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태실지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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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안지는 알 수 없으나 즉위한 1418년 가봉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이 때 태실 가봉을 위해 도감(都監)을 설치했다. 태실 가봉을 위해 도감을 설치한 기록이 처음 보이는 사례이며, 앞 서 다른 국왕의 태실을 가봉할 때도 도감이 설치되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초안지는 알 수 없으나 즉위한 1418년 가봉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이 때 태실 가봉을 위해 도감(都監)을 설치했다. 태실 가봉을 위해 도감을 설치한 기록이 처음 보이는 사례이며, 앞 서 다른 국왕의 태실을 가봉할 때도 도감이 설치되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정이오(鄭以吾)를 태실 증고사(胎室證考使)로 삼은지 약 두 달 만에 태실산도(胎室山圖)를 바쳤고 그대로 진주 곤명으로 결정지었다. 이 때 태실에 대한 제도가 갖추어진 것으로 보인다. 안태사(安胎使)로는 유정현(柳廷顯)을 천망하였으나 그가 형관(刑官)에 재임중이라는 이유로 한상경(韓尙敬)이 안태사로 새로이 임명되었다. 태실도감에서는 태실(胎室)에 시위(侍衛)하는 품관(品官) 8인과 수호(守護) 8인을 두기를 청하였고 상왕으로 있던 태종은 이를 따랐다. 또한 태실에 돌난간을 설치하면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이유로 나무를 이용하여 난간을 만들게 했다. 혹 난간이 썩으면 고쳐서 다시 만들라고 했다. 여기에 더해 가봉처로 태를 봉안하는 절차도 갖추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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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오(鄭以吾)를 태실 증고사(胎室證考使)로 삼은지 약 두 달 만에 태실산도(胎室山圖)를 바쳤고 그대로 진주 곤명으로 결정지었다. 이 때 태실에 대한 제도가 갖추어진 것으로 보인다. 태실도감에서는 태실(胎室)에 시위(侍衛)하는 품관(品官) 8인과 수호(守護) 8인을 두기를 청하였고 상왕으로 있던 태종은 이를 따랐다. 또한 태실에 돌난간을 설치하면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이유로 나무를 이용하여 난간을 만들게 했다. 혹 난간이 썩으면 고쳐서 다시 만들라고 했다. 여기에 더해 가봉처로 태를 봉안하는 절차도 갖추어졌다.
  
 
세종 태실은 정유재란(1597) 당시 도굴 당해 파손되었다. 이에 선조는 1601년(선조 34)에 다시 정비했다. 현재 전하는 석물의 대부분은 이 때 다시 갖추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태봉비는 숙종 때 마련하였으나 훼손된 것으로 보이며 영조 때 다시 마련되었다. 1734년(영조 10)에 세종·단종·예종·현종의 태봉에 비를 세우게 했다. 이 때 예조의 당상과 선공감역을 각각 1원을 보내 감독하게 했다. 태실이 위치했던 곳은 분묘가 들어서 있으며, 일부 석물은 태실의 것을 활용했을 가능성이 있어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다. 다만 가봉비를 비롯하여 몇몇의 석물은 수습되어 인근 길 옆에 모아져있다. 유물들은 현재 경상남도 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어있다.
 
세종 태실은 정유재란(1597) 당시 도굴 당해 파손되었다. 이에 선조는 1601년(선조 34)에 다시 정비했다. 현재 전하는 석물의 대부분은 이 때 다시 갖추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태봉비는 숙종 때 마련하였으나 훼손된 것으로 보이며 영조 때 다시 마련되었다. 1734년(영조 10)에 세종·단종·예종·현종의 태봉에 비를 세우게 했다. 이 때 예조의 당상과 선공감역을 각각 1원을 보내 감독하게 했다. 태실이 위치했던 곳은 분묘가 들어서 있으며, 일부 석물은 태실의 것을 활용했을 가능성이 있어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다. 다만 가봉비를 비롯하여 몇몇의 석물은 수습되어 인근 길 옆에 모아져있다. 유물들은 현재 경상남도 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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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除胎室安慰祭。 前此, 安胎後, 每三年一次行祭, 謂之胎室安慰祭。 至是, 禮曹令書雲觀稽舊例, 太祖、恭靖王安胎後, 竝不行安慰祭, 乃命罷之。|출처=『세종실록』13권, 세종 3년(1421) 10월 10일 기해(己亥) 5번째 기사}}
 
命除胎室安慰祭。 前此, 安胎後, 每三年一次行祭, 謂之胎室安慰祭。 至是, 禮曹令書雲觀稽舊例, 太祖、恭靖王安胎後, 竝不行安慰祭, 乃命罷之。|출처=『세종실록』13권, 세종 3년(1421) 10월 10일 기해(己亥) 5번째 기사}}
 
 
====『세종실록』150권, 「지리지」경상도(慶尙道) 진주목(晉州牧), 곤남군(昆南郡)====
 
{{Blockquote|본조(本朝) 금상(今上)이 즉위한 원년(元年) 기해에 어태(御胎)를 현(縣)에서 20리 북쪽 소곡산(所谷山)에 안치하고, 남해현(南海縣)을 곤명현(昆明縣)에 합쳐서 곤남군(昆南郡)으로 승격시켰다.
 
