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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4대 왕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 소생의 조선 5대 왕, 문종(文宗)의 안태지(安胎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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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5대 국왕 문종의 태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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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으로 즉위 후 가봉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태가 위치한 은풍현(殷豐縣)은 군으로 승격했는데 기천현(基川縣)을 합속시켜 풍기군(豐基郡)으로 이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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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때 난간을 나무로 만들게 했는데 잘 지켜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세조 때 태실의 석난간과 전석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1666년(현종 7) 울산부사 남천택이 문종 태봉이 위치한 곳에 전장(田莊)을 설치한 것이 발각되는 등 부침을 겪었다.
  
 
=='''관련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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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13일 (월) 01:24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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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 태실(文宗 胎室)
경북 예천군 효자면 명봉리 문종 태실 터 전경
식별자 PC005
분류 국왕 태실
한글명 문종 태실
한자명 文宗 胎室
영문명 Placenta Chamber of King Munjong
피안자 명칭 문종(文宗)
피안자 이칭 이향(李珦)·자(字) 휘지(輝之)·공순대왕(恭順大王)·현릉(顯陵)
피안자 부 세종(世宗)
피안자 모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
피안자 생년월일 1414.11.15
피안자 몰년월일 1452.06.01
안태 연월일 미상
안태지 기록 경상도 풍기군
안태지 기록1 경상도 은풍현 『문종실록』
안태지 기록2 풍기(豊基) 명봉사(鳴鳳寺) 뒤 『정조실록』
안태지 기록3 경북 영주군 상리면 『서삼릉 문종 태실 후면 각자』
안태지 좌표(위도) 36°77'85.68"N
안태지 좌표(경도) 128°37'63.73"E
안태지 주소 경북 예천군 효자면 명봉리 산 2
문화재 지정여부 미정
이안 연월일 1929 추정
이안지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서삼릉 내
이안지 좌표(위도) 37°66'45.61"N,
이안지 좌표(경도) 126°86'06.29"E
지문 永樂十二年甲午,正月,三日生,文宗大王胎,藏于榮州郡上里面,昭和四年,月,日移藏
지문 찬자 이왕직 예식과(李王職 禮式課)
지문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석물 문종·장조 태실 석물군명봉사 경내
태항아리 문종 태지석 및 태항아리 일습
태항아리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목차

내용[편집]

조선 제5대 국왕 문종의 태실이다.

국왕으로 즉위 후 가봉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태가 위치한 은풍현(殷豐縣)은 군으로 승격했는데 기천현(基川縣)을 합속시켜 풍기군(豐基郡)으로 이름했다.

세종 때 난간을 나무로 만들게 했는데 잘 지켜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세조 때 태실의 석난간과 전석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1666년(현종 7) 울산부사 남천택이 문종 태봉이 위치한 곳에 전장(田莊)을 설치한 것이 발각되는 등 부침을 겪었다.

관련 기록[편집]

조선왕조실록[편집]

『문종실록』2권, 문종 즉위년(1450) 7월 4일 병오(丙午) 2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임금의 태를 봉안한 경상도 기천현을 군으로 승격시키도록 주청하다》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권맹손(權孟孫)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의 본관(本貫)인 경상도(慶尙道) 기천(基川) 관할 안에 있는 은풍현(殷豐縣)은 곧 주상의 태(胎)를 봉안한 곳이니, 청컨대 군(郡)으로 승격하여 수(守)를 두소서."

하니, 이조(吏曹)에 내리어 의논하게 하였다.

藝文館大提學權孟孫等啓曰: "臣等籍鄕慶尙道 基川任內殷豐縣, 乃上安胎之處, 請陞郡置守。" 下吏曹議之。

Quote-right blue.png
출처: 『문종실록』2권, 문종 즉위년(1450) 7월 4일 병오(丙午) 2번째 기사



『문종실록』2권, 문종 즉위년(1450) 7월 26일 무진(戊辰) 6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태를 안치한 은풍현을 군으로 승격하고 기천현과 합하여 풍기군으로 이름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이조(吏曹)의 정문(呈文)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경상도(慶尙道) 기천(基川) 관할 안의 은풍현(殷豐縣)은 태(胎)를 안치(安置)한 곳이니, 청컨대 곤양군(昆陽郡)의 예에 의하여 군(郡)으로 승격시키고, 기천현(基川縣)을 합속시켜 풍기군(豐基郡)으로 이름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議政府據吏曹呈啓: "慶尙道 基川任內殷豐縣, 乃安胎之處。 請依昆陽郡例, 陞爲郡, 以基川縣合屬, 號爲豐基郡。" 從之。

