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민영환 혈죽(閔泳煥 血竹). 1905년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이 을사늑약의 폐기를 궁궐 앞에서 주장하다가 일번 헌병의 강제 해산으로 실패하자 1905년 11월 30일 새벽 6시에 청지기의 집에서 국민, 외교사절, 황제에게 보내는 유서 3통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순국후 피묻은 옷과 칼을 상청 마루방에 걸어 두었는데 이듬해 5월 상청을 열어보니 대나무 네 줄기가 마루 바닥과 피묻은 옷을 뚫고 올라왔다. 빼어난 잎이 33개였다고 한다. 이 나무를 혈줄이라고 하였다.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이 이야기를 듣고 다음과 같은 〈혈죽(血竹)〉이란 시를 지었다. 매천은 이 시를 짓고 5년 뒤인 1910년에 한일합방이 되자 국치(國恥)를 통분하여 절명시(絶命詩) 4편을 남기고 자결하고 말았다. 민영환의 혈죽은 이와 같이 항일, 절개를 상징하는 물건이 되어 혈죽가, 혈죽도로 형상화되었다.