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 태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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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태실(純宗 胎室)
충남 홍성군 구항면 태봉리의 순종 효황제 태실 터
식별자 PC020
분류 국왕 태실
한글명 순종 태실
한자명 純宗 胎室
영문명 Placenta Chamber of Emperor Sunjong
피안자 명칭 순종(純宗)
피안자 이칭 이척(李坧)·자(字) 군방(君邦)·호(號) 정헌(正軒)·유릉(裕陵)·효황제(孝皇帝)·창덕궁 이왕(昌德宮 李王)
피안자 부 고종(高宗)
피안자 모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
피안자 생년월일 1874.03.25
피안자 몰년월일 1926.04.25
안태 연월일 1874.06.08
안태지 기록 충청도(忠淸道) 결성현(結城縣) 구항면(龜頂面) 묘산(卵山) 갑좌지원(甲坐之原) 『승정원일기』
안태지 좌표(위도) 36°56'75.24"N
안태지 좌표(경도) 126°59'80.07"E
안태지 주소 충청남도 홍성군 구항면 태봉리 366-25
문화재 지정여부 미지정
이안 연월일 1928.08.19
이안지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서삼릉 내
이안지 좌표(위도) 37°66'45.61"N,
이안지 좌표(경도) 126°86'06.29"E
지문 同治十三年甲戌,二月八日生,純宗孝皇帝胎,同治十三年六月八日,藏于洪城郡龜項面,昭和四年月,日移藏
지문 찬자 이왕직 예식과(李王職 禮式課)
지문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석물 화소비(火巢碑) 1점 잔존
유물1 태봉 위치에 옹기공장이 들어서 유물 확인 불가
태항아리 순종 태지석 및 태항아리 일습
태항아리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목차

내용[편집]

대한제국 제2대 황제 순종의 태실이다.

1874년(고종 11) 안태가 이루어질 때 홍주 구항촌과 더불어 강원도 원주 신림의 백운산과 양주 북면 등이 함께 거론되었다. 이들 지역에 관상감 관원을 파견해 최종적으로 결성현 구항면으로 결정하였다. 순종 태실의 조성은 순조 태실을 모범으로 삼아 이루어졌다. 이에 옹석(甕石)과 개석(蓋石)만 사용하여 태실을 조성하였다. 또한 태실지 인근의 백성들의 전답 역시 전례에 따라 값을 치르고 수용하였다. 순종 태실이 조성될 당시 노정이 파악되는데 서울을 출발하여 시흥, 수원, 진위, 평택을 거쳐 결성에 이렀다.

현재 순종 태실은 완벽하게 사라졌다. 다만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순종 태봉도》가 남아있어 그 모습을 대략 추정할 수 있다.

순종의 태봉 자체는 아주 최근까지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을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2000년을 전후한 시점에 홍성군에서 태봉을 민간에 불하하였고 이 과정에서 태봉이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 현지에서 태봉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은 마을 이름과 화소비가 있을 뿐이다.

관련 기록[편집]

조선왕조실록[편집]

『고종실록』11권, 고종 11년(1874) 4월 7일 기미(己未) 2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송근수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송근수(宋近洙)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이승보(李承輔)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김익진(金翊鎭)을 안태사(安胎使)로 삼았다.

以宋近洙爲工曹判書, 李承輔爲判義禁府事, 金翊鎭爲安胎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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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종실록』11권, 고종 11년(1874) 4월 7일 기미(己未) 2번째 기사


『고종실록』11권, 고종 11년(1874) 6월 13일 갑신(甲申) 2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안태사 이하에게 시상하다》

안태사(安胎使)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하였다. 충청 감사(忠淸監司) 성이호(成彛鎬)에게는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命安胎使以下施賞有差, 忠淸監司成彝鎬加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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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종실록』11권, 고종 11년(1874) 6월 13일 갑신(甲申) 2번째 기사


『고종실록』11권, 고종 11년(1874) 7월 30일 경오(庚午) 1번째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이유원이 전세가 계속 무거워지는 사정을 설명하고 폐단을 시정할 방법을 의논하다》