Quote-right blue.png
출처: 『문종실록』2권, 문종 즉위년(1450) 7월 26일 무진(戊辰) 6번째 기사



『문종실록』6권, 문종 1년(1451) 9월 28일 계해(癸亥) 7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태실이 있는 은풍의 현에 다른 읍의 속현을 소속시킬 것을 의논케 하다》

처음에 임금의 태실(胎室)을 기천(基川)의 임내(任內)인 은풍(殷豊)의 땅에 봉안(奉安)하였는데, 임금이 즉위(卽位)하자, 기천과 은풍을 병합(幷合)하여 한 고을로 만들어서 군(郡)으로 승격시키고 ‘풍기(豊基)’라고 부르고 기천의 옛 고을을 그대로 다스리게 하였다.

은풍의 인민들이 상서(上書)하여 호소하기를,

"군의 치소(治所)를 본현(本縣)으로 옮기도록 원합니다."

하였으나, 정부(政府)에서 치소(治所)를 옮기는 폐단을 아뢰었다.

임금이 또 감사(監司)로 하여금 심사하여 아뢰게 한 뒤에 다시 의논하게 하니, 감사의 계문(啓聞)은 정부의 의논(議論)과 같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태실(胎室)이 있는 은풍의 현(縣)을 다른 고을로 옮겨 소속시킨다면 조금도 태실을 존중하고 받드는 뜻이 없게 되고 기천이 과연 의논한 바와 같다면 실로 치소(治所)를 옮기기 어렵겠다. 다른 읍의 속현(屬縣)을 은풍에 소속시켜서 합하여 한 고을로 만들어 수령(守令)을 두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그것을 다시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初安上胎于基川任內殷豐之地, 及上卽位, 乃幷合基川、殷豐爲一邑, 陞爲郡號豐基, 仍治基川舊邑。 殷豐人民上書訟之, 願移郡治于本縣, 政府陳其移治之弊。 且令監司, 審啓後更議, 監司啓如政府之議。 上曰: "胎所在殷豐之縣, 移屬他邑, 殊無尊奉胎室之意, 基川果如所議, 實難移治。 將他邑屬縣, 屬于殷豐, 合爲一邑, 置守何如? 其更議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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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종실록』6권, 문종 1년(1451) 9월 28일 계해(癸亥) 7번째 기사



『세조실록』30권, 세조 9년(1463) 3월 4일 계사(癸巳) 1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이극배에게 소헌 왕후 태실과 문종 대왕 태실의 석난간을 봉심토록 하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옛 순흥(順興)의 소헌 왕후 태실(昭憲王后胎室)과 옛 은풍(殷豐)의 문종대왕 태실(文宗大王胎室)은 석난간(石欄干)과 전석(磚石)이 조금 물러났으니, 청컨대 풍수 학관(風水學官)을 보내어 봉심(奉審)하고 수즙(修葺)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어찌 반드시 따로 보내야 하겠느냐? 마땅히 도순찰사(都巡察使) 이극배(李克培)로 하여금 봉심(奉審)하여서 아뢰게 하라."

하였다.

禮曹啓: "古順興 昭憲王后胎室、古殷豐 文宗大王胎室, 石欄干及磚石差退, 請遣風水學官奉審修葺。" 傳曰: "何必別遣。 宜令都巡察使李克培奉審以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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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조실록』30권, 세조 9년(1463) 3월 4일 계사(癸巳) 1번째 기사



『현종실록』12권, 현종 7년(1666) 4월 21일 신미(辛未) 3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대사간 정만화 등이 울산 부사 남천택 등의 정죄를 청하다》

대사간 정만화 등이 아뢰기를,

"울산 부사 남천택(南天澤)은 입안(立案)을 사칭하여 금화(禁火) 구역인 문종 대왕(文宗大王) 태봉(胎封) 안에 전장(田莊)을 설치하였으니, 크게 법을 무시한 처사입니다. 나문하여 정죄하소서. 경상도의 전임과 후임 감사는 즉시 계문하지 않았으므로 사실을 숨긴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아울러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大司諫鄭萬和等啓: "蔚山府使南天澤稱以立案, 設庄於文宗大王胎封禁火之內, 其蔑法大矣。 請拿問定罪。 慶尙道前後監司, 不卽啓聞, 難免掩置之罪。 請竝推考。" 上從之。

