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빈 성씨 묘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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詣璿源殿展拜仍詣懿昭墓及宣禧墓行酌獻禮歷臨孝昌墓行奠酌禮
 
詣璿源殿展拜仍詣懿昭墓及宣禧墓行酌獻禮歷臨孝昌墓行奠酌禮
 
…(전략)…乘輿臨墓上行奠酌禮仍臨宜嬪墓奠酌訖乘便輿巡後岡至萬里倉後麓少頃還齋室召見閣臣 承旨乘馬出齋室入崇禮門至敦化門外命隨駕軍兵解嚴至協陽門下馬乘輿還內|출처=『일성록』, 정조 14년(1790) 3월 15일 을미(乙未)}}
 
…(전략)…乘輿臨墓上行奠酌禮仍臨宜嬪墓奠酌訖乘便輿巡後岡至萬里倉後麓少頃還齋室召見閣臣 承旨乘馬出齋室入崇禮門至敦化門外命隨駕軍兵解嚴至協陽門下馬乘輿還內|출처=『일성록』, 정조 14년(1790) 3월 15일 을미(乙未)}}
 
 
 
===의빈묘지명===
 
====의빈묘지명(宜嬪墓誌銘)====
 
{{Blockquote|의빈 성씨는 문효세자의 어머니이다. 문효가 병오(1786년) 5월에 죽고 여섯 달이 지나고 나서 9월 14일 갑신에 빈 또한 죽고 말았다. 석 달 뒤 11월 20일 경인에 율목동 문효의 묘 왼쪽 언덕 묏자리에 장사 지냈다. 빈은 자신을 잃고 문효를 따라 죽기를 늘 소원하더니 비로소 이제 문효의 무덤 곁으로 떠나가 버렸다. 빈은 장차 한을 풀고 문효의 혼백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 아아, 슬프도다. 빈은 나면서부터 맑고 총명하여 생후 만 1년이 갓 되자 능히 이름을 구별할 줄 알고, 단정한 태도와 자세를 수양하고, 맑고 올곧고, 더욱 상서로이 화기로우며 온화했다. 열 살(영조 38년, 1762년)에 궁중에 들어왔는데 임금의 친척 집안 여인들이 모두 나라에 공로가 많고 벼슬 경력이 많은 집안 혈통으로 알았다. 타고난 기품이 아주 훌륭하게 뛰어나 능히 남을 높이고 자기를 낮췄고 검소하게 절약하며 사용 했다. 심지어 사람으로서 행해야 할 옳은 길을 도회지에서 똑똑하게 분별하고 확고하게 지키니 적지 아니하게 놀랐다. 처음 승은을 내렸을 때 내전이 아직 귀한 아이를 낳아 기르지 못했다며 눈물을 흘리고 울면서, 이에 감히 명을 따를 수 없다며 죽음을 맹세했다. 나는 마음을 느끼고 더는 다그치지 못했다. 15년 뒤에 널리 후궁을 간택하고 다시 명을 내렸으나 빈은 또 거절 했다. 이에 빈의 노비를 꾸짖고 벌을 내렸고 그러한 뒤에 비로소 내 명을 받들어 당석 했다. 그 달에 임신함으로써 임인(1782년) 9월에 세자를 낳았다. 이해 소용으로 봉해졌고 귀한 아들로 하여금 빠르게 품계가 올라 의빈이 되었다. 빈은 자기 의견만 옳다고 여기는 바를 더욱 스스로 억눌렀다. 내전을 대할 때는 온 마음을 다하여 예를 갖추고 두려워하고 존경하며 섬겼다. 시침 할 때는 "이제부터 국세를 의탁할 데가 있지만 위로 내전이 있고 또 후궁이 있습니다."라며 또 번번이 당석이 잘못 되었다며 사양하고 거절하며 피했다. 내전은 그 자식을 이미 받아들였고, 양육 할 때는 반드시 생모에게 맡겼는데 조정에서 예로부터 전해오는 규칙과 정례였다. 빈은 감히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여 처리하지 않고 내전을 따랐고 내전은 빈으로 하여금 기르게 하고 점차 자라기를 기다렸다. 빈은 세자를 어루만질 때는 생각하여 몸과 마음가짐을 조심했고, 밤에는 반드시 아침이 밝을 때까지 밝은 촛불을 두었고, 잘 때는 옷을 벗은 적이 없었는데 5년 동안 한 결 같았다. 또 나날이 천한 일을 몸소 했고, 말을 할 때는 극진히 존중히 여기고 공경했다. 너무 지나치다고 말하면 빈은 "왕세자는 내전의 아들입니다. 내가 낳았다고 어찌 감히 스스로를 높이겠습니까?"라고 했다. 빈의 거처는 겨우 비바람을 가리어 막고, 의복과 음식은 될 수 있는 대로 얼마 되지 않아 변변하지 못하게 했다. 이에 "지금 지체가 높고 귀한 신분은 이미 나에게는 과분합니다. 도리어 스스로를 자랑하고 방자하게 행동한다면 어찌 더욱이 몸에만 재앙이 든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동궁이 복을 오래 누릴 수 있도록 생활을 검소하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처음 5월에 변고가 일어나고 떠나보낼 때 말과 얼굴빛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람이 혹 괴이하게 여겨 어찌 개의치 아니하냐고 물어보니 "내 몸은 내 몸이 아닙니다. 지금 보는 나라는 위태함이 위엄이 머리카락과 같습니다. 다행히 내가 임신 했지만 늘어놓고 슬퍼하고 이와 같이 거리낌 없이 마음대로 행동한다면 내가 자연스럽지 못한 것과 같아 나라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헌데 어찌하여 병이 들었단 말인가? 증세는 의술과 약으로 고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해산할 달에 기력이 가라앉았는데 매일 세수할 때 내가 가서 보고 살폈다. 정신은 혼미하여 어지럽고 사지는 움직일 수 없어도 나를 대할 때는 몸가짐을 조심하고 용모를 단정하게 하고 기운을 내서 메아리처럼 응답했다. 임종하기 전날 저녁에 내가 가자 갑자기 슬퍼하고 한탄하며 눈물을 흘리며 청했다. 이에 내가 꾸짖으며 "평상시 나를 볼 때는 근심 어린 얼굴이 아니었는데 오늘은 어찌하여 이와 같은가?"라고 물었다. 빈이 말하기를 "앞서서 내전께 아들이 생긴 경사는 축복이었습니다. 천신이 다시 자식을 가져서 종사는 매우 다행이지만, 사심을 마음속으로 억눌러 견뎌내지 못하여 근심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이제 복이 지나치게 과분해서 끝내 병이 중해졌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마음에 차지 않으나 오직 오래도록 지닌 소원은 죽을 고비에 임하여도 아직 얻지 못하여 근심입니다. 그러니 정전에 자주 가시어 대를 이을 아들을 부지런히 구하면 경사가 있을 것이니, 장차 땅속에서도 즐거워하고 기뻐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나는 감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일어나 옷을 바르게 하고 자리에 나아가서 내가 들어가서 보니 이미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내전(효의왕후)은 빈이 진실로 나라를 위했다며 정성스럽게 말했는데 거짓됨이 없었다. 지난날을 생각하건대 어찌 아닐 수 있었겠는가? 이와 같이 죽음을 잊지 아니하고 맛보는 일과 언행을 조심했는데 빈의 죽음을 슬퍼하고 정성껏 임하는 태도와 마음은 매우 친밀하여 자매를 잃은 마음이었다. 온 궁 안 사람이 모두 빈의 죽음을 한탄하여 한숨 쉬고 슬퍼하며 애처로워했고 통곡하며 부르짖었다. 빈이 작위를 받고나서 나는 더 엄하게 단단히 단속하여 이따금 사람이 견디지 못 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빈은 한 뜻을 기쁘고 좋게 웃어른의 명령을 좇았다. 일이 혹 더욱 은혜에 해당 되면 위축되어 더욱 멀리하고 견지 했으니 자못 겸손했다. 빈의 선산 터가 이롭지 못하여 의논하여 이장하자고 하자 빈이 간하여 말하기를 "천한 집안의 일에 감히 마음대로 안배하여 번잡하게 관청의 돈을 쓰는 것은 사사로운 개인의 뜻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것은 중한 바인데 네가 불가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바라건대 스스로 의복을 팔아서 이장 비용에 보태라."고 일렀다. 동궁의 외가 사친은 규정에 따라 증 찬성에 추증하지만 나는 이전에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5월에 문효세자가 죽고 난 뒤에 비로소 교지를 내렸는데 빈은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하고 두려워하며 한 집안 사람으로서 분황을 예로서 중지 할 것을 청하며 말하기를 "벼슬을 더 높여서 내려주는 것은 곧 국가의 법전이 있는 바인데 감히 전하께서 내려주는 물건을 받을 수 없습니다. 