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왕의 초상화인 어진(御眞)을 보관하고, 정해진 날에 어진을 벽에 걸고 제사 드리던 건물이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한양의 문소전(文昭殿)을 비롯하여 외방 5처, 즉 경주 집경전(集慶殿), 전주 경기전(慶基殿), 평양 영숭전(永崇殿), 개성 목청전(穆淸殿), 영흥 준원전(濬源殿) 등 총 6곳에 태조의 진전을 두었다. 진전에 봉안했던 왕의 초상화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쟁을 겪는 중에 대다수가 파괴되어 양랸(兩亂) 이후 숙종대부터 국왕의 초상을 다시 그리기 시작하였다. 숙종에 이어 영조도 도성 안의 남전 즉, 영희전(永禧殿)을 5실로 확장한 후 새로 그린 숙종의 어진을 봉안하였다. 숙종이 죽은 뒤에는 창덕궁에 새로이 열성어진을 받드는 선원전을 설치하여 영희전과 함께 각기 열성조어진(列聖朝御眞)을 받들게 되었다. 생전에 왕의 영정을 그린 경우, 특정 장소에 보관하였다가 사후에 그곳에서 의례를 거행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는데, 숙종 어진과 영조 어진을 각각 봉안한 강화도의 장녕전(長寧殿)과 만녕전(萬寧殿), 정조 어진을 봉안한 화성의 화령전(華寧殿), 1836년(헌종 2)에 순조 어진과 익종 어진을 봉안한 경우궁(景祐宮) 성일헌(誠一軒), 철종 어진을 봉안한 천한전(天漢殿) 등이 그것이다. 그 밖에 궁궐 내의 여러 건물, 예컨대 경희궁_태녕전(泰寧殿), 창덕궁_주합루(宙合樓), 경복궁_집옥재(集玉齋) 등에도 임시로 어진을 봉안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1900년 고종 연간에는 선원전 실화(失火) 사건이 발생하여 선원전에서 받들언 7조어진이 소실되어 진전 증건 및 어진 이모 사업을 벌이게 되었는데, 이 때에 태조어진을 1본 더 이모하였고, 임진왜란으로 폐기되었던 목청전을 증건하여 이곳에 봉안하게 된다. 이후 1907년 향사이정(享祀釐正)에 관한 칙령이 반포되어 도성 내외 여러 진전에 봉안되었던 선대의 어진들은 모두 창덕궁의 선원전(璿源殿)에 옮겨져 봉안되었고, 나머지 여러 진전이나 어진 봉안각이 있던 자리는 칠궁(七宮)으로 활용될 육상궁 냉천정을 제외하고는 모두 국유(國有)로 속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왕의 초상화를 봉안하기 위하여 지은 진전은 적지 않았으나, 지금은 창덕궁의 선원전과 신선원전(新璿源殿) 그리고 전주의 경기전(慶基殿)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