Quote-right blue.png
출처: 『현종실록』12권, 현종 7년(1666) 4월 21일 신미(辛未) 3번째 기사



『정조실록』18권, 정조 8년(1784) 9월 15일 정묘(丁卯) 1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예조에서 열성조(列聖朝)의 태봉(胎峰)을 써서 바쳤다》

태조 대왕(太祖大王)의 태봉(胎封)은 진산(珍山) 만인산(萬仞山)에,

정종 대왕(定宗大王)의 태봉은 금산(金山) 직지사(直持寺) 뒤에,

태종 대왕(太宗大王)의 태봉은 성산(星山) 조곡산(祖谷山)에,

세종 대왕(世宗大王)의 태봉은 곤양(昆陽) 소곡산(所谷山)에,

문종 대왕(文宗大王)의 태봉은 풍기(豊基) 명봉사(鳴鳳寺) 뒤에,

단종 대왕(端宗大王)의 태봉은 곤양(昆陽) 소곡산(所谷山)에,

세조 대왕(世祖大王)의 태봉은 성주(星州) 선석사(禪石寺) 뒤에,

예종 대왕(睿宗大王)의 태봉은 전주(全州) 태실산(胎室山)에,

성종 대왕(成宗大王)의 태봉은 광주(廣州) 경안역(慶安驛) 뒤에,

중종 대왕(中宗大王)의 태봉은 가평(加平) 서면(西面)에,

인종 대왕(仁宗大王)의 태봉은 영천(永川) 공산(公山)에,

명종 대왕(明宗大王)의 태봉은 서산(瑞山) 동면(東面)에,

선조 대왕(宣祖大王)의 태봉은 임천(林川) 서면(西面)에 있었다.

현종 대왕(顯宗大王)의 태봉은 대흥(大興) 원동면(遠東面)에 있는데, 신유년 10월에 돌 난간을 배설(排設)한 뒤에 대흥현(大興縣)을 승호(陞號)하여 군수(郡守)를 두었다.

숙종 대왕(肅宗大王)의 태봉은 공주(公州) 남면(南面) 오곡(吳谷) 무수산(無愁山) 동구(洞口)에,

경종 대왕(景宗大王)의 태봉은 충주(忠州) 엄정립비(嚴政立碑)의 북쪽 이삼리 쯤에,

영종 대왕(英宗大王)의 태봉은 청주(淸州) 산내(山內) 일동면(一東面) 무쌍리(無雙里)에 있었다.

禮曹書進列聖朝胎(峰)〔封〕 。 太祖大王胎封珍山 萬仞山, 定宗大王胎封金山 直持寺後, 太宗大王胎封星山 祖谷山, 世宗大王胎封昆陽 所公山, 文宗大王胎封豐基 鳴鳳寺後, 端宗大王胎封昆陽 所谷山, 世祖大王胎封星州 禪石寺後, 睿宗大王胎封全州 胎室山, 成宗大王胎封廣州 慶安驛後, 中宗大王胎封加平西面。 仁宗大王胎封永川 公山, 明宗大王胎封瑞山東面, 宣祖大王胎封林川西面。 顯宗大王胎封大興遠東面, 辛酉年十月, 石欄干排設後, 大興縣陞號爲郡守。 肅宗大王胎封公州南面吳谷 無愁山洞口, 景宗大王胎封忠州嚴政立碑北數里許, 英宗大王胎封淸州山內一東面 無雙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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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조실록』18권, 정조 8년(1784) 9월 15일 정묘(丁卯) 1번째 기사



승정원일기[편집]

『승정원일기』 194책 (탈초본 10책) 현종 7년(1666) 4월 23일 계유(癸酉) 13/22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隨駕諸臣과 內侍에게 내린 加資의 還收, 文宗大王의 胎室을 잘못 관리한 南天澤 등의 처벌 등을 청하는 鄭萬和 등의 계》

大司諫鄭萬和, 正言李東稷啓曰, 前啓措語見上 請加思量, 諸臣及內侍加資, 一倂還收。

新啓 文宗大王胎室, 在於豐基郡鳴鳳山, 今方依例守護, 而蔚山府使南天澤, 家在安東地, 稱以立案, 伐木設庄於禁火之中, 至令奴僕, 作家入接, 官家禁令, 亦不動念, 其蔑法自肆之狀, 殊極驚駭。