또 뜻밖에도 어찌 감히 장대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내가 빈이 매양 애석해서 따뜻한 밥과 비단, 모시를 내렸으나 도리어 궁의 희빈(姬嬪)만 못하였다. 비록 자기를 굽히고 의지를 꺾어 검소함을 따랐으나 오히려 가난하고 군색함을 염려하며 궁중 사람에게 늘 너그러이 빌려줬다. 결국에 가서는 세상을 떠나자 상자에는 남은 비단이 없어서 염습할 때 모두 시장에서 가져왔고, 살아생전에는 은수저를 만들지 않아서 반함(염습 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구슬과 씻은 쌀을 물림)을 할 때 버드나무로 대신 했다. 궁인들이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지며 말하기를 "빈이 그 청빈함을 잘 알고 지키니 마침내 이에 이른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빈의 두 오라버니는 곤궁하여 스스로 보전하지 못하였으나 사심으로 관여한 적이 없었다. 내가 "조정의 관작은 진실로 부당하게 남수하는데 너는 어찌하여 남는 녹봉으로 저 배고픔과 추위를 구원하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빈이 걱정하는 모양으로 대답하길 "궁방이 세워진 이후 한 물건도 제멋대로 쓰지 않았는데 어찌 감히 사가의 천인에게 재물의 은덕을 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런 이유로 빈의 장례 때 그 친족은 다른 사람에게서 옷과 신발을 빌렸다. 궁빈의 사친은 관직명이 없는 사람은 궁중 출입을 허락을 받을 수 없으나 오래 전부터 본궁에서 접견하라고 허락했었다. 그러나 빈이 본궁에 나가 기거 하면서 사친과 여러 해 동안 격조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문 앞에 이르지 못하게 했다. 말하기를 "올 때 임금에게 여쭈고 아뢰어 뜻을 받들지 아니 하고서는 감히 불러내어 만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무릇 형제가 몹시 가난하여 어찌 할 수가 없어서 의탁하고자 하면 가족과 떨어지고자 했다. 단란함은 사람이 항상 품고 있는 심정인데 빈은 어찌 오직 다른 사람과 다르단 말인가. 내가 내린 명령은 한 가지 일이라도 마음대로 하지 않고 조심히 정성껏 지켰는데, 이는 실제로 사실을 경험했다. 궁에서 산지 20여년인데 일찍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좋지 않은 눈으로 본 적이 없었다. 혹여 말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이거나 의심을 접하면 반드시 자세하고 소상하게 하여 스스로 완전히 타당함에 이르게 했다. 나는 보통 때 집안 밖의 일을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빈도 역시 상황을 따르며 술잔을 주고받는데 익숙하고 내명부에 대해 꺼내지 않았다. 내가 혹 처소에 도착할 때면 궁중의 계집종들은 모두 황급히 숨어 감히 나아가지 않았다. 자기 스스로 뉘우치고 경계함에 힘썼고 아랫사람을 엄격하게 다스리는 것도 이와 같았다. 길쌈에 민첩하고, 요리를 잘 하고, 다른 일도 가까이 하여 붓글씨도 역시 스스로 범상함을 넘었다. 수리 학문을 익히면 능히 알아차리고 모두 이해했고, 정신과 식견은 느끼는 곳마다 밝은 지혜가 열려 도를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재능과 기예도 완전히 갖추었을 따름이다. 아아, 빈의 장사(葬事)에 반드시 내가 비석에 새기는 글을 지었다. 어찌 재주와 얼굴을 잊지 아니하겠는가. 나는 궁액을 엄히 다스리고 가까운 사람에게 가혹하게 대하는데 일을 주면 헤아려서 명령을 받드는 일이 적었다. 빈을 후궁 반열에 둔지 20년인데 단단히 타일러서 잘못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조심하게 했다. 이에 곧 명심하고 작은 실수도 하지 않고 조심하며 응대하였는데 법도가 저절로 있었고,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으니 마땅히 출중했다. 이것은 뛰어난 현인도 분명히 어렵다. 본분을 각별히 정성껏 지키며 신분의 엄격함을 뚜렷하고 분명하게 하였다. 사사로이 윗사람을 찾아가서 청탁하는 일을 경계하고 엄히 끊어내고 가득 이루어놓음에 있어서 염려하였는데 이는 더욱 어려운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에 이른 것이 크고 옳고 그름이 매우 분명하지만 감히 입을 열 수 없고, 일이 되어가는 형세는 손을 댈 수 없으면 능히 오랫동안 정성을 쌓고 있는 힘을 다해 곧바로 나아가 물러서지 않았다. 가진 것의 의리로 하여금 끝내 마땅히 바른 곳으로 돌아가게 하니 이는 책을 읽은 사대부가 쉽게 갖추지 못하는 바이다. 만약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일에 능하고 절개와 지조가 있다고 여기고 전하여져서 당대의 미담이 될 것이다. 후일 빈의 상론은 이와 같다. 빈의 출신은 가난하고 지체가 변변치 못하여 스승에게 배우지 못하고 후궁이 되었지만 학문을 배우지 않아도 알았다. 내전을 위해 힘과 마음과 정성을 다한 것은 하늘과 땅이 마땅히 알고 금석도 가히 뚫을 수 있을 것이다. 빈은 높음과 귀함, 임금의 은덕을 입은 영광을 즐거움으로 삼기에 거듭 부족하다고 했다. 마음에 잊히지 않는 정성으로 매우 간절히 청하며 반드시 내전에게 정성을 다하겠다고 하며 더구나 장차 상심하고 슬피 울면서 평생 동안 내전을 따르겠다고 지극히 바랐다. 비록 옛날에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하는 충정이지만 배에 칼을 꽂은 정성도 이에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빈은 덕을 실천하고 지키는 마음은 그 무엇과도 섞이지 않고 온전히 드러냈으니 이는 본디 그대로의 것에서 드러났음을 경험 할 수 있다. 이에 마땅히 낳은 어진 아들은 영광된 왕세자가 되고, 공을 세워서 국세가 태산과 반석처럼 편안하고, 경사로이 자식을 길러 왕족이 번창되어야 할 터인데 나라의 운세가 불행하고 신의 이치가 크게 어그러져 갑자기 올해 여름 문효세자가 죽은 변이 있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뱃속에 있는 아이와 하루아침에 죽었으니 빈의 흔적은 장차 이 세상에서 아주 사라질 것이다. 이 뛰어난 언행을 내가 글로 적지 않는다면 누가 그것을 전하고 알려서 아주 사라지는 것이 애석하다고 하겠는가? 이는 빈에게 한이 되고, 문효세자에게도 한이 될 것이다. 이에 대략 찬차 하였는데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이 글이 길어졌다. 그대 빈은 계유년생이고 향년 34세이다.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문효세자이고 딸은 해를 못 넘기고 죽었다. 빈의 본관은 창녕이고 고려 때 중윤 직위를 맡은 성인보가 시조이다. 인보의 아들은 문하시중으로 지낸 송국이다. 그의 증손은 검교의 정승으로 문정공이고 자는 여완이다. 여완의 큰 아들은 석린이고, 둘째 아들은 석용이며, 셋째 아들은 석인이다. 성석인은 예조판서와 대제학 직위에 올랐었고 시호는 정평인데 이 사람이 빈의 선조다. 그러나 이후 집안이 중간에 계보를 잃어버렸다. 7대조 만종은 제릉 참봉이고, 고조 성경은 군자감 정이다. 빈의 아버지는 증 찬성 윤우이고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임씨인데 통례원 인의 임종주의 딸이다. 다음과 같은 명을 내린다. 하늘을 따라 정중하게 행동하고 말을 하면 사람을 감동하게 했다. 몸은 정중하게 행동하고 입은 극진한 말을 했으나 복록이 은덕에 보답을 받지 못한 것은 아마도 운명인가보다. 저 고요한 율곡의 언덕은 문효세자가 잠든 곳이니 영원토록 서로를 지켜줄 것이다. 생각하건대 멀고 오랜 세월동안 배회하며 탄식하고 근심할 것이다.
 