…… (전략) 또 아뢰기를,

"지난번 연석(筵席)에서 하교를 받고 원자의 태(胎)를 모시고 갈 때 지나가는 각 고을에서 백성들의 폐해와 관계되는 일들을 등문(登聞)하여 처분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지금 경기 감사(京畿監司)의 보고를 보니, ‘시흥(始興)·과천(果川)·진위(振威) 등 세 고을에서 이전부터 내려오는 허결(虛結)이 358결 81부 1속인데 모두 백지 징세(白地徵稅)하니, 영영 감해주도록 하소서.’라고 청하였습니다. 세 고을의 허결은 참으로 뼈를 갉아내는 폐단입니다. 경사를 만나 선포하는 마당에 그 다소를 헤아릴 것도 없이 특별히 허락하여 10년 동안 정세(停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렇게 하면 실효가 있겠는가?"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10년 동안 정세하면 그 사이에 다시 소생할 길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 (후략)

又曰: "向筵伏奉下敎, 陪胎時所經各邑, 關於民瘼者, 有登聞之處分矣。 卽見畿伯所報, 則‘始興、果川、振威等三邑, 流來虛結三百五十八結八十一負一束, 皆是白地徵稅, 請令永減’爲辭矣。 三邑虛結, 果爲切骨之瘼。 其在遇慶宣布之地, 不必較計多少, 特許限十年停稅何如?"

敎曰: "依爲之。 如此, 則可有實效耶?"

裕元曰: "停稅十年, 則其間可有回蘇之道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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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종실록』11권, 고종 11년(1874) 7월 30일 경오(庚午) 1번째 기사


승정원일기[편집]

『승정원일기』 2798책 (탈초본 130책) 고종 11년(1874) 2월 8일 신사(辛巳) 35/36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중희당에서 약방 삼제조를 소견할 때 도제조 이유원 등이 입시하였다》

…… (전략) 이유원이 아뢰기를,

“세태(洗胎)의 길일은 사흘째 되는 날로 하거나 이레째 되는 날로 하는데, 이레째 되는 날은 행사가 많아서 거행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흘째 되는 날 세태한 것은 숙묘가 탄생했을 때의 일이다. 그 당시의 일기가 지금 대내(大內)에 있기 때문에 상세히 살펴보았는데, 사흘째 되는 날로 하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잠시 뒤에 문안하는 입시가 있을 것인데, 그때도 또한 등연(登筵)할 것인가?”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이 입시는 약원(藥院)의 신하를 접견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수시로 원임 대신의 자격으로서 등연하겠습니다.”하였다.

박제인이 아뢰기를,

“삼가 경술년과 을사년의 등록을 상고하건대, 자성께 친히 치사(致詞), 전문(箋文), 표리(表裏)를 올리신 뒤 전(殿)에 임어하여 진하를 받았습니다.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례대로 거행하라.”하였다.

裕元曰, 洗胎吉日, 或三日或七日矣, 七日多有節次, 有難擧行矣。

上曰, 第三日洗胎亦肅廟誕生時事也。

其時日記, 今在大內, 故詳知之, 而以第三日爲之, 可也。

上曰, 少間當有承候入侍, 其時又當登筵耶?

裕元曰, 此入侍, 卽藥院之臣晉接也, 又當隨時原任大臣登筵矣。

齊寅曰, 謹稽庚戌·乙巳謄錄, 則慈聖, 親上致詞箋文表裏後, 臨殿受賀矣, 今番則何以爲之乎?

上曰, 依已例擧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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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2798책 (탈초본 130책) 고종 11년(1874) 2월 8일 신사(辛巳) 35/36 기사


『승정원일기』 2798책 (탈초본 130책) 고종 11년(1874) 2월 18일 신묘(辛卯) 4/5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원자의 태봉을 거행할 곳을 상토관을 파견해 살펴 품하한 뒤 길일을 정해 거행할 것을 청하는 관상감의 계 》