 
本朝今上卽位元年己亥, 安御胎于縣北二十里所谷山, 以南海縣合于昆明, 陞爲昆南郡。|출처=『지리지」경상도(慶尙道) 진주목(晉州牧), 곤남군(昆南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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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忠監司洪羲瑾馳啓言: "今月初四日, 忠州 九萬里, 景宗大王胎室蓋簷石、隅裳石、坐臺石、正南下磚石、橫帶石、蓮葉柱石、俱有作變之痕, 山下居民及監官, 一倂捉囚, 罪人則今方譏捕。" 敎曰: "夜見錦伯狀啓, 不勝驚悚, 而不知胎封作變, 古亦有之。 且作變旣在道內, 則地方官, 與道伯, 當有勘罪與否, 其例有無, 幷欲知之, 大臣入來, 稟處。" 仍召見左右相, 左議政李相璜言: ‘胎封作變, 旣在道內, 則道臣地方官, 不可無論勘之擧, 而從前外道有事, 雖干係甚重, 如事關綱常等獄, 道臣無因此被罪之例。 至於地方官, 不可無論勘, 而第念殿牌作變邑守令之不爲論勘, 實出先朝深惟遠覽之聖竟。 且考見《春官通考》, 古亦有瑞山胎封作變之事, 而有曰, 「事端由於謀害本宮」 云。 今若論勘守令, 則以今民心之不古, 難保無來後之慮, 故不敢以論罪仰奏矣。’ 又言, ‘肅廟朝因昆陽、全州、大興四朝胎峰立表補頉之役, 以禮曹堂上及監役官下去, 著爲定式, 英廟朝林川胎室修改時, 亦遵行此例, 今亦當依此擧行, 今番則與尋常有頉有異, 若別遣奉審, 則恐合情文矣。’ 命遣禮堂奉審。|출처=『순조실록』32권, 순조 31년(1831) 11월 12일 경신(庚申) 1번째 기사}}
 
公忠監司洪羲瑾馳啓言: "今月初四日, 忠州 九萬里, 景宗大王胎室蓋簷石、隅裳石、坐臺石、正南下磚石、橫帶石、蓮葉柱石、俱有作變之痕, 山下居民及監官, 一倂捉囚, 罪人則今方譏捕。" 敎曰: "夜見錦伯狀啓, 不勝驚悚, 而不知胎封作變, 古亦有之。 且作變旣在道內, 則地方官, 與道伯, 當有勘罪與否, 其例有無, 幷欲知之, 大臣入來, 稟處。" 仍召見左右相, 左議政李相璜言: ‘胎封作變, 旣在道內, 則道臣地方官, 不可無論勘之擧, 而從前外道有事, 雖干係甚重, 如事關綱常等獄, 道臣無因此被罪之例。 至於地方官, 不可無論勘, 而第念殿牌作變邑守令之不爲論勘, 實出先朝深惟遠覽之聖竟。 且考見《春官通考》, 古亦有瑞山胎封作變之事, 而有曰, 「事端由於謀害本宮」 云。 今若論勘守令, 則以今民心之不古, 難保無來後之慮, 故不敢以論罪仰奏矣。’ 又言, ‘肅廟朝因昆陽、全州、大興四朝胎峰立表補頉之役, 以禮曹堂上及監役官下去, 著爲定式, 英廟朝林川胎室修改時, 亦遵行此例, 今亦當依此擧行, 今番則與尋常有頉有異, 若別遣奉審, 則恐合情文矣。’ 命遣禮堂奉審。|출처=『순조실록』32권, 순조 31년(1831) 11월 12일 경신(庚申) 1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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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150권, 「지리지」경상도(慶尙道) 진주목(晉州牧), 곤남군(昆南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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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본조(本朝) 금상(今上)이 즉위한 원년(元年) 기해에 어태(御胎)를 현(縣)에서 20리 북쪽 소곡산(所谷山)에 안치하고, 남해현(南海縣)을 곤명현(昆明縣)에 합쳐서 곤남군(昆南郡)으로 승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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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朝今上卽位元年己亥, 安御胎于縣北二十里所谷山, 以南海縣合于昆明, 陞爲昆南郡。|출처=『지리지」경상도(慶尙道) 진주목(晉州牧), 곤남군(昆南郡)}}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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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예조, 『태봉등록(胎封謄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조선 예조, 『태봉등록(胎封謄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태봉(胎封)』, 1928,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태봉(胎封)』, 1928,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조선 예조, 『세종대왕단종대왕태실표석수립시의궤(世宗大王端宗大王胎室表石竪立時儀軌)』,사천시청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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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예조, 『세종대왕단종대왕태실표석견립시의궤(世宗大王端宗大王胎室表石竪立時儀軌)』,사천시청 소장.
*조선 예조, 『세종대왕단종대왕태실수개의궤(世宗大王端宗大王胎室修改儀軌), 사천시청 소장.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태봉(胎封)』, 1928,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태봉(胎封)』, 1928,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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