本郡枚擧南天澤所犯, 自去冬, 累度牒報於監司, 而監司不以啓聞請罪, 至今掩置, 亦難免其責。請蔚山府使南天澤拿問定罪, 慶尙道前後當該監司, 從重推考。

答曰, 不允, 末端事, 依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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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94책 (탈초본 10책) 현종 7년(1666) 4월 23일 계유(癸酉) 13/22 기사



『승정원일기』 195책 (탈초본 10책) 현종 7년(1666) 5월 11일 신묘(辛卯) 16/22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南天澤 등의 일에 대하여 처치를 잘못하였으므로 遞職을 청하는 李東稷의 계》

正言李東稷啓曰, 臣於頃日, 文宗大王胎室禁火處, 伐木設庄人南天澤請拿時, 以當該前後監司不爲啓聞, 姑先從重推考論啓, 蒙允矣。物議以爲監司之掩置不聞, 厥罪惟均, 只請推考, 擬律太輕, 而臣意則姑待天澤就理, 觀其供辭而更論, 亦似未晩。故不卽自列矣, 今聞群議, 久而益激, 臣何可晏然仍冒乎?

且於昨日獻納崔逸之處置也, 同僚來問可否, 臣方欲以前事引避。故處置措語, 不欲明白議定, 而請出之意, 則槪與之同矣。繼聞該道監司於春間, 以營米設賑之意啓聞, 其後, 又以賑穀將乏馳啓, 自備局, 題給常平廳穀物, 則一番啓聞等語, 殊非實狀。物議皆以爲非云, 臣旣以聯名, 則處置乖當之失, 在所難免, 以此以彼, 尤難冒居, 請命遞斥臣職。

答曰, 勿辭, 退待物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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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95책 (탈초본 10책) 현종 7년(1666) 5월 11일 신묘(辛卯) 16/22 기사



『승정원일기』 195책 (탈초본 10책) 현종 7년(1666) 5월 28일 무신(戊申) 14/17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引見할 때 洪重普를 遞差하는 문제, 南龍翼을 堂上에 察任하게 하는 문제 등에 대하여 許積 등과 논의함》

… (전략) … 右議政許積所啓, 前慶尙監司閔點之被論罷職, 極涉冤抑矣。閔點到界之日, 豐基郡守魚尙俊, 文報同郡地文宗大王胎封火巢內, 有安東兩班設庄事, 曾已報使禁斷云云。 厥後亦無文報之擧, 則閔點之不預此事, 明若觀火, 而終乃被劾於言官, 不亦冤乎? 今日入侍諸臣, 無不明知矣。

上曰, 然則閔點敍用, 可也。

吏曹判書金壽恒所啓, 自前有別歲抄, 則年例歲抄, 不爲別書以入矣。今者頒赦後, 歲抄纔已入啓, 年例歲抄, 則似當別爲書入, 而至於赦後見罷者, 則何以爲之乎?

上曰, 年例歲抄, 則勿爲書入, 只赦後見罷者, 別單書入,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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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95책 (탈초본 10책) 현종 7년(1666) 5월 28일 무신(戊申) 14/17 기사



『승정원일기』 195책 (탈초본 10책) 현종 7년(1666) 5월 29일 기유(己酉) 13/15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遞職을 청하는 李東稷의 계》

掌令李東稷啓曰, 臣頃忝諫職, 聞南天澤, 於胎封禁標內, 設庄之事, 極用驚駭。旣得見豐基郡守前後文報, 則凡三度報狀, 而初度則稱山腰以下, 二百年斧斤不入之地, 盡爲斫伐, 燒火爲田云云。再度則稱旣報之後, 南家奴子, 一次刑推, 旋卽放送, 必以郡守所報, 爲不足取信, 別定差員, 更爲摘奸云云, 三度則稱文宗大王胎室火巢內, 安東兩班, 上年二月, 出立案設庄, 已爲報使禁斷云云。

