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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2대 왕 정조의 후궁, 원빈 풍산홍씨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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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 22대왕 정조(正祖)의 후궁인 원빈 홍씨의 묘(1766~1779)이다. 원빈 홍씨의 본관은 풍산이고, 아버지는 홍낙춘(洪樂春)이며 홍국영(洪國榮)의 누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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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8년(정조 2) 6월 정조의 후궁이 되며 원빈(元嬪)이라 작호와 함께 숙창(淑昌)이라는 궁호(宮號)를 받았다. 같은 달 6월 27일에 가례가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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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9년(정조 3) 5월 사망하자 정조는 희정당(熙政堂)에서 거애(擧哀)하였고 백관들은 선화문(宣化門) 밖에서 조애(助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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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홍국영의 기세로 인해 일부에서는 참람된 예를 적용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시행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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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는 인숙(仁淑)이라 하고 궁호(宮號)를 효휘(孝徽), 원호(園號)를 인명(仁明)이라고 추증하였다. 후에 인명원이라 칭하는 것은 참람 되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1786년(정조 10) 원호를 박탈하고는 수진궁에서 제사를 거행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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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빈 홍씨는 처음에 오늘날의 서울 성북구 안암동 일대에 안장되었다가 1949년 6월 서삼릉 경내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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伏以仁淑元嬪。奄然遐逝。中外人情。忉怛惟均。臣叨承明命。製進哀冊。而文辭荒拙。懿行淑德。不能形容其萬一。中心慚忸。不知攸措。昨者都監吏書告。以爲纔因大臣 大臣卽徐命善筵達。哀冊文中逝于養心閤之逝字。改以薨字。故方以薨字改付標以入云矣。臣竊思之。薨與逝。俱是徂落之義。似無彼此之殊。而但古人使字。各有攸主。若非所書而書之則非禮也。况禮之所重。專在於別嫌明微。夫以仁元貞聖二聖后禮陟時所書之字。今乃混以書之於元嬪之喪者。未知大臣有何別般意見也。且王朝所進文字。設有可改之處。大臣拈出句語。陳白於上。使製進之人。商量自改。事理固應然也。今乃不使臣知之。直使下吏改付標以入。後之覽者若以這一字爲眞出於臣。則臣雖百喙。何以脫淸議之誅乎。然此特就臣身而言。竊恐元嬪有知。以平日謙約之操。必有所蹙然不敢當之意。典禮所關。不容終默。茲敢冒死仰陳。惟聖明進退焉。臣無任屛營悚蹙之至。呈于喉院見遏。竟未得徹。前此余於戊戌夏。奉使赴燕還渡鴨水。始聞元嬪選入宮。定號淑昌宮。後於大庭候班。大殿大妃殿惠慶宮中宮殿以次問安。余則認以爲問安已畢。方欲退坐。忽聞院隷又呼淑昌宮。承言色下來。余惝怳驚恠。顧在傍宰臣曰。淑昌宮亦有朝廷問安乎。曰。節目如此。余曰。非正統與誕聖嬪宮。朝廷之不爲問安。禮也。所謂節目。果誰爲之。曰。徐相國所定。余曰。中宮殿旣呈問安。又於淑昌宮如之。則相國獨不知天無二日之義乎。相國由是切齒。固久矣。及哀冊後䟽語播傳。乃曰。是將殺我。時。相國能死生禍福人。陰嗾顯擠。必欲湛滅乃已。至於壬寅筵啓構捏罔測之境。苟非聖上明幷日月。何以照燭。使微命不至虀粉乎。此二事。爲媒禍之源。故尾記之如此。|출처=『번암집』 권38, 애책문애사(哀冊文哀辭) 병부(幷附)}}
 
伏以仁淑元嬪。奄然遐逝。中外人情。忉怛惟均。臣叨承明命。製進哀冊。而文辭荒拙。懿行淑德。不能形容其萬一。中心慚忸。不知攸措。昨者都監吏書告。以爲纔因大臣 大臣卽徐命善筵達。哀冊文中逝于養心閤之逝字。改以薨字。故方以薨字改付標以入云矣。臣竊思之。薨與逝。俱是徂落之義。似無彼此之殊。而但古人使字。各有攸主。若非所書而書之則非禮也。况禮之所重。專在於別嫌明微。夫以仁元貞聖二聖后禮陟時所書之字。今乃混以書之於元嬪之喪者。未知大臣有何別般意見也。且王朝所進文字。設有可改之處。大臣拈出句語。陳白於上。使製進之人。商量自改。事理固應然也。今乃不使臣知之。直使下吏改付標以入。後之覽者若以這一字爲眞出於臣。則臣雖百喙。何以脫淸議之誅乎。然此特就臣身而言。竊恐元嬪有知。以平日謙約之操。必有所蹙然不敢當之意。典禮所關。不容終默。茲敢冒死仰陳。惟聖明進退焉。臣無任屛營悚蹙之至。呈于喉院見遏。竟未得徹。前此余於戊戌夏。奉使赴燕還渡鴨水。始聞元嬪選入宮。定號淑昌宮。後於大庭候班。大殿大妃殿惠慶宮中宮殿以次問安。余則認以爲問安已畢。方欲退坐。忽聞院隷又呼淑昌宮。承言色下來。余惝怳驚恠。顧在傍宰臣曰。淑昌宮亦有朝廷問安乎。曰。節目如此。余曰。非正統與誕聖嬪宮。朝廷之不爲問安。禮也。所謂節目。果誰爲之。曰。徐相國所定。余曰。中宮殿旣呈問安。又於淑昌宮如之。則相國獨不知天無二日之義乎。相國由是切齒。固久矣。及哀冊後䟽語播傳。乃曰。是將殺我。時。相國能死生禍福人。陰嗾顯擠。必欲湛滅乃已。至於壬寅筵啓構捏罔測之境。苟非聖上明幷日月。何以照燭。使微命不至虀粉乎。此二事。爲媒禍之源。故尾記之如此。|출처=『번암집』 권38, 애책문애사(哀冊文哀辭) 병부(幷附)}}
 
  
 
=='''지식 관계망'''==
 
=='''지식 관계망'''==

2020년 1월 13일 (월) 02:29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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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빈홍씨묘(元嬪洪氏墓)
서삼릉 빈·귀인 분묘 집장지 원빈홍씨 묘
식별자 RT036
분류 분묘
한글명 원빈홍씨묘
한자명 元嬪洪氏墓
영문명 Tomb of Royal Consort Won of the Pungsan Hong clan
피장자 명칭 원빈(元嬪) 풍산홍씨(豊山洪氏)
피장자 이칭 정조 후궁 원빈 홍씨
피장자 부 홍낙춘(洪樂春)
피장자 모 미상
피장자 생년월일 1766.05.27
피장자 몰년월일 1779.05.07
초장 연월일 미상
초장지 기록 양주군 안암동원빈홍씨묘비
초장지 기록1 동부(東部) 온수동(溫水洞) 해좌지원(亥坐之原)인숙원빈애책문
초장지 기록2 고양군 숭인면 안암리능원묘천봉안
문화재 지정여부 미지정
이장 연월일 1949.06.13
이장지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서삼릉 내
이장지 좌표(위도) 37°66'56.84"N
이장지 좌표(경도) 126°85'84.06"E
지문 元嬪豊山洪氏之墓
지문 찬자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지문 소장처 조선왕릉 서부지구관리소



목차

내용[편집]

조선 제 22대왕 정조(正祖)의 후궁인 원빈 홍씨의 묘(1766~1779)이다. 원빈 홍씨의 본관은 풍산이고, 아버지는 홍낙춘(洪樂春)이며 홍국영(洪國榮)의 누이이다.

1778년(정조 2) 6월 정조의 후궁이 되며 원빈(元嬪)이라 작호와 함께 숙창(淑昌)이라는 궁호(宮號)를 받았다. 같은 달 6월 27일에 가례가 거행되었다.

1779년(정조 3) 5월 사망하자 정조는 희정당(熙政堂)에서 거애(擧哀)하였고 백관들은 선화문(宣化門) 밖에서 조애(助哀)하였다.

당시 홍국영의 기세로 인해 일부에서는 참람된 예를 적용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시행되지는 않았다.

시호는 인숙(仁淑)이라 하고 궁호(宮號)를 효휘(孝徽), 원호(園號)를 인명(仁明)이라고 추증하였다. 후에 인명원이라 칭하는 것은 참람 되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1786년(정조 10) 원호를 박탈하고는 수진궁에서 제사를 거행하도록 하였다.

원빈 홍씨는 처음에 오늘날의 서울 성북구 안암동 일대에 안장되었다가 1949년 6월 서삼릉 경내로 이장되었다.


조선왕조실록[편집]

『정조실록』권5, 정조 2년(1778) 6월 21일 기유(己酉) 1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홍낙춘의 딸이 빈으로 정해짐에 작호를 원빈, 궁호를 숙창으로 하다》

호조 참의 홍낙춘(洪樂春)의 딸로 빈을 정하였고, 빈청(賓廳)에서 작호(爵號)를 원빈(元嬪)이라 하고 궁호(宮號)를 숙창(淑昌)이라 하기로 의정(議定)하였다.

以戶曹參議洪樂春女定嬪。 賓廳議定爵號曰, 元嬪, 宮號曰淑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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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5, 정조 2년(1778) 6월 21일 기유(己酉) 1번째 기사



『정조실록』권5, 정조 2년(1778) 6월 27일 을묘(乙卯) 1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원빈의 가례를 행하다》

원빈(元嬪)의 가례(嘉禮)를 거행하였다. 정사(正使)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상을 내리었다. 정사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 김종수(金鍾秀)에게는 숙마(熟馬)를 면급(面給)하고, 부사 호조 참판 김노진(金魯鎭)은 가의 대부(嘉義大夫)로 승진시켰으며, 주인(主人) 호조 참의 홍낙춘(洪樂春)은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시키고, 전교관(傳敎官) 정민시(鄭民始)에게는 표피(豹皮)를 사급(賜給)하고, 가례청(嘉禮廳) 당상(堂上) 예조 판서 이경호(李景祜)·참판 서호수(徐浩修)·참의 이병모(李秉模)에게는 호피(虎皮)를 사급하고, 도청 정(都廳正) 송환철(宋煥喆)은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승진시키고, 정랑(正郞) 남학문(南鶴聞)은 준직(準職)을 제수하였다.

行元嬪嘉禮。 賞正使以下有差。 正使議政府右參贊金鍾秀熟馬面給, 副使戶曹參判金魯鎭陞嘉義, 主人戶曹參議洪樂春陞嘉善, 傳敎官鄭民始豹皮賜給, 嘉禮廳堂上禮曹判書李景祜、參判徐浩修、參議李秉模, 虎皮賜給, 都廳正宋煥喆陞通政, 正郞南鶴聞除準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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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5, 정조 2년(1778) 6월 27일 을묘(乙卯) 1번째 기사



『정조실록』권7, 정조 3년(1779) 5월 7일 경인(庚寅) 1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원빈 홍씨의 졸기》

원빈(元嬪) 홍씨(洪氏)가 졸(卒)하였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서 거애(擧哀)하였고 백관들은 선화문(宣化門) 밖에서 조애(助哀)하였다. 신미년의 예(例)에 의거하여 5일 동안 조시(朝市)를 정지하였다. 제4일에 성복(成服)하였는데 백관들이 천담복(淺淡服)을 입고 빈문(殯門) 밖에 모여서 곡하였으며 파산관(罷散官)과 관학 유생(館學儒生)들은 소복(素服)으로 외반(外班)에서 곡하였는데, 오상사(五上司)에서 향(香)을 올렸다. 발인(發靷)하고 반우(返虞)할 때 백관들이 성 밖에서 영송(迎送)하였고 오상사(五上司)·육조 당랑(六曹堂郞)이 배종(陪從)하였다. 당(唐)나라의 《개원례(開元禮)》 황조(皇朝)의 비빈(妃嬪)의 예(例)에 의거 시호(諡號)를 인숙(仁淑), 궁호(宮號)를 효휘(孝徽), 원호(園號)를 인명(仁明)이라고 추증(追贈)하고 삼도감(三都監)을 설치하였다. 이휘지(李徽之)가 표문(表文)을 짓고, 황경원(黃景源)이 지장(誌狀)을 짓고, 송덕상(宋德相)이 지명(誌銘)을 짓고, 채제공(蔡濟恭)이 애책(哀冊)을 짓고, 서명선(徐命善)이 시책(諡冊)을 지었다. 이때 홍국영(洪國榮)의 방자함이 날로 극심하여 온 조정이 감히 그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홍씨(洪氏)의 빈장(殯葬)에 관한 절차를 예관(禮官)이 모두 참람한 예(例)를 원용(援用)하였고 송덕상은 마땅히 공제(公除) 가 있어야 한다고까지 하였으나 중지하고 시행하지 않았다.

