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이는 진실로 응당 행해야 할 일입니다. 연석에 오른 장신에게 분부하여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장신은 이를 거행하라.” 하니, 이경하가 아뢰기를, “삼가 하교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최성(崔姓)도 이미 장수의 직임을 맡고 있고 이성(李姓)도 또한 평안 병사가 된 사람이 있으니, 그 후예로서 선천(宣薦)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과연 매우 억울한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대에서 공을 세운 사람은 비록 상민이나 천민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차례에 구애받지 않고 발탁하여 등용할 수 있는데, 하물며 양궁(兩宮)의 사친(私親) 본가 사람에 있어서이겠는가. 의빈 성씨(宜嬪成氏)의 가문도 또한 삭천 가운데 들어 있었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성씨 가문도 또한 마찬가지로 천망을 복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마찬가지로 거행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경하가 아뢰기를, “삼가 마찬가지로 천망을 복구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응당 천망을 복구해야 하는 자가 몇 사람이나 되는가?” 하니, 이경하가 아뢰기를,“합하여 200여 명인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모두 복구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세 성씨는 모두 천망을 복구하고, 그 나머지는 합당한 사람이 있을 때마다 시행하는 것이 좋겠다.”하니, 이경하가 아뢰기를, “삼가 하교대로 하겠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는 문관 괴원(槐院)의 선발과 서로 같다. 그러므로 문무(文武)에 각각 삼천(三薦)이 있는 것이다.”하니, 이유원이 그렇다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약 천망을 복구하면 삼군부에서 단자로 입계해야 하는가?”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천망을 복구하는 것은 선전관청에서 하고, 단자는 삼군부에서 계하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는 연전의 새로운 정식이다. 서북인(西北人)으로서 삭천된 자는 관안(官案)에 있을 듯하다.”하니, 이유원이 그렇다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문신의 분관(分館)에도 또한 선택하는 일이 있다.”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그전에는 분관한 뒤에 대신(大臣)이 선택하여 과연 올리고 내리는 거조가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괴원에서 혹 국자감으로 내려가고, 국자감에서 혹 운각으로 내려가는 것은 그 가운데에 매양 공론에 흡족하지 못한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니, 박규수가 아뢰기를, “매번 이 때문에 소란스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먼 지방의 사람에 대해서는 그의 문벌을 상세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정말 그렇습니다. 서울의 사부(士夫) 집에 대해서야 어찌 이런 소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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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曰, 武科削薦中, 毓祥宮·宣禧宮, 本家人之削薦者, 竝復薦, 好矣。 裕元曰, 此誠當行之事, 分付登筵將臣, 使之擧行, 恐好矣。 上曰, 將臣, 以此擧行也。 景夏曰, 謹當依下敎擧行矣。 崔姓旣爲將任, 李姓亦有爲平安兵使者, 其俊裔之不得爲宣薦, 果甚抑鬱矣。 上曰, 軍功人, 雖常賤, 尙得不次擢用, 況兩宮私親之本家人乎? 宜嬪成氏家, 亦入削薦中矣。 裕元曰, 成氏家, 亦可一體復薦矣。 上曰, 一體擧行, 可也。 景夏曰, 謹當一體復薦矣。 上曰, 可合復薦者, 合爲幾人乎? 景夏曰, 合爲二百餘人, 而有難一朝遽然竝復矣。 上曰, 三姓則盡爲復薦, 其餘則隨其可合人, 施之, 可也。 景夏曰, 謹依下敎矣。 上曰, 此與文官槐選, 相同, 故文武各有三薦矣。 裕元曰, 然矣。 上曰, 若復薦則當自三軍府, 單子入啓乎? 裕元曰, 復薦, 自宣傳官廳爲之, 而單子, 自三軍府啓下矣。 上曰, 此是年前新定式也。 西北人削薦者, 似在官案矣。 裕元曰, 然矣。 上曰, 文臣分館, 亦有揀擇之事矣。 裕元曰, 其前分館後, 大臣揀擇, 果有陞降之擧矣。 上曰, 槐或降國, 國或降芸者, 其中每有不協公論故也。 珪壽曰, 每以此紛紜矣。上曰, 遠方人則其地閥, 未可詳知故也。 裕元曰, 誠然矣。 京華士夫家, 豈有此紛紜乎?|출처=『승정원일기』2799책(탈초본 130책), 고종 11년(1874) 3월 5일 정미(丁未) 36/38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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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2799책(탈초본 130책), 고종 11년(1874) 3월 7일 기유(己酉) 27/27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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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賓廟)에는 내시를 보내 간심(看審)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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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출처=『승정원일기』2799책(탈초본 130책), 고종 11년(1874) 3월 7일 기유(己酉) 27/27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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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2811책(탈초본 131책), 고종 12년(1875) 3월 29일 병인(丙寅) 27/27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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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전교하기를, “대빈묘(大嬪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내시를 보내어 살펴보고 오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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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命書傳敎曰, 大嬪廟·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출처=『승정원일기』2811책(탈초본 131책), 고종 12년(1875) 3월 29일 병인(丙寅) 27/27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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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2824책(탈초본 131책), 고종 13년(1876) 4월 12일 계유(癸酉) 16/16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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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전교하기를, “희빈묘, 의빈묘에 내시를 보내 살펴보고 오게 하라.”하였다. - 전교를 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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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 看審以來。 出傳敎|출처=『승정원일기』2824책(탈초본 131책), 고종 13년(1876) 4월 12일 계유(癸酉) 16/16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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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2828책(탈초본 131책), 고종 13년(1876) 7월 18일 병자(丙子) 14/14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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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쓰라 명하고 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賓廟)에 내시를 보내서 살펴보고 오도록 하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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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書傳敎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출처=『승정원일기』2828책(탈초본 131책), 고종 13년(1876) 7월 18일 병자(丙子) 14/14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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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2836책(탈초본 131책), 고종 14년(1877) 3월 9일 을축(乙丑) 19/22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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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이어 봉심을 한 뒤에 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내시를 파견하여 간심하고 오게 하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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仍爲奉審後, 傳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출처=『승정원일기』2836책(탈초본 131책), 고종 14년(1877) 3월 9일 을축(乙丑) 19/22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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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2846책(탈초본 132책), 고종 15년(1878) 1월 29일 기묘(己卯) 9/9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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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내시를 보내 간심하고 오게 하라.” 하였다. - 전교를 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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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 出傳敎|출처=『승정원일기』2846책(탈초본 132책), 고종 15년(1878) 1월 29일 기묘(己卯) 9/9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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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2855책(탈초본 132책), 고종 15년(1878) 10월 15일 신묘(辛卯) 12/22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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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내시를 보내어 살펴보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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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출처=『승정원일기』2855책(탈초본 132책), 고종 15년(1878) 10월 15일 신묘(辛卯) 12/22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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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2855책(탈초본 132책), 고종 15년(1878) 10월 15일 신묘(辛卯) 22/22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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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내시를 보내어 살펴보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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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출처=『승정원일기』2855책(탈초본 132책), 고종 15년(1878) 10월 15일 신묘(辛卯) 22/22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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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2879책(탈초본 133책), 고종 17년(1880) 9월 6일 경오[신미] 20/20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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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 의빈묘(宜嬪廟)를 내시를 보내 간심하여 오도록 하라.” 하였다. - 전교를 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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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曰, 禧嬪廟·宜嬪廟遣內侍, 看審以來。 出傳敎|출처=『승정원일기』2879책(탈초본 133책), 고종 17년(1880) 9월 6일 경오[신미] 20/20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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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2886책(탈초본 133책), 고종 18년(1881) 4월 9일 경자(庚子) 10/27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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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嬪廟)로 내시를 보내어 살펴보고 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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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출처=『승정원일기』2886책(탈초본 133책), 고종 18년(1881) 4월 9일 경자(庚子) 10/27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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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2898책(탈초본 133책), 고종 19년(1882) 3월 20일 병오(丙午) 24/24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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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내시를 보내어 탈이 없는지 살펴보고 오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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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출처=『승정원일기』2898책(탈초본 133책), 고종 19년(1882) 3월 20일 병오(丙午) 24/24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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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2907책(탈초본 134책), 고종 19년(1882) 12월 15일 정묘(丁卯) 48/49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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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또 쓰라고 명하고 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賓廟)는 내시(內侍)를 보내 간심(看審)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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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命書傳敎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 看審以來。|출처=『승정원일기』2907책(탈초본 134책), 고종 19년(1882) 12월 15일 정묘(丁卯) 48/49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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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2908책(탈초본 134책), 고종 20년(1883) 1월 29일 신해(辛亥) 42/42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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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또 쓰라고 명하고 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내시를 보내어 간심하고 오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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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命書傳敎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출처=『승정원일기』2908책(탈초본 134책), 고종 20년(1883) 1월 29일 신해(辛亥) 42/42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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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2916책(탈초본 134책), 고종 20년(1883) 9월 28일 을사(乙巳) 23/23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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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또 쓰라고 명하고 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내시를 보내어 간심하고 오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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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命書傳敎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출처=『승정원일기』2916책(탈초본 134책), 고종 20년(1883) 9월 28일 을사(乙巳) 23/23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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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2922책(탈초본 134책), 고종 21년(1884) 4월 5일 기유(己酉) 17/17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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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내시를 보내어 간심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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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 看審以來。|출처=『승정원일기』2922책(탈초본 134책), 고종 21년(1884) 4월 5일 기유(己酉) 17/17 기사}}
  
 
=='''지식 관계망'''==
 
=='''지식 관계망'''==

2020년 7월 29일 (수) 15:2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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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빈성씨묘(宜嬪成氏墓)
서삼릉 빈·귀인 분묘 집장지 의빈성씨 묘
식별자 RT037
분류 분묘
한글명 의빈성씨묘
한자명 宜嬪成氏墓
영문명 Tomb of Royal Noble Consort Ui of the Changnyeong Sung clan
피장자 명칭 의빈(宜嬪) 창녕성씨(昌寧成氏)
피장자 이칭 정조 후궁 의빈 성씨
피장자 부 성윤우(成胤祐)
피장자 모 임종주(林宗冑)의 딸
피장자 생년월일 1753.07.08
피장자 몰년월일 1786.09.14
초장 연월일 1786.11.20
초장지 기록 고양군 율목동 임좌원(壬坐原)의빈성씨묘비
초장지 기록1 효창묘(孝昌墓) 좌강(左岡)정조실록
초장지 기록2 경성부 금정(錦町) 이정목(二丁目)능원묘천봉안
문화재 지정여부 미지정
이장 연월일 1940.05.15
이장지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서삼릉 내
이장지 좌표(위도) 37°66'56.84"N
이장지 좌표(경도) 126°85'84.06"E
지문 宜嬪昌寧成氏之墓
지문 찬자 정조(正祖)
지문 소장처 조선왕릉 서부지구관리소



목차

내용

조선 22대 왕 정조의 후궁인 의빈 성씨(1753~1786)의 묘 이다. 의빈 성씨의 본관은 창녕이고, 아버지는 성윤우(成胤祐)이며, 어머니는 임종주(林宗冑)의 딸이다.

1782년(정조 6) 상의(尙儀)의 신분으로 왕자를 출산한 뒤 소용(昭容)에 봉해졌다. 1783년(정조 7) 2월에는 의빈에 봉해졌고, 1784년(정조 8) 옹주를 출산하였다. 1786년(정조 10) 9월 사망하였다.

사망 이후 의빈 성씨는 아들의 묘인 효창묘 좌강(左岡)에 안장되었다. 정조를 비롯해 이후 국왕들의 전알 및 치제 등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1940년 서삼릉 경내로 이장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권14, 정조 6년(1782) 8월 26일 경인(庚寅)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서유경을 권초관으로 삼다》

서유경(徐有慶)을 권초관(捲草官)으로 삼았다. 이때 상의(尙儀) 성씨(成氏)가 해산할 달이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以徐有慶爲捲草官。 是時, 尙儀成氏彌月將屆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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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14, 정조 6년(1782) 8월 26일 경인(庚寅) 1번째 기사



『정조실록』권14, 정조 6년(1782) 9월 7일 신축(辛丑)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문효 세자의 탄생을 기뻐하다》

왕자(王子)가 탄생하였다. 임금이 승지와 각신(閣臣)들을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 "궁인(宮人) 성씨(成氏)가 태중(胎中)이더니 오늘 새벽에 분만하였다. 종실이 이제부터 번창하게 되었다. 내 한 사람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머지않아 이 나라의 경사가 계속 이어지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으므로 더욱더 기대가 커진다. ‘후궁은 임신을 한 뒤에 관작을 봉하라.’는 수교(受敎)가 이미 있었으니, 성씨를 소용(昭容)170) 으로 삼는다." 하니, 신하들이 경사를 기뻐하는 마음을 아뢰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를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하였다. 또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을 불러 보았는데, 모두가 말하기를, "하늘에 계신 조종께서 우리 나라를 돌보시어서 남아가 태어난 경사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 달은 우리 선대왕께서 탄생하신 달이고 우리 전하께서 탄생하신 달인데다가 왕자께서 또 이 달에 탄생하셨으니, 경사에 대한 기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대신이 뜨락에서 문안을 올리려고 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인데, 명호(名號)를 정하기 전에 뜨락에서 문안을 드리는 것은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다. 더구나 을묘년에도 이러한 예가 없었으니, 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王子生。 上召見承旨ㆍ閣臣, 敎曰: "宮人成氏有娠, 今曉分娩。 宗英之自此蕃衍。 非但一己之幸, 繼此邦慶, 明知其非久, 益切顒企。 後宮有娠, 然後封爵, 旣有受敎, 成氏爲昭容。" 諸臣陳慶忭之忱。 上曰: "始聞爲人父之稱, 是可幸也。" 又召見時原任大臣。 僉曰: "皇天祖宗, 眷佑邦家, 乃有斯男之慶。 況是月, 卽我先大王誕彌之月, 我殿下流虹之節, 王子誕生, 又在是月, 不勝慶忭之至。 大臣欲行庭候。" 敎曰: "凡事自有次序, 名號未定之前, 設庭候, 旣無前例可據。 況乙卯年, 亦無是例, 其已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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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14, 정조 6년(1782) 9월 7일 신축(辛丑) 1번째 기사



『정조실록』권14, 정조 6년(1782) 12월 28일 경인(庚寅)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성씨를 소용으로 삼다》

성씨(成氏)를 소용(昭容)으로 삼았다. 영의정 서명선이 또 건의하자, 윤허한 것이다.