관상감이 아뢰기를,

“이번 원자 아기씨의 태봉(胎封)을 규례대로 거행해야 하므로, 등록을 가져다 상고해 보았습니다. 좌향(坐向)이 길한 곳은 결성(結城) 구정촌면(龜頂村面)의 갑좌(甲坐) 언덕, 원주(原州) 신림역(新林驛)의 안산인 치악산 자락 백운산(白雲山) 아래의 오좌(午坐) 언덕, 양주(楊州) 북면(北面) 단정자퇴이동(椴亭子退伊洞)의 오좌 언덕 세 곳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록한 햇수가 오래되어서 아무 탈이 없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구례대로 본감의 상토관(相土官)을 보내어 다시 살펴본 뒤 망(望)을 갖추어 들이겠습니다. 그리하여 품하(稟下)된 뒤 길일을 택하여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觀象監啓曰, 今此元子阿只氏胎封, 依例擧行, 而取考謄錄, 則坐向吉利地, 只是結城龜頂村面甲坐之原, 原州新林驛案山雉岳山麓白雲山下午坐之原, 楊州北面椴亭子退伊洞午坐之原三處, 而入錄年久, 難保無頉, 依舊例發遣本監相土官, 更加看審後, 備望以入, 待稟下, 以爲涓吉擧行之地, 何如?

傳曰, 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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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2798책 (탈초본 130책) 고종 11년(1874) 2월 18일 신묘(辛卯) 4/5 기사


『승정원일기』 2799책 (탈초본 130책) 고종 11년(1874) 3월 26일 무진(戊辰) 12/14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원자 아기씨의 태봉으로서 길한 땅의 망을 갖추어 들이겠다는 영관상감사 등의 계》

조강하가 영관상감사와 제조의 뜻으로 아뢰기를,

원자 아기씨의 태봉(胎封)으로서 길한 땅은, 충청도 결성현(結城縣) 구정면(龜頂面) 묘산(卯山)의 갑좌(甲坐) 언덕, 강원도 원주부(原州府) 치악산 자락 백운산(白雲山)의 간좌(艮坐) 언덕, 경기도 양주목(楊州牧) 이담면(伊淡面) 마차산(磨嵯山) 건좌(乾坐)의 언덕 세 곳이었는바 구례에 따라 본감의 상토관(相土官)을 파견해서 다시 더 살펴보겠다는 뜻으로 이미 올린 초기(草記)에 대해 윤허를 받았습니다. 방금 본감의 상토관 이희규(李熙奎)가 내려가 살펴본바 세 곳이 모두 합당했으나 결성현의 갑좌 언덕이 더욱 길하다고 합니다. 규례대로 망(望)을 갖추어 들이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趙康夏, 以觀象監領事提調意啓曰, 元子阿只氏胎封吉利地, 忠淸道結城縣龜頂面卵山甲坐之原, 江原道原州府雉嶽山麓白雲山艮坐之原, 京畿道楊州牧伊淡面磨嵯山乾坐之原三處, 依舊例發送本監相土官, 更加看審之意, 已爲草記蒙允矣, 卽者, 本監相土官李熙奎, 下去看審, 則三處俱爲可合, 而結城縣甲坐之原, 尤爲吉利云, 依例備望以入之意, 敢啓。

傳曰, 知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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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2799책 (탈초본 130책) 고종 11년(1874) 3월 26일 무진(戊辰) 12/14 기사


『승정원일기』 2799책 (탈초본 130책) 고종 11년(1874) 3월 28일 경오(庚午) 6/10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원자 아기씨의 태를 안장할 길일을 정하여 들이도록 할 것을 청하는 영관상감사 등의 계》

김성균이 영관상감사와 제조의 뜻으로 아뢰기를,

“원자 아기씨의 태(胎)를 안장할 길지를 충청도 결성현(結城縣) 구정면(龜頂面) 묘산(卯山)의 갑좌(甲坐) 경향(庚向)으로 낙점을 받았습니다. 길지를 이미 결정하였으니, 태를 안장할 길일을 일관(日官)으로 하여금 잡아서 들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金性均, 以觀象監領事提調意啓曰, 元子阿只氏藏胎吉地, 忠淸道結城縣龜項面卵山甲坐庚向受點矣, 吉地旣爲完定, 安胎吉日時, 令日官推擇以入, 何如?