元嬪 洪氏卒。 上擧哀於熙政堂。 百官助哀宣化門外。 依辛未例, 五日停朝市。 第四日成服。 百官淺淡服, 會哭殯門外。 罷散官、館學儒生, 素服哭於外班。 五上司進香。 發靷、返虞, 百官迎送於城外, 五上司、六曹堂郞陪從。 依《唐開元》及《皇朝妃嬪》例, 贈諡曰仁淑, 宮曰孝徽, 園曰仁明, 設三都監。 李徽之製表。 黃景源製誌狀。 宋德相製誌銘, 蔡濟恭製哀冊。 徐命善製諡冊。 時洪國榮, 橫恣日甚, 擧朝莫敢拂意。 洪氏殯葬之節, 禮官悉援僭例。 宋德相至以爲當有公除, 寢不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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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7, 정조 3년(1779) 5월 7일 경인(庚寅) 1번째 기사



『정조실록』권8, 정조 3년(1779) 7월 3일 을유(乙酉) 1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원빈의 장사를 지내고 홍낙성·김화진 정광한 등을 승자하다》

원빈(元嬪)을 장사(葬事)하였다. 돈장(敦匠) 한 여러 신하들에게 상주었다. 좌참찬 홍낙성(洪樂性)을 보국(輔國)으로 승자(陞資)하고, 호조 판서 김화진(金華鎭)·예조 판서 정광한(鄭光漢)을 정헌(正憲)으로 승자하고, 서춘군(西春君) 이엽(李燁)을 가덕(嘉德)으로 승자하고, 이조 참의 유당(柳戇)을 가선(嘉善)으로 승자하고, 장령 남학문(南鶴聞)·이조 좌랑 김희(金憙)를 통정(通政)으로 승자하였다.

葬元嬪。 賞敦匠諸臣, 左參贊洪樂性陞輔國, 戶曹判書金華鎭、禮曹判書鄭光漢陞正憲, 西春君 燁陞嘉德, 吏曹參議柳戇陞嘉善, 掌令南鶴聞、吏曹佐郞金憙陞通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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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8, 정조 3년(1779) 7월 3일 을유(乙酉) 1번째 기사



『정조실록』권8, 정조 3년(1779) 8월 10일 신유(辛酉) 1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인명원이 명당자리가 아님을 지적하다》

임금이 연병관(鍊兵館)에 나아가 장사(將士)를 호궤(犒饋)하였다. 이날 회란(回鑾)할 때에 인명원(仁明園)에 들렀는데, 우의정(右議政) 서명선(徐命善) 등에게 말하기를,

"감여가(堪輿家)의 말을 내가 비록 알지는 못하나, 산을 보는 법은 반드시 언덕 기슭이 명당(明堂)을 둘러 안아 깊숙한 곳을 취하는데, 이 원(園)의 산세(山勢)는 하나도 명당을 둘러 안은 것이 없고 한길에 가까워서 성국(成局)하였다 할 수 없고 또 한길이 혈(穴) 앞에 너무 가깝기 때문에 이 길을 막으려 한다고 한다. 이 길은 아조(我朝)의 개국(開國) 이래 4백 년 동안 두루 다닌 길이고, 더구나 예전부터 능침(陵寢)에 왕래하는 연로(輦路)이니, 하루아침에 막으려는 것은 아주 놀랍고 두려운 일이다."

하매, 서명선이 황공하여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돈화문(敦化門)을 거쳐 환궁(還宮)하였다.

上御鍊兵館, 犒將士。 是日回鑾, 歷臨仁明園, 謂右議政徐命善等曰: "堪輿家之說, 予雖不解, 而看山之法, 必取岡麓回抱明堂深邃之地。 此園山勢, 無一環抱明堂, 逼臨大路, 不可謂之成局。 且以大路之太近穴前, 欲爲斷塞此路云。 此路, 乃我朝開國以來四百年周行之道, 況是自古陵寢往來之輦路。 則一朝欲爲夷塞者, 萬萬驚悚。" 命善惶恐不敢對。 由敦化門還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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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8, 정조 3년(1779) 8월 10일 신유(辛酉) 1번째 기사



『정조실록』권13, 정조 6년(1782) 6월 2일 정묘(丁卯) 2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첨지중추부사 정술조의 내수사를 혁파하는 것 등에 관한 상소문》

첨지중추부사 정술조(鄭述祚)가 상소하기를,

… (중략) …

대저 원(園)의 뜻은 능(陵)의 버금이고 묘(墓)보다는 중한 것입니다. 삼가 한(漢)나라와 송(宋)나라의 고사(故事)를 상고하건대 모두 성인(聖人)을 낳으시어 종사(宗社)와 신인(神人)의 주인이 되게 한 데 대한 공을 갚고 덕에 보답하기 위한 방도였던 것인데, 아조(我朝)에서 봉원(封園)하는 것도 또한 이를 모방하여 행하는 것으로 실로 조상에게 제사지내어 근본에 보답하는 정성에 합치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명원(仁明園)을 창설한 데 이르러서는 끝내 고례(古例)가 아닙니다. 원과 묘가 다른 것은 단지 한 글자 사이를 다투는 것이지만 융쇄(隆殺)하는 즈음에 있어서의 예의(禮義)는 절연(截然)한 점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비록 묘라고 일컫더라도 다른 빈어(嬪御)의 산(山)에 견주어 보면 이미 사치스러운 것입니다. 인명원(仁明園)의 원(園)자는 이를 그대로 보존시켜 후세에 보이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僉知中樞府事鄭述祚上疏曰: … (중략) … 夫園之爲義, 亞於陵, 重於墓。 竊稽漢、宋故事, 皆以篤生聖人, 爲宗主神人之主, 酬功報德之道, 我朝封園, 亦倣此而行之, 實合於追遠報本之誠也。 至於仁明之創設, 終非古例。 園之與墓, 只爭一字而隆殺之際, 禮義有截。 今雖稱之爲墓, 視諸也嬪御之山則已侈矣。 仁明園之園字不宜仍存, 以示後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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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13, 정조 6년(1782) 6월 2일 정묘(丁卯) 2번째 기사



『정조실록』권21, 정조 10년(1786) 1월 22일 정묘(丁卯) 20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정술조가 인명원이라는 후궁의 산소 명칭을 바꿀 것을 청하다》

호조 참판 정술조(鄭述祚)가 아뢰기를,

"인명원(仁明園)은 일개 후궁의 산소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외람되게 원(園) 자를 붙였으니, 이것은 우리 조정에서 없던 제도입니다. 또 거기다가 인명(仁明) 두 글자는 문정 왕후(文定王后)의 휘호인데, 저 일개 후궁으로서 선왕후의 휘호를 외람되게 차지하였으니, 사체나 도리에 있어서 너무나도 놀랍습니다. 신이 일찍이 상소 가운데 마땅히 혁파해야 한다는 뜻을 말하였고 요즈음 어떤 대각의 신하가 극구 이 의논을 말하였으나 두 글자가 선왕후의 휘호를 범하였다는 것은 미처 말씀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빨리 고쳐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대신에게 의논하여 품처하게 하였다.

戶曹參判鄭述祚啓言: "仁明爲園, 不過一後宮之山。 猥加園號, 已是國朝所無之制, 而又況仁明二字, 乃文定王后徽號也。 彼一後宮, 而冒占先后之徽號, 事體道理, 萬萬驚駭。 臣曾於疏中, 已陳當罷之意。 近者一臺臣, 又盛陳此論。 而二字犯號, 未及陳聞。 臣謂亟加釐革。" 令該曹, 議大臣稟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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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21, 정조 10년(1786) 1월 22일 정묘(丁卯) 20번째 기사



『정조실록』권22, 정조 10년(1786) 11월 11일 신사(辛巳) 1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영의정 김치인 등이 관작을 추증하는 일 등을 건의하다》

김치인이 또 아뢰기를, "궁원(宮園)의 호칭은 우리 조정의 정해진 제도입니다. 별도로 융숭하게 받드는 것은 진실로 경사를 기르는 처지에서 소중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지체가 다르다고 할 경우 열성조의 비빈(妃嬪)들 중에 높은 가문이나 성대한 씨족이 없지 않았으나 감히 의논하지 못하였으니, 법이 엄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번 인명원(仁明園)의 호칭을 고치자는 의논이 한두 명의 상소에서 제기되었을 때 윤허를 받지 못하였는데, 그때 의논하는 자들이 명나라의 고사를 들어 말하면서 감히 우리 나라의 전장(典章)을 들어 입증하지 못하였으니 인명원에만 격례에 벗어난 의식을 새로 추가한다는 것은 사례로 비추어볼 때 어찌 미안하지 않습니까? 궁(宮)의 호칭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의 전례에 관계된 일이므로 한번 의논해서 결정해야겠습니다." 하니, 좌상과 우상의 의견을 물었다.

좌의정 이복원(李福源)이 말하기를, "영의정이 아뢴 말은 실로 근거가 있습니다. 이왕 전례에 어긋났다는 것을 알았으니, 빨리 바로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하고,

우의정 김익(金熤)은 말하기를, "이 일은 빨리 바로잡아야 합니다. 지난번 재신(宰臣)이 상소를 올린 뒤에 하교하신 바가 있었는데 아직까지도 의정부에서 여쭈어 처리하지 않았으니, 이 책임은 신들에게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중국의 고사는 두루 인용할 것이 없다. 영의정의 말은 경상적인 것을 지키자는 의논에서 나왔는데, 마땅히 고쳐야 된다는 것을 안 이상 번복하는 혐의에 구애받을 것이 뭐가 있겠는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致仁又啓言: "宮園稱號, 卽我先朝定制。 其所別爲隆奉之擧者, 誠以毓慶之地, 所重有在也。 若爲地閥有異, 則列朝嬪御, 不無高門盛族, 而不敢議到者, 可見法意嚴也。 向來仁明園改稱之論, 出於一二章疏, 而未承批敎。 蓋伊時議者, 以皇朝事爲言, 而宜不敢證援我朝典章, 則獨於本園, 創加格外之儀, 揆以事例, 寧不未安? 宮號亦然。 事關國家典禮, 合有一番議定。" 詢于左右相。 左議政李福源曰: "領相所奏, 實有援據。 旣知其有違典禮, 則恐宜趁卽釐正矣。" 右議政金熤曰: "此事不但合速釐正。 向於宰臣疏後, 旣有下敎, 而尙無廟堂之稟處, 此則責在臣等矣。" 上曰: "中朝故事, 不足旁引。 領相之言, 旣出守經之論, 知其當改, 則何拘銷刻之嫌? 依所奏施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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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22, 정조 10년(1786) 11월 11일 신사(辛巳) 1번째 기사



『정조실록』권22, 정조 10년(1786) 11월 20일 경인(庚寅) 3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종실인 이담의 졸기》