以成氏爲昭容, 領議政徐命善, 又建請。 允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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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14, 정조 6년(1782) 12월 28일 경인(庚寅) 2번째 기사



『정조실록』권15, 정조 7년(1783) 2월 19일 경진(庚辰) 4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소용 성씨에게 의빈의 칭호를 내리다》

소용 성씨(昭容成氏)에게 의빈(宜嬪)이란 칭호를 내렸다.

賜昭容成氏號曰宜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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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15, 정조 7년(1783) 2월 19일 경진(庚辰) 4번째 기사



『정조실록』권17, 정조 8년(1784) 윤3월 20일 을해(乙亥)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호산청을 설치하다》

호산청(護産廳)을 설치하였는데, 당시 의빈 성씨(宜嬪成氏)가 딸을 낳았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設護産廳。 時宜嬪成氏生女, 故有是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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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17, 정조 8년(1784) 윤3월 20일 을해(乙亥) 1번째 기사



『정조실록』권22, 정조 10년(1786) 9월 14일 갑신(甲申)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의빈 성씨의 졸기》

의빈(宜嬪) 성씨(成氏)가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의빈의 상례(喪禮)는 갑신년의 예에 따라 후정(後庭)의 1등의 예로 거행하라." 하였다. 처음에 의빈이 임신하였을 때 약방 도제조 홍낙성이 호산청(護産廳)을 설치하자고 청하자, 출산할 달을 기다려 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병에 걸려 졸(卒)한 것이다. 임금이 매우 기대하고 있다가 그지없이 애석해 하고 슬퍼하였으며, 조정과 민간에서는 너나없이 나라의 근본을 걱정하였다. 홍낙성이 아뢰기를, "5월 이후로 온 나라의 소망이 오직 여기에 달려 있었는데 또 이런 변을 당하였으니, 진실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제부터 국사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 하였다. 이는 대체로 의빈의 병 증세가 심상치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무슨 빌미가 있는가 의심하였다고 하였다.

宜嬪成氏卒。 敎曰: "嬪喪, 依甲申年例, 以後庭一等例行之。" 初宜嬪有身, 藥房都提調洪樂性, 請設護産廳。 命待當朔, 至是遘疾而卒。 上企待方切, 不勝悼惜。 朝野莫不以國本爲憂。 樂性奏曰: "五月以後, 一國係望, 惟在於此, 而又遭此變, 誠罔措矣。" 上曰: "病情奇怪, 竟至於此。 從今國事尤靡托矣。" 蓋嬪病症非常, 時疑其有祟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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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22, 정조 10년(1786) 9월 14일 갑신(甲申) 2번째 기사



『정조실록』권22, 정조 10년(1786) 9월 16일 병술(丙戌)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안현의 본궁에 의빈의 빈소를 차리다》

안현(安峴)의 본궁(本宮)에다 의빈의 빈소를 차렸다. 상구(喪柩)를 소난상(小欄床)에다 봉안하고 흰 비단 보자기로 덮고 난 다음 유장(帷帳)을 설치하였다. 단양문(端陽門)을 거처 단봉문(丹鳳門)을 나와서 견여(肩輿)로 옮겨 나아갔다.

殯宜嬪于安峴本宮。 以喪柩, 安于小欄床, 覆素錦褚, 設行帷帳。 由端陽門, 出丹鳳門, 移安肩輿以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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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22, 정조 10년(1786) 9월 16일 병술(丙戌) 1번째 기사



『정조실록』권22, 정조 10년(1786) 11월 18일 무자(戊子)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의빈의 장사날을 맞아 궁과 묘소에 제사를 전례에 따라 정하다》

예조 판서 서유린(徐有隣)이 아뢰기를, "의빈(宜嬪)의 장사날이 머지 않았으니, 궁과 묘소에 제사를 지금 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의열궁의 전례를 상고해 보니, 궁에는 사중삭(四仲朔)과 사명일(四名日)에 봉상시(奉常寺)에서 제사를 지냈고 묘소에는 기신과 사명일에 본궁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번에도 이에 따라 거행할 것입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체모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으니, 그에 따라서 거행하라." 하였다.

禮曹判書徐有隣啓言: "宜嬪禮葬不遠, 宮墓祭享, 當趁今酌定, 而取考義烈宮前例, 宮享則四仲朔、四名日, 自太常擧行; 墓享則忌辰四名日, 自本宮擧行。 今番亦依此擧行乎?" 敎曰: "體貌不可不顧, 依此爲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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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22, 정조 10년(1786) 11월 18일 무자(戊子) 2번째 기사



『정조실록』권22, 정조 10년(1786) 11월 20일 경인(庚寅)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효창묘의 왼쪽 산등성이에 의빈 성씨의 장사를 치르다》

의빈(宜嬪) 성씨(成氏)의 장사를 치렀는데, 효창묘(孝昌墓)의 왼쪽 산등성이였다.

葬宜嬪成氏。 卽孝昌墓左岡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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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22, 정조 10년(1786) 11월 20일 경인(庚寅) 1번째 기사



『정조실록』권23, 정조 11년(1787) 1월 9일 무인(戊寅)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선혜청 제조 서유린이 의빈묘의 위전을 절수하는 일로 아뢰다》

선혜청 제조 서유린(徐有隣)이 의빈묘(宜嬪墓)의 위전(位田)을 절수(折受)하는 일로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근래에 어찌 버려져 있는 땅이 있겠는가? 산허리를 침범해 경작하는 것이 참으로 하나의 고질적인 폐단이어서 도끼로 베기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곳곳마다 산이 벌거숭이다. 이는 모두 수령들이 공가(公家)에서 세금을 매기지 않는 것을 이롭게 여겨 백성들에게 경작하기를 허락한 것이니, 읍력(邑力)으로 손을 댈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이제 만약 이를 빙자하여 향으로 쓸 향나무와 숯을 만들 참나무를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사방에서 널리 구하는데 뒤따라 모리(牟利)하는 자들이 동쪽 서쪽을 가리키며 소란을 피우며 그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내 뜻이겠는가? 경 등은 이런 뜻을 본받아서 궁방(宮房)이나 혹은 영문(營門)·아문(衛門)을 가리키며 소란을 피우며 시장(柴場) 가운데서 유명 무실한 곳은 혁파하고, 만일 합당한 곳을 얻으면 품처하라. 그렇지 않으면 비록 기일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절대로 외읍(外邑)에 양안(量案) 밖의 명색(名色)을 획정(劃定)하지 못하게 하라." 하니, 서유린이 말하기를, "이천부(伊川府)에 마땅한 송산(松山) 한 곳이 있기에 처음에는 황장 봉산(潢腸封山)으로 여겼었는데, 작년 본주(本州)의 백성이 소송으로 인하여 예조에서 봉산안(封山案)을 조사해 보니 원래 기록된 일이 없어서 효창묘(孝昌墓)의 위전(位田)으로 의정(擬定)하였습니다. 본 부사(府使)의 말을 듣건대, 소나무는 아주 무성하나 토지는 척박하여 개간할 수가 없으며, 또 그 옆에 삼화세(蔘火稅) 몇 결(結)이 있어서 장차 모두 넣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송정(松政)과 삼세(蔘稅)의 두 가지 일에 대해서는 성상의 뜻을 여러 차례 사륜(絲綸)에 나타내셨습니다. 이제 연교(筵敎)를 받들건대 더욱 향탄(香炭)·송전(松田)에 대하여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음을 깨달았으니 그대로 봉산(封山)을 만들고 삼화세는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전대로 수세(收稅)하게 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읍민(邑民)이 진고(陳告)한 것은 처음부터 경청(傾廳)할 일이 아니었고, 설사 또 땅이 척박하지 않고 옆에 삼세가 없었더라도 지금 산목(山木)이 곳곳마다 민둥산이 되어 있을 때에 크고 작은 나무 천만 주(株)를 베어 내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삼화세는 실로 적자(赤子)의 목숨과 관계되는데, 이제 만약 공가(公家)에 소속시킨다면 급대(給代)할 밑천을 어디서 만들어 내겠는가? 그리고 읍지(邑誌)를 상고하건대, 고미탄(古味灘) 근처에 끼어 있으니 관방(關防)의 중요한 땅이 됨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그곳에는 일찍이 성(城)을 쌓고 소나무를 심은 일이 있었으니 설치한 법의(法意)가 매우 면밀하였다. 이런 곳들은 거론하지 말아야 할 뿐만이 아니라, 진고(陳告)한 사람을 마땅히 먼저 엄중히 다스려서 간사한 백성들이 무엇을 엿보고 바라는 습성을 막아야 할 것이다. 대저 산택(山澤)의 정사는 나라의 중대한 일인데, 근래에 백성들의 습성이 아주 교활하여 이런 폐단이 있게 된 듯하니, 반드시 이 한 곳에만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이후에는 비록 사사로운 양산(養山)의 절수(折受)라도 비변사를 거쳐서 계하(啓下)해서 행회(行會)한 것이 아니면 궁방(宮房) 및 영문·아문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스스로 조치해 주지 말라는 일을 탁지(度支)의 등록(謄錄)에 기재하라." 하였다.

宣惠廳提調徐有隣啓宜嬪墓位田折受事。 上曰: "近來豈有曠棄之地? 山腰犯耕, 誠一痼弊, 不待斧斤, 在在童濯。 此蓋守令, 利其無公家之定稅, 許民耕作, 可知邑力之無着手也。 今若藉此, 香炭之名, 四處廣求, 從以牟利者, 指東指西, 紛紜不止, 則是豈予意? 卿等體此, 就罷宮房或營、衙門柴場中有名無實處, 如得可合者, 稟處。 否則雖未及期, 切勿以外邑量外名色劃定也。" 有隣曰: "伊川府有宜松山一處, 初認以黃腸封山, 昨年本州民訴, 禮曹考見封山案, 則元無載錄之事, 擬定孝昌墓位田矣。 聞本府使之言, 則松木頗茂密, 而土地則瘠薄, 無以起墾, 且其傍有蔘火稅幾結, 將竝入云。 蓋松政、蔘稅兩事, 聖意屢形於絲綸, 而今承筵敎, 益覺其不可輕議於香炭、松田, 則仍作封山, 蔘火稅, 則請令本官, 依前收稅。" 上曰: "邑民之陳告, 初非傾聽之事, 設又土不瘠薄, 傍無蔘稅, 以今山木在處濯濯之時, 斫出大小千萬株, 且非得計。 況蔘火稅, 實關赤子之命脈, 今若屬之公家, 則給代之資, 將何辦出? 且考邑誌, 介在古味灘近處, 可知爲關防重地。 況其地曾有築城植松之擧, 設置法意, 至爲縝密。 此等處, 非惟勿擧論, 陳告人宜先嚴治, 以杜奸民覬覦之習。 大抵山澤之政, 有國重事, 近來民習至巧, 似此弊端, 必當不止此一處。 此後雖於私養山折受, 如非關由備局啓下行會, 則宮房及營衙門, 無得擅自劃屬事, 載之度支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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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23, 정조 11년(1787) 1월 9일 무인(戊寅) 2번째 기사



『정조실록』권23, 정조 11년(1787) 1월 10일 기묘(己卯)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문희묘를 의빈묘 근처로 복지하고 사당터를 의빈궁 서쪽 담장 밖으로 정하다》

하교하기를, "문희묘(文禧廟)를 처음에는 경모궁(景慕宮) 남쪽 담장 밖에다 정했었는데, 작년 9월 이후에 신리(神理)와 인정(人情)으로 헤아려서 의빈묘(宜嬪廟) 근처로 복지(卜地)하는 것이 실로 편리하고 합당하여 사당 터를 의빈궁 서쪽 담장 밖으로 옮겨 정했었다. 이번에는 청(廳)을 설치하지 말고, 호조·공조의 당상(堂上)과 낭관(郞官) 각 1원(員)씩이 감독하라." 하였다.

敎曰: "文禧廟, 初定於景慕宮南墻外, 昨年九月後, 揆以神理、人情, 就宜嬪廟近處卜地, 實爲便當, 廟基以宜嬪宮西墻外移定。 今番勿設廳, 戶、工曹堂郞, 各一員監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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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23, 정조 11년(1787) 1월 10일 기묘(己卯) 1번째 기사



『정조실록』권26, 정조 12년(1788) 7월 8일 무진(戊辰)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각신을 보내 효창묘에 전작례를 행하고, 승지로 하여금 의빈묘에 치제케 하다》

각신(閣臣)을 보내어 효창묘(孝昌墓)에 전작례(奠酌禮)를 행하고, 승지를 보내어 의빈묘(宜嬪墓)에 치제(致祭)하였다.

遣閣臣, 行奠酌禮于孝昌墓, 遣承旨, 致祭于宜嬪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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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26, 정조 12년(1788) 7월 8일 무진(戊辰) 1번째 기사



『정조실록』권27, 정조 13년(1789) 4월 25일 신해(辛亥)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문희묘가 완성되다. 문효 세자 혼궁·효창묘·의빈묘에서 다례를 행하다》

문희묘가 완성되었다. 상이 왕림하여 재실에서 영건청(營建廳)의 당상과 낭관을 불러 보았다. 경희궁(慶熙宮)에 가서 문효 세자 혼궁(文孝世子魂宮)에 다례를 행하고서 이어 효창묘(孝昌墓)와 의빈묘(宜嬪墓)에 가서 다례를 행하였다.

文禧廟成。 上駕臨, 召見營建堂郞于齋室。 詣慶熙宮, 行茶禮于文孝世子魂宮, 仍臨孝昌墓、宜嬪墓, 行茶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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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27, 정조 13년(1789) 4월 25일 신해(辛亥) 1번째 기사



『정조실록』권27, 정조 13년(1789) 4월 26일 임자(壬子)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문효 세자의 신위를 문희묘로 옮겨 봉안하고, 봉안제와 별다례를 행하다》

문효 세자의 신위(神位)를 문희묘로 옮겨 봉안하였다. 상이 친히 구묘(舊廟)에서 고동련제(告動輦祭)를 행하고, 옮겨 봉안한 뒤에는 신묘(新廟)에서 봉안제(奉安祭)를 행하고 또 별다례(別茶禮)를 행하였다. 이어 의빈묘로 가서 별다례를 행하였다. 중궁전(中宮殿)은 문희묘에 갔다가 예가 끝나자 환궁하였다.