宜嬪成氏是文孝世子之母也文孝以丙午五月逝越六月甲申嬪又歿歿之越三月庚寅葬于高陽郡之栗木洞實文孝墓左岡壬坐之原也嬪自失文孝常願死則歸葬于其墓側今乃遂其願尙能紓嬪之恨而慰文孝之靈乎嗚呼悲夫嬪生而瑩慧甫周歲能卞姓名字容儀脩潔端凝祥和藹然踰十歲選入掖庭戚里家婦女之出入大內者皆認以閥閱種子天稟絶異能持謙恭而行儉約至於義理大處明辨確守不少變也承恩之初以內殿之姑未誕育涕泣辭以不敢矢死不從命予感之不復迫焉後十五年廣選嬪御復以命嬪又固辭至責罰其私屬然後乃從命自當夕之月卽有身以壬寅九月誕元良是歲封昭容旋進秩宜嬪以子貴也自是益自抑畏事內殿備盡誠禮侍寢則曰從今國勢有托而上有內殿且有嬪御其又敢當夕乎輒切諫而辭避焉內殿旣取其子子之若其養育之節必任於其所生母卽國朝故事也嬪惟罔敢自專而聽於內殿內殿使自養以待稍長則撫視惟謹夜必明燭達朝未嘗解衣而寢者五年如一日躬執賤役言語極其尊敬或言其太過則曰儲君也內殿之子也我何敢以己出而自尊乎居處僅蔽風雨服食務從菲薄曰我之有今日榮貴分已侈矣顧益自誇而自肆豈惟於身爲災尙可曰爲東宮惜福云乎哉及遭五月之變能以理譬遣未
 