종실(宗室)인 담(湛)이 사(死)하였다. 담은 은언군(恩彦君) 이인(李䄄)의 장자인데, 홍국영이 일찍이 나의 생질이라고 불렀던 자이다. 원빈(元嬪)의 상례 때에 대전관(代奠官)이 되어 완풍군(完豊君)으로 일컬어졌는데, 홍국영이 실패하자, 상계(常溪)로 호칭을 고쳤다가 이때에 이르러 갑자기 죽었는데[暴死] 한때 이인(李䄄)이 독살하였다고 떠들썩하였다. 그때 서유린이 예조 판서로 있으면서 그가 죽었다는 단자를 들이려고 하지 않았는데 임금이 부르자 서유린이 입대(入對)하였다. 승정원으로 하여금 예조를 독촉하여 빨리 거행하라고 하니, 예조에서 판서가 입시해서 나갈 수가 없다고 대답하자, 다음 당상이 대행하라고 명하였다. 이미 단자가 들어오자 낙천군(洛川君)의 고사에 따라 상을 치르라고 명하였는데, 예조에서 본 부서에는 친왕손(親王孫)을 예장(禮葬)하는 격례가 없다고 아뢰자, 하교하기를, "낙천군의 상이 특별히 내린 전교로 인해 예장을 치렀다면 친왕손에게 예장을 치르는 격례가 없다는 설도 또한 이치에 가깝지 않으므로 경을 추고하겠다. 계하된 별단(別單)에 따라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宗室湛死。 湛卽恩彦君 䄄之長子。 洪國榮之所嘗呼以吾甥者也。 元嬪喪, 爲代奠官, 稱完豐君。 及國榮敗, 改號常溪, 至是暴死。 一時喧傳䄄酖之時, 徐有隣爲禮曹判書, 不肯入卒逝單子, 上召有隣入對。 令政院, 促該曹擧行。 該曹以判堂入侍, 不得退出爲對。 命次堂替行。 旣入, 命依洛川君故事護喪, 該曹以本曹元無親王孫禮葬之格例, 奏。 敎曰: "洛川喪, 因特敎用禮葬, 則親王孫無之之說, 亦不近理, 卿則推考。 依啓下別單擧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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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권22, 정조 10년(1786) 11월 20일 경인(庚寅) 3번째 기사



『순조실록』권23, 순조 20년(1820) 12월 11일 계사(癸巳) 1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예조에서 원빈 홍씨 제수 봉진에 대하여 아뢰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원빈(元嬪) 홍씨(洪氏) 묘소의 호칭을 이미 강등하였으니, 제수(祭需)를 봉진하는 것이 예로 볼 때 미안합니다. 열성조에서 다른 후궁에게 하였던 사례에 의하여 수진궁(壽進宮)으로부터 옮겨 받들어 거행할 것을 대신에게 의논해 보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禮曹啓言: "元嬪、洪氏墓, 已降號, 祭需之封進, 於禮未安。 依列聖朝他後宮例, 自壽進宮移奉擧行, 議于大臣。" 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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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조실록』권23, 순조 20년(1820) 12월 11일 계사(癸巳) 1번째 기사



승정원일기[편집]

『승정원일기』 1422책(탈초본 79책), 정조 2년(1778) 6월 21일 기유(己酉) 8/20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賓廳單子, 宮號淑昌, 爵號元嬪。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22책(탈초본 79책), 정조 2년(1778) 6월 21일 기유(己酉) 8/20 기사



『승정원일기』 1422책(탈초본 79책), 정조 2년(1778) 6월 28일 병진(丙辰) 12/19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又以御營廳言啓曰, 今六月二十七日, 元嬪詣闕時, 別宮大門內外入直軍兵分半, 把摠哨官, 各其率領訓局先後牌尾局陪衛, 而入闕後, 除標信解嚴之意, 敢啓。傳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22책(탈초본 79책), 정조 2년(1778) 6월 28일 병진(丙辰) 12/19 기사



『승정원일기』 1441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5월 7일 신묘(辛卯) 24/37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又啓曰, 仁淑元嬪諡號單子, 旣已啓下, 依例招致禮曹郞廳, 陪往之意, 敢啓。傳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1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5월 7일 신묘(辛卯) 24/37 기사



『승정원일기』 1441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5월 7일 신묘(辛卯) 31/37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又以禮曹言啓曰, 今此淑昌宮銘旌書式, 依辛未謄錄, 以金字隷書元嬪梓室之意, 敢啓。傳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1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5월 7일 신묘(辛卯) 31/37 기사



『승정원일기』 1441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5월 7일 신묘(辛卯) 32/37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又以禮曹言啓曰, 旣已議號, 銘旌式, 以金字隷書仁淑元嬪梓室之意, 敢啓。傳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1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5월 7일 신묘(辛卯) 32/37 기사



『승정원일기』 1441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5월 8일 임진(壬辰) 11/14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鄭民始, 以禮曹言啓曰, 今此仁淑元嬪喪, 第四日成服時, 依辛未例, 宗親文武百官, 以淺淡服, 會哭於殯宮門外, 罷散官及館學儒生, 以素服, 亦爲會哭於外班事, 知委, 如何? 傳曰, 允。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1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5월 8일 임진(壬辰) 11/14 기사



『승정원일기』 1441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5월 12일 병신(丙申) 9/13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鄭民始, 以禮曹言啓曰, 取考喪禮補編, 則進香條, 小內喪則議政府·宗親府, 忠勳府, 進香事載錄矣, 今此元嬪魂宮進香之節, 亦依此例擧行之意, 分付, 何如? 傳曰, 允。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1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5월 12일 병신(丙申) 9/13 기사



『승정원일기』 1441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5월 13일 정유(丁酉) 16/20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又以禮曹言啓曰, 卽接奉常寺所報, 則自前造主處所, 例以空闕殿閣爲之云矣, 今此仁淑元嬪神主造成及奉安處, 以何所爲之乎? 敢稟。傳曰, 爲善堂爲之。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1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5월 13일 정유(丁酉) 16/20 기사



『승정원일기』 1441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5월 15일 무술(戊戌) 10/19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又以禮曹言啓曰, 取考辛未謄錄, 則發靷時, 宗親每品各一員陪往, 而在京宗親及百官服, 淺淡服, 前銜宰樞耆老儒生, 以素服先詣路祭所, 哭再拜, 奉辭, 返虞時, 亦爲奉迎矣, 今番仁淑元嬪發靷返虞時, 節目, 依此磨鍊, 何如? 傳曰, 允。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1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5월 15일 무술(戊戌) 10/19 기사



『승정원일기』 1441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5월 15일 무술(戊戌) 11/19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又以禮曹言啓曰, 取考謄錄, 則辛未·壬申年發靷時, 承旨一員隨往矣, 今此仁淑元嬪發靷時, 承旨, 依例隨往墓所, 何如? 傳曰, 允。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1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5월 15일 무술(戊戌) 11/19 기사



『승정원일기』 1441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5월 20일 계묘(癸卯) 15/16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命書傳敎曰, 賜諡冊官贈玉帛官, 不必强倣辛未之例, 用參贊, 旣有昨夏發冊時可據之事, 況如非親上, 則雖上尊號, 亦有差出使臣之例, 今番仁淑元嬪賜諡時及贈玉帛時, 差出正使擧行官品, 視昨年冊封時例爲之, 梓室封標官, 侍從四品以上, 自吏曹啓下。命書傳敎曰, 嘗按皇明之禮, 皇妃喪, 文武群官, 哭辭於承天門外, 辛未年聖敎中, 取用此句, 以爲嬪宮喪, 可旁照云, 世子嬪喪, 則可爲旁照之端, 元嬪喪, 則可爲襯着之禮矣, 然不必從繁, 依禮曹草記, 發靷時, 百官哭辭城外, 節次, 雖依辛未例擧行, 而其餘節次, 倂除之, 宗親儀賓, 陪往墓所等節, 依例擧行。又命書傳敎曰, 發靷時, 從衛之屬及都監堂郞及諸般騎卜馬等, 以驛馬入把者, 今番則預爲磨鍊後, 別單書入, 待啓下, 只依此數入把, 而外方驛馬, 則切勿徵上, 京驛馬, 如有不足之弊, 騎數寧爲減省, 當此農時, 決不可循例把定, 以此令兵曹及都監, 知悉擧行。又命書傳敎曰, 此是咫尺, 傳語軍, 不必用轝士餘軍及束伍軍矣, 只用衛軍, 而減數磨鍊, 善騎禁軍, 多數定立, 依前例, 飛傳傳語事, 分付兵曹及都監。又命書傳敎曰, 旣問之, 堂上亦有所奏, 梓室加漆, 自明日逐日爲之事, 分付。又命書傳敎曰, 雖以不得不使用之致, 不得除役, 而如有一分可除之弊, 則不可不除, 轝士軍初定時, 十分公擇, 俾無如丙申之弊, 又以點考一事言之, 當此盛暑, 三赴點考之役, 聞甚矜悶, 今番則只行二次點考事, 分付, 如是申飭之後, 若有以轝士軍, 爲民怨之端, 當該大將, 隨現難免重繩, 以此從事官處, 卽爲申明聽傳敎。又命書傳敎曰, 今番元嬪喪發靷時, 遺衣徒近褻慢, 已於別單中所盛彩轝樻子抹下矣, 次入等物, 雖有前例, 勿爲進排事, 分付, 改銘旌時, 所用貢緞, 亦當內下, 尺度, 使之書入事, 分付都監。又命書傳敎曰, 陵墓丁字閣上樑文, 或製或不製, 有特敎則擧行, 無特敎則廢閣, 事甚不一, 墓名當下敎, 上樑文, 斯速撰進。又命書傳敎曰, 發靷返虞及來頭入廟等行禮時, 辛未有攝相禮, 壬申有攝翊禮, 而今番則無可旁照之節, 而贊請之事, 亦不可廢閣, 依昨年嘉禮時例, 參上通禮院官員中, 稱以禮貌官擧行事, 預爲分付攝司僕, 而官員則以攝判官擧行, 竝令吏曹, 差出啓下。又命書傳敎曰, 冊印內入內出等節除之, 但於賜諡日, 殿庭發使後, 直入于殯宮事, 分付。又命書傳敎曰, 今番墓所, 定於城外近地者, 意在爲慮民弊矣, 若是則畿甸之民, 雖一事半事, 似無役用之節, 責納之物, 果能如是擧行乎? 又以各項應爲進排於陵墓之例言之, 旣是部字內, 且甚便近, 雖以假家支供等節, 各司自當自備, 此又果能如是擧行乎? 無例之事, 或循前規, 不無混同襲用之弊, 此又果能如是擧行乎? 卿其詳加抄出可考謄錄, 諸般自畿邑擧行事之事, 切勿爲之, 或有不可不擧行者, 亦卽仔細抄出後登對, 則予當裁減, 大抵予意, 今番役事, 度支之經費, 畿甸之民力, 雖減常供, 決不欲取用而使用, 卿其惕念擧行事, 下諭于京畿監司處, 夕後使之抄出來待。命退, 諸臣以次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1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5월 20일 계묘(癸卯) 15/16 기사



『승정원일기』 1441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5월 21일 갑진(甲辰) 9/10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鄭民始, 以禮曹言啓曰, 今此仁淑元嬪發靷時, 各門及所過名山大川道路橋梁等處, 祭庫, 依前例令兵曹及漢城府, 看審言啓事, 分付, 何如? 傳曰, 允。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1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5월 21일 갑진(甲辰) 9/10 기사



『승정원일기』 1441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5월 23일 병오(丙午) 16/27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又以兵曹言啓曰, 今此仁淑元嬪發靷時, 所把驛馬, 依下敎減省磨鍊, 別單書入之意, 敢啓。傳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1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5월 23일 병오(丙午) 16/27 기사



『승정원일기』 1441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5월 23일 병오(丙午) 17/27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鄭民始, 以禮曹言啓曰, 取考喪禮補編, 則賜諡儀, 有讀祝致詞·讀冊印之文矣。今此仁淑元嬪魂宮賜諡時, 亦依補編擧行之意, 敢啓。傳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1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5월 23일 병오(丙午) 17/27 기사



『승정원일기』 1441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5월 25일 무신(戊申) 13/27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又以禮曹言啓曰, 取考辛未·壬申謄錄, 則墓所陪從之官, 自宣政門外步從, 至板前屛門, 騎馬陪往矣。今此仁淑元嬪發靷時, 亦依此例, 陪從之官自宣仁門外步從, 至板前屛門, 竝與陪從宗親及儀賓, 騎馬陪往事, 知委, 何如? 傳曰, 允。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1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5월 25일 무신(戊申) 13/27 기사



『승정원일기』 1441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5월 25일 무신(戊申) 16/27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兪彦鎬, 以忠勳府言啓曰, 今此仁淑元嬪發靷時, 銘旌翣扇, 各差備, 當以忠義衛定送, 而入番忠義衛, 付祿遞兒, 只十八窠, 勢難推移, 依辛未年例, 副司勇十四遞兒, 加出付祿, 何如? 傳曰, 允。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1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5월 25일 무신(戊申) 16/27 기사



『승정원일기』 1441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5월 28일 신해(辛亥) 7/17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鄭元始啓曰, 再明日仁淑元嬪墓開金井時, 承旨一員, 當爲進參, 何承旨進去乎? 敢稟。傳曰, 明日取土, 承旨·同副承旨, 除下直進去。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1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5월 28일 신해(辛亥) 7/17 기사