移奉文孝世子神位于文禧廟。 上親行告動輦祭于舊廟, 移奉後, 親行奉安祭于新廟, 又行別茶禮。 仍臨宜嬪廟, 行別茶禮。 中宮殿臨廟, 禮畢還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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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27, 정조 13년(1789) 4월 26일 임자(壬子) 1번째 기사



『정조실록』권28, 정조 13년(1789) 12월 28일 기묘(己卯)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경모궁에 전배하고 문희묘, 의빈묘에 전작례를 행하다》

경모궁(景慕宮)에 전배하고, 지나는 길에 문희묘(文禧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들러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

展拜景慕宮, 歷臨文禧廟、宜嬪廟, 行奠酌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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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28, 정조 13년(1789) 12월 28일 기묘(己卯) 1번째 기사



『정조실록』권29, 정조 14년(1790) 3월 24일 갑진(甲辰)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경모궁에 전배하다》

경모궁(景慕宮)에 전배(殿拜)하였다. 문희묘(文禧廟)에 나아가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고, 이어 의빈묘(宜嬪廟)에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에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의 집 앞에 이르러 그의 병이 심하다는 말을 듣고 사관(史官)을 보내 병문안을 하였다.

展拜于景慕宮, 詣文禧廟, 行奠酌禮, 仍臨宜嬪廟, 駕還錦城尉 朴明源家前, 聞其病甚, 遣史官存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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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29, 정조 14년(1790) 3월 24일 갑진(甲辰) 1번째 기사



『순조실록』권6, 순조 4년(1804) 9월 1일 정해(丁亥)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궐리사에 정경을 보내 전작하고, 효령 대군 등의 묘에 사람을 보내 치제하다》

(전략)……창빈(昌嬪)·명빈(䄙嬪)·의빈(宜嬪)·연령군(延齡君)·해창위(海昌尉)의 묘에는 내시(內侍)를 보내 치제하라고 명하였다.

命…(중략)…昌嬪、䄙嬪、宜嬪、延齡君、海昌尉墓, 遣內侍致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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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조실록』권6, 순조 4년(1804) 9월 1일 정해(丁亥) 2번째 기사



『순조실록』권10, 순조 7년(1807) 9월 1일 기해(己亥)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효창묘에 나아가 작헌례하고 김재찬을 소견하다》

효창묘(孝昌墓)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의빈묘(宜嬪墓)에 역림(歷臨)하였다가, 이어 남관왕묘(南關王廟)에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詣孝昌墓, 行酌獻禮, 歷臨宜嬪墓, 仍詣南關王廟, 行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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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조실록』권10, 순조 7년(1807) 9월 1일 기해(己亥) 1번째 기사



『순조실록』권13, 순조 10년(1810) 8월 28일 경술(庚戌)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명빈 등의 묘소와 조광조 등의 사판과 서원에 사람을 보내 제사지내도록 하다》

명빈(䄙嬪)과 의빈(宜嬪)의 묘에 내시를 보내 제사를 지내라고 명하였다.

命䄙嬪、宜嬪墓, 遣內侍致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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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조실록』권13, 순조 10년(1810) 8월 28일 경술(庚戌) 2번째 기사



『철종실록』권13, 철종 12년(1861) 2월 6일 갑자(甲子)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능창 대군 등의 묘에 치제하게 하다》

하교하기를, "능창 대군(綾昌大君) 묘(墓)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영온 옹주(永溫翁主) 묘(墓)에 내시(內侍)를 보내어 치제하게 하라. 정문공(正文公) 김수근(金洙根) 묘(墓)는 연로(輦路)에 있고 또 면례(緬禮)가 멀지 않았다고 하니, 지방관(地方官)을 보내어 치제하고, 의빈묘(宜嬪墓)에는 내시를 보내어 치제하며, 현절사(顯節祠)에는 승지(承旨)를 보내어 치제토록 하라." 하였다.

敎曰: "綾昌大君墓, 遣禮官致祭, 永溫翁主墓, 遣內侍致祭, 正文公ㆍ金洙根墓, 在輦路, 且緬禮不遠云, 遣地方官致祭, 宜嬪墓, 遣內侍致祭, 顯節祠, 遣承旨致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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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철종실록』권13, 철종 12년(1861) 2월 6일 갑자(甲子) 2번째 기사



『고종실록』권7, 고종 7년(1870) 1월 2일 무진(戊辰)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인빈, 영빈, 화빈, 희빈, 정빈, 의빈, 영빈 등의 사당의 신주를 옮기다》

전교하기를, "친진(親盡)하여 조천(祧遷)하는 것은 어길 수 없는 제도이며 역시 옛날부터 전해오는 제왕들의 가법(家法)이다. 그런데 유독 의소묘(懿昭廟)의 사우(祠宇)를 아직 옮기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실로 겨를이 없었던 일이다. 그리고 각궁(各宮)에 따로 사당을 세운 것은 당시로서는 없어서는 안될 일이라고 하여 그렇게 된 것이지만, 오늘에 와서는 어느 한 곳의 별묘(別廟)에 합쳐 봉안(奉安)하는 것이 사리에 부합되는 것이다. 인빈 김씨(仁嬪金氏)·영빈 김씨(寧嬪金氏)·화빈 윤씨(和嬪尹氏)의 사우는 경우궁(景祐宮) 안의 별묘에 함께 모시고, 희빈 장씨(禧嬪張氏)·정빈 이씨(靖嬪李氏)·영빈 이씨(暎嬪李氏)·의빈 성씨(宜嬪成氏)의 사우는 육상궁(毓祥宮) 안의 별묘에 함께 모시며, 문효 세자(文孝世子)의 사우는 의소묘 안의 별묘에 이봉(移奉)하여야 할 것이다. 제반 의식 절차는 호조(戶曹)와 예조(禮曹)의 당상(堂上)으로 하여금 대원군(大院君)에게 품처(稟處)하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敎曰: "親盡而祧, 卽莫越之制, 而亦自古帝王家法。 然而惟獨懿昭廟之尙未祧遷, 實是未遑之事也。 且各宮之別立廟貌, 在當時雖不可闕而然矣, 到今則合奉於一處別廟, 正合事宜。 仁嬪金氏、寧嬪金氏、和嬪尹氏祠宇, 合奉於景祐宮內別廟; 禧嬪張氏、靖嬪李氏、暎嬪李氏、宜嬪成氏祠宇, 合奉於毓祥宮內別廟; 文孝世子祠宇, 移奉於懿照廟內別廟。 諸般儀節, 令戶禮堂, 稟處於大院君前擧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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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종실록』권7, 고종 7년(1870) 1월 2일 무진(戊辰) 2번째 기사



『고종실록』권11, 고종 11년(1874) 3월 5일 정미(丁未) 1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영의정 이유원이 재정을 절약할 것을 아뢰다》

또 하교하기를, "무과(武科)에서 삭천(削薦)된 자 가운데 육상궁(毓祥宮), 선희궁(宣喜宮)의 본가(本家) 사람으로서 삭천된 자는 모두 다시 추천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이것이야말로 응당 해야 할 일입니다. 연석에 나온 장수들에게 분부하여 그들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장수는 이러한 내용으로 거행하라." 하니, 이경하(李景夏)가 아뢰기를, "삼가 하교하신 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최가(崔哥) 성을 가진 사람은 이미 장임(將任)이었고, 이가(李哥) 성을 가진 이도 또한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일한 일이 있습니다. 그 후손들이 선천(宣薦)이 되지 못하였으니 사실 매우 억울한 일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군공(軍功)이 있는 사람은 상민(常民)이든 천민(賤民)이든 오히려 불차탁용(不次擢用)하는데, 하물며 두 궁(宮)의 사친(私親)의 본가 사람이야 더 말할 게 있는가? 의빈 성씨(宜嬪成氏)의 가문도 또한 삭천되었으니, 일체로 거행하도록 하라." 하니, 이경하가 아뢰기를, "삼가 일체로 다시 추천하겠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다시 추천해야 할 사람을 합하면 몇 사람이나 되는가?" 하니, 이경하가 아뢰기를, "합하면 200여 인인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모두 다시 추천하기는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세 성(姓)에 대해서는 전부 다시 추천하고, 그 나머지는 적합한 사람에게 시행하도록 하라." 하니, 이경하가 아뢰기를, "삼가 하교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又敎曰: "武科削薦中, 毓祥宮、宣禧宮本家人削薦者, 竝復薦好矣。" 裕元曰: "此誠當行之事, 分付登筵將臣, 使之擧行, 恐好矣。" 敎曰: "將臣以此擧行也。" 景夏曰: "謹當依下敎擧行矣。 崔姓旣爲將任, 李姓亦有爲平安兵使者。 其後裔之不得爲宣薦, 果甚抑鬱矣。" 敎曰: "軍功人雖常賤, 尙得不次擢用, 況兩宮私親之本家人乎? 宜嬪成氏家, 亦入削薦中, 一體擧行可也。" 景夏曰: "謹當一體復薦矣。" 敎曰: "可合復薦者, 合爲幾人乎?" 景夏曰: "合爲二百餘人, 而有難一朝遽然竝復矣。" 敎曰: "三姓則盡爲復薦, 其餘則隨可合人施之可也。" 景夏曰: "謹依下敎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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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종실록』권11, 고종 11년(1874) 3월 5일 정미(丁未) 1번째 기사



『고종실록』권15, 고종 15년(1878) 1월 29일 기묘(己卯)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육상궁과 경우궁의 제관은 옛 규례를 회복하여 삼헌관으로 마련하도록 하다》

전교하기를, "영소묘(永昭廟), 문희묘(文禧廟)에는 우승지(右承旨)를 보내어 봉심(奉審)하게 하고 희빈묘(禧嬪廟), 의빈묘(宜嬪廟)에는 내시(內侍)를 보내어 살펴보고 오게 하라." 하였다.

敎曰: "永昭廟、文禧廟, 遣右承旨奉審, 禧嬪、宜嬪, 遣內侍看審以來。" 又敎曰: "毓祥宮、景祐宮祭官, 復舊例, 三獻官磨鍊。 而初獻官, 從二品; 亞獻官, 堂上三品; 終獻官堂, 下三品。 塡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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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종실록』권15, 고종 15년(1878) 1월 29일 기묘(己卯) 2번째 기사



『고종실록』권18, 고종 18년(1881) 4월 9일 경자(庚子) 2번째 기사

Quote-left blue.png 《영소묘와 문희묘, 희빈묘와 의빈묘를 간심하도록 하다》

전교하기를, "영소묘(永昭廟)와 문희묘(文禧廟)에 도승지(都承旨)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내시(內侍)를 보내어 간심(看審)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敎曰: "永昭廟、文禧廟, 遣都承旨; 禧嬪、宜嬪, 遣內侍, 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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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종실록』권18, 고종 18년(1881) 4월 9일 경자(庚子) 2번째 기사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 1517책(탈초본 82책), 정조 6년(1782) 9월 7일 신축(辛丑) 9/20 기사

Quote-left blue.png 尙衣成氏, 昭容封爵事, 承傳。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517책(탈초본 82책), 정조 6년(1782) 9월 7일 신축(辛丑) 9/20 기사



『승정원일기』 1608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8월 12일 임자(壬子) 44/47 기사

Quote-left blue.png 上曰, 何爲請對? 樂性曰, 宜嬪産期, 只隔數月, 慶幸之忱, 不可勝達。當此八域臣民顒祝企待之日, 護産設廳, 不可膠守常例。雖以藥院事言之, 設廳, 然後方有隨時診察之道, 護産廳吉日, 今月內擧行, 何如? 上曰, 産室廳·護産廳, 體貌各異。雖以産室廳言之, 前期三朔, 設廳內殿外無是例, 至於護産廳, 例於當朔設廳。以卿等企待之忱, 有此拔例設廳之請, 乙卯年所未行之擧, 今何敢創始? 待當朔, 設護産廳, 可也。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08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8월 12일 임자(壬子) 44/47 기사



『승정원일기』 1610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9월 14일 갑신(甲申) 13/13 기사

Quote-left blue.png 上命書傳敎曰, 宜嬪喪, 依甲申年例, 以後庭一等禮擧行事, 分付。命退, 承史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10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9월 14일 갑신(甲申) 13/13 기사



『승정원일기』 1614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11월 14일 갑신(甲申) 13/14 기사

Quote-left blue.png 上命書傳敎曰, 宜嬪喪發靷日, 臨壙等奠, 遣承旨致祭, 今番祭品, 不煩外邑, 執事官, 亦勿以列邑守令塡差, 以都事及地方官察訪, 附近守令爲之事, 分付。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14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11월 14일 갑신(甲申) 13/14 기사



『승정원일기』 1614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11월 16일 병술(丙戌) 10/12 기사

Quote-left blue.png 上曰, 今番禮葬, 倣用甲申已例, 則墓所當有典監, 而一局之內, 不必別置, 仍以守衛官兼察似好, 錦城尉之意, 何如? 明源曰, 玆事便同官制, 臣不敢遽然仰對, 而今番墓所, 雖與孝昌墓, 同在一局, 義烈墓旣有典監, 則仍令守衛官兼管, 恐涉如何矣。上曰, 禮判亦陳所見, 可也。有隣曰, 昭寧園·綏吉園, 同奉於一局之內, 故守奉官, 兼管擧行, 此可爲旁照之端, 而義烈墓, 旣有典監, 援用此例, 亦似無妨矣。上曰, 然則以典監差出, 可也。明源曰, 若以典監差出, 則例有復戶矣。有隣曰, 復戶, 分付該廳, 考例劃給,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 有隣曰, 宜嬪墓所守護軍, 今當磨鍊矣, 額數, 依義烈墓例, 以三十名充定之意, 分付畿營, 給復等節, 亦令該廳, 擧行, 何如? 上曰, 依爲之。此墓係是孝昌墓一局, 原定額數, 雖以三十名磨鍊定式, 而責立則以二十名爲之, 以除畿民簽丁苟艱之弊, 可也。出擧條 有隣曰, 宜嬪禮葬不遠, 返虞後, 內廟, 多有擧行之事, 守僕, 依甲申例, 差定, 雇立名色, 亦依甲申例定送,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 有隣曰, 宜嬪墓所諸節, 不可不趁今擧行, 而香炭及位田, 取倣甲申前例, 望定劃給, 何如? 上曰, 香炭則卿與戶判, 相議望定後, 草記, 位田則錦城尉, 旣管本事, 從便求得, 仍令言送于卿等, 亦爲草記, 可也。上曰, 孝昌墓香炭位田, 尙未決定, 事甚苟艱, 卿等斯速探問稟定, 卿等官職, 有遞易之時, 有難專意主管, 亦令錦城尉, 知此意, 使之主管往復, 期於從速歸一, 可也。出擧條 有隣曰, 文禧廟, 分設禁漏溫水木, 當爲磨鍊上下, 而此時加定, 有難如例爲之, 自本廳, 參量容入, 直下本所, 恐合事宜, 故敢此仰達矣。上曰, 依爲之。出擧條 鼎修曰, 臣於日前, 以獻官進詣孝昌墓, 則享官入接等節, 全然未備, 鋪陳柴油之屬, 係是應行之事, 而初不措置, 外此凡百, 亦不成樣, 非但所見之可悶, 抑亦事體之苟艱。臣意則亟令該曹下帖, 知委於本墓守衛官, 來頭祭享時, 使之一依各陵園墓例擧行, 恐合事宜, 故適因言端, 敢此仰達矣。上曰, 依爲之。出擧條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14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11월 16일 병술(丙戌) 10/12 기사