傳曰, 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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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2799책 (탈초본 130책) 고종 11년(1874) 3월 28일 경오(庚午) 6/10 기사


『승정원일기』 2799책 (탈초본 130책) 고종 11년(1874) 3월 28일 경오(庚午) 7/10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원자 아기씨의 태를 안장할 길일을 6월로 가려 들일 것을 청하는 영관상감사 등의 계》

또 영관상감사와 제조의 뜻으로 아뢰기를,

“원자 아기씨의 태를 안장할 길일을 일관으로 하여금 잡아서 들이는 일과 관련해서 초기(草記)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일관을 불러서 물어보니, 태를 안장하는 법은 다섯 달만에 안장하는데 오는 6월이면 이미 다섯 달에 차고 또 길한 달이라고 합니다. 이날로 가려 들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又以觀象監領事提調意啓曰, 元子阿只氏安胎吉日時, 令日官推擇以入事, 草記蒙允矣, 招問日官, 則藏胎之法, 五朔以藏, 而來六月, 旣準五朔, 且吉月云, 以此日擇入, 何如?

傳曰, 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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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2799책 (탈초본 130책) 고종 11년(1874) 3월 28일 경오(庚午) 7/10 기사


『승정원일기』 2799책 (탈초본 130책) 고종 11년(1874) 3월 29일 신미(辛未) 10/11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원자 아기씨의 태를 봉안할 때 나아갈 관원에 대해 묻는 영관상감사 등의 계》

남정익이 영관상감사와 제조의 뜻으로 아뢰기를,

“원자 아기씨의 태(胎)를 봉안할 때에는 안태사(安胎使), 종사관(從事官), 서표관(書標官), 감역관(監役官), 배태관(陪胎官), 전향관(傳香官), 주시관(奏時官)이 각각 1명씩 나아가 그 임무를 감독하는 것이 전례입니다. 그러나 경술년과 기사년 태를 봉안할 때에는 특별 하교로 인하여, 종사관은 생략하고, 감역관은 본읍의 수령으로 차정하고, 전향관과 주시관은 본감 관원 1명이 겸행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감히 여쭙니다.”하니,

전교하기를,

“경술년과 기사년의 예대로 하라.”하였다.

南廷益, 以觀象監領事·提調意啓曰, 元子阿只氏胎封時, 安胎使從事官·書標官·監役官·陪胎官·傳香官·奏時官各一員進去, 各監其任, 例也, 而庚戌·己巳年胎封時, 因特敎, 從事官除之, 監役官以本邑守令差定, 傳香官·奏時官, 以本監官員一員兼行, 今番則何以爲之? 敢稟。

傳曰, 依庚戌·己巳年例爲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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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2799책 (탈초본 130책) 고종 11년(1874) 3월 29일 신미(辛未) 10/11 기사


『승정원일기』 2800책 (탈초본 130책) 고종 11년(1874) 4월 13일 을유(乙酉) 6/10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태(胎)를 봉안할 때의 석물에 대해 묻는 관상감의 계》

관상감이 아뢰기를,

“태(胎)를 봉안할 때의 석물(石物)을 옛날 규례는 옹석(瓮石)과 개석(蓋石)을 쓰고 안에 지석(誌石)과 표석(標石)을 썼고, 경술년에 태를 봉안할 때에는 특별 하교에 의거하여 다만 옹석과 개석을 쓰기만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감히 여쭙니다.”하니,

전교하기를,

“경술년의 사례에 의거하여 하라.”

하였다.

觀象監啓曰, 安胎時石物, 古例則用甕石·蓋石·內識石·標石, 而庚戌年胎封時, 因特敎, 只用甕石·蓋石矣, 今番則何以爲之乎? 敢稟。

傳曰, 依庚戌年例爲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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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2800책 (탈초본 130책) 고종 11년(1874) 4월 13일 을유(乙酉) 6/10 기사


『승정원일기』 2802책 (탈초본 130책) 고종 11년(1874) 6월 2일 계유(癸酉) 4/10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안태할 때 함을 받든 승지 신도희 등에게 시상하라는 전교》

전교하기를,

“안태(安胎)를 할 때 함(函)을 받든 승지 신도희를 가자하고, 관상감 관원과 금루관(禁漏官)은 아문으로 하여금 고품(高品)에 부료(付料)토록 하고, 분군 부장(分軍部將)은 상현궁(上弦弓) 1장(張)을 사급하고 고취(鼓吹), 공인(工人), 원역(員役), 하인(下人) 등은 판하(判下)에 따라 쌀과 베를 분등하여 시상하라.”

하였다.