『승정원일기』 1441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5월 29일 임자(壬子) 8/15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鄭元始, 以禮曹言啓曰, 今此仁淑元嬪, 魂宮祭享所用生獐, 勿爲磨鍊事, 有命矣。生獐磨鍊, 原啓目中, 改付標以入之意, 敢啓。傳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1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5월 29일 임자(壬子) 8/15 기사



『승정원일기』 1442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6월 1일 계축(癸丑) 7/24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鄭元始啓曰, 仁淑元嬪宮號園號單子, 旣已啓下矣。招致禮曹郞廳, 傳授之意, 敢啓。傳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1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6월 1일 계축(癸丑) 7/24 기사



『승정원일기』 1442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6월 1일 계축(癸丑) 20/24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吏曹口傳政事, 仁明園守奉官具敍和·李厚老, 仁明園忠義李台鉉。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1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6월 1일 계축(癸丑) 20/24 기사



『승정원일기』 1442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6월 2일 갑인(甲寅) 9/24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申思運, 以禮葬都監郞廳, 以都提調意啓曰, 上樑文頭行, 仁淑元嬪仁明園丁字閣上樑文十三字, 令書寫官李儒慶書塡, 今初三日, 使園所都監郞廳, 陪進園所之意, 敢啓。傳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2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6월 2일 갑인(甲寅) 9/24 기사



『승정원일기』 1442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6월 2일 갑인(甲寅) 14/24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申思運, 以兵曹言啓曰, 今此仁淑元嬪發靷反虞時, 各差備忠贊衛八十一名, 依都監磨鍊, 以京有廳出用之意, 敢啓。傳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2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6월 2일 갑인(甲寅) 14/24 기사



『승정원일기』 1442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6월 2일 갑인(甲寅) 17/24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禮曹啓曰, 今五月初十日, 都監堂上入侍時, 本曹判書鄭光漢啓曰, 今此元嬪喪後, 自上服制, 我朝無可援之例。周禮春官有曰, 王爲三公六卿錫衰, 爲大夫士疑衰。註又曰, 此君爲臣服也, 君猶爲臣而服, 則況於無品之嬪乎? 且考大明集禮中唐朝禮, 有曰, 皇太子爲良娣擧哀, 三朝哭而止。其文又曰, 若本服朞者, 三朝哭而止, 此爲旁照之禮, 以周禮觀之, 則當有服制, 以開元之禮參考, 則宜有公除, 竝下詢大臣儒賢, 而參考處之得宜, 須有公除然後, 凡係祀典, 當依喪禮補編擧行, 敢此仰稟矣。上曰, 依爲之事, 啓下矣。發遣郞廳, 問議于時原任大臣及儒賢, 則領議政金尙喆以爲, 今此仁淑元嬪服制公除, 因禮官稟達, 伏承收議之命, 而此於國制, 旣無可援之例, 則以臣蔑識, 雖不敢倉卒臆對, 禮官所引周官服制之論, 開元禮公除之說, 俱爲旁照可據之端, 惟在俯詢知禮之臣而裁定焉, 伏惟上裁云。左議政徐命善以爲, 今此仁淑元嬪服制公除, 該曹之以周禮·開元儀旁參考據, 極其該備, 依此施行, 恐合禮意, 如臣謏魯, 別無他見, 伏惟上裁云。領中樞府事李溵, 行判中樞府事鄭弘淳以爲, 禮堂所奏, 儘有考據, 臣等之見, 與領·左相意無異云, 祭酒宋德相以爲, 今此仁淑元嬪服制公除, 禮官所引周官·開元禮等說, 似爲該備, 可以旁照, 而第臣淺見, 周官之制, 乃天子臨公卿諸候喪時弔服, 而未必爲喪服也。開元禮三朝哭云云, 亦是皇太子爲良娣擧哀一節, 而亦未敢知以此參考, 必當有公除也。蓋今服制, 古今禮書, 別無可援之文, 而其可以旁照者, 又如此, 以臣寡陋, 有不敢臆決, 而妄對者, 惟在聖上廣詢博訪而財處焉云。大臣·儒賢之議如此, 上裁, 何如? 無批答。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2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6월 2일 갑인(甲寅) 17/24 기사



『승정원일기』 1442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6월 2일 갑인(甲寅) 18/24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吏曹口傳政事, 仁明園守園官單完豐君濬。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2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6월 2일 갑인(甲寅) 18/24 기사



『승정원일기』 1442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6월 4일 병진(丙辰) 9/10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又以長生殿郞廳, 以都提調意啓曰, 今此仁明園外梓室着漆, 依舊例已準三十度, 臣等來詣奉審, 則漆色光潤, 無所欠頉, 仍爲結裹, 移安於正殿前楹內, 今月初六日習儀, 初七日巳時, 陪進園所之意, 敢啓。傳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2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6월 4일 병진(丙辰) 9/10 기사



『승정원일기』 1442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6월 9일 신유(辛酉) 15/22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又以禮曹言啓曰, 今此仁淑元嬪魂宮虞祭·卒哭祭·練祥·禫祭及解謝祭所用生獐減省, 以猪代用事, 自魂宮都監磨鍊, 啓下矣。各祭享所用生獐, 代生猪依例進排之意, 分付, 何如? 傳曰, 允。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2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6월 9일 신유(辛酉) 15/22 기사



『승정원일기』 1442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6월 10일 임술(壬戌) 4/33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仁淑元嬪梓室加漆後, 大殿·政院·玉堂單子奉慰問安。答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2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6월 10일 임술(壬戌) 4/33 기사



『승정원일기』 1442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6월 10일 임술(壬戌) 24/33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又以禮曹言啓曰, 今此仁淑元嬪喪, 來七月初二日戌時發靷時, 同月初三日辰時下梓室時, 同月十二日卒哭日, 諸道大小奉命使臣及外官, 具淺淡服, 各於正廳, 設香卓望哭事, 八道及兩都良中, 行移, 何如? 傳曰, 允。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2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6월 10일 임술(壬戌) 24/33 기사



『승정원일기』 1442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6월 10일 임술(壬戌) 25/33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又以禮曹言啓曰, 今此仁淑元嬪啓嬪, 以發靷前一日爲之事, 稟定矣。啓殯吉時, 令日官推擇, 則來七月初一日辰時爲吉云, 以此時, 原擇日單子中, 付標以入之意, 敢啓。傳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2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6월 10일 임술(壬戌) 25/33 기사



『승정원일기』 1442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6월 10일 임술(壬戌) 26/33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又以禮曹言啓曰, 今此仁淑元嬪喪, 發靷習儀節目及各差備官差出節目, 發靷返虞時節目, 一依稟定, 原單子中, 釐改付標以入之意, 敢啓。傳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2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6월 10일 임술(壬戌) 26/33 기사



『승정원일기』 1442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6월 13일 을축(乙丑) 7/14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尹冕東, 以禮曹言啓曰, 仁淑元嬪賜謚之賜字, 改以宣字事, 命下矣。前後啓下單子中, 改付標以入之意, 敢啓。傳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2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6월 13일 을축(乙丑) 7/14 기사



『승정원일기』 1443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6월 20일 임신(壬申) 32/33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己亥六月二十日巳時, 上御誠正閣。

都監都提調·園所都監堂上·禮曹判書·前咸鏡監司, 同爲入侍時, 都監都提調徐命善, 園所都監堂上具善復, 禮曹判書鄭光漢, 前咸鏡監司趙㻐, 假注書李彦祜, 記注官崔大奎, 記事官金健修, 以次進伏訖。命善所啓, 史官座目單子, 注書不卽正書, 詣閤許久之後, 始爲入啓, 事甚未安, 當該注書, 下義禁府推考,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

彦祜退出。賤臣敏采, 進入進伏。

上命前北伯進前曰, 往釐絶塞, 無事還朝, 幸矣。

㻐曰, 臣以不才, 猥叨重寄, 今幸無事而還矣。

上曰, 農形, 何如?

㻐曰, 大抵豊徵矣。

上曰, 過了七月望後, 然後可以無慮矣。人心, 何如?

㻐曰, 民風謠俗, 極其不善, 京師絶遠, 尙以聖化之普洽, 猶有所未曁矣。

上曰, 人才, 何如?

㻐曰, 北俗所尙, 只是弓馬, 而亦未見特異之才, 但比他道稍勝矣。

上曰, 近來尙文云, 果然乎?

㻐曰, 其謂尙文, 極其無實, 只是冠儒而服儒, 不可以此, 便謂之尙文矣。大抵渠輩, 自知無拔身之道, 故便同自棄, 第以土俗言之, 則耐寒耐暑, 善爲導養, 則似有得力之道矣。

上曰, 別無更達之事, 則先退, 可也。㻐退出。

上曰, 園所堂上, 旣爾登筵, 似有可奏之事矣。

善復曰, 火巢限界, 前旣悉陳, 今無可達之事矣。

上曰, 愼勿廣占, 必以至狹, 可也。

上曰, 禁將筋力, 誠好矣。其間顔色, 少無所減。

命善曰, 不但無減, 反復勝焉。

上曰, 工役今至, 何境?

命善曰, 業已垂畢矣。

上曰, 丁字閣土役, 何以爲之?

善復曰, 今已畢役。

上曰, 可謂神速, 此皆禁將之功也。

命善曰, 用其財力, 極爲節約, 其所容入, 亦不夥然矣。

善復曰, 左參贊凡節甚熟, 臣則董役而已。都提調命善所啓, 發靷時各門及橋梁祭官, 例以禮葬都監都廳及一房郞廳塡差, 而今番都廳, 只是一員, 一房郞廳, 亦多有都監擧行之事, 在前苟艱之時, 或有他官塡差之例, 今亦依此例, 以他官塡差事, 分付,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

又所啓, 返虞時攝司僕官員, 以判官啓下, 而考見補編, 則以僉正書之, 令該曹改付標,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

又所啓, 園所工役, 今幾垂畢, 而匠料軍價, 猶有未盡給者, 加劃錢二千兩, 則足可入用云。賑廳有關西稅小米耗條, 年年作錢上來者, 此則與經費有間, 其中二千兩取用,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

又所啓, 神主造成後, 奉詣魂宮時, 當以何門作路乎?

上曰, 以敦化門東挾爲。出擧條

又所啓, 頓遞使, 以判尹之方在園所, 吏曹不得啓下云, 而臨時往來, 別無相妨之事, 依例啓下之意, 分付,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

禮曹判書光漢所啓, 初虞不遠, 祝文頭辭, 當爲磨鍊, 而取考丁丑祝式, 則稱昭告, 壬申祝式, 則稱致告矣。似當折衷於兩年謄錄而擧, 何以爲之乎?

上曰, 以遣臣謹告爲辭, 可也。出擧條

又所啓, 孝徽宮·仁明園仲朔秋享, 以上旬擇日擧行乎? 以分至日定行乎?

上曰, 擇日, 可也。出擧條

又所啓, 溯考曹上謄錄, 則倭人所進者, 曾無還下送之規, 今番丹木, 所見雖駭, 勢將置之, 而聞其捧出時, 釜山僉使與訓別, 眼同爲之, 該府使則初無照察之例云。旣係進上物種, 則爲本邑守臣者, 亦安敢不爲致察乎? 此後則凡倭獻之物, 府使亦爲一一考閱, 如有不成體樣者, 則使之嚴斥還給, 何如?