『승정원일기』 1614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11월 18일 무자(戊子) 23/24 기사

Quote-left blue.png 丙午十一月十八日午時, 上御重熙堂。禮房承旨入侍時, 左承旨徐鼎修, 假注書金祖淳, 記事官尹行任·李相璜, 以次進伏訖。上曰, 禮判使之入來。賤臣承命出與禮曹判書徐有隣偕入進伏。上曰, 柳文養·洪元燮, 亦爲入侍。賤臣承命出, 與兵曹佐郞柳文養, 戶曹正郞洪元燮, 偕入。上曰, 諸凡擧行之事, 何以爲之乎? 元燮曰, 自本曹, 措備者, 盡爲擧行矣。上曰, 道路能無狹隘之患否? 文養曰, 臣往來看審, 則別無汚穢之物, 而獨校洞兩邊, 甚多且隘矣, 然皆設房堗, 無以除治, 是甚可悶矣, 有隣曰, 元嬪廟墓, 劃送祭需設行等節, 更考可合前例, 登對稟處事, 命下矣。遍考本曹謄錄及惠廳祭需劃送式例, 實無可合前例, 而太常祭圖中, 國舅家忌日仲朔祭物, 備送一款, 或可爲傍照之端, 旣不折受, 又不設宮, 則似不得不依此擧行, 而亦非十分襯當之例。臣不敢指的仰對, 至於設行日字及祭官, 倣用各宮房已例, 恐合事宜, 故敢此仰達矣。上曰, 宮則時享日字, 以二至二分磨鍊, 而時享懿昭墓典祀廳, 自可竝設, 熟設後, 入給中使, 使之行祭。墓則忌辰及俗節, 輸送祭物于本墓, 墓監, 監視熟設, 獻官則不必別差, 當遣中使設行。若此, 則倣用國舅家輸送太常祭物之例, 參用宮房行祀之制, 依此定式施行, 祭品則自本曹, 別單書入, 以爲量減之地, 可也。有隣曰, 廟墓祭品, 比前自當減省, 尊罍等不用祭器, 竝使之還下戶曹, 何如? 上曰, 依爲之。有隣曰, 伏承筵敎, 墓監已命自內差定矣, 料布等節, 何以爲之乎? 上曰, 料布, 參酌磨鍊, 量宜給復, 可也。有隣曰, 廟墓修改等節, 今則不當自戶曹及繕工主管, 而旣無該宮, 以何處定式擧行乎? 上曰, 宮與墓, 春秋季朔, 自內需司, 別定官員, 看審有無頉, 形止, 仍自該司, 草記稟旨, 可也。有隣曰, 宜嬪禮葬不遠, 宮墓祭享, 所當趁今磨鍊, 而取考義烈宮前例宮享, 則四仲朔四名日, 自太常擧行。墓享則忌辰四名日, 自本宮擧行, 今番亦依此擧行乎? 上曰, 體貌不可不顧, 依此爲之。有隣曰, 祭享旣已如是定式, 義烈宮及本宮四仲朔肉膳價米, 自惠廳, 直送, 各自本宮, 措備擧行乎? 上曰, 依爲之。出擧條 命書傳敎曰, 今日卽義烈宮封爵設宮之回甲也。先朝癸酉年, 毓祥宮封爵回甲日, 上謚封園, 以予追感之意, 逢今日, 豈無表意之擧? 然因事故未得躬拜宮墓, 已令承旨奉審, 而不可虛度此日。本家人中李仁康, 雖已甄用, 其子前兵使李性默, 尙無職名, 今日政, 相當職調用, 如無窠, 三營門中堂上窠, 作闕調用事, 分付。命退, 諸臣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14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11월 18일 무자(戊子) 23/24 기사



『승정원일기』 1614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11월 19일 기축(己丑) 11/12 기사

Quote-left blue.png 丙午十一月十九日辰時, 上御重熙堂。奉命承旨入侍時, 左承旨徐鼎修, 右承旨洪仁浩, 右副承旨洪明浩, 假注書金祖淳, 記事官尹行任·李相璜, 以次進伏訖。上曰, 宜嬪葬時, 各樣笏記, 已爲成出耶? 鼎修曰, 然矣。上曰, 笏記已成, 則引儀崔慶鎭, 率去, 使之臚唱, 可也。發靷當在二更末三更初云, 致祭承旨, 早往本宮, 香祝則安於舍廊大廳, 而靷具凡百, 亦須看檢也。鼎修·仁浩·明浩等, 承命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14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11월 19일 기축(己丑) 11/12 기사



『승정원일기』 1617책(탈초본 86책), 정조 11년(1787) 1월 9일 무인(戊寅) 23/24 기사

Quote-left blue.png 丁未正月初九日酉時, 上御會慶堂。戶房承旨, 與錦城尉戶曹判書惠堂入侍時, 行左承旨李在學, 假注書李德鉉, 記事官李相璜·金祖淳, 錦城尉朴明源, 戶曹判書趙璥, 宣惠廳堂上徐有隣, 以次進伏訖。有隣曰, 宜嬪墓位田, 有戶惠堂相議, 略倣義烈宮例望定之命, 而前後聖敎, 每以覓得不關於民邑之地, 丁寧諄複, 故雖有數三可合處, 而不敢提達矣。日前始聞金海府, 有量舊陳中, 還起處及草場百餘結, 曾爲折受於宮房, 己亥年間, 適因事端, 屬之戶曹云矣。量舊陳及草場, 便是量外, 而自來官房之土, 於民邑俱不關係, 以此移作宜嬪墓位田, 最爲無弊。戶判, 今方入侍, 下詢處之, 何如? 上曰, 戶判之意, 何如? 璥曰, 此旣是陳荒處起耕, 而曾前折受於宮房者, 以此作爲宜嬪墓位田, 則事勢便好, 誠如惠堂所奏矣。上曰, 依爲之。文禧廟·孝昌墓香炭, 尙未望定, 此亦戶惠堂, 更加詳探, 後日登對時稟處, 而近來豈有空閒曠棄之地? 山腰犯耕, 誠一痼弊, 不待斧斤, 在在童濯, 此蓋守令, 利其無公家之定稅, 許民耕作, 共睹沾潤, 可知邑力之無着手也。今若藉此香炭之名, 四處廣求, 從以牟利者, 指東指西, 紛紜不止, 則是豈予前此防塞量外火田於宜嬪房之意也? 卿等, 體予此意, 就罷宮房或營門衙門柴場中, 有名無實處, 抄出摘奸, 如得可合者, 從近稟處, 否則雖未能及期劃屬, 切勿以外邑量外名色, 望定, 可也。出擧條 命退, 諸臣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17책(탈초본 86책), 정조 11년(1787) 1월 9일 무인(戊寅) 23/24 기사



『승정원일기』 1617책(탈초본 86책), 정조 11년(1787) 1월 10일 기묘(己卯) 54/56 기사

Quote-left blue.png 丁未正月初十日卯時, 上御會慶堂。來待諸臣入侍時, 右承旨徐鼎修, 假注書李德鉉, 記事官李相璜·金祖淳, 錦城尉朴明源, 戶曹判書趙璥, 宣惠廳堂上徐有隣, 以次進伏訖。上曰, 昨日看審則卿等所見, 何如? 僉曰, 宜嬪墓西墻近處, 實合卜地矣。上曰, 今則以此完定爲好, 而始役則何間爲之耶? 璥曰, 臣等未敢質定仰對矣。上命書傳敎曰, 文禧廟基址, 初定於景慕宮南墻外矣。昨年九月以後, 揆以神理, 人情, 就宜嬪廟近處卜地, 實爲便當。戶判昨旣進往, 看審廟基, 以宜嬪宮西墻外家舍移定, 始役日子, 今秋來春間, 待下敎擇吉擧行。今番勿設廳, 戶工曹堂上郞廳, 各一員, 以文禧廟營建堂上郞廳, 自吏曹, 臨時啓下, 至於入啓及行會文書之事係廟役者, 以營建廳稱號, 昨年不但已有筵敎, 以今經費, 許多物力, 豈可責之度支? 甲辰冊禮後, 常供之儲留該廳者, 數必不少, 廟役時, 以此取用於惠聽事, 分付戶曹, 命入外辦。命退, 諸臣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17책(탈초본 86책), 정조 11년(1787) 1월 10일 기묘(己卯) 54/56 기사



『승정원일기』 1625책(탈초본 86책), 정조 11년(1787) 5월 1일 정묘(丁卯) 22/23 기사

Quote-left blue.png 丁未五月初一日辰時, 上詣孝昌墓。擧動入侍時, 行都承旨沈豐之, 左承旨李亨元, 右承旨徐鼎修, 左副承旨趙衍德, 右副承旨徐有成, 同副承旨曺允大, 記事官金孝建, 假注書李德鉉, 記事官李相璜·金祖淳, 閣臣徐龍輔·尹行任, 以次侍立訖。上具戎服, 乘輿以出, 至降輿所, 左通禮啓請降輿乘馬, 上降輿乘馬, 自興化門, 由敦義門出詣孝昌墓。命宣傳官李永喆汰去分揀。亨元曰, 今日動駕時, 交龍旗奉持馬, 不善把立, 致有不實之患, 事極駭然。當該次知宣傳官及兵曹摠府郞廳, 所當重勘, 而本院請推之外, 無他可施之罰, 何以爲之乎? 上曰, 拿處, 可也。出擧條 上曰, 行祭後, 朝廷問安勿爲之。駕至墓所作門外, 左通禮啓請下馬乘輿, 上下馬乘輿。左右通禮前導入大次, 行祭時至, 左通禮詣大次前, 啓請外辦。上具衰服, 出詣丁字閣, 行禮如儀儀註見上 訖。豐之曰, 莫重親祭, 香盒不盛香, 事極驚駭。守僕, 令攸司科治, 當該官司, 所當重勘, 而本院請推之外, 無他可施之罰, 何以爲之乎? 上曰, 推考, 可也。出擧條 仍哭臨墓所, 次詣宜嬪墓哭臨, 還大次。還宮時至, 左通禮啓請外辦, 上改具戎服, 乘輿出至降輿所, 左通禮啓請降輿乘馬。上降輿乘馬。命書傳敎曰, 自墓所洞口, 至敦義門捧上言。上曰, 守禦使金鍾秀, 仍佩往來。自敦義門, 由敦化門, 至降馬所, 左通禮啓請降馬乘輿, 上降馬乘輿, 由協陽門還內, 諸臣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25책(탈초본 86책), 정조 11년(1787) 5월 1일 정묘(丁卯) 22/23 기사



『승정원일기』 1633책(탈초본 87책), 정조 11년(1787) 9월 12일 병자(丙子) 13/13 기사

Quote-left blue.png 命仁浩書傳敎曰, 十四日孝昌墓, 遣官攝祭, 初獻官, 曾經輔養官中爲之, 宜嬪宮墓, 遣都尉致祭, 以此, 分付。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33책(탈초본 87책), 정조 11년(1787) 9월 12일 병자(丙子) 13/13 기사



『승정원일기』 1633책(탈초본 87책), 정조 11년(1787) 9월 13일 정축(丁丑) 11/12 기사

Quote-left blue.png 丁未九月十三日辰時, 上御重熙堂。右副承旨入侍時。右副承旨洪仁浩, 假注書趙台榮, 記事官李相璜·金祖淳, 以次進伏訖。上曰, 宜嬪宮致祭, 錦城尉已受香出去耶? 仁浩曰, 已爲傳香矣。上曰, 祥祭祭文, 曾有親撰者, 承旨出往該宮, 使忠義, 依祝式書之, 而孝昌墓香祝及宜嬪墓香祝, 權安於書題所, 待明曉出往墓所, 朝上食時, 兼行攝祭, 可也。攝祭祭官, 皆令徑詣好矣。仁浩曰, 祥祭則有三獻, 致祭則只單獻, 何以擧行乎? 上曰, 致祭行三獻可也。仁浩曰, 孝昌墓, 旣已塡差大祝, 祭文何以爲之乎? 上曰, 藝文提學牌招, 製進, 可也, 昨年冬宜嬪葬禮時, 多賴承旨之檢擧, 得免紛雜之患云, 今亦依前爲之, 可也。仁浩曰, 昨年臣亦以承旨, 奉命護喪矣。上曰, 本宮致祭時, 則承旨, 依昨年例參班, 明日則參班於孝昌墓攝祭, 可也。仍命退, 承史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33책(탈초본 87책), 정조 11년(1787) 9월 13일 정축(丁丑) 11/12 기사



