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4월 25일, 경운궁중건도감 의궤당상 이재극(李載克)이 고종에게 “경운궁(慶運宮) 대안문(大安門)의 수리를 음력 4월 12일로 길일(吉日)을 택하여 공사를 시작하겠습니다”라고 상주하였다. 이때 고종은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치되 아뢴 대로 거행하라”고 함으로써 덕수궁의 “대안문(大安門)”은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1] 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의 대한문(大漢門) 상량문(上樑文)을 보면, “황하가 맑아지는 천재일우의 시운을 맞았으므로 국운이 길이 창대할 것이고, 한양(漢陽)이 억만년 이어갈 터전에 자리하였으니 문 이름으로 특별히 건다”고 하였다. [2]대한문(大漢門)이라는 이름은 한양(漢陽)을 수도로 하여 새로 태어난 대한제국이 영원히 창대하라는 염원을 담은 것임을 알 수 있다.[3]
그런데, 세간에는 이 일이 배정자(裵貞子)라는 이토 히로부미의 내연녀와 관련이 있다는 속설이 돌았다.
일제강점기 대중잡지인 『별건곤』 제33집(1933년 7월 1일자)에서 ‘문외한’이란 가명의 필자는 ‘대한문’ 관련 일화를 이렇게 소개했다: “원래 대안문(大安門)이었는데, 안(安)자가 계집 녀(女) 자에 갓쓴 글자이고 양장하고 모자 쓴 여자인 배정자의 대궐 출입이 빈번해서 ‘상서롭지 못하다’는 말쟁이의 말로 인해 대한문으로 고쳤다.”[4]
배정자는 1870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배지홍이 실각한 흥선대원군의 추종세력이란 이유로 처형당한 후 1885년에 일본으로 보내졌다. 1887년 김옥균의 소개로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게 되었고, 조선으로 돌아와서는 일본의 특급 스파이 역할을 하였다고 전한다.
배정자 이외에도 러시아공사 베베르의 부인과 그의 언니 앙트와네트 손탁도 이 시절 대안문을 자주 드나들던, 모자 쓴 양장의 여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