上曰, 依爲之。丹木置於禮曹, 嚴關査實, 果是中間幻弄, 則摘發重繩, 若該府使不善察飭之致, 則更當論罪, 訓別亦令取以聞, 可也。出擧條

命退, 諸臣以次退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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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443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6월 20일 임신(壬申) 32/33 기사



『승정원일기』 1443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6월 22일 갑술(甲戌) 24/37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鄭元始, 以司僕寺官員, 以一提調意言啓曰, 今此仁淑元嬪發靷敎是時, 各差備入把馬別單書入之意, 敢啓。傳曰, 知道。依別單中抹下者擧行, 此外不足之數, 待馬牌爲之事, 知悉, 而許多馬匹責立之時, 必有內外所屬作弊之弊, 雖一匹馬一名軍, 若有法外侵漁之事, 一提調另加廉察, 隨現重繩, 該官員草記論罪。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3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6월 22일 갑술(甲戌) 24/37 기사



『승정원일기』 1443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6월 24일 병자(丙子) 14/19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沈頤之啓曰, 今此仁淑元嬪發靷時及立主時, 承旨一員陪從入參事, 禮曹草記, 允下矣。自再明日, 習儀當爲進參, 何承旨進去乎? 敢稟。傳曰, 都承旨進去。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3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6월 24일 병자(丙子) 14/19 기사



『승정원일기』 1443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6월 25일 정축(丁丑) 11/19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又以禮曹言啓曰, 今此仁淑元嬪發靷下玄室返虞時, 內殿望哭儀註, 依例直爲書入各殿之意, 敢啓。傳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3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6월 25일 정축(丁丑) 11/19 기사



『승정원일기』 1443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6월 30일 임오(壬午) 11/22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鄭元始, 以都摠府言啓曰, 今此仁淑元嬪下玄宮時及返虞哭禮親臨時, 寶劍四員, 旣已受點, 侍衛二員, 不可不備員, 而都摠管一員, 都監堂上進去, 都摠管一員, 副摠管一員未肅拜, 都摠管二員未差, 侍衛將不得備員, 二員未差之代, 令該曹卽爲口傳差出, 以爲備員侍衛之地, 何如? 傳曰, 未肅拜摠管許遞與未差之代, 口傳差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3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6월 30일 임오(壬午) 11/22 기사



『승정원일기』 1443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6월 30일 임오(壬午) 11/22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鄭元始, 以都摠府言啓曰, 今此仁淑元嬪下玄宮時及返虞哭禮親臨時, 寶劍四員, 旣已受點, 侍衛二員, 不可不備員, 而都摠管一員, 都監堂上進去, 都摠管一員, 副摠管一員未肅拜, 都摠管二員未差, 侍衛將不得備員, 二員未差之代, 令該曹卽爲口傳差出, 以爲備員侍衛之地, 何如? 傳曰, 未肅拜摠管許遞與未差之代, 口傳差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3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6월 30일 임오(壬午) 11/22 기사



『승정원일기』 1444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7월 1일 계미(癸未) 3/23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尹塾啓曰, 今此仁淑元嬪神主, 奉詣殯宮時, 門單子誤爲磨鍊以入, 事甚未安, 當該兵曹堂上, 推考警責, 何如? 傳曰, 允。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4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7월 1일 계미(癸未) 3/23 기사



『승정원일기』 1444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7월 1일 계미(癸未) 10/23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又以禮曹言啓曰, 今此仁淑元嬪發靷前一日, 至發靷日各祭, 依傳敎, 更爲別單書入之意, 敢啓。傳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4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7월 1일 계미(癸未) 10/23 기사



『승정원일기』 1444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7월 2일 갑신(甲申) 5/7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鄭元始, 以兵曹言啓曰, 今此仁淑元嬪發靷時, 左邊捕盜大將具明謙, 以陪往大將, 進去園所矣。回還間, 以右邊捕盜大將李昌運, 姑爲兼察, 何如? 傳曰, 允。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4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7월 2일 갑신(甲申) 5/7 기사



『승정원일기』 1444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7월 6일 무자(戊子) 25/34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李義翊, 以禮曹言啓曰, 仁淑元嬪魂帛, 今七月初十日五虞祭畢後, 陪進園所埋安事, 已爲節目啓下矣。宜有魂帛出納及神轝陞降贊請等節, 宮闈令攝相禮攝司僕寺, 僉正, 令該曹差出, 以爲擧行之地, 何如? 傳曰, 允。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4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7월 6일 무자(戊子) 25/34 기사



『승정원일기』 1444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7월 10일 임진(壬辰) 22/23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上曰, 右副承旨, 馳詣仁明園, 奉審以來。出榻敎。上詣仁明園至洞口。宣傳官跪稟鳴金吹打止。上至齋室門外下馬, 乘輿入齋室, 改御翼善冠黲袍, 乘輿出齋室。上曰, 園所看山時堂郞入侍。左議政徐命善等進前。上曰, 堪輿家之說, 予雖不解, 而大抵看山之法, 必取岡麓回抱, 明堂深邃之地者, 此是當然之理, 而今此園所, 予始來見, 則山勢無一環抱, 明堂逼臨大路, 雖以堪輿家說觀之, 不可謂之成局, 且以大路之太近穴前, 欲爲斷塞此路云, 此亦豈不寒心乎? 此路乃我朝開國以來四百年周行之道, 則乃欲容易斷塞, 無少持難者, 抑何意也? 其時看山堂郞之意, 誠未可曉也。予之倚恃左相顧, 何如, 而今此園所一事, 極爲寒心。此道非尋常徑路之比, 而乃是自古陵寢往來之輦路, 則一朝欲爲夷塞者, 萬萬寒心矣。命善曰, 臣於聖敎之下, 惶恐不知所達矣。上曰, 局勢之淺露, 姑勿論, 塞路一節, 尤爲不成說之事也, 然此豈卿自主掌之事乎? 故於卿, 猶不深咎矣。上詣園上, 降輿周覧訖。乘輿還入齋室, 改具戎服, 乘輿出齋室門外, 降輿乘馬出洞口。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44책(탈초본 79책), 정조 3년(1779) 7월 10일 임진(壬辰) 22/23 기사



『승정원일기』 1462책(탈초본 80책), 정조 4년(1780) 4월 13일 신유(辛酉) 16/17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庚子四月十三日卯時, 上幸永祐園。擧動入侍時, 行都承旨鄭元始, 左承旨李亨逵, 右承旨徐有防, 左副承旨金〈魯淳〉, 右副承旨金魯永, 同副承旨沈豊之, 假注書吳翼煥·趙衍德, 記事官鄭東浚·金載瓚, 以次隨駕。王大妃殿進御一錢重人蔘粟米飮一貼煎入事。榻前下敎 上具戎服, 乘輿出協陽門, 降輿乘馬, 出弘化門, 度弘化門街上。上曰, 禁衛營文郞廳, 不參陣上乎? 卽爲知入。賤臣承命出來, 復奏曰, 郞廳李度默, 以未投刺, 不參陣上云矣。命書傳敎曰, 事係師律, 禁衛營文從事官李度默, 爲先汰去。上曰, 未出興仁門之前, 李度默記過次, 捉致待令。大駕出興仁門, 始張鼓吹, 詣遞馬所遞馬, 仍幸到仁明園, 命停鼓吹。駕前不卽停樂, 上曰, 旣命停樂, 則何不停止乎? 大抵行過陵寢園所之時, 例停風樂, 而況今三年內乎? 吹螺兩宣傳官, 爲先記過, 詣永祐園洞口。上曰, 都監郞廳徐鼎修, 不參陣上, 或未投刺而然乎? 卽爲知入。賤臣承命出來, 復奏曰, 雖已投刺, 而未參云矣。上曰, 先大王明陵幸行時, 厚謙, 以軍門郞廳, 不參陣上。先大王曰, 厚謙雖是外孫, 當自是而懲後矣。卽命處分, 今徐鼎修, 雖曰名官, 豈敢如是乎? 爲先記過待令。上謂兵曹判書蔡濟恭曰, 徐鼎修之如是不參陣上, 專無畏劫而然也, 極爲非矣。卿須言之。命書傳敎曰, 以本營事, 旣有記過之命, 揆以禮使之道, 勢難兼察。訓鍊都監從事官徐鼎修, 本職遞差。上到下馬所, 下馬乘輿, 入齋室後, 諸臣問安。上具翼善冠·淺淡服, 乘輿詣紅箭門外, 降輿就版位, 再拜訖, 步詣園上奉審, 仍詣碑閣看審後, 詣丁字閣, 行酌獻禮再拜訖。亞獻官李溵, 終獻官李徽之拜禮訖。通禮告禮畢。上還詣紅箭門內, 就版位再拜訖, 乘輿入齋室後, 諸臣問安。上命遣金魯永, 問安于王大妃殿·惠慶宮。上具戎服, 乘輿出齋室, 降輿乘馬進發, 自永祐園洞口, 至興仁門, 捧上言事。駕前下敎 大駕到仁明園前, 同副承旨馳詣仁明園, 奉審以來事。駕前下敎 上歷臨東關王廟, 行展拜禮。東關王廟歷臨時, 百官行禮置之, 路上留住事。駕前下敎 大駕到興仁門外停鼓吹, 到弘化門街上。禁衛營從事官李度默, 訓鍊都監從事官徐鼎修, 記過竝蕩滌事。駕前下敎 上曰, 文郞廳記過, 旣已勿施吹螺, 宣傳官記過, 亦爲蕩滌。上命宣傳官勞問, 各軍門以次罷陣, 朝廷問安置之事。駕前下敎 大駕入弘化門, 到協陽門, 降馬乘輿入大內。諸臣問安, 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62책(탈초본 80책), 정조 4년(1780) 4월 13일 신유(辛酉) 16/17 기사



『승정원일기』 1462책(탈초본 80책), 정조 4년(1780) 4월 13일 신유(辛酉) 17/17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庚子四月十三日未時, 上御誠正閣。禮房承旨入侍時, 右承旨徐有防, 假注書趙衍德, 記事官鄭東浚, 記事官金載瓚, 以次進伏訖。王大妃殿進御一錢重人蔘粟米飮一貼煎入事。榻前下敎 命書傳敎曰, 旣已展拜, 東·南兩廟, 遣將臣涓吉致祭。勿出朝報 命書傳敎曰, 路過丁閣前, 封丘入望, 遣承旨今十五日仁明園致祭祭文當製下矣。上曰, 李度默捉來時, 只據法乎? 有防曰, 果爲結縛而來矣。上曰, 初以記過次待令云, 而如是擧行, 早知如此, 則豈不善處乎? 有防曰, 渠是三司之臣, 而所見極爲怪駭, 此是校卒不善擧行之致矣。上曰, 適會之事, 而事極可怪矣。至於徐鼎修, 殆不善爲之矣, 況以軍色而如是乎? 先朝時厚謙, 猶以處分矣。有防曰, 鼎修果不善爲之矣。上命退, 諸臣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62책(탈초본 80책), 정조 4년(1780) 4월 13일 신유(辛酉) 17/17 기사



『승정원일기』 1462책(탈초본 80책), 정조 4년(1780) 4월 14일 임술(壬戌) 23/24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朴祐源啓曰, 今十五日仁明園, 遣承旨致祭事, 命下矣, 何承旨進去乎? 敢稟。傳曰, 以十七日退定。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62책(탈초본 80책), 정조 4년(1780) 4월 14일 임술(壬戌) 23/24 기사



『승정원일기』 1462책(탈초본 80책), 정조 4년(1780) 4월 17일 을축(乙丑) 4/28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蔡弘履啓曰, 今十七日仁明園致祭事, 命下矣。何承旨進去乎? 敢稟。傳曰, 禮房承旨進去。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62책(탈초본 80책), 정조 4년(1780) 4월 17일 을축(乙丑) 4/28 기사



『승정원일기』 1462책(탈초본 80책), 정조 4년(1780) 4월 17일 을축(乙丑) 25/28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庚子四月十七日巳時, 上御誠正閣。禮房承旨入侍時, 左副承旨李在學, 假注書宋文述, 記事官徐龍輔·金載瓚, 以次進伏訖。上命在學曰, 爾往仁明園, 致祭祭物諸執事, 仍爲摘奸以來。上曰, 祭文觀之乎? 在學曰, 觀之矣, 第殄瘁之殄字, 似誤書以下矣。上曰, 然則改之, 可也。上曰, 王大妃殿進御一錢重人蔘粟米飮一貼, 煎入。出榻敎 上曰, 殿講擧案徐鼎修, 不入乎? 在學曰, 果不入矣。上曰, 承文院多官中, 何其講員之少耶? 亦可駭也。仍命退, 諸臣以次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62책(탈초본 80책), 정조 4년(1780) 4월 17일 을축(乙丑) 25/28 기사