『승정원일기』 1633책(탈초본 87책), 정조 11년(1787) 9월 14일 무인(戊寅) 18/18 기사

Quote-left blue.png 丁未九月十四日巳時, 上御重熙堂。右副承旨入侍時。右副承旨洪仁浩, 假注書趙台榮, 記事官李相璜·金祖淳, 以次進伏訖。仁浩曰, 臣承命馳詣孝昌墓參班矣。上曰, 不必畢說矣。奉審無頉, 而享事俱利成乎? 仁浩曰, 然矣。孝昌墓上食, 例爲設行於丁字閣, 別茶禮則排設於床石事, 曾有下敎, 而今番則攝祭爲重, 故雖兼上食, 亦爲過行於象設矣。上曰, 善爲之矣。聞孝昌墓所屬, 謂與宜嬪墓分定境界, 初不管攝, 且多侵侮紛鬧之患云。若知所重之有在, 渠輩焉敢如此? 此後則勿分境界, 令孝昌墓所屬, 兼管宜嬪墓守護等節。若有如前爭鬧之弊, 隨現重繩之意, 禮判出往墓所, 各別申飭, 下帖書付於各其直所, 戶判亦爲出往, 看審墓下當買之田土爲好。禮·戶判今日出去, 過夕上食後入來之意, 招致戶·禮吏分付。筵敎一通, 亦爲錄送, 可也。下番翰林, 亦爲出去奉審, 可也。仍命退, 承史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33책(탈초본 87책), 정조 11년(1787) 9월 14일 무인(戊寅) 18/18 기사



『승정원일기』 1633책(탈초본 87책), 정조 11년(1787) 9월 15일 기묘(己卯) 14/16 기사

Quote-left blue.png 曺允大, 以禁衛營言啓曰, 臣有大, 昨日依下敎馳往孝昌墓時得聞, 植木監官, 與宜嬪墓山直起鬧之說, 捉入監官金德龜, 問其委折, 則渠雖飾辭發明, 誠有難掩之跡。禁標近地當陳之處, 以渠田疇相連之故, 冒禁犯耕, 山直言于典監, 至有禁止之擧, 因此含嫌, 語侵典監, 非止一再, 仍又告訴於守墓官。守墓官, 奪其山直帖文, 使之斥退, 而山直則旣無所失, 公然見除, 監官則不知宜嬪墓事體之重, 恣意凌侮於典監者。究厥所爲, 其心實由於局內禁養, 渠獨自專, 不使他人管攝於其間, 致有此紛紜之弊矣, 敢啓。傳曰, 知道。此後摘奸, 更或如前起鬧, 各別痛治後, 草記, 可也。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33책(탈초본 87책), 정조 11년(1787) 9월 15일 기묘(己卯) 14/16 기사



『승정원일기』 1642책(탈초본 87책), 정조 12년(1788) 5월 11일 임신(壬申) 27/30 기사

Quote-left blue.png 戊申五月十一日午時, 上御重熙堂。魂宮堂上入侍時, 右副承旨洪仁浩, 假注書白慶楷, 記事官李相璜·金祖淳, 魂宮堂上徐有隣, 以次進伏訖。上曰, 王大妃殿進御香砂六君子湯一貼, 更爲煎入。出榻敎 有隣曰, 兩墓香炭可合處, 望定於順天·同福矣。兩邑稅納, 今始上來, 順天稅錢, 輸送孝昌墓, 以爲自今望日以後香炭之需, 同福稅錢, 依義烈宮例, 輸送宜嬪宮, 以爲廟墓香炭之需, 恐合事宜, 故敢此仰達矣。上曰, 依爲之。出擧條 命退, 諸臣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42책(탈초본 87책), 정조 12년(1788) 5월 11일 임신(壬申) 27/30 기사



『승정원일기』 1644책(탈초본 87책), 정조 12년(1788) 7월 6일 병인(丙寅) 28/28 기사

Quote-left blue.png 書傳敎曰, 再明日孝昌墓, 遣閣臣替行奠酌禮, 執事曾經宮銜人爲之, 宜嬪墓, 遣承旨致祭, 承旨·右副進去, 命鶴聞進伏。命書孝昌墓奠酌禮祭文, 旣酹又酹知不是日, 隔岡之阡, 其冤壹鬱, 宜嬪墓致祭祭文, 忍臨昨夜, 又侑今日, 慟徹幽明, 是日何日? 敎曰, 祭文一本精寫, 送于內閣, 一本送于香室, 可也。行祭時至, 上臨文禧廟, 行祭如儀, 祭畢。命書傳敎曰, 明日朝廷問安勿爲之。命退, 諸臣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44책(탈초본 87책), 정조 12년(1788) 7월 6일 병인(丙寅) 28/28 기사



『승정원일기』 1644책(탈초본 87책), 정조 12년(1788) 7월 7일 정묘(丁卯) 12/22 기사

Quote-left blue.png 南鶴聞, 以戶曹言啓曰, 文禧廟四名日, 四仲朔祭, 孝昌墓忌辰祭, 四名日祭祭物, 宜嬪宮忌日祭四名日, 四仲朔祭祭物各種, 依例加定事, 陳達蒙允矣。文禧廟·孝昌墓祭物別單一件及宜嬪宮祭物別單一件, 分道磨鍊書入, 依此給價之意, 分付宣惠廳, 何如? 傳曰, 允。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44책(탈초본 87책), 정조 12년(1788) 7월 7일 정묘(丁卯) 12/22 기사



『승정원일기』 1646책(탈초본 87책), 정조 12년(1788) 9월 7일 을축(乙丑) 14/15 기사

Quote-left blue.png 至孝昌墓洞口, 下馬乘輿入齋室, 改具翼善冠黲袍, 臨墓上行奠酌禮, 仍臨宜嬪墓奠酌, 還入齋室, 改具戎服, 乘轎出齋室, 至紅箭門外, 命漢城判尹徐有防, 招集五江民人, 敎曰, 爾等兩日曳船, 其勞不些, 宜有酬勞之擧, 玆今賑廳, 每名下各給兩日料米, 而或有中間縻費之慮, 以錢代給爲好, 以此分付, 可也。駕由崇禮門, 入敦化門至協陽門外, 降轎乘輿, 還內, 諸臣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46책(탈초본 87책), 정조 12년(1788) 9월 7일 을축(乙丑) 14/15 기사



『승정원일기』 1648책(탈초본 87책), 정조 12년(1788) 11월 5일 계해(癸亥) 25/29 기사

Quote-left blue.png 戊申十一月初五日辰時, 上詣孝昌墓擧動入侍時, 行左承旨李時秀, 右承旨李亨元, 左副承旨李祖承, 同副承旨李敏采, 假承旨鄭東浚·李敏輔, 記事官金孝建, 假注書趙台榮, 記事官李相璜·金祖淳, 一提學金鍾秀, 檢校直提學徐有防·李秉模, 檢校直閣金載瓚·徐鼎修, 待敎尹行任, 以次隨駕。上具戎服, 乘輿出廣達門, 降輿乘轎, 出興化門, 由敦義門, 詣孝昌墓齋室, 降轎, 御齋室。少頃, 乘輿臨孝昌墓, 行奠酌禮如儀。命左議政李性源, 行望燎禮。仍詣宜嬪墓, 行奠酌禮, 還御齋室。命書榻敎曰, 今日還宮時, 嚴時刻置之, 待下敎, 只入外辦。又命書榻敎曰, 兩墓守僕以下及守護軍, 依例施賞。上曰, 京畿監司入侍。賤臣承命出, 與京畿監司趙鼎鎭, 偕入進伏。上曰, 卿之一番辭疏, 無或爲怪, 而至於所引太過矣。鼎鎭曰, 終始生成之澤, 偏及臣身, 無容更達, 而旣被傷風敎之目, 則何敢晏然於旬宣之任乎? 上曰, 在卿非同堂之親, 有何傷於風敎乎? 更勿爲引也。命鼎鎭先退。上曰, 還宮後, 朝廷問安, 勿爲之。出榻敎 命書傳敎曰, 朝廷問安, 旣命停之, 今夜行祭時, 明日行禮時, 只東西班隨駕堂郞, 參班事, 分付。命書榻敎曰, 明日親祭罷後, 朝廷問安及經宿問安, 竝勿爲之。少頃, 乘輿出齋室, 降輿乘轎進發, 由敦義門, 入興化門, 入廣達門, 還內, 諸臣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48책(탈초본 87책), 정조 12년(1788) 11월 5일 계해(癸亥) 25/29 기사



『승정원일기』 1655책(탈초본 88책), 정조 13년(1789) 4월 30일 병진(丙辰) 16/16 기사

Quote-left blue.png 己酉四月三十日辰時, 上御誠正閣。右副承旨入侍時, 右副承旨韓用龜, 假注書李海隣, 編修官曺亨壽, 記事官金鳳顯, 以次進伏訖。上曰, 兵曹參判入侍。賤臣承命出, 與兵曹參判柳誼偕入。上曰, 左副承旨入侍。出榻敎 賤臣承命出傳。左副承旨李家煥進伏。仍命書傳敎曰, 政官牌招開政。誼曰, 文禧廟同奉宜嬪廟, 兩廟奉安之地, 大門軍士之雇軍一名, 極涉疎虞。本曹留營鄕軍中, 限三名定送, 與雇軍一名合爲四名, 而若値科場之時, 則限二名使用, 過場後還爲守直事, 定式,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 誼曰, 文禧廟員役章標, 待報來卽爲造送似好, 敢此仰達矣。上曰, 依爲之。出擧條 仍命退, 諸臣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55책(탈초본 88책), 정조 13년(1789) 4월 30일 병진(丙辰) 16/16 기사



『승정원일기』 1664책(탈초본 88책), 정조 13년(1789) 9월 6일 기축(己丑) 37/38 기사

Quote-left blue.png 己酉九月初六日巳時, 上御重熙堂。右承旨入侍時, 行右承旨徐鼎修, 記事官徐有聞·李相璜·金祖淳, 以次進伏訖。上曰, 都承旨·左副承旨·入侍。出榻敎 賤臣承命出傳, 行都承旨金載瓚, 左副承旨鄭東浚, 追入進伏。上命載瓚書榻敎曰, 進御香吉茶前方中, 人蔘減五分, 一貼式煎入, 命鼎修書傳敎曰, 明日孝昌墓, 遣閣臣, 替行奠酌禮, 宜嬪墓, 遣近侍致祭。仍敎東浚曰, 明日進去孝昌墓, 可也。命書傳敎曰, 左承旨·左副承旨, 許遞。命書傳敎曰, 龍媒僉使黃重錫, 不但有礴石善輸之勞, 以差員長在路上, 奚暇護送? 論罪一款, 非所可論, 置之, 此意回諭。命退, 承史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64책(탈초본 88책), 정조 13년(1789) 9월 6일 기축(己丑) 37/38 기사



『승정원일기』 1675책(탈초본 89책), 정조 14년(1790) 3월 24일 갑진(甲辰) 15/17 기사

Quote-left blue.png 上詣文禧廟, 行奠酌禮訖, 仍詣宜嬪廟, 行奠酌禮後, 乘輿出廟門, 由觀象監峴備邊司, 至敦化門, 下標信解嚴, 由進善門·肅章門, 入協陽門, 至宣化門還內。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75책(탈초본 89책), 정조 14년(1790) 3월 24일 갑진(甲辰) 15/17 기사



『승정원일기』 1884책(탈초본 100책), 순조 4년(1804) 9월 1일 정해(丁亥) 5/9 기사

Quote-left blue.png 傳于李文會曰, 闕里祠, 遣正卿奠酌, 孝寧大君·讓寧大君·永昌大君墓, 文正公趙光祖祠, 靑海伯李之蘭, 故學士李皐, 左議政柳灌, 領議政鄭太和, 左議政鄭惟吉, 文貞公姜碩基, 六臣墓, 遣禮官致祭。 梅谷·鳴皐·鷺江·四忠·忠賢書院, 遣承旨致祭。 昌嬪墓·䄙嬪墓·宜嬪墓·延齡君墓·海昌尉墓, 遣內侍致祭。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884책(탈초본 100책), 순조 4년(1804) 9월 1일 정해(丁亥) 5/9 기사



『승정원일기』 1908책(탈초본 101책), 순조 6년(1806) 2월 16일 갑오(甲午) 13/21 기사

Quote-left blue.png 金會淵, 以戶曹言啓曰, 謹奉傳敎, 宜嬪墓祭廳以下雨漏與頹圮處及簾帳等修改吉日, 令日官池景興推擇, 則今二月二十九日卯時爲吉云, 以此日時擧行, 何如? 傳曰, 允。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908책(탈초본 101책), 순조 6년(1806) 2월 16일 갑오(甲午) 13/21 기사



『승정원일기』 1919책(탈초본 101책), 순조 6년(1806) 11월 5일 무신(戊申) 15/19 기사

Quote-left blue.png 柳畊, 以禮曹言啓曰, 卽接孝昌墓守衛官所報, 則墓所南邊相望之地, 蔓草川路傍, 自丁未年, 列植柳木, 以爲蔽遮行人, 而宜嬪墓典監, 犯斫九株發賣云, 聞極驚駭, 發遣郞廳摘奸, 則此距墓所, 爲三里許, 而路傍田畔, 從前有柳木之列植者, 丁未以後, 自墓所間間補植, 以爲叢翳之地, 而其傍店舍之後, 又有如干散植之柳木, 此則以其民家之後, 雖不補植, 亦在於墓所管領中, 而卽者宜嬪墓典監尹光殷, 斫取其大柳木十株, 發賣的實矣。 雖非火巢近地, 又與補植有異, 而旣在墓所禁養之內, 則身爲典監, 無難犯斫, 究厥所爲, 萬萬痛駭。 其罪狀, 令攸司照法嚴處, 何如? 傳曰, 允。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919책(탈초본 101책), 순조 6년(1806) 11월 5일 무신(戊申) 15/19 기사



『승정원일기』 1919책(탈초본 101책), 순조 6년(1806) 11월 6일 기유(己酉) 18/20 기사

Quote-left blue.png 柳畊, 以刑曹言啓曰, 禮曹啓辭內, 卽接孝昌墓守衛官所報, 則墓所南邊相望之地, 蔓草川路傍, 自丁未年, 列植柳木, 以爲蔽遮行人, 而宜嬪墓典監, 犯斫九株發賣云。 聞極驚駭, 發遣郞廳摘奸, 則此距墓所, 爲三里許, 而路傍田畔, 從前有柳木之列植者, 丁未以後, 自墓所, 間間補植, 以爲叢翳之地, 而其傍店舍之後, 又有如干莎植之柳木, 此則以其民家之後, 雖不補植, 亦在於墓所管領中, 而卽者宜嬪墓典監尹光殷, 斫取其大柳木十株, 散賣的實矣。 雖非火巢近地, 又與補植有異, 而旣在墓所禁養之內, 則身爲典監, 無難犯斫, 究厥所爲, 萬萬痛駭。 其罪狀, 令攸司照法嚴處, 何如? 傳曰, 允事, 命下矣。 謹按律文, 則大典通編栽植條有曰, 京城內外山立標處代[伐]木者, 杖九十。 尹光殷, 依此律照勘, 決杖九十後, 放送之意, 敢啓。 傳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919책(탈초본 101책), 순조 6년(1806) 11월 6일 기유(己酉) 18/20 기사