傳曰, 安胎時奉函承旨申道熙加資, 觀象監官員·禁漏官, 令衙門高品付料, 分軍部將, 上弦弓一張賜給, 鼓吹·工人·員役·下人等, 依判下米布分等施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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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2802책 (탈초본 130책) 고종 11년(1874) 6월 2일 계유(癸酉) 4/10 기사


『승정원일기』 2802책 (탈초본 130책) 고종 11년(1874) 6월 13일 갑신(甲申) 5/16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안태사 이하를 별단에 써서 들이라는 전교》

전교하기를,

“안태사(安胎使) 이하를 별단에 써서 들이라.”

하였다.

傳曰, 安胎使以下, 別單書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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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2802책 (탈초본 130책) 고종 11년(1874) 6월 13일 갑신(甲申) 5/16 기사


『승정원일기』 2802책 (탈초본 130책) 고종 11년(1874) 6월 13일 갑신(甲申) 8/16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안태사 김익진 등에게 시상하라는 전교》

전교하기를,

“안태사 김익진(金翊鎭)의 자질(子侄) 중에 교관(敎官)의 자리를 만들어오늘 정사에 의망하여 들이고, 도차사원(都差使員) 겸 지방관인 결성 현감(結城縣監) 임우한(林佑漢)을 승서(陞敍)하고, 배태관(陪胎官) 한교직(韓敎直)과 감역관 이희규(李熙奎)는 모두 감목관(監牧官)으로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서 우선 차임하여 보내고, 주시관(奏時官) 피병간(皮秉侃)은 해당 아문으로 하여금 높은 관직의 녹을 부쳐주도록 하고, 본도의 도백 성이호(成彝鎬)는 가자하고, 시골의 간역(看役)한 장교(將校)와 경향(京鄕)의 이예(吏隷)ㆍ공장(工匠) 등은 모두 판하에 따라 시상을 하라.”

하였다.

傳曰, 安胎使金翊鎭子侄中敎官作窠, 今日政擬入, 都差使員兼地方官結城縣監林佑漢陞敍, 陪胎官韓敎直, 監役官李熙奎, 竝監牧官待窠, 爲先差送, 奏時官皮秉侃, 令該衙門高品付料, 本道伯成彝鎬加資, 鄕看役將校, 京鄕吏隷工匠等, 竝依判下施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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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2802책 (탈초본 130책) 고종 11년(1874) 6월 13일 갑신(甲申) 8/16 기사


『승정원일기』 2802책 (탈초본 130책) 고종 11년(1874) 6월 13일 갑신(甲申) 9/16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안태를 행할 때 경기에서 도백을 배행한 정태호에게 내하 중호피 1령을 사급하라는 전교》

전교하기를,

“안태를 행할 때 경기에서 도백을 배행(陪行)한 정태호(鄭泰好)에게 내하 중호피(內下中虎皮) 1령(令)을 사급하라.”

하였다.

傳曰, 安胎行時京畿陪行道伯鄭泰好, 內下中虎皮一令[領], 賜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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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2802책 (탈초본 130책) 고종 11년(1874) 6월 13일 갑신(甲申) 9/16 기사


『승정원일기』 2802책 (탈초본 130책) 고종 11년(1874) 6월 13일 갑신(甲申) 16/16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성정각에서 약방이 입진하고 안태사를 소견할 때 도제조 이유원 등이 입시하였다》

갑술 6월 13일 사시(巳時). 상이 성정각에 나아갔다.

약방이 입진하는 데에 안태사가 함께 입시하였다.

이때 입시한 도제조 이유원, 제조 오취선, 좌승지 김병익, 가주서 최정헌(崔鼎獻), 기사관 김유(金㽥)ㆍ심상만(沈相萬), 안태사 김익진(金翊鎭)이 차례로 나와 엎드리고, 의관 이경년, 이충연, 최성협, 이명석이 기둥 밖에 나아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였다.