嘗形于辭色人或恠其恝然則曰吾身非自有也見今宗國之危凜然如髮而幸吾有娠若任情肆悲縱吾不自恤如得罪宗國何其遘疾也症形非醫藥所治彌月沈頓而日必盥頮爲予之臨視也雖在精神迷亂四體不能運動之時對予則輒斂容作氣應答如響屬纊之前夕予臨問則忽辭致悽惋淚隨言零予責之曰平日未嘗以慽容見予今反如是何也嬪曰內殿之慶膺斯男生前至祝也賤臣之復有子雖爲宗社深幸而竊不勝私心之憂畏今果福逾分而病至革矣一死不足怛而惟以宿願之未獲爲臨死之慽焉或望頻御正殿勤求嗣續則方來之慶亦將懽忭於地下云予感而頷之及詰朝起正衣就席而訖予入視已無奈矣嬪所以爲宗國爲內殿者苟非至誠無僞則顧何能之死不忘若是其惓惓乎內殿嘗服其誠意親愛無間悼喪之懷若失同氣一宮之人皆咨嗟稱惜至於痛哭奔號焉嬪自受爵予之操切益嚴往往有人所不堪而處之怡然一意承順或事係干恩尤瑟縮斂遠愈執其謙嘗以嬪家山地之不利方議改葬嬪諫曰以賤家事至煩公費實非私意之所敢安予言其有所重而不可獲已則曰願自賣衣服以補葬需云東宮外家私親例贈贊成而予曾不許至五月喪後始降官敎嬪懼不自勝家人請行焚黃之禮嬪止之曰䝯贈卽國典所在不敢不祗受而又安敢張大乃爾予於嬪每惜其恩數饎爨絲枲之用反不如宮姬嬪雖折節從儉乎尙患艱窘輒假貸於宮中人及其歿也篋無餘帛斂襲之具皆取於市生時不造銀匙其飯含也以柳代之宮人輩瞠然相語曰固知嬪之守約而其貧乃至此乎有二娚窮窶無以自存而未嘗有私與焉予詔之曰朝家官爵固不當濫授而爾獨不以俸餘救其飢寒乎嬪蹙然而對曰設宮房以後不敢擅用一物況敢爲私家賤人沾丐之資乎故嬪之喪其親屬率借其衣靴於人云宮嬪私親之無職名者雖不通籍於禁中而許接見於本宮故事則然嬪之出寓本宮也私親之積年貽阻者使不得造門起居曰來時未敢稟承不可召見云夫兄弟之顚連欲其庇覆親懿之離闊欲其團欒此人之常情嬪豈獨異於人哉其謹守予敎令無一事自專斯足以驗也處宮闈二十有餘年未曾與人睢盱或事有難言地偪嫌疑而必委曲宛轉自至妥當予居常不以外言入內而嬪亦習於循默酬酢不出於戶庭予或臨止則所使之宮婢皆惶匿不敢前其自飭之勤而嚴於御下亦如此敏女紅善烹餁卽其餘事而筆翰亦自超凡旁通數理之學便能領會蓋其神識開悟觸處皎如非特才藝之全備而已嗚呼嬪之葬必用予銘豈爲才色之不忘乎哉予御宮掖嚴而近苛給事承令少可於意嬪之置後庭之列廿載于玆而佩訓飭則尺寸無失愼應對則規度自有夙夜匪懈終始如一此其出類之賢固已難矣恪守常分明乎等級之嚴痛絶私謁戒其盈成之懼此其尤難者也今夫義理之關係至大是非孔彰而地處之有不敢開
 