『승정원일기』 1924책(탈초본 102책), 순조 7년(1807) 3월 2일 갑진(甲辰) 16/17 기사

Quote-left blue.png 丁卯三月初二日辰時, 上御誠正閣。 在院承旨入侍時, 行都承旨鄭東觀, 行左承旨洪義浩, 右承旨李文會, 左副承旨柳畊, 同副承旨金魯敬, 假注書趙庭和·金學淳, 記注官盧KC04283, 記事官鄭觀綏, 檢校待敎朴宗薰, 以次進伏訖。 上曰, 昨日黃海監司狀啓封進委折, 果已査實耶? 文會曰, 監司今方行巡云, 以其巡到所之距京稍近, 故似如是速到矣。 上命都承旨·左副承旨先退, 東觀·畊退出。文會曰, 昨日禁府啓目啓下者, 合爲五度, 而院吏出給該府之際, 一度漏落, 不知去處, 達宵終朝, 連爲査實, 終未推得, 臣之矇然不飭, 不勝惶悚, 而院吏及院隷, 令攸司, 從重科治, 何如? 上曰, 其委折, 同副承旨出去, 更爲詳査以入, 魯敬承命退出。少頃, 還入奏曰, 出去査實, 則啓目五度, 昨日昏後, 院吏授院隷, 院隷從門隙出給當直書吏, 而該吏受而照檢, 則一度漏落云, 故卽爲入來, 推尋院中, 則書吏置簿, 明有出給五度之文蹟, 而一度漏落者, 終無推覓之道云矣。 上曰, 禁府啓目, 異於他文書, 則今此閪失, 有關後弊, 不可歇勘, 院吏·院隷及當直書吏, 竝令秋曹, 嚴査究問以啓, 可也。 上命義浩, 書傳敎曰, 健元陵·元陵親祭祭文, 顯陵·穆陵·徽陵·崇陵·懿陵·惠陵遣大臣攝行祭祭文, 竝當親撰以下矣, 仍命義浩, 書健元陵親祭祭文, 淸晨駕發, 兩陵祗謁, 感慕冞深, 周旋怳惚, 久未展誠, 其年也四, 祗薦洞酌, 小子誠至, 元陵親祭祭文, 三霜已畢, 四來展誠, 仙寢密邇, 天氣和淸, 感慕之極, 愈往愈深, 有淚加瀉, 不覺沾襟, 六陵遣大臣攝行祭祭文, 兩陵展謁, 松楸密邇, 情無間焉, 理或俯只, 孝安殿禫祭親祭祭文, 日月易邁, 三霜已畢, 俯仰穹壤, 靡逮如失, 吉祥變易, 惟禮之禫, 祗薦泂酌, 小子孝感。孝安殿望祭親祭祭文, 禫祀已過, 望祭其至, 銜恤靡逮, 小子誠意。孝安殿朔祭兼告動駕祭文, 祔廟時近, 靈駕將戒, 祗告事由, 小子其拜。文禧廟酌獻禮親祭祭文, 維嘉慶十二年歲次, 丁卯三月癸卯朔十七日己未, 國王敢昭告于文孝世子, 伏以仁孝其德, 溫文其姿, 未逮承顔, 孔懷我思, 壬年之慶, 溢于八方, 甲辰儲位, 磐泰宗祊, 先王歡悅, 殿宮祝嘏, 臣民不弔, 嗚呼, 丙午嗣服之後, 不遑躬來, 齎志未遂, 耿耿懷哉。八年之闕, 三月其謁, 幽明豈隔, 若覿音容, 周旋怳惚, 同氣之情, 一宮之內, 未能進拜, 咫尺之地, 瞻望興喟, 替斟其酌, 遣官致祭, 二南其化, 極盡小嘒, 具告事由, 展拜之夕, 昭薦苾馨, 庶幾歆格, 謹以淸酌庶羞, 式陳明薦尙饗。宜嬪廟遣內侍致祭祭文, 小星其職, 德冠後宮, 先王曰嘉, 克追周風, 嗣服之後, 感于心衷, 諸宮展謁, 今日其同, 甲辰邦慶, 壬寅之功, 月建甲辰, 若有期逢, 文禧廟拜, 其親也兄, 敬薦𨡜酭, 酌獻禮成, 未能進拜, 咫尺之地, 遣官替酌, 庶幾歆只。上命義浩, 書傳敎曰, 近來兵曹之擧行, 全不成樣, 政院之察飭, 反致生頉, 兵曹判書, 從重推考, 旣在一院之長, 都承旨亦爲從重推考。上命文會, 讀奏刑曹罪人文璘聖議律啓目, 文會曰, 似此罪犯, 關係甚重, 當以極律施行矣。 義浩·魯敬·宗薰等, 齊聲奏曰, 文璘聖之屢次作罪於莫重之地, 此與眚災有異, 斷當施以極律矣。 上命文會書判付。義浩曰, 今番生進謝恩日, 與幸行日子相値, 進定退行間, 合有變通之道矣。 上曰, 進定, 可也。 上命閣臣先退, 宗薰退出。 仍命退, 承史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924책(탈초본 102책), 순조 7년(1807) 3월 2일 갑진(甲辰) 16/17 기사



『승정원일기』 1925책(탈초본 102책), 순조 7년(1807) 4월 11일 계미(癸未) 23/23 기사

Quote-left blue.png 丁卯四月十一日酉時, 上御誠正閣。 坐直承旨入侍時, 左承旨李文會, 同副承旨朴宗薰, 假注書趙奎昇, 記事官李若洙·鄭觀綏, 以次進伏訖。 上敎曰, 今日大臣入來乎? 宗薰曰, 左議政未及入來, 而鰲恩君入來矣。 上敎文會曰, 鄭萬始揭板事, 果知之乎? 文會曰, 此是年久之事, 故未能詳知, 而雖以兵曹一處言之, 蓋聞揭板尙存云矣。 上曰, 自在先朝, 有撤去揭板之敎, 而未及撤去者也。 分付各司, 一竝撤去揭板, 自政院, 申飭, 使之斯速承牌, 可也。 因敎曰, 放未放冊子中, 刑曹所關發掘群塚, 强奸未成已成魘魅蠱毒, 凌辱士夫之類, 抄錄以入, 可也。 敎宗薰曰, 再明日擧動時, 當先行文禧廟酌獻禮, 而次詣毓祥宮, 輦路果順便乎? 宗薰曰, 然矣。 因命書傳敎曰, 今番宜嬪廟, 遣內侍致祭, 祭物, 令各該司措備。 文會奏曰, 向日傳敎中, 文武科唱榜, 以便殿爲之事命下, 而今番唱榜, 則異於生進唱榜, 百官例皆陳賀矣, 不無狹窄之慮, 何以爲之乎? 上命書傳敎曰, 十八日文武科放榜, 處所, 以春塘臺親臨磨鍊。 又命書傳敎曰, 十九日文武新恩謝恩, 當親受, 處所, 以便殿爲之, 該房知悉。 敎于宗薰曰, 唱榜時軒架節次, 依例擧行。 命退, 承史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925책(탈초본 102책), 순조 7년(1807) 4월 11일 계미(癸未) 23/23 기사



『승정원일기』 1925책(탈초본 102책), 순조 7년(1807) 4월 13일 계미(癸未) 23/23 기사

Quote-left blue.png 丁卯四月十一日酉時, 上御誠正閣。 坐直承旨入侍時, 左承旨李文會, 同副承旨朴宗薰, 假注書趙奎昇, 記事官李若洙·鄭觀綏, 以次進伏訖。 上敎曰, 今日大臣入來乎? 宗薰曰, 左議政未及入來, 而鰲恩君入來矣。 上敎文會曰, 鄭萬始揭板事, 果知之乎? 文會曰, 此是年久之事, 故未能詳知, 而雖以兵曹一處言之, 蓋聞揭板尙存云矣。 上曰, 自在先朝, 有撤去揭板之敎, 而未及撤去者也。 分付各司, 一竝撤去揭板, 自政院, 申飭, 使之斯速承牌, 可也。 因敎曰, 放未放冊子中, 刑曹所關發掘群塚, 强奸未成已成魘魅蠱毒, 凌辱士夫之類, 抄錄以入, 可也。 敎宗薰曰, 再明日擧動時, 當先行文禧廟酌獻禮, 而次詣毓祥宮, 輦路果順便乎? 宗薰曰, 然矣。 因命書傳敎曰, 今番宜嬪廟, 遣內侍致祭, 祭物, 令各該司措備。 文會奏曰, 向日傳敎中, 文武科唱榜, 以便殿爲之事命下, 而今番唱榜, 則異於生進唱榜, 百官例皆陳賀矣, 不無狹窄之慮, 何以爲之乎? 上命書傳敎曰, 十八日文武科放榜, 處所, 以春塘臺親臨磨鍊。 又命書傳敎曰, 十九日文武新恩謝恩, 當親受, 處所, 以便殿爲之, 該房知悉。 敎于宗薰曰, 唱榜時軒架節次, 依例擧行。 命退, 承史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925책(탈초본 102책), 순조 7년(1807) 4월 11일 계미(癸未) 23/23 기사



『승정원일기』 1932책(탈초본 102책), 순조 7년(1807) 8월 24일 계사(癸巳) 12/12 기사

Quote-left blue.png 丁卯八月二十四日辰時, 上御誠正閣。 右副承旨·同副承旨入侍時, 右副承旨申絢, 同副承旨朴宗薰, 假注書李憲琦, 記注官李昌心, 記事官朴周壽, 以次進伏訖。 上曰, 上番出去, 在院公事持入, 可也。 昌心承命出去, 持公事還入進伏。 上命讀公事。 宗薰, 絢分讀訖。 上命書判付。 絢曰, 俄者懿陵·宗廟·景慕宮奉審有命, 而臣今入侍矣。 小臣當先退奉審, 故敢此仰達矣。 上曰, 入侍罷後, 出去奉審, 可也。 上曰, 嬪墓歷臨與否, 考例以入, 宜嬪墓致祭祭文, 同副製進, 可也。 仍命書傳敎曰, 孝昌墓展拜後, 宜嬪墓, 當遣內侍致祭, 祭文, 令閣臣代撰以入。 仍命退, 承史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932책(탈초본 102책), 순조 7년(1807) 8월 24일 계사(癸巳) 12/12 기사



『승정원일기』 1933책(탈초본 102책), 순조 7년(1807) 9월 1일 기해(己亥) 12/14 기사

Quote-left blue.png 丁卯九月初一日辰時, 上自始興行宮, 還詣孝昌墓, 親祭擧動入侍時, 行都承旨鄭東觀, 行左承旨韓致應, 右承旨李文會, 左副承旨柳畊, 右副承旨洪樂淵, 同副承旨申絢, 記事官洪起燮, 假注書李憲琦, 記注官盧KC04283, 記事官朴周壽, 檢校直閣沈象奎·洪奭周, 檢校待敎朴宗薰, 待敎朴綺壽以次侍立。 時至, 通禮啓外辦。 上具軍服, 出幄次。 左議政李時秀進曰, 連日勞動, 聖體, 若何? 上曰, 一樣矣。 時秀曰, 俄聞右相, 進詣輦路, 故敢此仰達矣。 通禮啓請乘馬。 上乘馬, 仍進發, 至龍驤鳳翥亭。 通禮啓請下馬。 上下馬, 入御幄次。 少頃, 通禮啓外辦。 上具戎服, 出幄次, 通禮啓請乘馬, 上乘馬, 臨鷺梁舟橋。 兵曹判書韓晩裕, 跪稟渡涉節次, 宣傳官如法擧行訖。 大駕渡橋, 至孝昌墓洞外。 右議政金載瓚祇迎路左。 上駐馬, 敎曰, 聞卿入來, 誠爲萬幸, 而路次入侍, 亦多非便, 當於齋室入侍, 注書出往, 傳諭于右議政。 賤臣承命出傳。 載瓚曰, 旣伏承昨日下敎, 他不暇顧, 進伏輦路, 而咫尺之地, 轉動無路, 齋室入侍之命, 不敢承當矣。 賤臣以此還奏。 上曰, 旣已入來, 則事當入侍, 旣入侍則不可以野服進見, 以戎服入侍, 而肅拜單子, 亦爲進呈之意, 更爲傳諭, 可也。 賤臣承命出傳。 載瓚曰, 連伏承下敎, 感激隕越, 不知所達, 而入侍之命, 萬萬不敢當, 惟鈇鉞之誅是俟矣。 賤臣以此還奏。 上曰, 墓所行禮, 不可遲滯, 聞卿承膺之語, 然後當進發, 此意更諭, 可也。 賤臣承命出傳, 載瓚曰, 聖敎至此, 臣謹當於前席陳達矣。 上進發, 入墓所洞口, 通禮啓請下馬, 上下馬乘輿, 至齋室門外, 通禮啓請降輿, 上降輿入齋室門, 入御幄次。 入齋室後問安勿爲之。 出榻敎 傳曰, 孝昌墓展拜後, 宜嬪墓當歷臨, 該房知悉。 出傳敎 少頃, 通禮啓外辦。 上具翼善冠·衮龍袍, 出幄次。 至齋室門外。 通禮啓請乘輿, 上乘輿, 至紅箭門外。 通禮啓請降輿, 上降輿入展拜版位。 引儀唱鞠躬再拜興平身, 上行再拜禮。 仍詣墓上, 奉審一回, 詣碑閣奉審訖。 通禮啓請行禮。 上詣親祭版位。 引儀唱鞠躬再拜興平身, 上行再拜禮。 上詣尊所。 東觀酌酒, 絢受酒。 上詣神位前。 贊禮啓請三上香。 東觀奉香, 絢奉爐, 上三上香。 贊禮啓請執爵·獻爵。 東觀奉爵以進, 上執爵授絢, 絢奉奠于神座前。 大祝呂東植跪讀祝文訖。 上降復位。 亞獻官·終獻官, 行亞獻·終獻禮如儀訖。 引儀唱鞠躬再拜興平身, 上行再拜禮。 贊禮導上詣望燎位, 燎訖。 贊禮導上詣版位。 引儀唱鞠躬再拜興平身, 上行再拜禮。 出紅箭門。 通禮啓乘輿。 上乘輿, 仍詣宜嬪墓。 通禮啓請降輿, 上降輿詣墓上, 巡審一回訖。 通禮啓請乘輿。 上乘輿, 還詣齋室。 親祭罷後, 問安勿爲之。 出榻敎 諸臣以次侍立。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933책(탈초본 102책), 순조 7년(1807) 9월 1일 기해(己亥) 12/14 기사