…… (중략) 상이 안태사에게 이르기를,

“더운 길에 잘 다녀왔는가?”하니,

김익진이 아뢰기를,

“기쁘고 반가운 나머지, 길다니는 일이 힘든 줄도 모르고 다녀왔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듣기로는, 연로에 폐를 끼치는 일을 많이 없앴다고 하더구나.”하니,

김익진이 아뢰기를,

“연로의 고을이 조잔(凋殘)하여 주전(廚傳)의 폐가 몹시 민망하였습니다. 그래서 으레 행해 오던 일을 많이 덜어 없앴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태봉(胎峯)은 어떻던가?”하니,

김익진이 아뢰기를,

“태봉의 생김세를 두루 살펴보았는데, 아름답고 길하였습니다.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보더라도 정말 더없이 좋았습니다.”하고,

이어 주달하기를,

“이 터는 곧 전반(田班)과 하반(河班)이 살고 있는 곳인데, 그 전답과 원림(園林)이 또한 그 안에 있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이 고을 백성의 전답과 원림이면, 값을 주고 사들이는 것이 더없이 좋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하니,

김익진이 아뢰기를,

“도백으로 하여금 재량껏 제급(題給)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이는 정말 아름다운 일입니다. 마땅히 운감(雲監)이 해도에 관문을 발송해야 되겠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무를 심는 일도 도신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이 일도 도신으로 하여금 편한 대로 거행하도록 하라는 뜻으로 관문을 내겠습니다.”하니,

김익진이 아뢰기를,

“그곳의 추수가 끝나기를 기다려 관문을 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안태사가 내려간 연로(沿路)에 뜻을 보여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주는 것이 좋겠는가?”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이는 없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상께서 전교를 내시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묘당이 관문을 내어 그 폐막(弊瘼)을 묻는 것이 좋겠다.”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경기와 광주, 수원, 호서에 관문을 내겠는데, 연로의 점막(店幕)과 가까운 곳에 부역을 견감해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진실로 나의 뜻이다.”하였다.

이어 내시에게 명하여 안태소(安胎所)의 도형(圖形)을 찾아내서 김병익에게 주도록 하니, 김병익이 받아서 이유원의 앞에다가 펼쳐놓고, 이유원이 보고 나자 김병익이 도로 바치었다.

상이 이르기를,

“연로의 농사는 어떻던가?”하니,

김익진이 아뢰기를,

“이번 장마에 밭곡식은 비록 피해를 입은 데가 많지만, 논곡식은 별로 손상된 곳이 없었습니다. 앞으로 비와 볕이 고루 알맞기만 하면 풍년이 들 가망이 있다고 봅니다.”

하였다.

甲戌六月十三日巳時, 上御誠正閣。

藥房入診, 安胎使同爲入侍時, 都提調李裕元, 提調吳取善, 左承旨金炳翊, 假注書崔鼎獻, 記事官金㽥·沈相萬, 安胎使金翊鎭, 以次進伏, 醫官李慶年·李忠淵·崔性協·李命錫, 進伏楹外訖。

上曰, 史官分左右。

…… (중략) 上謂安胎使曰, 炎程善爲往返乎?

翊鎭曰, 歡抃之極, 不知行役之勞而往返矣。

上曰, 予聞沿路貽弊之端, 多有除之者云矣。

翊鎭曰, 沿邑凋殘, 廚傳之弊甚悶, 故例行之事, 多有減除矣。

上曰, 胎峯, 何如?

翊鎭曰, 周覽胎峯體勢, 則佳麗吉祥, 以凡眼看之, 果爲極吉矣。

仍奏曰, 此臺址, 卽田班河班所居之地, 而其田畓與園林, 亦在此中矣。

上曰, 此是邑民之田畓與園林, 則給價買之甚好, 而何以則好也?

翊鎭曰, 令道伯, 量宜除給, 似好矣。

裕元曰, 此果盛德事也, 當自雲監, 發關該道矣。

上曰, 植木, 亦使道臣擧行何如乎?

裕元曰, 此亦使道臣, 從便擧行之意, 發關矣。

翊鎭曰, 待其秋成發關, 恐好矣。

上曰, 安胎下去沿路, 欲示意, 如何爲之則好耶?

裕元曰, 此不可無之事也, 自上出傳敎乎?

上曰, 自廟堂發關, 問其弊瘼好矣。

裕元曰, 京畿·廣州·水原·湖西當發關, 而沿路店幕近處, 蠲役似好矣。

上曰, 此固予意也。

仍命內侍, 搜出安胎所圖形, 授于炳翊, 炳翊受而開置裕元前, 裕元覽訖, 炳翊還納。

上曰, 沿路農形, 何如?