口事勢之有莫可容手猶能積誠竭力直前無退使所執之義理終歸於至當至正之地者此讀書士夫之所未易辨而一有其人則指以爲能事大節傳爲當世之美談後日之尙論若嬪者出自寒微不資師承小星之女歸妹之娣初未學而知之而若其爲內殿之苦心血忱神祗可質也金石可透也一身之尊貴恩榮曾不足以爲樂而耿耿之衷懇懇之辭必欲自效於內殿乃以將死之哀鳴獲遂平生之至願雖古之尸諫之忠剚腹之誠不是過也而其執德持心純然出於本然之公有可徵矣宜其篤生賢子光承儲位功存國勢之磐泰慶毓公族之熾昌而邦運不幸神理多舛遽見今夏之喪變又未幾何與其在腹之兒一朝歸化嬪之跡其將泯沒於斯世矣其言行之卓卓可紀非予述之有孰傳之而知其爲泯沒之可惜乎此不惟爲嬪之恨而爲文孝之恨也遂撰次梗槪不覺其言之長云爾嬪以癸酉月日生得年三十有四擧一男一女男卽文孝女生未踰歲而矢嬪昌寧人昌寧之成以高麗中尹仁輔爲鼻祖中尹之子曰松國門下侍中傳三世而始入本朝曰汝完檢校政丞諡文靖文靖長子石璘次石瑢次石因禮曹判書大提學諡靖平是爲嬪之先而因中微間失譜系云七代祖萬種齊陵參奉高祖景軍資監正父曰胤祐贈贊成母曰林贈貞敬夫人引儀宗胄女也銘曰
 
行之循乎天者敦行言之感乎人者至言躬敦行而口至言祿之不酬德殆命焉彼窈栗阡文孝攸藏兮永言相守想百世徊徨而咨傷兮|출처=의빈묘지명(宜嬪墓誌銘)}}
 
 
 
===의빈묘표===
 
====의빈묘표(宜嬪墓表)====
 
{{Blockquote|내가 즉위한지 10년째 되는 병오 9월 갑신일(1786년 음력 9월 14일)에 의빈 성씨가 사망했다. 같은 해 5월에는 문효세자가 죽었다. 빈이 임신하여 해산할 달에 이르렀는데 죽었다.
 
