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태실지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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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1년(태종 1) 하륜(河崙)을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로 삼아 가봉하려 하였으나 농번기이고 가뭄이 심하다는 이유로 문하부 낭사에서 반대를 했다. 그러나 하륜을 증고사로 삼고 지관(地官) 윤신달(尹莘達)을 붙여 태실지를 물색하게 하였고, 이후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로 안태사(安胎使)를 삼아 함주(咸州)에 있던 태함을 받들고 와 경산부(京山府) 조곡산(祖谷山)에 태(胎)를 봉안하였다. 이 일로 경산부는 성주목(星州牧)이 되었다.
 
1401년(태종 1) 하륜(河崙)을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로 삼아 가봉하려 하였으나 농번기이고 가뭄이 심하다는 이유로 문하부 낭사에서 반대를 했다. 그러나 하륜을 증고사로 삼고 지관(地官) 윤신달(尹莘達)을 붙여 태실지를 물색하게 하였고, 이후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로 안태사(安胎使)를 삼아 함주(咸州)에 있던 태함을 받들고 와 경산부(京山府) 조곡산(祖谷山)에 태(胎)를 봉안하였다. 이 일로 경산부는 성주목(星州牧)이 되었다.
  
현재 태실지에는 분묘가 조성되어있으며, 태실을 구성했던 석물은 성주군청이 2012년 대동문화재연구원에 「성주 태종·단종 태실 학술(지표)조사」를 의뢰하여 태석함의 함개(函蓋) 일부와 팔각대석, 개첨석, 주석, 동자석, 전석, 횡죽석 등 다수의 잔존 석물을 수습해 별도로 보관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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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태실지에는 분묘가 조성되어있으며, 주변에서 태실을 구성했던 석물은 확인되지 않는다.
 
 
태종 태실의 원당으로는 태봉사(胎峰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앞서 대동문화재연구원의 조사에 의하면 대봉1리 마을 남서면 골짜기 일대에 ‘절골’이라는 지명을 확인한 바가 있다. 아울러 해당 일대의 지표상에서 분청자편, 백자편 등 자기편과 파상문 등이 시문된 기와편 등이 다수 확인되면서 사지와 관련된 건물지, 기단선축 등은 확인이 불가하나 조선전기에 해당하는 분청자편 등을 비롯한 조선시대 유물이 다수 확인되어 해당 지역이 태봉사지일 가능성이 높다.
 
  
 
=='''관련 기록'''==
 
=='''관련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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