『승정원일기』 1462책(탈초본 80책), 정조 4년(1780) 4월 17일 을축(乙丑) 27/28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庚子四月十七日申時, 上御誠正閣。左副承旨入侍時, 左副承旨李在學, 假注書宋文述, 記事官徐龍輔·金載瓚, 以次進伏訖。上曰, 無撓行祭, 而凡百無頉乎? 在學曰, 臣承命馳詣仁明園致祭時, 看審祭物, 則祭酒水果, 頗欠精潔, 祭器則爵一坐, 亦有破缺。典祀官·守奉官之不能致謹, 俱涉可駭, 該寺公事提調, 亦難免不善檢飭之失, 推考警責, 當該典祀官及守奉官, 所當論罪, 而本院請推之外, 無他可施之罰, 何以爲之乎? 上曰, 依爲之。官員拿處, 可也。出擧條 上命在學, 讀義州府尹薦望, 在學讀畢。上曰, 是官在爾, 非必爲華, 而邊遠之民, 政爾無告, 爾其往莅, 必須善爲也。仍命退, 諸臣以次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62책(탈초본 80책), 정조 4년(1780) 4월 17일 을축(乙丑) 27/28 기사



『승정원일기』 1463책(탈초본 80책), 정조 4년(1780) 5월 6일 갑신(甲申) 3/2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庚子五月初六日申時, 上御誠正閣。都承旨入侍時, 行都承旨鄭民始, 記事官鄭東浚, 記注官李𤧣, 記事官金載瓚, 以次進伏訖。上曰, 王大妃殿進御一錢重人蔘粟米飮一貼, 煎入。出榻敎 命書傳敎曰, 旣設校正廳之後, 與前纂修之時有異, 諸郞廳只於堂上仕進日仕進事, 分付。上曰, 仁明園致祭, 右承旨進去。出榻敎 仍命退, 諸臣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63책(탈초본 80책), 정조 4년(1780) 5월 6일 갑신(甲申) 3/2 기사



『승정원일기』 1463책(탈초본 80책), 정조 4년(1780) 7월 1일 정축(丁丑) 16/29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李亨逵, 以兵曹言啓曰, 今此仁淑元嬪神主入廟時, 陪衛與前後牌軍兵, 相考各年謄錄, 別單書入之意, 敢啓。傳曰, 已書下於別單矣。軍兵則堂上將官中, 率領事, 分付, 中軍置之。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63책(탈초본 80책), 정조 4년(1780) 7월 1일 정축(丁丑) 16/29 기사



『승정원일기』 1466책(탈초본 80책), 정조 4년(1780) 7월 2일 무인(戊寅) 8/28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李性源, 以吏曹言啓曰, 今此仁淑元嬪神主入廟時, 陪衛分兵曹參議·正郞, 各一員依例口傳差出, 何如? 傳曰, 允。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66책(탈초본 80책), 정조 4년(1780) 7월 2일 무인(戊寅) 8/28 기사



『승정원일기』 1466책(탈초본 80책), 정조 4년(1780) 7월 2일 무인(戊寅) 9/28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李亨逵, 以兵曹言啓曰, 今此仁淑元嬪神主入廟時, 陪衛分都摠府副摠管·都事, 各一員, 依例口傳差出, 何如? 傳曰, 允。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66책(탈초본 80책), 정조 4년(1780) 7월 2일 무인(戊寅) 9/28 기사



『승정원일기』 1483책(탈초본 81책), 정조 5년(1781) 4월 9일 임자(壬子) 15/16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辛丑四月初九日卯時, 上詣永祐園。擧動入侍時, 行都承旨李𡊠, 左承旨徐有防, 右承旨趙時偉, 左副承旨金宇鎭, 右副承旨鄭志儉, 同副承旨趙鼎鎭, 假注書李集斗·趙興鎭, 記事官徐龍輔·金載瓚具戎服, 以次侍立。上具戎服乘輿, 出仁化門, 陪從侍衛導前。至仁政門, 左通禮跪啓, 請降輿乘馬, 上降輿乘馬。出敦化門, 左通禮跪啓, 請侍衛上馬, 大駕進駐把子橋留陣所, 命禁將入侍, 宣傳官持信箭, 承命出傳, 禁衛大將李敬懋進前。上曰, 本營騎士中, 善騎馬者多數抄出, 自闕外至園所, 排站立待, 如有藥院狀啓之事, 卽卽馳報, 勿爲遲滯, 可也。敬懋承命退出。大駕詣太廟前, 左通禮跪啓, 請下馬, 上下馬鞠躬步過。左通禮跪啓, 請乘馬, 上乘馬出興仁之門, 至關王廟前替馬所, 上替馬, 至仁明園。上謂時偉曰, 曾以植木之勿爲廣占, 有所提敎矣, 今乃見之, 平蕪可耕之地, 多植樹木, 此何故也? 且此處, 距城內至近, 林本若長盛, 則虎患可慮, 此後則旣植之木已矣, 不植之處, 勿爲更植, 皆令耕食之意, 承旨招事知守僕, 申飭, 可也。時偉承命出衛外, 分付。大駕詣永祐園洞口, 左通禮跪啓, 請下馬乘輿, 上下馬乘輿, 至大次前, 左通禮跪啓, 請降輿, 上降輿入齋室, 陪從百官各就次。上曰, 園司入侍。別檢李彦祜進伏。上曰, 年前補土處, 若欲親審, 則所從之路, 形便, 何如? 彦祜曰, 林木叢密, 甚爲狹窄矣。上曰, 注書出去, 看審形止以來。賤臣承命進去, 還奏曰, 臣往審形止, 則樵路纔通, 林木叢茂, 行過甚難矣。上謂時偉, 回鑾後, 從近出來, 看審形止, 開出大路, 可也。時偉承命退。上曰, 當行展拜禮, 百官外儀整齊與否, 知入。左通禮跪啓, 請外辦, 上改具翼善冠·黲袍, 百官皆淺淡服, 先就紅門外, 東西序立。上乘輿, 詣紅箭門外, 左通禮跪啓, 請降輿, 上降輿, 立板位上。左通禮跪啓, 請再拜, 上行望園禮, 再拜訖。左通禮導上至園上, 奉審訖, 左通禮前導, 上步登主峯, 下詢集斗曰, 爾經園官, 必諳四山形止, 案對諸峯中, 何山爲內案耶? 集斗曰, 望彼鬱鬱多新松處, 是淸涼山, 而卽爲內案矣。外案則仁旺山之下邊峯, 是矣。上曰, 園所, 乃是金時默郊亭之基云, 亭舍曾構於何處耶? 集斗曰, 卽今齋室, 乃其舊亭, 而仍而修葺, 今爲齋室, 園所亦其家垈, 而自古相臣金堉, 已爲設置, 其來也久云矣。上謂有防曰, 承旨之亭舍, 曾在何處耶? 有防曰, 此前大路北邊村家後, 是臣置亭之地, 而今入火巢內矣。上曰, 垈入火巢, 則亭舍, 何以區處耶? 集斗曰, 亭舍毁來, 作諸執事房後, 四五間尙餘矣, 年前盡爲毁去, 作仁明園齋室云矣。上曰, 自此抵上上主峯, 則其遠近險夷, 何如, 而足可以乘輿上去耶? 集斗曰, 相去不過爲數馬場, 而自下而上, 其勢去益高, 穿林小逕, 逶迤狹礙, 輿不得容, 行且艱矣。上曰, 補土處去路, 不甚小澁乎? 時偉曰, 臣聞園官及守僕言, 則多斫樹木, 然後可以通行云矣。上曰, 然則今姑置之, 後日奉審之路, 看審, 好矣。上曰, 此前大路, 在山法, 何如? 時偉曰, 前有大路之山, 往往有之而不爲害云矣。上曰, 前者, 大路出自何邊, 而今爲障塞, 以安樂峴出路耶? 集斗曰, 舊路自淸涼山南麓最低處, 回繚過洞口外矣, 已爲防塞, 今植樹木, 禁不往來矣。上曰, 林逕雖狹, 試往觀上峯矣。仍命進輿, 左通禮跪啓, 請乘輿, 上乘輿, 行未一里, 仍降輿平步。上謂志儉曰, 以右副所見, 左右龍虎之勢, 主案作穴之法, 何如耶? 志儉曰, 臣亦素昧, 不敢仰對, 其如何, 而以凡眼觀之, 則山勢極吉矣。上曰, 此是巡山之路, 而園官幾日一巡乎? 集斗曰, 以五日一巡, 爲定式, 而或有逐日巡山之時矣。上曰, 其然乎? 仍步上主峯, 看審山勢, 小憇後, 仍命還下。謂集斗曰, 不由來路, 更有他逕否? 集斗曰, 自左岡下去, 則路甚險隘, 反不如來路矣。左通禮前導, 上步下一崗, 左通禮跪啓, 請乘輿, 上乘輿, 詣園後降輿, 仍步下至碑閣, 奉審訖, 仍行展拜禮。贊儀導殿下, 詣盥洗位, 上盥洗訖, 贊禮導, 上陞自東階, 詣丁宇閣內版位, 上北向立。執禮徐龍輔曰, 再拜。贊禮啓請殿下再拜興平身, 上行再拜禮。執禮曰, 贊禮導殿下, 行初獻禮。贊禮導上, 詣尊所西向立, 執尊者擧羃, 時偉酌酒, 有防受酒, 贊禮導上, 詣神位前北向立。贊禮啓請跪, 上跪, 在位諸臣皆跪。宇鎭奉香盒, 志儉奉爐跪進, 贊禮啓請三上香, 上三上香, 志儉奠爐于案, 宇鎭奉爵跪進。贊禮啓請執爵獻爵, 上執爵獻爵, 以爵授志儉, 奠于神位前。贊禮啓請俯伏與小退北向跪, 上俯伏興小退北向跪。大祝李時秀, 進神位之右, 東向跪, 讀祝文訖。執禮呼贊禮, 導殿下降復位, 上俯伏退立版位上。亞獻官徐命善, 陞階詣神位前獻酌, 行亞獻禮, 還降復位。終獻官李徽之, 陞階詣神位前, 行禮如亞獻禮訖, 降復位。執禮呼再拜, 贊禮啓請上再拜興平身, 上行再拜禮訖。執禮曰, 望燎。贊禮導, 上詣望燎位, 西向立。執禮曰, 可燎。大祝, 捧祝版燎於坎。執禮曰, 禮畢。贊禮導上詣紅門內版位上。左通禮啓請殿下再拜, 上行辭園禮, 仍乘輿入齋室。上謂時偉曰, 向者被罪兩閫帥中, 孰輕而孰重? 時偉曰, 李得濟則當磨勘時, 比諸申大謙則差重矣。上曰, 職牒還給, 則雖不敍用, 軍門則似可行公矣。時偉曰, 然矣。命書傳敎曰, 兩閫帥所坐, 不無輕重之別, 亦與敍用有異, 前兵使申大謙, 職牒還給。上曰, 日尙早, 百官就次小息後, 初嚴則待下敎入之, 還宮時刻, 以未正三刻定行, 可也。承史·侍衛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83책(탈초본 81책), 정조 5년(1781) 4월 9일 임자(壬子) 15/16 기사



『승정원일기』 1485책(탈초본 81책), 정조 5년(1781) 윤 5월 4일 병오(丙午) 13/13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辛丑閏五月初四日酉時, 上御誠正閣。同副承旨入侍時, 同副承旨鄭志儉, 假注書趙衍德, 編修官張顯慶, 記事官文采五, 以次進伏訖。上曰, 庚炎轉甚, 今此講製, 似難課試矣。志儉曰, 似甚然矣。命讀兵曹草記, 志儉讀奏訖, 仍命書判付。又命書傳敎曰, 旣是當日還宮, 不出十里之內, 斥堠伏兵置之, 屛門把守軍兵, 留陣營不赴陣鄕軍中出用, 以此磨鍊節目事, 分付兵曹。上曰, 西門外白晝虎患, 聞甚驚怪矣。志儉曰, 果然矣。命書傳敎曰, 觀此漢城府別單, 西門外有捉虎之擧云, 大抵十數年間, 城闉內外虎跡, 比比有之, 西部字內, 有兩墓所, 而陔內禁松, 自致成藪, 年前遣禮堂看審後, 略翦枝柯, 其後必復如前蓊鬱, 若此不已, 則都下咫尺之地, 門豈不扄? 人將不行, 予所以每以爲慮者也。以此意令該曹知悉。依年前例擧行當否, 從近看審後稟處, 奚特西郊爲然? 年來東城外封築之後, 行將尤甚, 伊時郊幸初過, 已有縷縷之敎, 春初謁陵之路, 亦令紅箭門前, 左右各一行植木外, 皆勿禁養, 以除行路之弊云云, 該曹將此敎申飭乎? 如不明白指揮, 更令依此知悉擧行。上曰, 年前寧陵擧動回鑾時, 歷見仁明園, 則非但押近都城, 葬非其兆, 伊時任事之人, 果不善爲矣。志儉曰, 臣亦以其時都廳, 躬審董役, 而擇其吉地之故, 如是矣。上曰, 治國之道, 當以何先乎? 志儉曰, 惟在民心之安謐矣。上曰, 使民奠安, 固是王政所先, 而至於邊塞之鞏圉, 亦是安國本之一端, 不可不益加勤念處矣。爾在義州時, 民心邊情, 果何如? 志儉曰, 本州旣無土稅, 且無徭役, 故民皆安樂, 擧知向上之義矣。上曰, 萊府亦以使民安樂, 則似甚爲好矣。志儉曰, 言其重地, 則此與灣府無異矣。上曰, 兪彦鉉任在尙州時, 治績果能無疵乎? 志儉曰, 果爲善治, 而歸後州民, 尙今思之云矣。命退, 諸臣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85책(탈초본 81책), 정조 5년(1781) 윤 5월 4일 병오(丙午) 13/13 기사