『승정원일기』 1986책(탈초본 104책), 순조 10년(1810) 7월 1일 계축(癸丑) 10/62 기사

Quote-left blue.png 傳于金宗善曰, 還宮日, 當詣孝昌墓展拜親祭, 宜嬪墓遣內侍祭, 該房知悉。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986책(탈초본 104책), 순조 10년(1810) 7월 1일 계축(癸丑) 10/62 기사



『승정원일기』 1987책(탈초본 104책), 순조 10년(1810) 8월 28일 경술(庚戌) 17/33 기사

Quote-left blue.png 傳于洪義浩曰, 䄙嬪墓·宜嬪墓, 遣內侍致祭, 愍懷墓, 遣禮堂致祭, 延齡君墓·永昌大君墓·海昌尉墓·闕里祠·文正公趙光祖·靑海伯李之蘭·故學生李皐祠版·梅谷書院·明皐書院, 竝遣禮官致祭。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987책(탈초본 104책), 순조 10년(1810) 8월 28일 경술(庚戌) 17/33 기사



『승정원일기』 2030책(탈초본 106책), 순조 13년(1813) 7월 2일 병인(丙寅) 12/14 기사

Quote-left blue.png 傳于尹命烈曰, 宜嬪宮回甲, 在於今年今月初八日, 當日遣內侍致祭。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987책(탈초본 104책), 순조 10년(1810) 8월 28일 경술(庚戌) 17/33 기사



『승정원일기』 2220책(탈초본 113책), 순조 27년(1827) 8월 21일 갑오(甲午) 13/22 기사

Quote-left blue.png 權敦仁, 以戶曹言達曰, 謹奉下令, 宜嬪廟正堂雨漏, 正門風板, 移安廳薍簾修改吉日, 令日官崔福基推擇, 則九月初一日卯時爲吉云, 以此日時擧行之意, 敢達。 令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220책(탈초본 113책), 순조 27년(1827) 8월 21일 갑오(甲午) 13/22 기사



『승정원일기』 2266책(탈초본 114책), 순조 31년(1831) 6월 10일 경인(庚寅) 20/22 기사

Quote-left blue.png 權敦仁, 以戶曹言啓曰, 謹奉傳敎, 宜嬪廟正堂簾帳等修改吉日, 令日官李秉源推擇, 則今六月十二日辰時爲吉云, 以此日時擧行之意, 敢啓。 傳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266책(탈초본 114책), 순조 31년(1831) 6월 10일 경인(庚寅) 20/22 기사



『승정원일기』 2412책(탈초본 119책), 헌종 9년(1843) 3월 16일 기미(己未) 8/15 기사

Quote-left blue.png 傳于金學性曰, 昌嬪·䄙嬪·宜嬪·延齡君·海昌尉墓, 遣內侍致祭。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412책(탈초본 119책), 헌종 9년(1843) 3월 16일 기미(己未) 8/15 기사



『승정원일기』 2412책(탈초본 119책), 헌종 9년(1843) 3월 29일 임신(壬申) 11/12 기사

Quote-left blue.png 鄭㝡朝, 以戶曹言啓曰, 謹奉傳敎, 宜嬪廟·文禧廟正堂簾帳等修改吉日時, 令日官金昌勳推擇, 則來四月十九日巽時爲吉云, 以此日時擧行之意, 敢啓。 傳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412책(탈초본 119책), 헌종 9년(1843) 3월 29일 임신(壬申) 11/12 기사



『승정원일기』 2455책(탈초본 120책), 헌종 12년(1846) 9월 12일 갑오(甲午) 11/11 기사

Quote-left blue.png 鄭㝡朝, 以戶曹言啓曰, 謹奉傳敎, 宜嬪廟·文禧廟正堂簾帳等修改吉日時, 令日官金昌勳推擇, 則來四月十九日巽時爲吉云, 以此日時擧行之意, 敢啓。 傳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2455책(탈초본 120책), 헌종 12년(1846) 9월 12일 갑오(甲午) 11/11 기사



『승정원일기』 2455책(탈초본 120책), 헌종 12년(1846) 9월 12일 갑오(甲午) 15/11 기사

Quote-left blue.png 上曰, 輦路過此, 墓所入望, 是年是月, 尤增興懷, 明日宜嬪墓, 遣內侍致祭。 出駕敎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2455책(탈초본 120책), 헌종 12년(1846) 9월 12일 갑오(甲午) 15/11 기사



『승정원일기』 2507책(탈초본 122책), 철종 1년(1850) 7월 11일 신축(辛丑) 27/32 기사

Quote-left blue.png 又以戶曹言啓曰, 宜嬪廟正堂簾帳等修改吉日時, 令日官田佑說推擇, 則七月二十日辰時爲吉云。 以此日時擧行之意, 敢啓。 傳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2507책(탈초본 122책), 철종 1년(1850) 7월 11일 신축(辛丑) 27/32 기사



『승정원일기』 2598책(탈초본 124책), 철종 8년(1857) 12월 21일 무진(戊辰) 6/9 기사

Quote-left blue.png 備邊司啓曰, 頃因京畿繡單, 通津復戶結, 令道臣定價報來之意, 覆啓行會矣。 卽見該監司李晉翼所報, 則以爲, 宣禧墓·宜嬪墓·孝昌墓軍復戶, 靑川府院君房, 咸原府院君房復戶, 每結以十二兩五錢, 定價遵行, 實爲便當爲辭矣。 道臣所報, 必有斟量而然矣。 依此施行之意, 永爲著式, 何如? 傳曰, 允。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2598책(탈초본 124책), 철종 8년(1857) 12월 21일 무진(戊辰) 6/9 기사



『승정원일기』 2637책(탈초본 125책), 철종 12년(1861) 2월 6일 갑자(甲子) 17/17 기사

Quote-left blue.png 傳曰, 宜嬪墓, 遣內侍致祭。 出傳敎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2637책(탈초본 125책), 철종 12년(1861) 2월 6일 갑자(甲子) 17/17 기사



『승정원일기』 2747책(탈초본 129책), 고종 7년(1870) 1월 2일 무진(戊辰) 12/27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대수(代數)가 지난 후 위판을 옮기는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제도이며 제왕들의 가법인데, 지금까지 의소(懿昭)의 묘를 옮기지 않은 것은 실로 처리할 여유가 없어서 그랬던 것이며, 각궁에 별도로 사당을 세운 것도 당시에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별묘에 합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하니, 인빈(仁嬪) 김씨, 영빈(寧嬪) 김씨, 화빈(和嬪) 윤씨의 사우는 경우궁 내의 별묘에, 희빈(禧嬪) 장씨, 정빈(靖嬪) 이씨, 영빈(暎嬪) 이씨, 의빈(宜嬪) 성씨의 사우는 육상궁내의 별묘에 합봉하고, 문효세자(文孝世子)의 사우는 의소묘 내의 별묘에 이봉할 것이니, 제반 의절을 호조와 예조 당상으로 하여금 대원군에게 품정하게 하여 거행토록 분부하라.” 하였다.

傳曰, 親盡而祧, 卽莫越之制, 而亦自古帝王家法然, 而惟獨懿昭墓之尙未祧遷, 實是未遑之事也。 且各宮之別立廟貌, 在當時, 雖不可闕, 而然矣。 到今, 則亦宜合奉於一處別廟, 正合事宜, 仁嬪金氏·寧嬪金氏·和殯尹氏祠宇, 合奉於景祐宮內別廟, 禧嬪張氏·靖嬪李氏·暎嬪李氏·宜嬪成氏祠宇, 合奉於毓祥宮內別廟, 文孝世子祠宇, 移奉於懿昭墓內別廟, 諸般儀節, 令戶禮堂稟定於大院君前, 擧行事, 分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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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747책(탈초본 129책), 고종 7년(1870) 1월 2일 무진(戊辰) 12/27 기사



『승정원일기』 2747책(탈초본 129책), 고종 7년(1870) 1월 3일 기사(己巳) 19/25 기사

Quote-left blue.png 예조가 아뢰기를, “전일 전교하시기를, ‘대수가 지난 뒤 묘주를 옮기는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제도이거니와 예로부터 재왕들의 가법인데, 유독 지금까지 의소의 묘를 옮기지 않은 것은 실로 처리할 여유가 없어서였으며, 각궁에 사당을 세운 것도 당시에는 어쩔 수 없는 처사였다. 그러나 이제는 한 곳의 별묘에 합봉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하니, 인빈 김씨, 화빈 윤씨의 사우는 경우궁 내의 별묘에, 희빈 장씨, 정빈 이씨, 영빈 이씨, 의빈 성씨의 사우는 육상궁 내의 별묘에 합봉하고, 문효세자의 사우는 의소묘 내 별묘에 옮길 것이니, 제반 의절을 호조와 예조의 당상으로 하여금 대원군에게 품정하게 하여 거행토록 분부하라.’고 명하였으며, 또 전교하기를 ‘의소 세손의 대수가 지났으니 순회ㆍ소현 두 세자의 예에 따라 문주를 묻어야 할 것이나 자교가 있었으니 우선 영녕전으로 옮기라.’고 명하였습니다. 이에 진오(鎭五)가 하교를 받들어 대원군에게 품정하니, 대원군이 이르기를, ‘의소 묘주는 이미 옮겼으니, 향사의 규식은 저경궁이나 연호궁의 예를 따르고, 각궁 묘주의 합봉 절차는 모두 성교를 따라 거행하라. 그리고 대빈궁(大嬪宮)에서 아직껏 사시 절향을 거행하는 것은 미처 처리하지 못한 일이라고는 하나 저경궁이나 연호궁의 예를 따라 정하여 행하는 것이 실로 사리에 합당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하니 의소묘(懿昭廟)에는 금년부터 춘추 향사만 거행하게 하고, 의소묘(懿昭廟)에는 한식의 제사만 거행하게 하며, 문희묘와 의소묘의 합봉 절차는 예조에서 날짜를 가리어 거행하게 하고, 대빈궁 향사도 금년부터는 저경궁이나 연호궁의 예를 따라 거행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禮曹啓曰, 傳曰, 親盡而祧, 卽莫越之制, 而亦自古帝王家法也。 惟獨懿昭廟之尙未祧遷, 實是未遑之事也。 且各宮之各立廟貌, 在當時雖不可闕而然矣, 到今則亦宜合奉於一處別廟, 正合事宜。 仁嬪金氏·和嬪尹氏祠宇, 合奉于景祐宮內別廟, 禧嬪張氏·靖嬪李氏·暎嬪李氏·宜嬪成氏祠宇, 合奉于毓祥宮內別廟, 文孝世子祠宇, 移奉于懿昭廟內別廟, 諸般儀節, 令戶·禮堂稟定于大院君前, 擧行事, 分付事, 命下。 又傳曰, 懿昭世孫, 旣已親盡, 則當依順懷·昭顯兩世子例, 祧埋廟主, 而旣承慈敎, 姑以祧遷爲之事, 命下矣。 臣鎭五, 謹奉下敎, 稟定于大院君前, 則懿昭廟主, 旣行祧遷, 則享祀規式, 一依儲慶宮·延祐宮[延祜宮]例爲之, 各宮廟主合奉之節, 竝依聖敎擧行, 而大嬪宮之尙行四時節享, 係是未遑之事也, 亦依儲慶宮·延祐宮[延祜宮]例定行, 實合事宜爲敎矣。 懿昭廟, 自今年爲始, 只行春秋享, 懿昭墓, 只行寒食一祭, 而文禧廟合奉懿昭廟節次, 自臣曹擇日擧行, 大嬪宮享事, 亦自今年爲始, 一依儲慶宮·延祐宮[延祜宮]例擧行事, 分付, 何如? 傳曰, 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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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747책(탈초본 129책), 고종 7년(1870) 1월 3일 기사(己巳) 19/25 기사



『승정원일기』 2747책(탈초본 129책), 고종 7년(1870) 1월 20일 병술(丙戌) 17/19 기사

Quote-left blue.png 호조가 아뢰기를, “저경궁, 화빈묘, 대빈궁, 연호궁, 선희궁, 의빈묘의 사우를 합봉할 터 마련하는 일을 이달 20일부터 시작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안과 환안의 고유(告由)를 해조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戶曹啓曰, 儲慶宮·和嬪廟·大嬪宮·延祜宮·宣禧宮·宜嬪廟祠宇, 合奉基址始役, 今正月二十一日擧行事, 命下矣。 移還安告由, 令該曹擧行, 何如? 傳曰, 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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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747책(탈초본 129책), 고종 7년(1870) 1월 20일 병술(丙戌) 17/19 기사



『승정원일기』 2748책(탈초본 129책), 고종 7년(1870) 2월 26일 임술(壬戌) 4/7 기사

Quote-left blue.png 호조가 아뢰기를, “대빈궁(大嬪宮)ㆍ연호궁(延祜宮)ㆍ선희궁(宣禧宮)ㆍ의빈(宜嬪) 사우(祠宇)의 정초(定礎)는 4월 9일, 입주(立柱)는 같은 달 13일, 상량(上樑)은 14일 묘시, 화빈(和嬪) 사우의 정초는 4월 9일, 입주는 같은 달 13일, 상량은 17일 자시가 특별히 길하다고 합니다. 모두 이 일시(日時)로 정하여 행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戶曹啓曰, 大嬪宮·延祜宮·宣禧宮·宜嬪祠宇定礎, 四月初九日, 立柱, 同月十三日, 上樑, 十四日卯時, 和嬪祠宇定礎, 四月初九日, 立柱, 同月十三日, 上樑, 十七日子時爲吉云。 竝以此日時, 定行之意, 敢啓。 傳曰, 知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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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748책(탈초본 129책), 고종 7년(1870) 2월 26일 임술(壬戌) 4/7 기사



『승정원일기』 2751책(탈초본 129책), 고종 7년(1870) 5월 20일 을유(乙酉) 10/11 기사

Quote-left blue.png 이어 적도록 명하고 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에 내시를 보내어 봉심하게 하고, 의빈묘(宜嬪廟)에 내시를 보내어 간심하게 하라.”하였다.