빈은 사망하기 전날 밤에 옷섶을 정리하고 눈물을 흘리며 내게 “국가의 자손 번창 소망이 효의왕후가 아닌 천한 몸에서 나왔는데 병에 걸려 죽으니 이는 감당할 수 없는 재앙입니다. 이제부터 자주 효의왕후에게 거둥하시어 부지런히 대를 이을 아들을 바란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일찍이 효의왕후가 자식을 낳고 기르며 지내지 못 한 것을 항상 근심하고 탄식했다. 승은을 받기 시작할 때는 감히 효의왕후를 대신 하여 당석 할 수 없다며 간절히 사양했다. 내가 잠시 틈을 타서 무언가에 빗대어 재치 있게 경계하거나 비판해도 한 결 같이 온통 매우 간절했다. 더구나 빈은 숨이 끊어져갈 쯤에도 오히려 기운을 내서 마음속에 있는 진심을 완연히 전하니 감동 받기에 충분했다. 나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얼굴 표정을 고치고 약속하겠다고 했다. 내가 보건대 예로부터 첩이 시침하는 것을 보면 지체가 높고 귀한 사람은 항상 정위(정실)가 자신을 핍박하고 근심하게 만든다고 했다. 이에 정실을 업신여기고 욕되게 하였다. 빈은 병을 앓다가 죽음을 직면했을 때 사랑에 끌려 잊지 못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고, 사후에 사사로운 사랑에 얽매이는 총애를 받는 영광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빈의 권력과 부귀는 스스로 높여서 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빈은 죽음을 단연코 근심하지 않았다. 다만 한 결 같이 마음을 다하여 효의왕후가 반드시 소망을 이룰 것이라고 믿었다. 그 현명함이 어찌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빈은 문효세자를 낳았으나, 스스로 왕세자의 어머니라고 내세우지 않고 겸손하게 자신을 억제했다. 처소는 수리하지 않고 의복을 입고 음식을 먹는데 있어서는 검소하게 절약하며 지냈다. 그리고 의빈은 “내가 지금 어긋난다면, 내가 감히 복을 바라고 아주 작은 사치라도 부리면 내 몸에 재앙이 있을 것이다. 이를 논할 겨를이 없는데 어찌 문효세자의 석복을 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엄히 다스려서 허둥지둥 일을 처리하게 한 적이 없었다. 때때로 은총을 받는 사람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있을 만큼 엄하게 다스렸다. 하지만 빈은 몸가짐과 언행을 조심하고 지키며 임금이 내린 명령을 두려워 하는 기색 없이 분명하게 해냈다. 또한 내내 게으른 적이 없었다. 빈은 궁궐 처소에서 지낸지 20년이다. 부정하게 남에게 재물을 주는 자를 우러러보지 않았으며 효의왕후로부터 특별한 친애를 받았다. 빈을 잃은 효의왕후의 울음은 대단히 우애가 좋은 형제를 잃고 근심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세상에 빈과 같은 사람이 어찌 많겠는가. 빈은 영조 29년, 계유 7월 8일 생이고 득년 34세다. 본관은 창녕이며 고려 때 중윤 직위를 맡은 성인보가 비조이다. 성인보의 아들은 시중으로 지낸 성송국이다. 시중의 증손은 검교의 정승으로 문정공이며 자는 여완으로 시사했다. 나는 빈의 집안 맏아들이 조상이 엄습하여 세상이 명망이 있는 집안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후 번창하던 집안이 중간에 쇠퇴하였다가 제릉참봉 성만종으로 하여금 비로소 집안이 벼슬길에 나아갔다. 하지만 또 다시 삼대 동안 벼슬에 나가지 못하다가 성정경이 군자감으로 지냈는데 곧 빈의 7대조로 고조부와 같다. 빈의 아버지는 증찬성 성윤우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임씨다. 빈의 부모는 법도에 따라 추증 되었는데 이는 문효세자의 외조부모였다. 저 지체가 낮고 천한 여염에서 이 같이 빼어난 사람이 태어나서 세자를 낳고 영화로움을 받들어 빈의 자리에 올랐으니 마땅히 우연이 아닌 듯했다. 그러나 문효세자의 무덤에 흙이 마르기도 전에 빈이 뱃속의 아이와 함께 급히 세상을 떠났다. 내가 죽음을 슬퍼하며 아까워함은 특별히 빈의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빈이 세상을 떠난지 세 달이 되는 경인에 고양군 율목동 임좌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는데 문효세자의 묘와 백 걸음 정도 떨어져 있다. 이는 빈의 바람을 따른 것인데 죽어서도 빈이 나를 알아준다면 바라건대 장차 위로가 될 것이다. 내가 빈의 언행을 표본으로 하여금 기록하여 광중에 묻고 묘비에 요점만 간단하게 요약해서 썼다. 찾아오는 사람이 빈의 현명함을 애석해 하도록 할 따름이다. 사랑하는 빈의 불행한 운명은 위에 적힌 사실과 같다.
 