『승정원일기』 1511책(탈초본 82책), 정조 6년(1782) 6월 1일 병인(丙寅) 16/16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有防曰, 請祛仁明園園字矣。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485책(탈초본 81책), 정조 5년(1781) 6월 1일 병인(丙寅) 16/16 기사



『승정원일기』 1614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11월 11일 신사(辛巳) 28/30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致仁曰, 聖人曰, 必也正名, 名不正則苟而已矣。宮園稱號, 卽我先朝定制, 其所別爲隆奉之擧者, 誠以毓慶之地, 所重有在也。若謂地閥有異, 則列朝嬪御, 不無高門盛族, 而不敢議到者, 可見法意之嚴也。向來仁明園改稱之論, 出於一二章疏, 而未承批敎, 蓋伊時議者, 以皇朝事爲言, 而是固天朝之制, 宜不敢證援。我朝典章, 則雖以儲君位號之重, 亦未嘗稱園, 而獨於本園, 創加例外之儀, 則揆以事例, 寧不未安? 宮號亦然, 事關國家典禮, 合有一番議正, 今日僚相, 皆入侍, 下詢而處之, 何如? 上曰, 左右相之意, 何如? 福源曰, 領相所奏, 實有援據, 旣知其有違典禮, 則恐宜趁卽釐正矣。熤曰, 此事, 不但合速釐正, 向於宰臣疏後, 旣有下敎, 而尙無廟堂稟處之擧, 此則責在臣等不勝慙悚, 更不可留難咨且矣。上曰, 中朝故事, 不足旁引云云。領相之言, 旣出守經之論, 旣知其當改, 則何拘銷刻之嫌? 依領相所奏, 施行, 可也。致仁曰, 降號等節, 令該曹擧行,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14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11월 11일 신사(辛巳) 28/30 기사



『승정원일기』 1614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11월 14일 갑신(甲申) 13/14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丙午十一月十四日巳時, 上御重熙堂。右副承旨入侍時, 右副承旨趙衍德, 假注書張相吾, 記事官李崑秀·李相璜, 稟事閣臣尹行任, 以次進伏訖。上曰, 戶曹正郞洪元燮入侍事。賤臣承命出, 與元燮偕入進伏。上命書榻敎曰, 提調入侍事。賤臣承命出, 與提調徐有隣偕入進伏。上命書傳敎曰, 宜嬪喪發靷日, 臨壙等奠, 遣承旨致祭, 今番祭品, 不煩外邑, 執事官, 亦勿以列邑守令塡差, 以都事及地方官察訪, 附近守令爲之事, 分付。有隣曰, 因領議政金致仁陳達, 仁明園降號等節, 令該曹擧行事, 命下矣。今此降號, 旣由於中朝故事之不足旁引, 而必也正名, 務歸至當, 則所當以國朝典禮爲據。國朝典禮之可合援引者, 只有金寧嬪房近例, 凡諸等事, 依此擧行。仁明園號, 孝徽宮號革罷, 丁字閣紅箭門毁撤, 碑石改刻, 去虎石及守奉官區處之節, 令各該曹, 擧行, 何如? 上曰, 依爲之。丁閣去拜位廳, 正堂, 仍用於祭廳, 可也。有隣曰, 園號宮號, 旣已革罷, 太常祭需, 今無可論, 而不設宮房, 又無折受, 宜有別般措置之道, 當以何處, 分付擧行乎? 上曰, 以今經費, 不可別設宮房, 然則劃給折受, 非可論, 京廟朔望焚香中官, 依前爲之, 俗節及時享墓所忌祭及俗節, 竝當爲之。不設宮房, 則劃送祭需設行, 更考可合前例, 登對時稟處, 可也。出擧條 行任曰, 年前原任提學兪彦鎬, 遭故時, 第三日致弔後, 有成服日勸粥, 卒哭日勸肉等節, 而係是外邑, 故自本官進排, 而遭故者, 若在京中, 則恐當依大臣遭故例, 自內廚擧行。至於時任閣臣服制式暇, 亦當援用他上司及政院經筵廳例, 而尙無一定之式, 故敢此仰達矣。上曰, 依爲之。出擧條 上命退, 諸臣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14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11월 14일 갑신(甲申) 13/14 기사



『승정원일기』 1614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11월 18일 무자(戊子) 23/24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丙午十一月十八日午時, 上御重熙堂。禮房承旨入侍時, 左承旨徐鼎修, 假注書金祖淳, 記事官尹行任·李相璜, 以次進伏訖。上曰, 禮判使之入來。賤臣承命出與禮曹判書徐有隣偕入進伏。上曰, 柳文養·洪元燮, 亦爲入侍。賤臣承命出, 與兵曹佐郞柳文養, 戶曹正郞洪元燮, 偕入。上曰, 諸凡擧行之事, 何以爲之乎? 元燮曰, 自本曹, 措備者, 盡爲擧行矣。上曰, 道路能無狹隘之患否? 文養曰, 臣往來看審, 則別無汚穢之物, 而獨校洞兩邊, 甚多且隘矣, 然皆設房堗, 無以除治, 是甚可悶矣, 有隣曰, 元嬪廟墓, 劃送祭需設行等節, 更考可合前例, 登對稟處事, 命下矣。遍考本曹謄錄及惠廳祭需劃送式例, 實無可合前例, 而太常祭圖中, 國舅家忌日仲朔祭物, 備送一款, 或可爲傍照之端, 旣不折受, 又不設宮, 則似不得不依此擧行, 而亦非十分襯當之例。臣不敢指的仰對, 至於設行日字及祭官, 倣用各宮房已例, 恐合事宜, 故敢此仰達矣。上曰, 宮則時享日字, 以二至二分磨鍊, 而時享懿昭墓典祀廳, 自可竝設, 熟設後, 入給中使, 使之行祭。墓則忌辰及俗節, 輸送祭物于本墓, 墓監, 監視熟設, 獻官則不必別差, 當遣中使設行。若此, 則倣用國舅家輸送太常祭物之例, 參用宮房行祀之制, 依此定式施行, 祭品則自本曹, 別單書入, 以爲量減之地, 可也。有隣曰, 廟墓祭品, 比前自當減省, 尊罍等不用祭器, 竝使之還下戶曹, 何如? 上曰, 依爲之。有隣曰, 伏承筵敎, 墓監已命自內差定矣, 料布等節, 何以爲之乎? 上曰, 料布, 參酌磨鍊, 量宜給復, 可也。有隣曰, 廟墓修改等節, 今則不當自戶曹及繕工主管, 而旣無該宮, 以何處定式擧行乎? 上曰, 宮與墓, 春秋季朔, 自內需司, 別定官員, 看審有無頉, 形止, 仍自該司, 草記稟旨, 可也。有隣曰, 宜嬪禮葬不遠, 宮墓祭享, 所當趁今磨鍊, 而取考義烈宮前例宮享, 則四仲朔四名日, 自太常擧行。墓享則忌辰四名日, 自本宮擧行, 今番亦依此擧行乎? 上曰, 體貌不可不顧, 依此爲之。有隣曰, 祭享旣已如是定式, 義烈宮及本宮四仲朔肉膳價米, 自惠廳, 直送, 各自本宮, 措備擧行乎? 上曰, 依爲之。出擧條 命書傳敎曰, 今日卽義烈宮封爵設宮之回甲也。先朝癸酉年, 毓祥宮封爵回甲日, 上謚封園, 以予追感之意, 逢今日, 豈無表意之擧? 然因事故未得躬拜宮墓, 已令承旨奉審, 而不可虛度此日。本家人中李仁康, 雖已甄用, 其子前兵使李性默, 尙無職名, 今日政, 相當職調用, 如無窠, 三營門中堂上窠, 作闕調用事, 分付。命退, 諸臣以次退出。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14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11월 18일 무자(戊子) 23/24 기사



『승정원일기』 1614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11월 25일 을미(乙未) 13/20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李祖承, 以戶曹言啓曰, 元嬪墓丁字閣拜位廳以下石物等, 毁撤之役, 以今日推擇, 而告由等節, 知委內需司, 則以爲初無聽傳敎之事, 不得擧行云, 何以爲之? 敢啓。傳曰, 分付禮賓寺, 除祝文, 只備脯醢及酒, 墓官奠酌事, 分付, 可也。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14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11월 25일 을미(乙未) 13/20 기사



『승정원일기』 1614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11월 25일 을미(乙未) 15/20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趙衍德, 以禮曹言啓曰, 因戶曹草記批旨內, 元嬪墓告由時, 以墓官奠酌事, 批下後, 以此知委於墓官, 則墓官南達孫在外, 墓官李永冕, 謂有事故, 成命之下, 終不奉承, 其在事體, 萬萬無嚴。當該墓官, 令該府拿問處之, 假官一員, 卽爲差出, 以爲將事之地, 何如? 傳曰, 允。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14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11월 25일 을미(乙未) 15/20 기사



『승정원일기』 1623책(탈초본 86책), 정조 11년(1787) 4월 6일 계묘(癸卯) 15/24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洪仁浩, 以戶曹言啓曰, 卽接內需司所報, 則元嬪宮與墓, 季朔看審時, 簾帳鋪陳等有頉處, 報戶曹事, 判下云矣。內而禮曹關文, 外而畿伯狀聞外, 元無自本曹擧行之例, 何以爲之? 敢稟。傳曰, 令禮曹稟處。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23책(탈초본 86책), 정조 11년(1787) 4월 6일 계묘(癸卯) 15/24 기사



『승정원일기』 1623책(탈초본 86책), 정조 11년(1787) 4월 7일 갑진(甲辰) 26/27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有隣曰, 因戶曹草記, 元嬪廟墓春夏有頉修改之節, 令禮曹稟處事, 命下矣。旣不設宮, 又無折受, 修改物力, 誠難區處, 而第念本墓內, 有位畓七石落, 田二十日耕, 使守護軍二十名, 分執耕食, 而不可無稅納, 故綽約定稅, 則合爲四十石零。以此付之墓官, 以備修改之物, 而董役等節, 令內司摠察擧行,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 。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1623책(탈초본 86책), 정조 11년(1787) 4월 7일 갑진(甲辰) 26/27 기사



『승정원일기』 2136책(탈초본 110책), 순조 20년(1820) 12월 5일 정해(丁亥) 24/24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上曰, 諸宰奏事。 魯敬曰, 祀典, 有國之所重也。 宮·園·廟·墓之忌辰節享祭需, 自太常封進, 自有定制, 毋敢違越, 故列聖朝, 後宮若非毓慶之地, 所重有在, 則元無祭需官供之例矣, 今此元嬪墓祭需降號之後, 宜卽革罷, 而因循未遑, 至今自太常封進云, 在法無據, 於禮未安。 臣職在宗伯, 旣知之後, 不可不一番仰請釐正, 而至於廟貌之別設, 亦非禮意, 祭需今欲釐正, 則尤不可如前立廟, 一依列聖朝他後宮例, 自壽進宮移奉擧行, 恐合事宜。 事係祀典, 問議大臣處之, 何如? 上曰, 依爲之。 出擧條。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136책(탈초본 110책), 순조 20년(1820) 12월 5일 정해(丁亥) 24/24 기사