仍命書傳敎曰, 禧嬪廟, 遣內侍奉審, 宜嬪廟, 遣內侍看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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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751책(탈초본 129책), 고종 7년(1870) 5월 20일 을유(乙酉) 10/11 기사



『승정원일기』 2756책(탈초본 129책), 고종 7년(1870) 10월 7일 기해(己亥) 7/31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의빈묘(宜嬪墓)에 내시를 보내어 간심하고 오라.” 하였다.

傳曰, 宜嬪墓, 遣內侍, 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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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756책(탈초본 129책), 고종 7년(1870) 10월 7일 기해(己亥) 7/31 기사



『승정원일기』 2756책(탈초본 129책), 고종 7년(1870) 10월 7일 기해(己亥) 32/31 기사

Quote-left blue.png 이어, 쓰라고 명하고 전교하기를, “의빈묘(宜嬪墓), 흥인군 부인(興寅君夫人)묘, 영온옹주(永溫翁主)묘, 박 숙의(朴淑儀)묘, 화빈묘(和嬪墓)에 내시를 보내 간심하고 오라.”하였다.

仍命書傳敎曰, 宜嬪墓·興寅君夫人墓·永溫翁主·朴淑儀墓·和嬪墓, 遣內侍, 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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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756책(탈초본 129책), 고종 7년(1870) 10월 7일 기해(己亥) 32/31 기사



『승정원일기』 2761책(탈초본 129책), 고종 8년(1871) 2월 30일 경인(庚寅) 8/22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의빈(宜嬪)의 사우(祠宇)에 내시를 보내어 살펴보고 오라.” 하였다.

傳曰, 宜嬪祠宇, 遣內侍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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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761책(탈초본 129책), 고종 8년(1871) 2월 30일 경인(庚寅) 8/22 기사



『승정원일기』 2761책(탈초본 129책), 고종 8년(1871) 2월 30일 경인(庚寅) 21/22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의빈의 사우에 내시를 보내어 살펴보고 오라.” 하였다. - 전교를 냄 -

傳曰, 宜嬪祠宇, 遣內侍看審以來。 出傳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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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761책(탈초본 129책), 고종 8년(1871) 2월 30일 경인(庚寅) 21/22 기사



『승정원일기』 2775책(탈초본 130책), 고종 9년(1872) 4월 2일 을묘(乙卯) 8/19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의빈(宜嬪)의 사우(祠宇)에 중관을 보내 간심하여 오게 하라.” 하였다.

傳曰, 宜嬪祠宇, 遣內侍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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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775책(탈초본 130책), 고종 9년(1872) 4월 2일 을묘(乙卯) 8/19 기사



『승정원일기』 2775책(탈초본 130책), 고종 9년(1872) 4월 2일 을묘(乙卯) 18/19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의빈묘(宜嬪廟)에 내시를 보내어 간심하여 오도록 하라.” 하였다. - 전교를 냄 -

傳曰, 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 出傳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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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775책(탈초본 130책), 고종 9년(1872) 4월 2일 을묘(乙卯) 18/19 기사



『승정원일기』 2786책(탈초본 130책), 고종 10년(1873) 3월 22일 경자(庚子) 12/12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희빈묘와 의빈묘를 내시가 봉심하고 오라.” 하였다. - 전교를 냄

傳曰, 禧賓廟·宜嬪廟, 遣內侍, 看審以來。 出傳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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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786책(탈초본 130책), 고종 10년(1873) 3월 22일 경자(庚子) 12/12 기사



『승정원일기』 2799책(탈초본 130책), 고종 11년(1874) 3월 5일 정미(丁未) 36/38 기사

Quote-left blue.png 상이 이르기를, “무과(武科)에서 삭천(削薦)된 사람들 가운데 육상궁(毓祥宮)과 선희궁(宣禧宮)의 본가 사람으로서 삭천된 자들은 모두 천망을 복구하는 것이 좋겠다.”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이는 진실로 응당 행해야 할 일입니다. 연석에 오른 장신에게 분부하여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장신은 이를 거행하라.” 하니, 이경하가 아뢰기를, “삼가 하교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최성(崔姓)도 이미 장수의 직임을 맡고 있고 이성(李姓)도 또한 평안 병사가 된 사람이 있으니, 그 후예로서 선천(宣薦)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과연 매우 억울한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대에서 공을 세운 사람은 비록 상민이나 천민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차례에 구애받지 않고 발탁하여 등용할 수 있는데, 하물며 양궁(兩宮)의 사친(私親) 본가 사람에 있어서이겠는가. 의빈 성씨(宜嬪成氏)의 가문도 또한 삭천 가운데 들어 있었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성씨 가문도 또한 마찬가지로 천망을 복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마찬가지로 거행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경하가 아뢰기를, “삼가 마찬가지로 천망을 복구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응당 천망을 복구해야 하는 자가 몇 사람이나 되는가?” 하니, 이경하가 아뢰기를,“합하여 200여 명인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모두 복구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세 성씨는 모두 천망을 복구하고, 그 나머지는 합당한 사람이 있을 때마다 시행하는 것이 좋겠다.”하니, 이경하가 아뢰기를, “삼가 하교대로 하겠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는 문관 괴원(槐院)의 선발과 서로 같다. 그러므로 문무(文武)에 각각 삼천(三薦)이 있는 것이다.”하니, 이유원이 그렇다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약 천망을 복구하면 삼군부에서 단자로 입계해야 하는가?”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천망을 복구하는 것은 선전관청에서 하고, 단자는 삼군부에서 계하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는 연전의 새로운 정식이다. 서북인(西北人)으로서 삭천된 자는 관안(官案)에 있을 듯하다.”하니, 이유원이 그렇다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문신의 분관(分館)에도 또한 선택하는 일이 있다.”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그전에는 분관한 뒤에 대신(大臣)이 선택하여 과연 올리고 내리는 거조가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괴원에서 혹 국자감으로 내려가고, 국자감에서 혹 운각으로 내려가는 것은 그 가운데에 매양 공론에 흡족하지 못한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니, 박규수가 아뢰기를, “매번 이 때문에 소란스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먼 지방의 사람에 대해서는 그의 문벌을 상세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정말 그렇습니다. 서울의 사부(士夫) 집에 대해서야 어찌 이런 소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上曰, 武科削薦中, 毓祥宮·宣禧宮, 本家人之削薦者, 竝復薦, 好矣。 裕元曰, 此誠當行之事, 分付登筵將臣, 使之擧行, 恐好矣。 上曰, 將臣, 以此擧行也。 景夏曰, 謹當依下敎擧行矣。 崔姓旣爲將任, 李姓亦有爲平安兵使者, 其俊裔之不得爲宣薦, 果甚抑鬱矣。 上曰, 軍功人, 雖常賤, 尙得不次擢用, 況兩宮私親之本家人乎? 宜嬪成氏家, 亦入削薦中矣。 裕元曰, 成氏家, 亦可一體復薦矣。 上曰, 一體擧行, 可也。 景夏曰, 謹當一體復薦矣。 上曰, 可合復薦者, 合爲幾人乎? 景夏曰, 合爲二百餘人, 而有難一朝遽然竝復矣。 上曰, 三姓則盡爲復薦, 其餘則隨其可合人, 施之, 可也。 景夏曰, 謹依下敎矣。 上曰, 此與文官槐選, 相同, 故文武各有三薦矣。 裕元曰, 然矣。 上曰, 若復薦則當自三軍府, 單子入啓乎? 裕元曰, 復薦, 自宣傳官廳爲之, 而單子, 自三軍府啓下矣。 上曰, 此是年前新定式也。 西北人削薦者, 似在官案矣。 裕元曰, 然矣。 上曰, 文臣分館, 亦有揀擇之事矣。 裕元曰, 其前分館後, 大臣揀擇, 果有陞降之擧矣。 上曰, 槐或降國, 國或降芸者, 其中每有不協公論故也。 珪壽曰, 每以此紛紜矣。上曰, 遠方人則其地閥, 未可詳知故也。 裕元曰, 誠然矣。 京華士夫家, 豈有此紛紜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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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799책(탈초본 130책), 고종 11년(1874) 3월 5일 정미(丁未) 36/38 기사



『승정원일기』 2799책(탈초본 130책), 고종 11년(1874) 3월 7일 기유(己酉) 27/27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賓廟)에는 내시를 보내 간심(看審)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傳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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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799책(탈초본 130책), 고종 11년(1874) 3월 7일 기유(己酉) 27/27 기사



『승정원일기』 2811책(탈초본 131책), 고종 12년(1875) 3월 29일 병인(丙寅) 27/27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대빈묘(大嬪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내시를 보내어 살펴보고 오게 하라.” 하였다.

上命書傳敎曰, 大嬪廟·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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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811책(탈초본 131책), 고종 12년(1875) 3월 29일 병인(丙寅) 27/27 기사



『승정원일기』 2824책(탈초본 131책), 고종 13년(1876) 4월 12일 계유(癸酉) 16/16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희빈묘, 의빈묘에 내시를 보내 살펴보고 오게 하라.”하였다. - 전교를 냄 -

傳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 看審以來。 出傳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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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824책(탈초본 131책), 고종 13년(1876) 4월 12일 계유(癸酉) 16/16 기사



『승정원일기』 2828책(탈초본 131책), 고종 13년(1876) 7월 18일 병자(丙子) 14/14 기사

Quote-left blue.png 쓰라 명하고 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賓廟)에 내시를 보내서 살펴보고 오도록 하라.”하였다.

命書傳敎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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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828책(탈초본 131책), 고종 13년(1876) 7월 18일 병자(丙子) 14/14 기사



『승정원일기』 2836책(탈초본 131책), 고종 14년(1877) 3월 9일 을축(乙丑) 19/22 기사

Quote-left blue.png 이어 봉심을 한 뒤에 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내시를 파견하여 간심하고 오게 하라.”하였다.

仍爲奉審後, 傳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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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836책(탈초본 131책), 고종 14년(1877) 3월 9일 을축(乙丑) 19/22 기사



『승정원일기』 2846책(탈초본 132책), 고종 15년(1878) 1월 29일 기묘(己卯) 9/9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내시를 보내 간심하고 오게 하라.” 하였다. - 전교를 냄 -

傳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 出傳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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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846책(탈초본 132책), 고종 15년(1878) 1월 29일 기묘(己卯) 9/9 기사



『승정원일기』 2855책(탈초본 132책), 고종 15년(1878) 10월 15일 신묘(辛卯) 12/22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내시를 보내어 살펴보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傳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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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855책(탈초본 132책), 고종 15년(1878) 10월 15일 신묘(辛卯) 12/22 기사



『승정원일기』 2855책(탈초본 132책), 고종 15년(1878) 10월 15일 신묘(辛卯) 22/22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내시를 보내어 살펴보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傳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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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855책(탈초본 132책), 고종 15년(1878) 10월 15일 신묘(辛卯) 22/22 기사



『승정원일기』 2879책(탈초본 133책), 고종 17년(1880) 9월 6일 경오[신미] 20/20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 의빈묘(宜嬪廟)를 내시를 보내 간심하여 오도록 하라.” 하였다. - 전교를 냄 -

傳曰, 禧嬪廟·宜嬪廟遣內侍, 看審以來。 出傳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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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879책(탈초본 133책), 고종 17년(1880) 9월 6일 경오[신미] 20/20 기사



『승정원일기』 2886책(탈초본 133책), 고종 18년(1881) 4월 9일 경자(庚子) 10/27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嬪廟)로 내시를 보내어 살펴보고 오라.” 하였다.

傳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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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886책(탈초본 133책), 고종 18년(1881) 4월 9일 경자(庚子) 10/27 기사



『승정원일기』 2898책(탈초본 133책), 고종 19년(1882) 3월 20일 병오(丙午) 24/24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내시를 보내어 탈이 없는지 살펴보고 오게 하라.” 하였다.

傳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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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898책(탈초본 133책), 고종 19년(1882) 3월 20일 병오(丙午) 24/24 기사



『승정원일기』 2907책(탈초본 134책), 고종 19년(1882) 12월 15일 정묘(丁卯) 48/49 기사

Quote-left blue.png 또 쓰라고 명하고 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賓廟)는 내시(內侍)를 보내 간심(看審)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又命書傳敎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 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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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907책(탈초본 134책), 고종 19년(1882) 12월 15일 정묘(丁卯) 48/49 기사



『승정원일기』 2908책(탈초본 134책), 고종 20년(1883) 1월 29일 신해(辛亥) 42/42 기사

Quote-left blue.png 또 쓰라고 명하고 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내시를 보내어 간심하고 오게 하라.” 하였다.

又命書傳敎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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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908책(탈초본 134책), 고종 20년(1883) 1월 29일 신해(辛亥) 42/42 기사



『승정원일기』 2916책(탈초본 134책), 고종 20년(1883) 9월 28일 을사(乙巳) 23/23 기사

Quote-left blue.png 또 쓰라고 명하고 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내시를 보내어 간심하고 오게 하라.” 하였다.

又命書傳敎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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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916책(탈초본 134책), 고종 20년(1883) 9월 28일 을사(乙巳) 23/23 기사



『승정원일기』 2922책(탈초본 134책), 고종 21년(1884) 4월 5일 기유(己酉) 17/17 기사

Quote-left blue.png 전교하기를, “희빈묘(禧嬪廟)와 의빈묘(宜嬪廟)에 내시를 보내어 간심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傳曰, 禧嬪廟·宜嬪廟, 遣內侍, 看審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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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2922책(탈초본 134책), 고종 21년(1884) 4월 5일 기유(己酉) 17/17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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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문헌

  •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능원묘천봉안(陵園墓遷奉案)』, 1929 ~ 1945,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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