初報再報, 則金徽爲監司之日, 三報則乃閔熙到任之後也, 其報狀中, 雖稱已爲禁斷, 而旣有胎室火巢內, 立案設庄等語, 則此固人所共憤。缺宜驚惕詳問, 而泛然看過, 有若不緊公事者然, 比之金徽之掩置, 雖有缺不可謂之專然無所失, 緘問之後, 當得缺竝請推考者, 蓋出於此也。厥後物議, 以擬律太輕爲非, 故引避見遞矣, 今聞大臣於榻前陳達, 閔熙之無罪, 以爲極涉冤抑云, 若曰冤抑, 則當初請推之論, 亦未免不審之歸, 臣何敢自以爲是, 而抗顔臺閣之上乎? 請命遞斥臣職。

答曰, 勿辭, 退待物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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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95책 (탈초본 10책) 현종 7년(1666) 5월 29일 기유(己酉) 13/15 기사



『승정원일기』 198책 (탈초본 10책) 현종 7년(1666) 12월 25일 신미(辛未) 14/18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權衍의 削去仕版, 吳熽의 罷職不敍, 宋明奎의 拔去薦目과 薦主인 具仁墍의 推考를 청하는 義禁府의 계》

禁府啓, 權衍族人之通文, 臣光熽, 得見之矣。

粘一小紙於通文之上曰, 此權澳與衍之書也。

其書有曰, 吾欲以爾子爲侍養云云。設令今書, 果爲權澳之手筆, 澳之夫妻在世之日, 旣無侍養之事, 而其孼子旁題奉祀, 已過數十年之久, 則權澳夫妻之意, 可知也。財主之自處如此, 則衍何敢囑其族人, 欲奪其血屬之奉祀而與之子乎?

且考見澳書所載年月, 則乃去壬午年也, 今去壬午, 已至二十五年之久, 而藏其隻字, 以待其澳妻之死, 而欲售其擾奪之計, 此豈士夫之所忍爲者哉? 雖以族人議論之携貳, 不得改書旁題, 而其田民財産, 一任權衍之區處, 誠極可駭。實狀如此, 更無審察之事。永平縣令權衍, 請命削去仕版。漢城判官李騫, 爲人麤鄙, 凡所營爲, 無非悅人肥己之事, 所到之處, 貪穢彰聞, 姑擧其一二款而言之, 曾經義興縣監, 定送境內木工於牙山本家, 營造房舍, 嬖妾用事, 刑杖任意, 下輩怨苦, 逃散煩多。

及爲司䆃寺主簿, 與其長官相詰, 蹴踏杯盤於公會, 沾汚衣冠, 聽聞無不爲駭。如此貪鄙悖戾之人, 不可置在縉紳之列。漢城判官李騫, 請命削去仕版。新除授咸安郡守吳熽, 性本庸闒, 不合字牧之任, 遐邑蘇殘之責, 決非所堪, 且前者南天澤之設庄於豐基地, 文宗大王胎峰也。

熽爲其時郡守, 聽其所言, 許其冒占, 焚燒斫伐, 一任所爲, 遂至侵及胎峰至近之地, 遞歸之後, 始爲後官所發, 掩置不聞之道臣, 旣被拿推, 則熽以當初許設之邑倅, 何獨俾免? 請新除授咸安郡守吳熽, 罷職不敍。今此別薦, 實出於朝家明揚仄陋之意, 而副率宋明奎, 以衆所共棄之人, 亦參其中, 物情皆以爲駭, 請宋明奎拔去薦目, 薦主綾豐君具仁墍, 推考。副司正李三錫, 鄕居歛聚, 醜說多行, 況其父兄之累, 爲世賤惡, 而遽被堂后之薦, 物情駭然。或以夤緣爲疑, 玷辱名器, 莫此爲甚, 請李三錫削薦之主罷職。

答曰, 不允。推考事及削薦事, 依啓, 薦主亦爲推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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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98책 (탈초본 10책) 현종 7년(1666) 12월 25일 신미(辛未) 14/18 기사



『승정원일기』 796책 (탈초본 44책) 영조 11년(1735) 3월 7일 정축(丁丑) 12/14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洪尙賓, 以觀象監官員, 以提調意言啓曰, 元子阿只氏胎峯占得次, 本監地官李器弘, 發送於諸道矣。江原道原城縣雉岳山下, 酒泉面伏龍山下, 洪川縣兀雲山下, 平昌郡獅子山下, 質峨山下, 各占一處, 而仍尋山脈, 慶尙道順興府小白山麓一處, 永川縣太白山下一處, 豐基縣小白山下文宗大王胎室局內一處, 醴泉縣小白山下一處占得, 而轉往忠淸道報恩縣俗離山下內外, 各占一處, 合十二處, 而其中慶尙道豐基縣小白山丑坐未向, 醴泉小白山子坐午向, 江原道原城縣雉岳山午坐子向之地, 最優云。以此三處, 擬望擇定, 以爲藏胎之地, 而其餘所占處, 則分付各道該邑, 禁其土民, 侵占穿鑿之弊, 何如?