予卽阼之十年丙午九月甲申宜嬪成氏歿是歲五月喪文孝世子嬪方有娠幾臨月而嬪遂歿矣其歿之前夕敷袵垂涕而告予曰國家螽斯之望不于正殿而于賤身賤身病且死此不稱之災也繼自今頻御正殿勤求嗣續則死無足恨蓋以內殿之未始誕育居常憂歎承恩之初苦辭不敢當夕而乘間諷切懇懇如一乃於綿綴之際猶且作氣力致宛轉言出肝膈有足感動人者予不覺改容而許之予觀從古妾御之居榮貴者常嫌正位之偪己從而有凌嫡蔑分之患其臨死之托鮮不係戀乎私屬以徼身後之寵光焉嬪則榮不以自尊死不以自慽而斷斷苦心只知有內殿必伸其志願而後已其賢豈易得哉文孝嬪之出也嬪自爲儲君母益自謙抑所處之室不加修葺被服飮食務從儉約曰我之有今日非我敢期復欲一毫侈大于前吾身之有災不暇論此豈爲東宮惜福之道哉予嚴於操切未嘗假以恩寵往往有不可堪處而略無難色謹守飭令恐恐然如有失終始罔懈處宮闈二十餘年未或與人睢盱特蒙內殿之親愛內殿哭其歿慽甚孔懷其賢於人者不亦多乎嬪生于英宗二十九年癸酉七月八日得年三十有四系籍昌寧以高麗中尹仁輔爲鼻祖中尹之子曰門下侍中松國侍中之曾孫曰檢校政丞文靖公汝完始仕我朝圭組相襲爲世望族其後中衰至齊陵參奉萬種始通仕又三世而爲軍資監正景卽嬪七世祖若高祖贈贊成胤祐贈貞敬夫人林卽嬪父母也贈秩之典以文孝外親也夫以閭巷卑微之地生此拔類之賢載誕元良寵承嬪位殆若有不偶然者而文孝之墓土未乾嬪又與在腹之子遽殞其命予所衋傷匪特爲嬪之一身而已歿越三月庚寅葬于高陽郡之栗木洞壬坐原距文孝墓百步而近以從嬪之願也死而有知庶以其孔邇爲慰也歟予以嬪之言行本末誌于壙又書其梗槪于墓石使來者惜嬪之賢而哀其命之不幸云爾|출처=의빈묘표(宜嬪墓表)}}
 
 
 
 
===순재고===
 
====『순재고』권6, 제문, 의빈묘견내시치제제문(宜嬪廟遣內侍致祭祭文)====
 
{{Blockquote|小星其職。德冠後宮。先王曰嘉。克追周風。嗣服之後。感于心衷。諸宮展謁。今日其同。甲辰邦慶。壬寅之功。文禧廟拜。其親也兄。敬薦𨡜酭。酌獻禮成。未能進拜。咫尺之地。遣官替酌。庶幾歆止。|출처=『순재고』권6, 제문, 의빈묘견내시치제제문(宜嬪廟遣內侍致祭祭文)}}
 
 
 
====『순재고』권6, 제문, 의빈회갑일치제제문(宜嬪回甲日致祭祭文)====
 
{{Blockquote|於乎是宮。吉慶攸宜。嬪德克淑。聖褒曾垂。忍說維丙。幷享令辰。回甲生朝。適丁斯年。志切寓感。禮合薦酌。伻官替奠。庶幾歆格。|출처=『순재고』권6, 제문, 의빈회갑일치제제문(宜嬪回甲日致祭祭文)}}
 
 
 
 
===족수당집===
 
====『족수당집』권1, 시, 의빈만장(宜嬪輓章)====
 
{{Blockquote|芳質初承聖主恩。榮名懿德後庭尊。慶祥甲觀徵無地。萬事人間一夢翻。
 
端陽哀淚白鬚滋。痛哭銅闈國勢危。耿耿須臾無死願。眞祥重覩日南時。
 
天公荒老理乖常。纔半年間又降殃。玉碎香摧悲不暇。那堪酷禍說胎殤。
 
至誠惓惓仰坤宮。淑德稀聞列女中。華衮宸章昭日月。忠言又復在臨終。
 
妝臺寂寞掩寒帷。漏滴銀壺曉響悲。惟有上林殘月在。宮娥應廢小星詩。
 
靈輀又逐鶴驂廻。雲引丹旌栗洞隈。千載相依冥漠裏。猶堪慰處最堪哀。|출처=『족수당집』권1, 시, 의빈만장(宜嬪輓章)}}
 
 
 
