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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생각한 개천, 청계천 》 백성들 덕분에 57일만에 끝난 준천

Story

영조는 재임 기간 중 200여 차례의 순문을 진행했는데, 그 중 준천과 관련해서는 9차례를 진행하였다. 즉, 준천이 중요한 국책사업인 만큼 백성과 신하들과 소통하면서 준천에 대한 민심과 의견을 파악한 것이다.

영조는 1752년 광통교에 행차하여 백성들에게 준천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았고(『영조실록』, 영조 28년 01월 27일), 1758년에는 숭문당에서 준천의 실시여부를 신하들과 토론하였다.(『영조실록』, 영조 34년 05월 02일)

1759년 10월 준천을 담당할 임시 관청인 준천소(浚川所)를 설치하고, 홍봉한(洪鳳漢, 1713~1778), 홍계희(洪啓禧, 1703~1771), 이창의(李昌誼, 1704~1772)를 준천당상으로 임명하였다.(『영조실록』, 영조 35년 10월 06일) 한달 후인 11월 20일 자원하여 성책(成冊)된 인원이 1만명을 넘자 명정전(明政殿) 월대에서 시민(市民)들을 직접 면대하여 위로하는 등 (『영조실록』, 영조 35년 11월 20일)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하였다.

본격적인 준천사업은 1760년 2월 18일에 시작되었다. 공사기간동안 21만 5천 여명의 백성이 동원되었는데, 도성의 방민(坊民)을 비롯하여 각 시전의 상인 등, 지방의 자원군(自願軍), 승군(僧軍), 모군(募軍) 등 다양한 계층의 백성들이 참여하였다. 실업 상태의 백성 6만 3천 여 명은 품삯을 받기도 하였는데, 대략 공사 기간 동안 3만 5천 냥의 돈과 쌀 2천 3백여 석의 물자가 소요되었다.

조선전기에는 국가적 토목공사에 백성을 동원하는 경우 강제로 부역시켰지만, 영조는 지방의 백성에 대해서는 강제로 동원하지 않았고, 동원된 백성들에게는 품삯을 지급했다. 이것은 정조대에도 계승되어 정조는 화성 건축 공사에 백성을 동원하면서 품삯을 지급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또한 영조는 준천이 시작되자 개천에 나가 곡식과 무명을 나눠주는 등 백성을 위로하였고, 백성에 대한 자신의 뜻을 표현한 『어제균역준천여사업』(1773,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을 지었다. 더불어 준천으로 백성들이 불편함이 있는 지를 살피었고(『영조실록』 영조 36년 3월 11일) 개천 주변의 일부 백성이 거주지를 잃게 되었는데, 영조는 도성의 빈집을 준천소에 소속시켜 이들에게 제공 (『영조실록』 영조 36년 4월 1일)하는 등 민생을 돌보았다.

이와 같은 영조의 노력 덕분일까, 백성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준천사업은 57일만인 4월 15일에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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