傳曰, 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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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96책 (탈초본 44책) 영조 11년(1735) 3월 7일 정축(丁丑) 12/14 기사



『승정원일기』 799책 (탈초본 44책) 영조 11년(1735) 윤 4월 15일 갑신(甲申) 22/22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乙卯閏四月十五日卯時, 上御宣政殿常參,

… (중략) … 寅明曰, 臣以安胎使下去矣。新胎峯, 有文宗大王胎室, 故奉審則蓮花石·欄干石, 竝皆依舊, 欄干一面石色頗異, 而要皆無大段毁傷, 修改不至時急, 其處山谷深峻, 石材運入極難, 若欲一竝修改, 則功力甚鉅, 民弊必多, 旣無表石, 此則雖不可不刻立, 而其他石役, 姑觀前頭爲之, 恐無妨矣。

在魯曰, 欄干橫石兩面, 元無稜與他面之八稜者有異, 且不正圓, 有同無隅石, 其中一石, 又有腰折細痕, 不無前頭折墮之慮, 若以其不甚緊急, 竝與表石新設而姑徐, 則可也。若設表石, 則此兩石, 似不可不同時改設, 石樣不大, 工亦不大段矣。

上曰, 旣無表石, 則當爲新設, 而其他不得不修改者, 同時修改,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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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799책 (탈초본 44책) 영조 11년(1735) 윤 4월 15일 갑신(甲申) 22/22 기사



『승정원일기』 807책 (탈초본 45책) 영조 11년(1735) 8월 23일 기축(己丑) 28/42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慶尙道豐基地文宗大王胎室의 表石豎立에 대해 여쭙는 禮曹의 草記》

又以禮曹言啓曰, 慶尙道豐基地文宗大王胎室, 表石豎立吉日, 定在來九月二十五日。本曹堂上郞廳及觀象監·繕工監提調下去蕫役事啓下, 而上年昆陽·全州·大興胎室表石豎立時, 因大臣陳達, 只令本曹堂上·郞廳及監役官下去蕫役矣。今番則何以爲之? 敢稟。

傳曰, 今亦依此擧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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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807책 (탈초본 45책) 영조 11년(1735) 8월 23일 기축(己丑) 28/42 기사



『승정원일기』 1568책 (탈초본 84책) 정조 8년(1784) 10월 8일 경인(庚寅) 46/48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慶尙道豐基地文宗大王胎室의 表石豎立에 대해 여쭙는 禮曹의 草記》

甲辰十月初八日申時, 上御誠正閣。時·原任大臣·備局堂上入侍時,

… (중략) … 魯鎭曰, 景慕宮胎峯, 纔已奉審矣。加封之節, 旣不容少緩, 而鳴鳳山局內, 旣多石材之可以取用者, 至於碑石, 則及此凍節, 前期留意求得, 然後可無臨時窘急之弊, 而一局之內, 且有文宗大王加封胎室, 石物長端[長湍]尺數, 可以取而爲制, 及此未凍之前, 令地方官兼監役, 浮石整待, 以隣近守令, 定差員監董, 待明春擧行之意, 卽爲分付於該道道臣, 而明春擇日後, 令雲觀繕工監, 如例進去排設, 則可無費日字之患, 亦爲省民弊之端, 敢此仰達矣。

上曰, 以此出擧條, 待明春解凍, 卽爲擧行,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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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1568책 (탈초본 84책) 정조 8년(1784) 10월 8일 경인(庚寅) 46/48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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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편집]

학술적 성격의 저작물[편집]

1.고문헌

  • 조선 예조, 『태봉등록(胎封謄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태봉(胎封)』, 1928,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2.단행본

  •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삼릉태실』,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 심현용, 『한국 태실 연구』, 경인문화사, 2016.
  • 윤진영, 김호, 이귀영, 홍대한, 김문식 공저, 『조선왕실의 태실 의궤와 장태 문화』,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

3.논문

  • 윤석인, 『조선왕실의 태실 변천 연구』,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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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