『승정원일기』 2136책(탈초본 110책), 순조 20년(1820) 12월 11일 계사(癸巳) 20/23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林景鎭, 以禮曹言啓曰, 今十二月初五日藥房入診, 大臣·備局堂上引見入侍時, 臣魯敬所啓, 祀典, 有國之所重也, 宮園廟墓之忌辰節享祭需, 自太常封進, 自有定制, 毋敢違越, 故列聖朝後宮之若非毓慶之地, 所重有在, 則元無祭需官供之例矣。 今此元嬪墓祭需, 降號之後, 宜卽革罷, 而因循未遑, 至今自太常封進云, 在法無據, 於禮未安。 臣職在宗伯, 旣知之後, 不可不一番仰請釐正, 而至於廟貌之別設, 亦非禮意, 祭需今欲釐正, 則尤不可如前立廟, 一依列聖朝他後宮例, 自壽進宮移奉擧行, 恐合事宜。 事係祀典, 問議大臣處之, 何如? 上曰, 依爲之事, 批下矣。 發遣郞廳, 問議于時原任大臣, 則領中樞府事臣李時秀以爲, 元嬪廟宇之別立, 祭需之太常備送, 本非常典, 合有釐正, 依禮堂所奏, 移廟于壽進宮, 仍自該官措備祭需, 實爲得宜, 臣無容他議云。 行判中樞府事臣徐龍輔, 病未獻議, 行判中樞府事臣金載瓚以爲, 元嬪祭需, 自太常備送, 已違重祀典之意, 且廟宇別立, 亦由於未及釐正之故也。 依禮堂所陳, 一遵國朝定制, 恐不可已矣云。 行判中樞府事臣韓用龜以爲, 元嬪墓降號, 旣出正名之義, 則別立廟宇, 官供祭需, 有違常典, 依禮堂所陳, 及今釐正, 恐不可已矣云。 行判中樞府事臣金思穆, 病未獻議, 議政府右議政臣南公轍以爲, 列聖朝後宮, 若非毓慶之地, 所重有在, 元無別立廟宇官封祭需之例, 今此元嬪墓祭需之自太常備送, 有違於法, 未安於禮, 依禮堂所奏, 移廟于壽進宮, 祭需亦自該宮擧行, 實合事宜矣云。 大臣之議如此, 上裁, 何如? 傳曰, 依大臣議爲之。 壽進宮內, 亦各設祠宇, 而五處皆有所安, 無以推移云。 待解氷, 量宜造成事, 分付戶曹, 移往前則姑爲依前, 可也。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136책(탈초본 110책), 순조 20년(1820) 12월 11일 계사(癸巳) 20/23 기사



『승정원일기』 2139책(탈초본 110책), 순조 21년(1821) 3월 9일 기미(己未) 27/48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徐有聞, 以戶曹言啓曰, 元嬪祠宇移建吉日, 令日官趙相順推擇, 則開基三月初十日辰時, 定礎同月十七日卯時, 立柱同月二十日卯時, 上樑同月二十二日辰時爲吉云, 以此日時擧行, 何如? 傳曰, 待秋更爲擇日擧行。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139책(탈초본 110책), 순조 21년(1821) 3월 9일 기미(己未) 27/48 기사



『승정원일기』 2152책(탈초본 110책), 순조 22년(1822) 윤 3월 3일 무인(戊寅) 9/12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又以戶曹言啓曰, 元嬪祠宇營建所入物力, 代錢磨鍊, 輸送于壽進宮, 自其宮營建事, 命下矣。 材木石子, 已有治鍊等待者, 以此取用, 瓦甎·沙土·鐵物·彩色等各種及匠募雇價, 竝以錢磨鍊, 則都數爲一千七十七兩二錢八分, 依此數輸送本宮之意, 敢啓。 傳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152책(탈초본 110책), 순조 22년(1822) 윤 3월 3일 무인(戊寅) 9/12 기사



『승정원일기』 2153책(탈초본 110책), 순조 22년(1822) 4월 3일 정미(丁未) 15/40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傳于金陽淳曰, 元嬪廟位, 旣已移奉之後, 祭需條不可無區劃, 以前貢價上下條, 移劃於壽進宮, 以補祭需事, 分付該廳, 典監依例減下事, 一體分付。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153책(탈초본 110책), 순조 22년(1822) 4월 3일 정미(丁未) 15/40 기사



『승정원일기』 2211책(탈초본 112책), 순조 27년(1827) 1월 27일 계묘(癸卯) 20/21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又以御營廳言啓曰, 謹依下敎, 元嬪墓火巢內松木犯斫罪人本廳軍崔順吉·黃喜大等兩漢, 各嚴棍二十度後, 各別嚴繩次, 移送刑曹之意, 敢啓。 傳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211책(탈초본 112책), 순조 27년(1827) 1월 27일 계묘(癸卯) 20/21 기사



『승정원일기』 2211책(탈초본 112책), 순조 27년(1827) 1월 28일 갑진(甲辰) 11/11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又以刑曹言啓曰, 御營廳啓辭內, 謹依下敎, 元嬪墓火巢內松木犯斫罪人本廳軍崔順吉·黃喜大等兩漢, 各嚴棍二十度後, 各別嚴繩次, 移送刑曹之意, 敢啓。 傳曰, 知道事, 命下矣。 謹按律文, 則大典通編禁制條有曰, 京城十里內生松元株一株以上犯斫者, 杖一百徒三年。 崔順吉·黃喜大, 竝依此律, 各決杖一百後, 順吉黃海道甕津府, 喜大公忠道黃澗縣, 徒三年定配所, 卽爲押送之意, 敢啓。 傳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211책(탈초본 112책), 순조 27년(1827) 1월 28일 갑진(甲辰) 11/11 기사



『승정원일기』 2216책(탈초본 112책), 순조 27년(1827) 4월 17일 임술(壬戌) 22/28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尹秉烈, 以刑曹言達曰, 本曹赦前發配未至配所罪人黃澗·黃喜大, 元嬪墓所生松犯斫罪, 與已蒙放甕津崔順吉, 罪名相同, 永春韓壽福, 搶奪人財物罪, 與已蒙放海南鄭泓琯, 罪名相同矣。 旣是同罪, 則不可異同, 一體放送之意, 分付配所道臣, 何如? 令曰, 依。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216책(탈초본 112책), 순조 27년(1827) 4월 17일 임술(壬戌) 22/28 기사



『승정원일기』 2279책(탈초본 115책), 순조 32년(1832) 7월 15일 기미(己未) 14/16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又以禮曹言啓曰, 謹依口傳下敎, 明溫公主新定墓所境界, 發遣郞廳, 與中使眼同看審, 則新定墓所, 以酉坐卯向定標, 而四標則西至胡踰峴主峯, 東至大路, 南至元嬪墓接界, 北至外靑龍山底至大鍾巖後山脊云矣, 敢啓。 傳曰, 知道。 Quote-right blue.png
출처: 『승정원일기』 2279책(탈초본 115책), 순조 32년(1832) 7월 15일 기미(己未) 14/16 기사



번암집[편집]

『번암집』 권38, 애책문애사(哀冊文哀辭) 병부(幷附)[편집]

Quote-left blue.png 仁淑元嬪哀冊文

維歲次己亥五月初七日庚寅。仁淑元嬪洪氏逝于昌德宮之養心閤。七月癸未朔初三日乙酉。永遷于東部溫水洞亥坐之原。禮也。琯灰移葭。井葉飄梧。星沈阿閣。漏咽凉壺。彩輴依遲兮苦霧。丹旌翻動兮凄風。主上殿下䀌泡幻於蘭儀。悼刦灰於椒宮。徘徊翠幄。撫念芳塵。爰命彤管。俾壽貞珉。其詞曰。

豐山煙熅。毓慶降祥。蟾珠樓錦。嘉夢煌煌。廼生碩媛。金相玉度。聖上二載。念軫螽羽。祇承慈旨。遂行三揀。婉婉德容。秀出閨閫。慈聖褰簾。在心惟簡。慈宮帶喜。錫以饌飯。旣閒且靚。規退矩進。冊號元嬪。有赫銀印。履貴愈約。處謙惟謹。束心秋毫。夙宵氷淵。靡大靡小。罔或自專。一室嚴嚴。端坐如植。奩珠篋繡。過眼苴礫。數問宮宵。櫛纚容飾。問寢殿宮。璜佩肅肅。或命已之。惄焉廢食。正冠始入。聖心攸敬。端拱避席。雍容暇整。相對如賓。動以禮秉。仁浹郡主。恩溥六宮。感戴慕悅。匪貌伊衷。何慶不臻。何福不宜。病如不病。毋使上知。夫何夢語之怳惚兮。帝遣人而邀之。夜整襟而迎上兮。曉奄然而長訣。宮人之如哭私親兮。炊不煙於三日。嗚呼哀哉。仰念慈宮。無以娛悅。純孝根性。坐不離膝。慈宮色憂。隨以憂炳。慈宮罹囏。隨以淚逬。視膳善寡。自爲飢飽。慈宮曰咨。卓哉嬪孝。聖上曰嘉。予實忘憂。庶見祥和。充牣宮幬。倐焉千古。彼蒼悠悠。嗚呼哀哉。兄兮登壇宿衛之臣。弟兮嬪京贊化維新。其永有賴。宗國萬年。天何爲兮篤生。神何爲兮速奪。兄孔懷兮叫號。耿宸情之忉怛。嗚呼哀哉。秋生兮古閤。塵掩兮虛廂。宛容儀之如在兮。愀擧目而茫茫。嗟佳城之鬱鬱兮。占東闉之密邇。禁鍾兮宮鷄。聲相通兮泉隧。神理不遠於人情兮。僾周旋兮瑤戺。嗚呼哀哉。流川不息。逝暉無停。人生之卒歸於盡兮。孰有殤而有彭。惟德音之未沫兮。並蘭茝而彌芳。慈宮旣叙其媺行兮。倬聖筆之流光。徵美諡於永禩兮。托琬琰而無疆。嗚呼哀哉。

哀冊文製進後陳所懷䟽附

伏以仁淑元嬪。奄然遐逝。中外人情。忉怛惟均。臣叨承明命。製進哀冊。而文辭荒拙。懿行淑德。不能形容其萬一。中心慚忸。不知攸措。昨者都監吏書告。以爲纔因大臣 大臣卽徐命善筵達。哀冊文中逝于養心閤之逝字。改以薨字。故方以薨字改付標以入云矣。臣竊思之。薨與逝。俱是徂落之義。似無彼此之殊。而但古人使字。各有攸主。若非所書而書之則非禮也。况禮之所重。專在於別嫌明微。夫以仁元貞聖二聖后禮陟時所書之字。今乃混以書之於元嬪之喪者。未知大臣有何別般意見也。且王朝所進文字。設有可改之處。大臣拈出句語。陳白於上。使製進之人。商量自改。事理固應然也。今乃不使臣知之。直使下吏改付標以入。後之覽者若以這一字爲眞出於臣。則臣雖百喙。何以脫淸議之誅乎。然此特就臣身而言。竊恐元嬪有知。以平日謙約之操。必有所蹙然不敢當之意。典禮所關。不容終默。茲敢冒死仰陳。惟聖明進退焉。臣無任屛營悚蹙之至。呈于喉院見遏。竟未得徹。前此余於戊戌夏。奉使赴燕還渡鴨水。始聞元嬪選入宮。定號淑昌宮。後於大庭候班。大殿大妃殿惠慶宮中宮殿以次問安。余則認以爲問安已畢。方欲退坐。忽聞院隷又呼淑昌宮。承言色下來。余惝怳驚恠。顧在傍宰臣曰。淑昌宮亦有朝廷問安乎。曰。節目如此。余曰。非正統與誕聖嬪宮。朝廷之不爲問安。禮也。所謂節目。果誰爲之。曰。徐相國所定。余曰。中宮殿旣呈問安。又於淑昌宮如之。則相國獨不知天無二日之義乎。相國由是切齒。固久矣。及哀冊後䟽語播傳。乃曰。是將殺我。時。相國能死生禍福人。陰嗾顯擠。必欲湛滅乃已。至於壬寅筵啓構捏罔測之境。苟非聖上明幷日月。何以照燭。使微命不至虀粉乎。此二事。爲媒禍之源。故尾記之如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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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번암집』 권38, 애책문애사(哀冊文哀辭) 병부(幷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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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편집]

학술적 성격의 저작물[편집]

1.고문헌

  •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능원묘천봉안(陵園墓遷奉案)』, 1929 ~ 1945,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대중적 성격의 콘텐츠[편집]

주석[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