 
===해석유고===
 
====『해석유고』권3, 시, 의빈성씨만(宜嬪成氏輓)====
 
{{Blockquote|含徽挺茂仰端莊。椒掖親承日月光。九御班中仍進爵。天生淑德誕元良。
 
其二
 
樛木春深咏葛覃。洋洋聖化繼周南。丹心斷斷惟憂國。每向坤闈祝百男。
 
其三
 
宗國靡依五月餘。休祥惟待燕煤初。倚蘭未卜宮椒萎。蕙路西風哭祖車。
 
其四
 
居寵若驚自守嚴。令儀令德又謙謙。貴爲嬪御淸如水。遺篋何曾有寸縑。
 
其五
 
不以慽容見至尊。天心猶格病中言。栗林墓貌長隣近。應抱哀寃到九原。|출처=『해석유고』권3, 시, 의빈성씨만(宜嬪成氏輓)}}
 
 
 
 
===쌍계유고===
 
====『쌍계유고』권1, 시, 의빈궁만장(宜嬪宮挽章)====
 
{{Blockquote|聖王家法正。潛德夢蘭宜。每覿溫文質。深知鍾毓基。端陽胡舛理。復月又虛期。西寢歸依地。千秋慰孝慈。素性惇天秩。丹誠奉小君。河睢承化夙。禖燕祝釐勤。懿行三宮䀌。奎章百世芬。憧憧宗國念。來慶逝猶欣。|출처=『쌍계유고』권1, 시, 의빈궁만장(宜嬪宮挽章)}}
 
 
 
 
===하서집===
 
====『하서집』권3, 시, 의빈만사(宜嬪輓詞)====
 
{{Blockquote|煌煌奎彩賁貞珉。宸語悽悲泣萬人。天上曾無私惠澤。女中還有諫爭臣。齎誠每祝坤闈慶。乘化長隨鶴馭賓。况復平生謙謹德。賣衣纔得葬其親。|출처=『하서집』권3, 시, 의빈만사(宜嬪輓詞)}}
 
 
 
 
===명고전집===
 
====『명고전집』권1, 시, 의빈만장(宜嬪輓章)====
 
{{Blockquote|閨儀肅肅小星詩。月色蠅聲侍寢時。每向坤闈祈聖嗣。芳心不敢幸恩私。
 
其二
 
禖郊弓襡筮休祥。誕我元良赤芾煌。一自尊榮愈抑損。了無綾帛侈宮箱。
 
其三
 
天心人事苦難推。五月吾東率土悲。猶幸腹中方毓慶。強將言笑謝諸姬。
 
其四
 
纔經厄運届昌期。玉質躬擔萬世基。朝野皆祈彌月誕。邈然神理遽如斯。
 
其五
 
虗月宮機斂典刑。白雲歸訪鶴驂停。西岡松栢相隣近。庶慰泉臺寂寞靈。|출처=『명고전집』권1, 시, 의빈만장(宜嬪輓章)}}
 
 
 
 
===풍고집===
 
====『풍고집』권1, 시, 성의빈만사(成宜嬪挽詞)====
 
{{Blockquote|曾自瑤臺降紫雲。飄然來傍聖明君。衣綈辭輦何須道。淑德宜傳女史芬。
 
天心眷我壬寅秋。滿寢紅光誕降休。與奪悤悤神理漠。五年如夢四重謳。|출처=『풍고집』권1, 시, 성의빈만사(成宜嬪挽詞)}}
 
 
 
 
===이재난고===
 
====『이재난고』권35, 시, 삼십일신묘(三十日辛卯)====
 
{{Blockquote|又聞 命昭容成氏 名德任 其爺故洪鳳漢廳直 而因得入惠慶宮 惠慶宮稱其福相 而上亦愛之 許令從所顧屬內庭 旣有娠 惠慶宮恒以語上 曰德任腹漸高大矣 上則微哂而已 尹嬪 過三十餘朔 産事無實 而元子生 則産廳都提調徐命善等 猶請姑待尹氏産期 而不請元子定號 奉朝賀金尙喆 亟上疏 引春秋立庶以長之義 請元子定號 上意亦然 亟從之 徐則竟八度呈辭而遞 蓋昭容本係洪家傔人之女 故老論或以線索甚爾|출처=『이재난고』권35, 시, 삼십일신묘(三十日辛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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