翊鎭曰, 今番潦水, 田穀雖多受害處, 畓穀則別無受損矣, 從此雨暘均適, 則可占大有之望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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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2802책 (탈초본 130책) 고종 11년(1874) 6월 13일 갑신(甲申) 16/16 기사


『승정원일기』 2802책 (탈초본 130책) 고종 11년(1874) 6월 20일 신묘(辛卯) 25/25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성정각에서 약방이 입진할 때 도제조 이유원 등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안태사(安胎使)가 내려갔을 때 연로(沿路)의 고을에 대해 폐단을 물어 보고 재상을 당한 토지에 대해서는 세금을 견감해주는 일은 이미 행회를 하였는가?”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이미 연로의 고을에 관문으로 신칙을 하였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태봉(胎封)을 한 곳이 곧 귀항동(龜項洞) 묘산(卯山)이다.”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듣건대, 안태사가 복명(復命)을 한 날에 신령한 거북이가 마침 이르렀다고 하고, 태봉을 한 곳의 지명이 ‘귀(龜)’자와 부합하니, 일이 우연하지 않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말 이상한 일이다. 태봉하러 가면서 지난 지방이 몇 고을인가?”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시흥(始興)에서부터 수원(水原)에 이르기까지 진위(振威), 평택(平澤), 결성(結城) 등지 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신의 안색이 어찌하여 수척한가?”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요즘 더위에 병이 들어오랫동안 낫지 않고 있습니다.”하였다.

상이 사관에게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이어 물러가라고 명하니,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나왔다.

上曰, 安胎使下去時, 沿路謨瘼蠲災事, 已爲行會乎?

裕元曰, 已關飭於沿路諸邑矣。

上曰, 胎封處, 卽龜項洞卯山也。

裕元曰, 問安胎使復命日, 靈龜適至, 而胎封地名之符合龜字事, 不偶然矣。

上曰, 果異矣, 胎封之行, 所經地方, 幾邑乎?

裕元曰, 自始興, 至水原·振威·平澤·結城等地矣。

上曰, 大臣顔色, 何爲少損乎? 裕元曰, 近日暑祟, 長在彌留矣。

上命史官就座, 仍命退, 諸臣以次退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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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정원일기』 2802책 (탈초본 130책) 고종 11년(1874) 6월 20일 신묘(辛卯) 25/25 기사


동아일보[편집]

『동아일보』「순종태실이안」, 쇼와(昭和) 3년(1928) 8월 22일 기사[편집]

Quote-left blue.png 《순종태실이안(純宗胎室移安) -홍성의 태실을 옮겨 모셔 19일 경성(京城)에 봉환(奉還) -》

홍성군(洪城郡) 귀항면(龜項面) 태봉리(胎封里)에 봉안하였던 순종태실(純宗胎室)은 지난 18일 이왕직으로부터 봉출(奉出)하여 같은 날 홍성군청에 임시로 봉안(權奉)하였다가 그 이튿날인 19일에 이왕직전사(李王職典祀) 유해종(劉海鐘), 이정구(李定求) 두 사람이 배종하여 경성으로 봉환하였더라.【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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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동아일보』「순종태실이안」, 쇼와(昭和) 3년(1928) 8월 22일 기사


지식 관계망[편집]

태실 지식 관계망[편집]


계보도 지식 관계망[편집]


시각자료[편집]

파노라마[편집]

스틸샷 갤러리[편집]

전자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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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편집]

학술적 성격의 저작물[편집]

1.고문헌

  • 조선 예조, 『태봉등록(胎封謄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이왕직(李王職) 예식과(禮式課), 『태봉(胎封)』, 1928,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2.단행본

  •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삼릉태실』,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 심현용, 『한국 태실 연구』, 경인문화사, 2016.
  • 이규상, 『한국의 태실』, 청원문화원, 2005.
  • 윤진영, 김호, 이귀영, 홍대한, 김문식 공저, 『조선왕실의 태실 의궤와 장태 문화』,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
  •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조선의 태실』, 전주이씨대동종약원, 1999.

3.논문

  • 윤석인, 『조선왕실의 태실 변천 연구』,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

대중적 성격의 콘텐츠[편집]

주석[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