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조 태실지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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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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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추존 국왕으로 영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의 태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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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1대 왕 영조와 영빈 이씨 소생의 추존 국왕, 장조(莊祖)의 안태지(安胎地).
 
 
영조는 사도세자의 태를 태어난지 3개월만에 안태하였다. 충청도 덕산‧강원도 춘천‧원성현 치악산‧주천면 복룡산‧경상도 풍기 등 다양한 지역을 간심하였다. 결국 경상도 풍기 명봉산으로 정해졌다. 인근에 문종 태실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세자의 태실을 조성하는 한편 문종 태실도 수개하였다. 하지만 이후 기록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다가 정조의 즉위 이후 사도세자 태실 관련 기록이 나타난다.
 
 
 
정조는 재위 기간 내내 사도세자 추숭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서울에 있었던 수은묘를 수원 화산 아래로 옮겨 현륭원이라 이름하였다. 단순히 이름을 고쳤을 뿐 아니라 여러 상설제도를 왕릉에 준하였다.
 
 
 
정조의 경모궁 태실 가봉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당시 경모궁 태실 가봉 논의에 신하들은 의거할 전례가 없다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결국 정조는 경모궁 태실을 가봉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모습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중인 《장조태봉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정조의 태실 가봉이 경모궁 태실 가봉의 예를 따라 이루어진 것을 함께 고려하면 경모궁 태실은 현륭원과 같이 국왕의 태실격으로 가봉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훼손된 채 방치되다 흔적을 찾을 수 없었던 장조의 태실은 2012년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팀이 현장 답사를 통해 태실지가 확인된 뒤 예천군에서 발굴조사를 해 복원되었다.
 
 
 
한편 명봉사 진입로에는 자연암반에 사도세자 태실 조성에 참여한 감역인 명단이 새겨진 각석이 남아있다. 이 각석을 통해 사도세자 태실 가봉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 및 감역 규모를 추정할 수 있다.
 
 
 
이 각석은 <예천 명봉리 경모궁 태실 감역 각석문>으로 명명되어 2016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23호로 지정되었다.
 
  
 
=='''관련 기록'''==
 
=='''관련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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